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그리고 인간의 영혼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에서 가장 영명하신 군주이시며, 전세계 역사에서도 그 이상의 군주를 발견하기 어려운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세종대왕이심니다.
이러한 세종대왕께서는 아래의 업적요약에서도 보듯이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우리나라에 구현하시었습니다.
그러나 세종대왕께서는 세월이 지나면서 인간 영혼의 문제, 내세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는 불교를 억제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장려까지도 하시었습니다.
부족한 본인의 소견으로는 이는 우리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고 유일하게 머리를 하늘로 향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내세를 내다보며, 창조주와 영혼을 갈구하는 영적(spiritual)인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영명하신 세종께서는 이 점을 알게 되시고 내세의, 영혼이 갈 곳을 찾는 불교를 인정하게 된 것으로 추정 생각됩니다. 인간은 절대 빵만으로는 살 수가 없는 위대한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이후에는 세계의 종교인 기독교도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널리 전파되었는데, 이는 또한 인간영혼의 문제와 내세의 갈길, 창조주의 존재와 인간이 천국에 갈 수 있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음니다.
반면에 유학은 공자로부터 이점은 유보하심으로 그 구심점이 적어도 이점에서는 약하다고 생각됨니다.
이제 이에 우리나라 성리학의 후학들은 이에 대한 치열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리학의 자연을 기본으로 한 "격물치지의 정신"은 기독교에서는 구약(Old Testament)시대의 "일반은총"의 논리로 유학과 사실상 거의 같은 내용으로 다루고 있지요.
다만 기독교는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신 신약(New Testament)이 새로운 것으로 이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역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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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약사
휘(諱) 도(祹). 자 원정(元正). 시호 장헌(莊憲). 태종의 셋째 아들로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 소생. 비(妃)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에 봉군, 1413년(태종 13)에 대군이 되고 1418년에 왕세자에 책봉, 동년 8월에 22세의 나이로 태종의 왕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즉위 뒤 정치·경제·문화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아 수준 높은 민족문화의 창달과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하여 1420년에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황희(黃喜)·맹사성(孟思誠)·허조(許稠) 등의 청백리(淸白吏)를 등용하여 왕권과 신권(臣權)의 조화를 위하여 노력하면서 의정부(議政府)를 견제했다. 또한 이를 왕립 학술기관으로 확장하여 변계량(卞季良)·신숙주(申叔舟)·정인지(鄭麟趾)·성삼문(成三問)·최항(崔恒) 등의 젊은 학자를 등용하여 정치 자문·왕실 교육·서적 편찬 등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였다. 1443년(세종 25) 한글을 창제하고, 1446년 이를 반포하였다. 또한 이천(李蕆 )에게 명하여 경인자(庚寅字)·갑인자(甲寅字)·병진자(丙辰字) 등을 제작하게 하였는데, 이 가운데 갑인자는 정교하기로 이름난 활자이다.
초기에는 억불책(抑佛策)을 써서 5교(五敎) 양종(兩宗:천태종·조계종)을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2종으로 통합하여 각 18개 사찰만 인정하고 경행(經行)을 금지했다. 하지만 말년에는 궁중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고 승과제도(僧科制度), 경행을 인정하는 등 왕실 불교로 장려하여 불교 발달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음악(音樂)에도 관심을 기울여 1425년 관습도감(慣習都監)을 설치하고 박연(朴堧)으로 하여금 아악(雅樂)을 정리하게 하여 음악을 장려하였다. 악기도감을 설치하여 많은 아악기들이 제조되었으며, 편경과 편종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실록(實錄) 보관을 위하여 춘추관(春秋館)·충주(忠州)·전주(全州)·성주(星州)에 4대 사고(史庫)를 설치했는데,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불타버렸다.
과학기술 업적은 1442년 이천·장영실(蔣英實)로 하여금 우량(雨量) 분포 측정기인 측우기(測雨器)를 제작하게 했는데, 이는 1639년 이탈리아의 B.가스텔리가 발명한 측우기보다 약 2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그리고 궁중에 과학관인 흠경각(欽敬閣)을 설치하고 과학기구를 비치하게 했고, 혼천의(渾天儀)·해시계·물시계 등의 과학기구를 발명하였다. 김담(金淡)·이순지(李純之) 등을 시켜 중국 원(元)나라의 수시력(授時曆), 명(明)나라의 대통력(大統曆)을 참작하고 아라비아의 회회력(回回曆)을 빌어 역서(曆書)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편찬했다. 또한 천문·역법(曆法)·의상(儀象) 등에 관한 지식을 종합한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이순지가 펴냈다.
경제·사회 정책면은 1436년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고 각도(各道)의 토지를 비척(肥瘠)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세율(稅率)을 달리하는 안을 실시했다. 그러나 결함이 많아 1443년에 공법상정소의 안을 시정하기 위하여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고 풍흉(豊凶)에 따라 연분 9등법(年分九等法)과 토지의 비옥도(肥沃度)에 따라 전분 6등법(田分六等法)에 의한 수등이척법(隨等異尺法)으로 조세의 공평화를 도모했으며, 전국의 토지를 20년마다 측량하여 양안(量案)을 작성하게 했다.
그리고 의창(義倉)·의료제도·금부삼복법(禁府三覆法)을 제정했고, 노비(奴婢)에 대한 지위 등을 개선, 사형(私刑)을 금하도록 했다. 대외정책면에서는 국가의 주권 확립과 영토확장에 진력한 치적을 들 수 있다. 명나라와의 관계를 보면, 처녀진헌(處女進獻)을 폐지하는 한편, 명나라에 보내던 금(金)·은(銀)의 조공물(朝貢物)을 폐지하고 마(馬)·포(布)로 대신하도록 했다. 그리고 여진(女眞)과의 관계는 무력으로 강경책을 쓰거나 회유하는 화전(和戰) 양면책을 썼는데, 두만강 유역의 여진은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구축하도록 하고 6진(六鎭)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1432). 압록강 유역의 여진은 최윤덕(崔潤德)·이천 등으로 하여금 구축하게 하고, 4군(四郡)을 설치하였다. 이때의 국경선이 압록강으로부터 두만강까지 확보되어 이곳에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는 등 국토의 균형된 발전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일본과는 1419년(세종 1)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섬[對馬島]을 정벌하게 했으며, 이후 쓰시마 도주(島主)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사죄하고 통상을 간청해오자, 1426년 삼포(三浦)를 개항하였다. 이후 왜인의 출입이 증가하자 1443년 왜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하여 신숙주의 교섭으로 변효문(卞孝文)과 소 사다모리 사이에 계해조약(癸亥條約)을 체결하게 하여 1년 동안에 입항할 수 있는 세견선(歲遣船)을 50척으로 제한했고, 세사미(歲賜米)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한편, 반드시 수도서인(受圖書人)에 한하여 왕래하도록 무역과 출입을 통제하였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陵西面) 왕대리(旺垈里)에 있는 영릉(英陵)인데 처음에는 광주(廣州)에 있었으나, 1469년(예종 1)에 이곳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