안녕하세요. 지난 7월 신흥무관학교 답사에 함께한 상동교회 진영철 목사입니다. 지난번에 함께하신 많은 분들 또 만나뵙고 싶습니다. 저는 상동교회에 주중 평일에 근무하며, 일요일에는 경기도 고양시에 제1군단 사령부 천하제일교회 교육목사로 섬기며, 화요일은 동두천 미군부대 미2사단 카추사 예배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지난 8월 17일 수요일에 국군방송 이원석 PD님이 국군방송 [신흥무관학교 다큐 제작]을 위한 자료수집차 상동교회를 방문하셨습니다. 돌아오는 8월 22일 화요일에 교회 전경과 역사박물관 녹화와 인터뷰를 계획하고 상동교회 담임목사님과 면담을 하셨습니다. 국군방송에 대한 신흥무관학교 다큐 영상은 방송 시간을 알게 되면 추후 공지해 드리겠습니다.
국군방송 이원석 PD님과 담임목사님께서 방송 녹화에 대한 대화를 나누시는 자리에서 저에게 '상동교회와 신민회'자료를 좀 찾아서 보고하라고 하셔서, 상동교회일백년사를 찾아서 자료를 정리하였습니다. 상동교회에는 민족교회연구소가 있으며, 지난 6월에 신흥무관학교 옛터답사를 하신 김종설 선생님이 계신데, 이분은 근대사에 많은 지식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여러분이 언제든 방문하시면, 100년전 역사 박물관과 자료사진을 탐방하실 수 있습니다.
상동교회와 신민회(新民會)
2011.8.20.
진영철 목사
1. 민족운동의 중심구실을 한 상동교회
신민회는 국내파의 민족독립운동 단체인 ‘상동파’를 중심으로 하여 1907년에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의 영도력을 받아들여 조직된 비밀 독립운동단체이다. 따라서 이 신민회의 본부는 자연히 상동교회가 되었고 을사보호조약 반대운동, 헤이그 밀사사건, 등 민족운동은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계획되고 일어났다. 전덕기 목사가 살아있는 동안 민족운동의 중심 구실을 하였다
2. 비밀조직인 신민회와 상동교회 지하실
신민회가 언제 조직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안창호가 미국에서 돌아 온 이후라면, 분명히 1907년 이후가 된다. 이 신민회는 철저한 비밀조직이었기 때문에 회원자신도 두 명 이상은 서로 모르도록 되어 있었고 따라서 회원 수도 정확하게 몇 명 정도였는지 알 수 없다. 이 회의 조직은 치밀하고 정신이 확고하여 양기탁, 이갑, 안태국, 전덕기, 최광옥 등이 모두 간부요인으로 발전에 힘을 썼다고 한다.
이회영 약전의 저자는 신민회의 회원수를 더 줄여서 신민회라는 비밀조직은 전덕기, 이동녕, 양기탁, 안창호, 김구, 이갑, 이준, 이동휘, 김진호, 김영, 이관직 씨 등과 조직하였다. 운강(雲岡) 양기탁을 주필로 하는 당시 유일한 배일신문(背日新聞)인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자연히 신민회의 기관지가 되었고, 상동교회는 신민회의 본부처럼 되어서 항상 상동교회의 지하실에서 전덕기, 이회영, 이동영, 양기탁, 등 4인이 조석으로 밀회를 거듭하였다.
상동교회 지하실은 일본 경찰의 앞잡이들이 탐지하여 경찰들이 이 지하실을 습격하면 다른 비밀문을 통하여서 독립 운동가들이 도망치기 때문에, 일본 경찰은 이 지하실을 아에 밀폐하여 버렸다. 일본경찰들이 상동교회가 민족독립운동의 아성이라고 추구하면서 민족운동가들이 모여드는 것을 금지하라고 경고를 받아도 그 때마다 항상 신앙토론을 위하여 가끔 모인다고 대답하였다.
3. 민족독립운동이 목회였던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
전덕기 목사에게 있어서 민족독립운동이 곧 그의 목회요 신앙생활이었기 때문에 독립운동계획이 곧 신앙토론의 제목이 되었다. 따라서 그 때마다 일본 통감부(총독부)는 전덕기 목사를 경찰서로 연행하여서 보복적인 가혹한 고문을 가하고는 내보내었다. 이런 고문의 되풀이로 전덕기 목사의 건강이 점점 나빠져 갔다. 친구를 대신해서 고난을 받으므로 다른 친구들을 살리는 그론 대속적 고난을 감수했던 까닭에 전덕기 목사는 잡혀갔어도 친구를 배신하거나 신민회의 비밀조직을 누설하지 않았다.
4. 신민회의 조직목적
1905년 이후의 유일한 정치단체인 이 신민회 비밀조직은 1911년에 데라우찌 총독 암살미수라는 조작된 사건을 연출할 때 까지, 세계에 자랑하던 경찰 정보망을 가지고도 신민회의 비밀조직이 있었던 것을 전혀 몰랐다.
신민회를 이러한 비밀결사로 조직한 이유에 대하여 안창호는 『예심조서』에서 “당시 인민의 정도가 유치하여 이를 표면단체로 하면 사회의 반감을 사서 방해를 받을 것이요. 또 입회 희망자를 전부 참가시키면 어떠한 인물이 섞이는지도 모르고 따라서 동 회의 참 목적을 달성하기 불가능할 지며, 또 동 회는 정치적으로 대한민족의 자립 자존을 목적으로 함으로 통감부에 의해 해산을 당하여서는 안되겠는고로 실력이 생길 때까지는 비밀결사로 두는 것이 필요한 까닭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동지 중에서 혹시나 배신자나 밀고자가 생기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의 기울였고, 만일 생길지도 모를 배신자에 대한 철저한 보안조치를 처음부터 취한 것이다. 신민회의 조직목적을 이광수는 다음 네 가지로 들고 있다.
①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할 것
② 동지를 발견하고 단합하여 국민운도의 역량을 축적할 것
③ 교육기관을 각지에 설치하여 청소년의 교육을 진행할 것
④ 각종 상공업기관을 만들어 단체의 재정과 국민의 부력을 증진할 것
안창호는 신민회의 목적을 ‘대한민족의 자립 자존 정신을 보급’시키는데 있다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신민회는 한마디로 우리의 국권회복을 목적한 비밀결사로서 무력투쟁의 방법보다 국민의 교육과 산업진흥에 역점을 둠으로서 점진적으로 국력을 양성하여 때가 이르면 축척된 우리민족의 힘으로 이 땅에서 일본의 세력을 몰아내고 국권을 도로 찾자는 정치단체였다.
5. 신민회의 교육기관인 상동청년학원
이런 목적을 위하여 일찍이 전덕기 목사는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민족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08년에 와서 안창호는 이런 신민회의 목적에 의하여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에 헌신할 인재를 양성하며 독립정신 고취에 분투하였다. 신민회가 조직된 후에 상동교회의 상동청년학원과 남녀 공옥학교도 신민회의 교육기관이 되었다. 상동청년학원에는 주로 당시 민족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던 인사들의 아들들이 많이 몰려 왔다.
당시, 서울에 중등교육기관으로 배재, 경신, 보성 등의 이름 있는 학교들이 있었으나, 자기 아들이 후에 성장하여 민족운동을 계속해 주기를 바라는 가정에서는 전덕기 목사가 있는 상동청년학원으로 보냈다. 따라서 당시 상동교회의 주위에는 각지의 애국지사들이 빈번히 찾아들고 주일에는 예배에 참석하였다.
6. 신민회의 조직 속에 전덕기 목사
신민회의 중앙조직은 극비로 초창기에 4명이 핵심을 이뤘다.
① 중앙총책 - 양기탁, ② 총서기 – 이동녕,
③ 재무 – 전덕기 목사, ④ 신입회원의 가입과 집행원의 직책 – 안창호
이 조직은 회장제도를 채택한 것보다는 과두정치(寡頭政治) 형태를 취하였다.
각 도의 책임자
① 서울 총감 – 전덕기 목사, ② 평북 총감 – 이승훈, ③ 평남 총감 – 안창호.
④ 황해 총감 – 김구 ⑤ 함경도 이북(만주) - 이동휘
전덕기 목사는 새로 조직된 유일한 비밀 독립운동단체의 중앙위원으로 서울의 총감과 조직의 재정까지 책임맡았다. 당시 전국에서 제일 큰 상동교회의 담임목사의 직책을 감당하였다.
7. 전덕기 목사를 돕는 삼총사의 역할
전덕기 목사가 이러한 크고 중요한 일을 동시에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밑에 유능한 젊은이들이 교회안에 있어 전덕기 목사의 목회와 민족운동을 도왔기 때문이다. 전덕기 목사를 도운 상동교회에서 크게 활동한 사람은, 이필주(李弼柱), 최성모(崔聖模), 김진호(金鎭浩)였다. 상동교회의 삼총사로 불리는 이필주(李弼柱), 최성모(崔聖模), 김진호(金鎭浩)는 서로 출생 신분이 다르며 상동교회에 입교하여 모두 목사가 되었고, 전덕기 목사의 민족정신을 계승하여 3.1운동 계획과 그 참가에 앞장섰다. 이필주 목사와 최성모 목사는 33인 민족대표로 서명하였고, 김진호 목사는 당시 배재학당 학생들의 동원책임을 맡아 맹활약을 하다가 체포되어 큰 옥고를 치루었다.
① 이필주(李弼柱) : 전덕기 목사는 군인출신인 이필주에게 상동청년학원과 공옥학교의 체육교사 직을 맡겨 청소년 지도훈련에 헌심케 하였다. YMCA 체육교사직과 상동청년학원의 일을 주로 맡았다.
② 최성모(崔聖模) : 상동교회의 기도회 인도를 맡기고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학원, 공옥학교의 대외교섭 문제를 맡겼다.
③ 김진호(金鎭浩) : 상동교회의 교인 가정 심방과 상동교회 청년회의 지도를 맡겼다.
전덕기 목사가 상동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며 동시에 상동교회로 하여금 민족운동의 요람지가 되게 한 뒤에는 삼총사의 숨은 공로가 있었다. 이들과 전덕기 목사의 협동목회시대였다. 이들 삼총사는 후에 전부 목사가 되어 목회와 민족운동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8. 신민회의 지도노선에 영향을 준 전덕기 목사
신민회의 지도노선은 두 노선이었다.
① 무장투쟁파 - 군인출신인 이동휘, 이갑, 노백린을 중심으로 “국가의 존망이 목전에 달린 이 때에 국력 민력의 배양을 말하는 것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을 기다리는 것”이라 주장하며 당장 일본과 싸워 독립을 성취하자는 것이다.
② 실력배양파 – 전덕기 목사, 안창호를 중심으로 “아무 준비없이, 아무 힘없이 일본과 지금 당장 결판을 낸다는 것은 민족의 자살행위라고 역설함“으로 신민회의 지도노선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래서 더딘 것 같으나 교육을 통한 국력배양에 전념하게 되고 안창호는 이 지도노선에 따라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했다.
전덕기 목사는 일찍이 신민회과 조직되기 전부터 상동청년학원, 남녀 공옥학교를 통하여 민족운동을 위한 인재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신민회가 조직된 후로 상동교회 건물과 학교는 신민회의 프로그램으로 사용되고, 집행기관이 되었다.
신민회의 지도노선에 따라 1909년에는 YMCA가 선교사들과 함께 청년운동단체로 민족독립운동을 목적한 것은 아니지만,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만들었다. 신민회는 비밀조직이기 때문에 대외적인 조직으로, 청년학우회를 공개적인 단체로 청년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구국운동에 몸바칠 정신과 소질을 길러주었다.
- 자료출처 : 상동교회일백년사를 중심으로 요약정리함
www.sangdong.org 상동교회 홈페이지에
독립운동관련 역대 인물, 역사 사진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