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제국 역사상 마지막 황제인 푸이(선통제[宣統帝]/1906.2.7~1967.10.17)는 1908년 오랜 권력을 행사했던 서태후와 광서제의 죽음 직후 두살의 나이로 즉위하게 된다. 1911년 10월 청의 신식군대인 신군에 침투해 있던 쑨원의 비밀결사인 동맹회 조직의 군사반란을 시작으로 청은 제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황제의 섭정들은 능력있는 개혁파 장군인 위안스카이를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하고 일본식의 입헌군주국으로 나아가려 하였다. 그러나 12년 1월 1일 난징에서 쑨원을 임시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선포되고, 군대의 명령불복종이 계속되자 2월 12일 결국 청의 조정은 푸이의 퇴위를 선언하게 된다. 신해혁명. 이때 푸이의 나이는 여섯살.
청과 난징임시정부-위안스카이(쑨원은 국가의 통일을 위해 위안스카이에 임시대총통 자리를 넘겼다)의 협상조건은 이랬다. 어린 황제와 황실은 황실재산을 그대로 보유하며 자금성에 살고, 연 400만 달러의 연금과 함께 만주 조상의 사당을 보존할 권리를 갖는다. 푸이는 이때부터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면서 가장 자유가 없는 삶을 시작하게 된다. 황제는 1200명의 환관과 350명의 시녀, 185명의 요리사, 840가구의 호위병, 그 외 다수의 시중을 받았으며, 자금성은 일주일에 닭3,000마리, 한달에 담비모피 120장 등을 소비하였다. 그의 삶은 화려했고, 또한 외로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수천명의 신하들 앞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어디를 가나 수십 수백명의 수행원이 따라다니는, 그러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궁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특이한 삶. 중국 3천년 왕조 역사의 마지막 황제.
자금성에 위폐된채 살아가던 푸이는 1924년 군벌 펑위샹에게 쫒겨나 일본 조계지에서 32년까지 특별한 일을 하지 않고 재산만 소비하는 삶을 살다가 1934년 만주국의 왕이 되었다. 일본의 꼭두각시 왕이 된 경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영화에서는 신념에 의해 자의적으로 왕이 된 걸로 묘사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서양인 교사에게 교육받은 그는 서양을 동경했다. 그는 강한 중국을 원했고, 개혁을 원했으며,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서 몸부림 쳤다. 그러나 이미 시대는 달라졌고, 그는 힘도, 뛰어난 지혜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까지 '유용한' 사람이었다.
어쨋거나 그는 자의던 타의던 '중국'을 '일본'의 지배하에 두는 작업에서 주연급 배우역할을 했고, 그 사이 많은 인민들의 희생이 있었다. 물론 일본의 침략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중국의 난세가 더 짧았으리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세계 최대의 국가이면서도 그에 합당한 국력을 가지지 못했던 중국은 수많은 강대국가들의 수탈지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중국만이 아니라 급격하게 서구화된 모든 국가들은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궁핍이라는 홍역으로 앓을 수 밖에 없었다.
중국 근대사를 보면 군벌, 제국주의 세력, 국민당, 공산당은 각기 나름대로 잔인했다. 그들에겐 생사를 함께 할 수 없는 적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철저히 무능했고 시대에 뒤떨어졌지만, 자신들을 공격하는 자들 외에는 공격하지 않았던 방어적인 청조가 더 관대해 보일 지경이다. 그 시대는 중국인민 모두에게 잔인한 시기였다. 당시의 파업은 곧잘 발포로 이어져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했고, 때로는 파업지도자들의 목이 잘려 길거리에 효시되기도 했다. 모든 세력들은 전쟁과 암살과 폭력을 일삼았다.
그래도 중국 최후의 황제는 가족과 함께 몰살된 러시아제국의 마지막 황제보다는 나은 말년을 맞았다. 일본으로의 망명이 실패하고 소련군에 체포된 그는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 때 증인으로 출두하였다가 공산화된 중국으로 송환되었다. 약 십년간의 교도소 생활 중에 1959년 특사로 교도소에서 풀려난 그는 자금성 근교의 식물원에서 정원사로 일하였으며, 1964년 공산당원으로서 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 되었다. 40년 동안 수백명의 수행인을 거느렸던 그가 홀로 서는데 얼마나 힘겨운 투쟁을 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그의 전향은 매우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이 영화도 그 시기에 직접 쓴 자서전을 바탕으로 하였다. 그는 1967년 문화대혁명의 열기 속에 죽었으며 유해는 베이징 시내의 공동묘지의 안치되었다가, 1995년 1월 26일 베이징 남서쪽 청나라 황릉(皇陵)으로 이장되었다. 이로써 사망한 지 28년 만에 청나라 황제로 복권되었다.
영화 마지막의 두 대사는 푸이의 삶을 압축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교도소에서 교도소장이 다그치는 장면에서 푸이는 '당신들도 내가 필요해서 살려둔 것 아니요?'라고 따져묻는다. 교도소장은 되묻는다. '필요하다는 것이 그렇게 싫소?' 부이는 아무대답도 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젊은 홍위병들 -그 홍위병들에게 묶여 끌려가는 사람 중에는 과거의 그 교도소장도 있었다.- 의 맹목적인 열성을 보며 그가 한마디 한다. '너무 어리군.'
그는 너무 어렸고, 시대를 읽을 줄 몰랐다는 면에서 어리석었다. 그러나 그를 욕하기는 어렵다. 그 혼란스러운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자 과연 몇이나 있었겠는가? 그는 우연히 중국의 마지막 황제로 태어났을 뿐 다른 이와 똑같은 한명의 인민일 뿐이었다. 그는 황제로 태어났지만 한명의 인민으로 죽었다. 지극히 평범했던 인간. 푸이.
바로 이 점이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 즉, 서구열강의 식민통치를 경험했던 인니, 미얀마, 사회주의 혁명을 겪은 중국이나 베트남 등에서 군주제의 전통이 단절되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종교의 이념도 없어졌던 흐름과 다른... 바로 이것이 타이 사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지요...
첫댓글 근데, 중국 등의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달리 타일랜드의 경우는 특이합니다... 즉, 다른 나라들의 경우는 민중을 중심으로 "밑에서 위로" 이뤄졌던 반면에, 태국의 근대적 민족주의와 국민국가 형성은 국왕을 구심점으로 하여 "위에서 밑으로" 이뤄졌기 때문이죠...
물론 태국도 19세기 이후에 근대화와 민주화의 시기를 거쳤습니다.... 하지만 태국 사회의 보편적 문화인 '불교'와 그 수호자인 '국왕' 그리고 불교를 믿고 국왕을 태국 사회의 구심점으로 인식하는 '국민' 간의 삼각관계의 기본구조는 항상 이어져 왔습니다.
바로 이 점이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 즉, 서구열강의 식민통치를 경험했던 인니, 미얀마, 사회주의 혁명을 겪은 중국이나 베트남 등에서 군주제의 전통이 단절되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종교의 이념도 없어졌던 흐름과 다른... 바로 이것이 타이 사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지요...
예전에 동남아 참사가 일어났었는데... 저는 푸미폰 국왕이 국민들을 돌아보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자신의 왕권의 입지를 굳히기 위한 목적도 있겠지요...
어쨌든, Thai...... 여기 전도하기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