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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서해랑길 40코스(법성포-구시포)
여 행 일 : ‘23. 11. 11(토)
소 재 지 : 전남 영광군 법성면·홍농읍 및 전북 고창군 상하면 일원
여행코스 : 법성 버스정류장→검산마을→홍농읍사무소→상삼마을→하삼마을→고리포→구시포해변(거리/시간 : 13.9km, 실제는 14.23km를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0코스를 걷는다. 7개로 이루어진 함평·영광 구간의 마지막 코스이기도 한데, 고창지역(4km)을 제외한 나머지 구간은 보안지역인 원자력발전소를 피해 내륙을 횡단한다. 고창 땅에 있는 고리포와 구시포를 빼면 내놓을만한 볼거리가 없다는 얘기이다.
▼ 들머리는 법성 버스정류장(영광군 법성면 법성리)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IC에서 내려와 23번 국도를 타고 영광, 신평교차로(영광읍)에서 22번 국고로 바꿔 법성포까지 온다. 복용삼거리에서 좌회전 842번 지방도(영광로)로 옮기면 잠시 후 법성버스정류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영광40코스) 안내도는 버스정류장 근처에 세워놓았다.
▼ 이번 구간은 전라 남·북도의 경계를 넘는 구간이다. 전라남도의 해안(40개 코스, 652.2km)을 숨 가쁘게 달려온 서해랑길이 이 구간에서 전라북도에 바톤을 넘겨준다. 하지만 의미에 비해 볼거리는 빈약하다. 보안구역인 원자력발전소를 피해 내륙을 횡단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바닷가를 다시 만난 고창에서 아름다운 풍광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길이는 13.7km, 구간 전체가 평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무척 짧은 거리다. 난이도가 별이 2개(5개 가운데)인 이유일 것이다.
▼ 11 : 15. ‘법성3교’ 다리를 건너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갯벌을 돋우어 조성한 뉴타운(2009년 포구 앞, 속칭 ‘걸레바탕’을 매립한 뒤 공모로 뽑은 지명이다)과 구도심을 연결한 몇 개의 다리 중 하나이다.
▼ 물 빠진 법성포 앞바다는 갯벌만이 시커멓게 배를 드러내놓고 있었다. 하지만 물이 차면 저곳은 호수처럼 변한다고 했다. 내륙 깊숙이 파고들어온 탓에 호수처럼 잔잔하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호남지방을 드나드는 배들의 관문이 되어왔던 이유이다. 하지만 수심이 낮아진데다, 다른 곳에 근대식 항만시설을 갖춘 항구들이 들어서면서 번성했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한적한 어촌마을로 변해버렸다.
▼ 11 : 18. 다리 건너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바닷가를 따라 내놓은 길은 굴비의 고장답게 이름까지도 ‘굴비로’이다. 무늬만 굴비인 게 아니다. ‘굴비’를 브랜드로 내건 도로답게 들어선 음식점이나 건어물가게의 이름도 하나같이 ‘굴비’를 내걸었다.
▼ 영광군은 신재생에너지 산업클러스터를 꿈꾸는 고장이다. 우리나라의 4개 원자력발전단지 중 하나가 이곳 영광에 있는가 하면, 드넓은 바닷가를 따라 태양광발전단지와 풍력발전단지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하지만 영광의 주민 모두가 찬성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정부 정책에 반대해 세종시 정부청사 앞으로 달려가자는 걸 보면...
▼ ‘에이~ 조기가 아니라 갈치네’. 누군가의 말마따나 다리(보행교인 ‘한두름교’)를 덧씌운 조형물이 갈치처럼 길쭉하게 생겼다. 각설하고 간이 잘 된 영광굴비는 살이 눅눅하지 않아 담백한 맛이 난다. 질이 좋은 소금으로 염장하기 때문이란다. 재료가 되는 조기도 중요하다. 신안에서 영광을 거쳐 부안에 이르는 길은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파시(波市)의 등불이 꺼지지 않은 곳이었다. 해마다 알을 밴 조기들이 칠산 앞바다를 지나 북쪽으로 향했고, 이게 최고의 굴비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을 배기도 전에 남중국해에서 대부분이 잡혀버린다. 요즘은 수산시장을 돌며 사들인 조기가 굴비의 원료가 되는 이유다. 그렇다고 영광굴비가 제 맛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염산면의 소금과 법성포 해풍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충족시켰으니 가히 영광굴비라 불릴 수 있지 않겠는가.
▼ 영광은 ‘굴비’의 고장이다. 그래선지 조형물도 굴비 일색이다. 그러니 어찌 굴비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굴하지 않는다’는 뜻의 ‘굴비(屈非)’는 고려시대 이자겸(李資謙, 미상~1126)이 만들었다. 딸 셋을 하나는 16대 예종(睿宗), 나머지 둘은 예종의 아들(자신에게는 외손자)인 인종(仁宗)에게 시집보냄으로써 묘한 족보를 만들어버린 인물이다. 그가 영광으로 유배를 오게 됐는데, 이곳에서 만난 말린 조기를 ‘굴비’라는 이름으로 진상하며 ‘선물은 주되, 결코 비굴하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았단다. 자기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한 아부가 아니며, 또한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기 위한 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 11 : 25. 두 번째 다리(법성2교) 앞에서 ‘굴비로’를 버리고, 오른쪽으로 난 ‘연우로’로 들어간다. 도심으로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참! 조형물로 치장된 첫 번째 다리(한두름교)는 보행자 전용이라는 것도 기억해두자.
▼ ‘법성포역사문화탐방길’은 법성포의 오랜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 탐방로이다. 보은의 두꺼비 전설이 있는 ‘철비’, 조선시대 동헌 등 주요 관아와 객사, 수령들의 선정비, 전라지역 12고을의 조창 터, 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5박6일 동안 머물렀던 하촌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친을 반대하며 낙향한 훈련도정 이척이 지은 ‘제월정(영호정)’ 등을 만나볼 수 있다.
▼ 11 : 26. 행운당(도장집) 앞. 일행 중 하나가 걸음을 멈춘 채 핸드폰의 앱을 확인하느라 분주하다. 좋은 길을 놓아두고 골목(행운당과 수산물가공업체인 ‘해미락굴비수산’의 사이)으로 들어서라는 서해랑길의 방향표시가 의심스러웠던 모양이다.
▼ 골목은 갈수록 좁아진다. 이에 비례하듯 경사도 가팔라져 간다.
▼ 11 : 30. 오름길의 막바지에서 엄청나게 굵은 느티나무(이정표 : 종점 12.9km/ 시점 1.0km)를 만났다. 나이도 법성포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오래 묵은 듯. 이런 볼거리를 그냥 놓아 둘 지자체가 아니다. 쉼터용 정자를 지어 관광객들을 불러 모은다.
▼ 이곳은 법성포 시가지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조망의 명소이기도 하다. 저녁에는 저 느티나무에 달이 걸리는 진풍경도 넘볼 수 있단다
▼ 11 : 32. 842번 지방도(연우로)가 지나가는 ‘동짓재(‘동깃재’로 부르는 지역민들도 있었다)’에 올라선다. ‘법성포 12경’ 중 일곱 번째인 ‘동령추월(東嶺秋月)’, 즉 가을철에 뜨는 둥근 달이 빼어나다는 고갯마루이다.
▼ 11 : 33. 도로로 내려서지는 않는다. 인의산(165.3m) 방향(오른쪽)의 언덕길로 잠시 진행하자 이 고장 출신 애국지사의 충용비(忠勇碑)가 얼굴을 내민다. 한국전쟁 때 법성면 일대의 수복을 위한 병력지원을 요청하려 광주로 가는 도중 공비의 습격을 받아 전사한 백인기 방위군 소위의 충용을 기리는 빗돌이다.
▼ 빗돌을 살펴본 다음 탐방로에서 잠시 벗어나본다. 굵직굵직한 느티나무와 팽나무 수십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수백 년은 족이 묵었음직한 것이 도로 건너에 있는 ‘법성진 숲쟁이’의 연장이 아닐까 싶다. 숲의 내력은 지난 39코스 때 설명했었다.
▼ ‘혜원 신윤복 선생이 그렸답니다’.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이 일러주신다. 담벼락에 그려진 민속화가 김홍도의 작품인줄로만 알았다. 민속화는 무조건 김홍도라는 내 선입견 탓이었고, 그런 무지를 그가 정정해 준 것이다. 덕분에 난 오늘도 새로운 앎을 얻어간다. 공자님의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가 실감나는 하루라 하겠다.
▼ 11 : 36. 서해랑길은 842번 지방도(연우로)를 가로지른다. 이정표(종점까지 12.6km) 말고도 영광굴비특품사업단의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 영광굴비홍보전시관(문이 닫힌 듯해 들어가지는 않았다) 오른편에는 ‘서호농악회관’이 들어서 있었다. 국가무형문화재인 영광법성포단오제의 난장트기 행사 때 중추적 역할을 한다는 단체일 것이다. ‘서호’란 이름은 호수처럼 잔잔하다는 법성포 앞바다의 별칭에서 따왔을 것이고...
▼ 두 건물의 사잇길로 들어서자 폐허로 변한 마을이 나타났다. 하필이면 이런 황량한 풍경 속으로 길을 냈을까?
▼ 폐촌을 빠져나오자 이번에는 밭두렁을 따라 이어진다. 밭에서는 알알이 여문 콩깍지가 타작을 기다린다.
▼ 왼쪽에는 ‘검산제’가 있다. 갈대밭과 수림을 배경삼은 풍경이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한 저수지이다. 둑 너머에서는 ‘영광대교’가 자신도 있다며 좀 보아달란다.
▼ 11 : 42. ‘검산(撿山)’ 마을에 이른다. 도로(연우로)변에 버스정류장과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 벽화가 그려진 골목을 빠져나오자 ‘검산마을 경로당’. 쉼터용 정자가 잠시 쉬었다 가란다. 하지만 2.5km쯤 앞에서 출발한 집사람을 따라잡으려면 그럴 여유는 없다.
▼ 널디 너른 들녘이 마을 앞으로 펼쳐진다. 전남방조제가 축조되면서 만들어진 풍요의 상징이다. 그 너머 바다, 홍농읍과 백수읍 사이 해협을 ‘영광대교’가 가로지른다.
▼ 11 : 47. 정자를 지나 200m쯤 더 걸었을까 홍농읍과 법성면의 경계를 가르는 ‘구암천’이 얼굴을 내민다. 이정표(종점까지 11.7km)는 둑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가란다.
▼ 전남방조제로 물길이 막힌 ‘구암천(龜岩川)’은 너른 유수지로 변해있다. 갈대밭으로 이루어진 습지도 곳곳에 분포되어 있었다. 참고로 ‘구암천’은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신촌리 과치제에서 발원하여 두암저수지를 지나 전라남도 영광근 홍농읍 칠곡리에서 서해로 합류하는 총연장 15.29km의 지방하천이다.
▼ 구암천에는 ‘홍농교’가 놓여있다. 법성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다리를 건너 홍농읍으로 들어간다. 이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초입에 입간판까지 세워놓았다.
▼ 그렇다고 ‘홍농교’를 건너는 것은 아니다. 서해랑길은 옛 다리인 ‘연우교’를 이용한다. 1981년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해 ‘홍농교’가 놓이면서 효용가치를 잃은 연우교는 상판에 흙을 쌓은 도로공원으로 바뀌었다. 참고로 ‘연우(蓮牛)’라는 이름은 이 고장 출신으로 박정희정권 때 내무부장관을 지낸 ‘박경원(朴璟遠)’의 호에서 따왔다. 고향의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앞장섰던 그의 행적은 지금까지도 지역민들 사이에 회자된다고 했다.
▼ 안내판은 이곳이 ‘줄 나룻터’였음을 알려준다. 연우교가 놓이기 전, 1910년대부터 1971년까지 주민들은 나룻배를 이용해 강을 건넜다고 한다. 강 양편을 잇는 밧줄을 뱃사공이 끌어당기면서 나아가는 나룻배이다. 그 나룻배를 복원했다며 하단에 이용수칙까지 적어놓았다. 하지만 나룻배가 눈에 띄지 않는 이유는 뭘까? 무심한 지자체가 게으르기까지 했던 모양이다. 나룻배를 없애려면 안내판까지 함께 치웠어야 하지 않겠는가.
▼ 11 : 52. 다리 건너(이정표 : 종점까지 11.1km)에서 왼쪽 강둑을 탄다. 잠시 후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농로를 따른다.
▼ 12 : 01. ‘ㄷ’자 모양으로 난 길을 8쯤 걸으면 ‘842번 지방도’. 도로 양옆에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우리가 걸어왔던 곳에 ‘신흥(新興) 마을’, 그리고 진행방향에는 같은 상하리(4구)인 ‘월봉(月峰) 마을’이 있단다.
▼ 잠시 후 이른 월봉마을(이정표 : 종점까지 10.5km)에도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참고로 영광군청은 월봉이란 지명의 유래를 마을 지형이 반달처럼 생긴데서 찾고 있었다. ‘미역섬’이라 불러오다 박도섬 등으로 바뀌었다고도 했다. ‘전남방조제’가 축조되기 전에는 이곳이 섬이었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 월봉마을을 감싸듯이 돌아 나오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홍농읍이 놓여있다. 그런데 고층아파트들이 울쑥불쑥 솟아오른 게 시골 소읍치고는 낯선 풍경을 보여준다. 원자력발전소가 만들어 낸 변화가 아닐까 싶다.
▼ 12 : 07. 저 거대한 시설은 농협의 ‘벼 건조·저장센터’라고 했다.
▼ 저장센터 앞 버란계(버스정류장), 어느 선답자는 군청에까지 연락해 이곳의 정확한 지명이 ‘벌안개’라는 것까지 알아냈다. 벌의 안쪽에 잇는 갯가라는 뜻일 게다. 옛날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고, 바닷일을 업으로 살던 어부들의 안식처였던 포구도 있었다나?
▼ 우람하게 치솟은 해주아파트를 오른편에 두고 ‘하봉마을(상하2리)’로 간다. 봉대산(峯大山) 아래에 위치하면서 망덕산(望德山) 줄기를 따라 위에 위치한 마을을 상봉(上峯), 아래에 위치한 마을을 하봉(下峯)이라 부른단다.
▼ 마을길은 꽃밭으로 꾸며졌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름답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마을인가 보다.
▼ 12 : 25. 홍농로(이정표 : 종점까지 8.7km)로 올라서 홍농읍 저잣거리를 걷는다.
▼ 12 : 27. 잠시 후 ‘다온누리아파트’ 앞에서 도로를 건너 ‘하봉마을’로 간다. 다음 블록에서는 오른쪽으로 난 ‘상하길’을 따른다. 참! 아까 도로로 올라오기 전에 만난 농기계 보관창고에도 ‘하봉’이란 이름이 붙어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하봉마을의 중심가쯤 되겠다.
▼ 이 길(상하길)은 행정타운인가 보다. 파출소와 읍사무소는 물론이고 초·중학교가 모두 이 거리에 들어서있었다.
▼ 앞서가던 집사람이 농협의 간판이 조금 이상하단다. ‘지명’을 브랜드로 내거는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굴비’를 얼굴마담 삼았다는 것이다. 맞다. 영광 사람들은 ‘백화점에서 사면 백만 원짜리라도 백화점 굴비지만, 영광서 사게 되면 오만 원짜리도 영광굴비가 된다’고 주장한다고 했다. ‘자린고비’도 영광에서는 남의 집 얘기일 뿐이라고도 했다. 그나저나 ‘자린고비’라는 뜻을 집사람은 알기나 할까? 반찬이 아까워 천장에 생선을 매달아 놓고 쳐다보기만 했다는 할아버지와는 달리 그녀의 씀씀이는 요즘 내 연금의 한도를 넘어서고 있으니 말이다.
▼ 번화가를 벗어나자 상점 대부분이 문이 닫혀있다. 요즘 TV만 켜면 불경기라는 뉴스가 뜨는데, 그 현장이 제발 아니었으면 좋겠다. 매서운 한파에 경기라도 좋아야 하지 않겠는가.
▼ 12 : 35. 홍농초등학교의 담벼락. ‘인성이 실력이다’라는 휘호가 눈길을 끈다. 맞다.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고루한 사고발상은 이제 그만 사라졌으면 좋겠다.
▼ 잠시 후 만난 홍농중학교의 담벼락에선 장미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세월이 하 수상하다보니 장미까지도 철이 바뀐 줄을 모르나 보다.
▼ 12 : 41. 도심을 빠져나오면 확·포장공사가 한창인 ‘홍농로’와 마주한다.
▼ ‘한수원사택’ 입구이기도 한 이곳에는 ‘119 안전센터’가 들어서 있다. 2년 전, 봉대산과 금정산을 답사하러 왔을 때는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어느새 현대적인 외양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참고로 봉대산에는 백수 구수산의 ‘고도도 봉수대(古道島 烽燧臺)’에서 신호를 받아 상하면(고창군)의 고리포봉수대로 전하던 ’봉수대‘가 있었다. 고려 성종(981년) 때 시작되어, 조선 중종 때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법성포의 조창을 왜구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란다.
▼ 이후부터는 영광(한빛)원자력발전소로 가는 ’홍농로‘를 따른다. 도중에 영광승마원과 영광테마식물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기도 한다.
▼ 12 : 51. 서당마을 앞 ‘진덕삼거리’에서는 ‘한빛원자력본부’ 방향 직진이다. 오른쪽(구시포 방향의 ‘진덕로’)으로 가면 더 가까운데 도로를 피해 우회시킨다. 참고로 서당(書堂)이란 지명은 1870년경 밀양박씨의 입향조가 문맹자들을 가르치던 서당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옛 서당은 현재 문중 재실로 변했단다.
▼ 100m쯤 걷다가 오른쪽으로 난 농로로 들어간다. 초입에 이정표(종점까지 7.4km)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그런데 어느 축산농가 앞에서 길이 곤포 사일리지로 막혀있는 게 아닌가. ‘럼피스킨’이라는 소 피부병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 12 : 55. 조금 전 헤어졌던 ‘진덕로(이정표 : 종점까지 6.2km)’를 다시 만났다. 그렇다고 도로를 따른다는 얘기는 아니다. 도로를 만나자마자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상삼마을로 간다.
▼ 잠시 후 진덕리(眞德里)에 속한 자연부락 상삼마을(이정표 : 종점까지 5.9km)에 이른다. 영광군청은 ‘상삼(上三)’이란 지명의 유래를 삼밭(蔘田)에서 찾고 있었다. 남원 땅에서 들어온 ‘남양방씨’가 삼밭을 경작했는데, 이 삼밭의 위에 마을이 위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을 이름인 ‘삼’자가 ‘인삼 삼(蔘)’이 아니고 ‘석 삼(三)’인 이유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 13 : 10. 상삼마을부터는 밭과 논 사이로 난 농로를 따른다. 그렇게 12분쯤 더 걸으면 ‘하삼마을’이다. 영광군청은 이 마을도 역시 삼밭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옥녀가 머리를 산발한 지형의 ‘옥녀산발’ 마을이 삼(蔘) 재배면적이 늘어나면서 ‘삼밭’ 또는 ‘갯삼밭’으로 고쳐졌다는 것이다. 이게 또 마을의 위치로 인해 ‘삼밭 아래’란 의미의 ‘하삼(下三)’이 되었고.
▼ 하삼마을(이정표 : 종점까지 5.1km)은 개짓는 소리로 요란했다. 크고 험상궂게 생긴 개들이 이집 저집에서 윽박지르듯 짖어댄다. 개집이 천정까지 철망으로 막혀있다는 게 그나마 안심이 된다.
▼ 13 : 15. 마을을 벗어나 2차선 도로인 ‘진덕로2길(이정표 : 종점까지 4.6km)’로 올라선다. 그렇다고 도로를 따르지는 않는다. 도로를 횡단한 다음 농로를 이용해 건너편 들녘으로 간다.
▼ 동아방조제가 만들어놓은 드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진다. 수확을 끝낸 들녘은 텅 비었다. 부지런한 농부는 ‘곤포 사일리지’조차도 논두렁에 가지런히 쌓아놓았다.
▼ 13 : 21. 전라 남·북도의 경계에 놓인 ‘자룡천’의 강둑(이정표 : 종점까지 4.2km)에 올라선다. 그리고는 둑길을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 참고로 자룡천(紫龍川)은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검산리에서 발원해 남서쪽으로 흐르다 용대저수지를 지나 자룡리에서 서해로 스며드는 길이 6.13km의 지방하천이다.
▼ 방조제에 막힌 자룡천은 유수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 자못 빼어난 풍광을 보여준다.
▼ 13 : 26. 진덕리(영광군 홍농읍)과 자룡리(고창군 상하면)의 앞바다를 막은 ‘동아방조제(이정표 : 종점까지 3.7km)’에 올라섰다. 둑 위로 2차선의 해안도로가 지나간다. 하나 더, 전라남도의 해안(40개 코스, 652.2km)을 숨 가쁘게 달려온 서해랑길은 이 둑길에서 전라북도에 바톤을 넘겨준다.
▼ ‘동아배수장’ 앞에서 바라본 바다. 내륙을 향해 움푹 파고들어와 안쪽에다 펑퍼짐한 바다를 만들어놓은 것이 영락없는 호로병인데, 바닷물이 들어오는 저 주둥이 부분도 남북으로 나뉜단다. 왼쪽은 전라남도(영광군 홍농읍 성산리), 반면에 오른쪽은 전라북도(고창군 상하면 자룡리) 땅이다. 하나 더, 갈대밭이 들어선 바닷가는 철새도래지인 듯. 꽤 많은 왜가리들이 먹이활동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 13 : 33. 500m쯤 되는 방조제가 끝나면 길은 둘로 나뉜다. 서해랑길은 왼쪽 구시포 쪽으로 간다.
▼ ‘가시연꽃길’ 이정표가 오른쪽으로 가면 ‘용대 가시연꽃군락지’가 나온다고 알려준다. 고창군에서 자연환경과 문화역사 자원을 담아 만든 ‘예향천리마실길’ 중 10코스인 가시연꽃길(13km)이 이곳으로 지나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 13 : 36. 300m쯤 더 걸으면 또 다른 삼거리. 이번에도 왼쪽(구시포 방향)으로 간다. 다만 길이 2차선에서 1차선으로 바뀔 따름이다.
▼ 이곳에서는 ‘1박2일 촬영지’라는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자기네 식당에서 촬영했다는 듯 ‘거북선 숯불풍천장어’라는 상호를 두드러지게 적어놓았다.
▼ 이후부터는 바닷가를 따른다. 철제 난간까지 두른 멋진 산책로가 ‘고리포’까지 나있다. 하지만 길이 널찍한 것은 흠이 될 수도 있겠다. 승용차는 물론이고 트럭까지 스스럼없이 지나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 내륙 방향, 1km도 더 되는 구간은 대하양식장 천지다. 소금 수입자유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저곳에 염전이 들어서있었지 않나 싶다.
▼ 습지를 가득 메운 갈대밭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아니 근처에서 노닐고 있는 왜가리까지 더해줄 경우 흔치 않는 풍경으로 업그레이드된다.
▼ 바닷가 안내판은 고리포마을 해안의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 바닷가에 쳐놓은 저 그물의 정체는 대체 뭘까? 호리병처럼 생긴 내만을 한 바퀴 둘러놓은 것 같은데...
▼ 13 : 56. 바닷가로 내려선지 21분. ‘고리포(古里浦)’에 도착했다. 조선시대 봉화를 올리던 고리포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던 포구로 유명하다. 마을은 봉군들이 머무르면서 생겨났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참고로 고리포봉수대는 포구 북동쪽 600여m 지점의 안산(120m) 정상에 있었다고 한다. 문헌은 영광군 홍농산(弘農山, 지금의 봉대산일 것이다)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의 소응포 봉수로 전달해 주었다고 적고 있다.
▼ 포구 앞, 작은 모래섬이 천혜의 항구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맞다. 고리포는 현 고창 지역의 포구 중 유일하게 그 위치가 이동되지 않고 원형이 유지되고 있는 포구라고 했다. 입지여건이 뛰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10척도 못되는 소형 선박들이 이용하고 있을 따름이란다.
▼ 고리포의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숯불풍천장어’는 거북선을 독채로 전세 냈다. 민박이 가능한 맛집으로 잔잔한 바다냄새와 함께 커다란 지붕이 열리며 파란 하늘을 덤으로 볼 수 있는 고창의 핫 플레이스라고 한다. 하지만 갈 길 바쁜 나그네는 카메라 셔터 한번 누르고 그냥 지나칠 따름이다.
▼ 고리포를 지난 서해랑길은 ‘주씨고개’를 향해 가파르게 치고 오른다. 주씨고개는 40코스에서 가장 높다.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
▼ 14 : 06. 고갯마루를 넘자 발아래로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1800년 무렵부터 소금을 생산하던 ‘구시포(仇時浦)’는 염전을 일구기 위해 설치한 수문의 모양새가 소의 구시통(구유의 방언)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 해양수산부에서 선정한 ‘아름다운 어촌 100선’에 뽑히기도 했다.
▼ 14 : 16. ‘구시포 해변(仇時浦 海邊)’은 고창 제일의 ‘핫 플레이스’로 꼽힌다. 명사가 십리에 펼쳐지는데다 송림까지 우거져 오토캠핑과 가족단위 캠핑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 해수욕장은 길이 1.7km에 폭이 2m인 백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울창한 송림이 뒤를 받치는가 하면, 나지막한 야산이 아늑하게 모래사장을 감싼다. 갯벌 한 점 없이 고운 백사장이 특히 돋보이는데, 바닷물이 빠지면 모래가 단단해져 축구를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한마디로 가족단위 피서지로는 이만한 곳이 없다 하겠다.
▼ 이곳은 일몰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해변 바로 앞에 바다낚시터로 전국에서 손꼽히는 ‘가막섬’이 떠 있는데, 그 뒤로 펼쳐지는 저녁노을이 가히 일품이라고 한다.
▼ 저 갈매기들은 인간과의 공생을 추구하고 싶은 모양이다. 관광객들이 다가가도 도망가지를 않고 자리만 잠깐 내주고 있었다.
▼ 관광객들에 더해 캠핑족까지 몰려드는 곳에 어찌 조형물이 없겠는가. 움직임을 멈춘 그네는 생물권보전지역,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람세스 습지 같은 고창의 명소들을 가리키는 방향표지판까지 매달고 인생샷 하나 건져보려는 이들을 기다린다.
▼ ‘I ♡ 구시포’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포토 죤이다. 이곳 구시포는 tvN의 인기 예능프로그램 ‘삼시세끼 어촌편’ 시즌3의 첫 촬영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그만큼 화면발이 받쳐준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곳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구시포항은 여느 항구와 달리 육지에서 떨어져 있는 ‘가막도(可莫島)’라는 섬에 자리하고 있다. 덕분에 다른 항구에 비해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어선이 입·출항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또한 항구를 와인 잔 모양으로 넓게 정비하면서 바다로 뻗은 800m의 긴 제방과 등대, 전망데크, 트릭아트, 공원 등을 조성해 관광객들이 쾌적하고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했다.
▼ 14 : 30. 서해랑길(40코스)은 고창군청의 이동봉사실 앞에 이르면서 끝을 맺는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가 14.23km이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했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상담가인 ‘클라이드 M 네레모어’는 그의 저서 ‘행복에로의 길’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사랑을 찾기 위해서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가려고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행복한 삶의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그럴 필요조차 없다. 사랑하는 집사람이 하루 24시간으로도 부족하다며 내 곁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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