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 됨의 특권
에베소서 1:3~6
요절:“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에베소서 1:4,5)
찬송가 325장(예수가 함께 계시니)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의 피로써 만세 전에 택한 자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받은 자들의 신분을 자기의 아들들로 삼으셨음을 오늘 본문 말씀에서 선언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2,13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12)
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 주 예수를 믿고 그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단지 구원받는 것과 다릅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죄와 저주와 사망에서 건져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천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선한 천사들은 악령들과 달리 범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받지 아니하였고 그래서 저 영원한 사망의 장소 죽고 또 죽어도 영원히 죽지 아니하며 고통을 겪는 유황불의 심판이 있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곁에서 수종드는 자들로 영원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란 하나님께서 친히 낳으신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란 곧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낳으셨다는 것입니다. 아까 읽었던 요한복음 1장 12절과 그에 이어지는 13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는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단어가 아닙니다. 어디서부터 ‘나왔다’는 말이 아니고 헬라어 ‘겐네마’로서 ‘태어났다’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로서 우리를 낳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태어났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만세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잉태하셨고 우리를 낳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4 이하에서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아빠가 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라디아서 4:4~6)
그렇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지만 그가 우리를 위하여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심으로써 하나님의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아들이 되셨고 그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써 하나님의 영원전부터 낳으신 그의 택한 자들의 죄를 씻고 그들을 그의 피로써 값을 지불하고 사셔서 하나님의 아들들 곧 그 안에서 양자 되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특권을 얻은 자들은 이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권세를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자 된 구원받은 우리들은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지위를 얻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특권을 누립니다. 그것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모든 유업을 상속하는 특권입니다.
갈라디아서 4:7 말씀에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고 하였습니다. 종은 언제든지 내쫓겨질 수 있습니다. 종은 충성치 못하고 신실치 못하면 그의 직무를 내려놓고 주인이 내보낼 수 있습니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 나오듯 불의한 청지기는 직위에서 쫓겨나면 스스로 자기 앞가림을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녀는 쫓겨나지 않습니다. 주님이 베푸신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처럼 자녀라면 그가 아무리 허물이 많고 그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했더라도 단지 돌아오기만 하면 그 부모는 이미 용서해놓으시고 기다리고 계시고 그가 돌아오면 아무런 조건없이 맞아들여 품에 안고 끼고 집에 돌아와 새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소를 잡고 기뻐서 온 동네가 함께 잔치를 벌이는 존재입니다. 종이 그랬다가는 당장 쫓겨나고 문이 닫어걸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는 이처럼 쫓겨나지 않습니다. 그는 영원히 아버지 집에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의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가 속량되고 그의 아들 딸이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모든 것들을 공동으로 상속받아 누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로마서 8:14 이하에서 이에 대하여 이르기를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이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로마서 8:14~17)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우리의 이 지극히 영광스럽고 복된 영원한 지위와 신분과 특권을 항상 기억하면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지극히 복된 우리의 신분을 명예스럽게 여기고 이 신분에 걸맞는 행실을 행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옛날 백인들이 아프리카 내부를 노략질하여 흑인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하여 서부 황금해안으로 끌고와서 배에 태워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팔아넘길 때에 그 때에 배 안에 끌고 온 노예들을 학대하여 거의 반 정도가 죽어서 바다에 던져지곤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흑인들이 배 안에서 온갖 학대를 당하면서 굴종적이 되곤 했답니다. 그러나 어떤 흑인 젊은이가 그 굴욕적이고 폭력적인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고 의연하게 고난을 견디고 그 눈초리에 굴중적이고 포기함 없이 고난을 견디더랍니다. 알고보았더니 그는 아프리카 부족의 부족장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가 비록 이렇게 백인들에게 체포되어 까닭없이 노예가 되었지만 자기 부족의 부족장의 아들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그 신분을 기억하며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신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으니, 우리가 이 땅의 고난 가운데 처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아들로서의 의연함을 결코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고난과 맞서 인내하며 믿음으로 이겨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로우심을 따라 그 아들답게 선하고 의롭고 자비로와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비웃고 모욕하고 무시한다고 해서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들은 갖지 못한 저 천국의 영원한 기업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늘 부요 의식을 갖고 믿지 않는 자들이 장차 처하게 될 끔찍한 영원한 파멸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기도하며 전도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 감옥에 죄수로 갇혀 있을 때에, 당시 왕복을 입은 아그립바 2세와 화려한 공주의 의상을 입고 온 버니게 공주와 멋진 계급장을 단 천부장들과 로마 총독 베스도가 자기를 불러내어 심문하는 중에 그들에게 그들에게 당당히 복음을 전도하고 믿기를 권면한 후에 그들이 거부하였을 때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라고 선언하였으니, 사도 바울은 죄수였지만 세상 왕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가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지극히 크고 복된 영광과 권세를 인한 자부심 때문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처럼 우리가 영광스러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지극히 큰 지위를 항상 기억하면서 항상 담대하고 당당하고 고상하고 견고하게 지상의 순례의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때가 되면 그리운 우리의 하늘 본향 집에 들어가 우리 하늘 아버지와 우리 구주 예수님이 계신 저 천국 성에 들어가 거기서 모두 함께 기쁘고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