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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도하라 (마6:5-8절)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로 시작되는 쉐마를 아침과 저녁에 암송하면서 일정한 형식의 기도를 매일드리는데 그 의미를 깊이 상고하기보다는 형식적인 기도로 일관할 때가 많았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아침 9시, 정오, 오후 3시, 등 하루에 세 번의 기도 시간을 정해 놓고 그 시간에 어디에 있든지 손을 앞으로 뻗고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도록 하고 머리를 숙이고 기도를 드립니다. 그뿐 아니라 외식하는 자들은 기도 시간에 맞추어 사람이 붐비는 곳으로 외출하여 거기서 기도하는 연출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기도를 몰랐을 리가 없고 평소에 기도하지 않았거나 기도를 소흘히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기도와 자신들의 기도가 다른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기도는 유대인들의 기도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하나의 형식이요, 관습이었으나 주님의 기도는 힘이요, 능력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물음에 주님은 즉시 그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연극배우처럼 마음에는 전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큰 거리나 회당 같은 곳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제가 이웃에 대한 의로운 행위라 한다면 기도는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보다 직접적이고 본질적인 종교 행위이며 의로운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외식하는 자’ 에 해당하는 “휘포 크리테스” 는 ‘가장하다’, ‘꾸미다’ 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본래 “배우”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배우가 무대에서 연기를 할 때 다른 사람으로 가장하는 것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배우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고 다만 연극 대사에 기록된 말을 그대로 연출합니다. 즉 자신은 잊어버리고 오로지 극중의 인물이 되어 그 인물의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식하는 기도는 배우가 연출하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후일에 “위선자” 라는 용어로도 쓰이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 단어는 성경에서 선행을 가장하나 실은 악한 자를 의미하는 말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까지도 자신들의 의를 사람들에게 나타내는데 이용하는 것을 비판하시며 올바른 기도를 교훈하셨습니다.
1. 은밀한 중에 기도하라.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정신 중에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은 은밀한 중에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조용한 곳에서 홀로 기도하신 것처럼 은밀히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눅22:39-40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주님은 평소의 습관을 따라 은밀한 곳인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사단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외식을 버리고 오직 은밀한 가운데 진실한 기도를 드릴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골방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곳이었습니다. 마치 엘리사의 침실과 같은 곳으로 세상의 모든 것과 단절되고 오직 하나님과만 내밀한 대화를 나누는 공간을 말합니다. 주님은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신자들이 기도할 때에 왜 밀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해야 하는지 이사야 선지자가 그 해답을 미리 주고 있습니다.
*사26:19-21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보라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당한 자를 다시는 덮지 아니하리라.
이사야가 이 예언을 베풀 때는 분명히 마지막 심판 날의 무서운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러한 심판 날을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기도하되 이를 습관화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자신의 방문을 닫는다는 것은 자신과 하나님 외에는 어떠한 제 3자의 개입도 불허한다는 것과 순결한 영혼의 교제만을 원하는 자세입니다. 여기서 ‘은밀하다’ 라는 말은 ‘보이지 않게 하다’ ‘알지 못하게 하다’ 의 의미로 자신을 과시하거나 드러내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마음의 중심을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집집마다 은밀한 장소를 꾸며 놓고 하나님께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바울은 디모데에게 각처에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딤전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마음의 진실함이며 조용한 장소에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새벽 오히려 미명에 기도하신 것처럼 은밀한 기도를 아버지께 드리는 자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갚으신다’ 는 말은 ‘회계를 하다’ ‘보상하다.’ 라는 뜻으로 어떤 행위에 대한 보상을 지급하는 상급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기도의 응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에 주어질 상급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드리는 기도를 의로운 행동으로 간주해서 장차 큰 상급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2.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기도의 두 번째 정신은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 하셨습니까. 하나님 같으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의 시작이 그분에게서 말미암았고 모든 것이 그분으로 인하여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한다는 것은 그분이 만물의 창조주이며 우리를 만드신 우리의 근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전 건축의 대업을 마친 솔로몬 왕은 백성들 앞에서 “하늘과 땅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왕상8:22-23 솔로몬이 여호와의 제단 앞에서 이스라엘의 온 회중과 마주서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
앗수르의 침략을 받은 히스기야 왕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왕하19:19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
신약의 사도들도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행4: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하늘의 이십사 장로도 한결같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계4:10-11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그러므로 하나님께 구하기에 앞서 우리 마음에 먼저 하나님이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내게 있는 어떤 문제를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먼저 바라보아야 하며, 내게 있는 죄책보다 먼저 하나님의 구속을 보아야 합니다. 나를 괴롭히는 근심이나 두려움 대신 돌보시며 힘주시는 아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요, 또한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우리를 선택하여 양자를 삼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양자를 삼으시되 새롭게 중생시켜 아버지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게 하신 아버지십니다. 그리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당당히 나아갈 자격증을 주신 아버지입니다.
양자 삼는 일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양부모는 비록 자녀를 입양하였어도 그 양자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주지 못합니다. 물론 친자식처럼 돌보고 사랑합니다. 함께 한집에 살고 심지어 유산까지 줍니다. 그러나 은밀한 의미에서 친자식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우리에게 양자의 은혜를 주셨을 때 새 생명을 주시고 다시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 우리 마음에 증거토록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은혜를 받았습니까. 사도 요한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일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이 선언은 크고 영원하신 하나님만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우리의 중대한 의무가 있습니다.
첫째로 아들로서 땅 위의 부모보다 하늘의 부모를 더 공경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 아버지를 즐거워하고 진심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둘째로 함께 자녀된 형제와 자매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의 중심일 때 그 기도는 희망과 승리의 원동력입니다.
시편 23편은 구약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의 본이기도 합니다. 여섯 절, 거기에 담긴 아홉 가지 간구는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평생에 약할 때가 있었고 문제도 많았고 죄책의 음침한 골짜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참혹한 순간에도 내일의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두 가지의 결론을 내리면서 기도를 마칩니다.
첫째는 축복된 내일입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둘째는 내일 그 너머에도 역시 축복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한 흑인이 높은 빌딩 창문으로 몸을 던져 죽었을 때 그를 잘 아는 이웃 사람이 말했습니다. ‘인생이 하나님이 없을 때 투신자살 할 것밖에 더 무엇이 있겠습니까.’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으로 사는 것입니다.’ 둘 다 옳은 말입니다.
3.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기도의 정신 중의 세 번째는 같은 말을 반복하여 간구하는 것을 길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자는 이 사실을 두고 하나님이 다 아시는데 새삼 기도하여 구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입니다. 과거의 일과 현재의 일 뿐만 아니라 미래의 일까지도 다 아시며 인간의 생각과 모든 속성까지도 다 아시는 분입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의 필요까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로서 그것을 하나님께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인 교제를 갖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무엇을 일방적으로 주시고 또 억지로 요구하시기를 싫어하십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자녀와 깊은 신뢰감 속에서 주시고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나타내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자녀들과 동역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심에 있어 절대주권과 계획에 따라 행하시지만 동시에 자기 백성들의 기도와 응답의 방법으로 동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는 반드시 기도의 수칙을 지켜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나의 형편을 다 알고 계신 분임을 기억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전 지식이 있을 때 이방인처럼 무엇을 구하여야 할지 알지 못해 중언부언하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억지로 설득하려고 말을 많이 하는 우를 범하지 않게 됩니다.
둘째, 기도할 때에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더 많은 일을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중언부언 하다.’ 라는 헬라어는 ‘밧톨로게오’ 로서 ‘생각 없이 말하여 재잘거리다.’ ‘쓸데 없는 말을 하다.’ 라는 뜻을 지닙니다. 이것은 사람이 신앙도 없이 기도하면서 같은 말을 중복하거나 또는 마음의 간절함이 없는 길고 지루한 기도를 말합니다. 마치 바알 선지자들이 갈멜산에서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응답해 달라고 기도한 것처럼 아무 뜻도 없는 말로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날 이슬람교도들은 형식과 자세만을 중요시하여 한 가지 구절을 30번에서 100번까지 반복하는 종교의식을 치르기도 합니다. 기도를 길게 하거나 반복해서 하는 문제는 그 근본 동기가 사람의 영광과 평판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자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진실함을 가지고 하나님만을 찾는 성숙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는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게을리하거나, 기도를 하지 않고, 올바르지 못한 기도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는 거듭난 신자의 영혼의 호흡이며,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우리의 소원이 응답받는 비결입니다. 기도는 다른 종교에서 행하는 것처럼 마음의 수양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야 하며 주님의 용기와 평화를 지녀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우리의 힘과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기도의 방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마음의 문을 열고 기도로서 주님을 영접하면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는 규칙적인 기도를 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참된 정신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첫째는, 골방에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골방 기도의 직접적인 유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일상생활이 너무나 바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가치를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조용한 시간을 가지게 되면 성령님께서 그 가치를 일깨워주시는 것입니다. 나아가 골방의 시간은 내 자신의 삶에 대한 전체적인 안목을 가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골방의 시간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위로하시고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진실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한다면 은밀한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교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고요한 가운데 들려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는 믿음 없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고 열정적으로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에 믿음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무조건적인 은혜입니다. 그러나 기도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기도의 회수나 강도가 아니라 오직 믿음인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그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용서를 구하기 전에 하나님은 아담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는 가죽옷을 준비하셨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인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하기 전에 주님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 승천을 다 이루시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다 아시고 구원의 길을 예비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부르기 전에 먼저 응답하십니다.
*사65: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요구하는 그 이상으로 후히 주십니다.
*엡3: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더욱 넘치도록 역사하시고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을 많이 하고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영혼이 없는 형식적인 기도를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응답을 믿고 간절히 간구하는 기도를 드림으로 기도의 열매를 풍성히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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