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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3월9일 목요일 [(자)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수도회] 좋은 것을 한없이 받을 수 있는 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에스테르 4,17⑫.17⑭-17⑯.17㉓-17㉕
† 복음 마태 7,7-12
◈ 오늘의 묵상
예수님 당대 유다교에서는 ‘다른 사람이 너에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
일을 너도 남에게 하지 마라.’라는 계명이 널리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을 더 적극적인 형태로 이끄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기존 계명은 ‘악을 소극적으로 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에게 아무런
손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은 남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을 수도
있지요. 반면 예수님의 새로운 계명은 ‘악을 피하는 것’뿐만 아니라,
‘선을 적극적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남이 나에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
일은 나도 남에게 하지 않는다.’ 이런 자세는 법이 요구하는 자세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나에게 친절을 베풀기를 원하는 대로, 내가 먼저
남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사랑의 행위가 아닙니까?
우리 역시 적극적으로 사랑의 계명, 황금률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남에게 용서받고 싶은 만큼 용서해 주고, 다른 이의 칭찬을 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칭찬해야 합니다. 다른 이의 도움을 바라는 대로 남을 돕고,
남으로부터 이해받기를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물론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려면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오해를
겪겠습니까? 사랑을 실천할 힘과 방법을 주시도록 주님께 정성을 다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것
2017년 가해 3월9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제1독서
<주님,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습니다.>
○ 에스테르기의 말씀입니다. 4,17⑫.17⑭-17⑯.17㉓-17㉕
복음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7-12
아직은 꽤 쌀쌀하지만 이제 곧 새순이 나고 꽃이 피는 따뜻한 봄이
오겠지요. 갑곶성지를 구석구석 둘러보면서 이번 봄에 해야 할 것들을
떠올려 봅니다. 올 봄에는 잔디도 사다가 심어야 할 것 같고, 또한 각종
꽃나무도 심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좀 더 아름다운 성지가 될 수
있으니까요. 이러한 생각들을 하던 중에 10년 전 제가 이곳에서 직접
심었던 나무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갑곶성지의 땅은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돌이 너무 많고 또한
단단하고 푸석푸석한 땅이기 때문에 나무 한 그루 심기도 쉽지가
않았지요. 이런 상황에서 힘들게 땅을 파고 나무를 심는 제게 어떤
형제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시더군요.
“큰 흙덩어리들을 잘게 부순 뒤에 물을 부어보세요. 부서진 흙에 물이
잘 스며들어야 나무들이 잘 자랍니다.”
이 분의 말씀 덕분에 너무나 서툰 제가 심은 나무들도 잘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튼 큰 흙덩어리는 물이 잘 스며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서진 흙은
물이 잘 스며들 수 있어서 나무가 잘 자라고 또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에는 어떠한 꽃도 피울 수 없고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잘게
부서져서 모든 이들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이 될 때에야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습니다.
물이 잘 스며드는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잘게 부서질 수 있는 마음, 다른 이들과 대립각을 세우는 모습이 아니라
겸손한 부드러운 마음을 갖춰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황금률을 말씀하십니다. 즉,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라는 것이었지요. 바로 앞서 이야기했던 겸손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갖추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모습은
과연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따르고 있을까요?
솔직히 남이 내게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만 가지고 있을 뿐, 남에게 해
주는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우리들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면서
자신이 받지 못한 것에만 주목하면서, 시기와 질투로 남과 비교하고 또
손해와 상처를 입었다며 이웃들을 향해서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던
것은 아닙니까?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이 말씀의 주인공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줄 수 있는 잘게 부서진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안쪽에만 달려 있다(게오르크 헤겔).
초창기의 갑곶성지 입구. 지금과 전혀 다르죠?
Listen carefully
‘시간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연애할
시간도 없고, 취미활동을 즐길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낙이 없다고
합니다. 하루하루를 그냥 힘들게 살아갈 뿐이랍니다. 그래서일까요?
많은 이들이 쉽게 할 수 있는 것, 바로 먹는 것에서 인생의 즐거움을
얻으려고 한다더군요(사람들이 인터넷에 음식 사진을 많이 올리는
이유를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먹는 데에도
고민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고칼로리라 엄청 살이 찔
텐데...’라고 말입니다.
무엇 하나 즐겁게 할 수 없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생각 속에 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시간이 없다’라고 단정을 짓기
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것, 지금 기뻐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본다면
어떨까요?
어떤 사람이 늘 불안감에 시달리다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오랜 상담 후에 다음과 같은 처방을 내리셨지요.
“지금 안정이 필요하니 조용한 산에서 며칠 쉬세요. 그리고 산에서 이
편지를 꼭 뜯어 읽어보세요.”
그가 산에 가서 편지를 뜯어보자 편지 안에는 이러한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Listen carefully(신중히 들어보시오).”
이 처방대로 신중히 들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처음에 듣지 못했던
바람소리, 새소리, 벌레소리, 심지어 나뭇가지 흔들리는 미세한
소리까지 들리더랍니다. 이러한 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이 편안해졌고,
결국 자신의 병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 세상의 온갖 걱정을 다 안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똑같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Listen carefully(신중히 들어보시오).”
내 삶 안에서 나는 모든 소리에 집중하게 될 때, 분명히 평화와 안정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삶 자체가 큰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시간이 없다면 한적한 길이라도 걸어보세요.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좋은 것을 한없이 받을 수 있는 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3월9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마태 7,7-12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7,7)
좋은 것을 한없이 받을 수 있는 길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7,7-8) 무엇이든 청하는 것을 다 주실 뿐 아니라 좋은
것을 더 많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7,11).
얼마나 희망적이고 든든한 말씀입니까.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청하기만 하면 누구에게 다 좋은 것을 한없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악행을 저지르고, 제멋대로
살다가 하느님을 찾으면서 필요한 것을 달라고 청하면 다 주실까요?
오직 자신의 이익과 성공을 위해 문을 두드리면 열어주실까요?
그럴 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주시기 위한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지극히 현세적이고 물질적이며,
자기중심적인 기준과는 전혀 다른 조건이지요. 그 조건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는 것‘(7,12)
입니다. 철저히 이타적이며 되돌리는 사랑이 그 조건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 사랑을 위해 사랑을 청할 때 한없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선을 위해 선을 청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무제한으로 주신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문을
두드리는 이들에게 언제든지 기꺼이 문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성령을
청해야 하고, 주님의 사랑과 선을 청하며,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이기심이나 하느님의 선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보시기에 좋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안에 사랑과 선이 메마르고
대인관계에서 생겨난 상처가 있다면 먼저 하느님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선과 의를 위해 필요한 것을 청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일을
하며,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자기에게 닥친 죽음의 위험을 느끼고 하느님께 완전히
의지하는 기도를 드렸던 에스테르 왕비처럼 말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청하는 것이니, 내 중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해 하느님을 움직이려들지
말아야겠지요.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원하는 때에 이루어주셔야만
한다는 생각은 하느님을 도구화하는 엄청난 착각이요 교만입니다.
언제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겸손한 자세로 청하고, 그
결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음을 인식하고, 청하기에
앞서 사랑에 몰두하는 것이 하느님의 자녀다운 태도가 아닐까요?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깊이 깨닫고,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음을 고백하며 청할 때, 주님께서는 청하는 것 이상으로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며, 청하는 것보다
좋은 것을 훨씬 더 많이 주시는(7,11) 주님을 믿고, 더 열심히 다른
이들과 이 사회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거룩한 성취의 날이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3월9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
복음: 마태 7,7-12: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려라.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기도를 잘
아는 민족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듣는 귀가
말하는 입 가까이 붙어있는 것과 같이 하느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가까이 계셔 들어주신다.” 그리고 하느님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요구를 내놓을 줄 아는 이를 더 사랑하신다.”
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7-8절)
라고 가르쳐 주신다. 문은 청하고 구함으로써 두드리는 이에게만
열린다. 우리가 청하는 것은 사랑의 계명을 완수할 수 있는 힘을 청하는
것이며, 찾는다는 것은 복된 삶을 위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의
참된 지식은 복됨으로 가는 길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열렬한 마음으로 청하여야 한다. ‘찾아라.’는 의미가 이런
뜻이다. 무엇을 찾는 사람은 찾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며 주변 상황에는
관심이 없다. ‘두드려라.’는 말씀은 열정적으로 하느님께 다가가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곧 열어 주시는 것 같지 않아도 우리는 그곳에
남아 계속 문을 두드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분께 항구하게 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삶을 예를 들어 설명하신다.
즉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9-11절)하신다. 우리가 악하다 해도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골라
준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속이지 않듯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속이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12절) 예수님께서는 이 한 마디로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을
간단히 요약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덕은, 즉 선행은 간단하고 쉬우며
모든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것임을 가르치신다. 그래서 ‘너의 동료가
너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도 네 이웃에게 해 주어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12절) 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안다. 몰랐다고 핑계를 댈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할 때, 이중적으로 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현세적인 이익을 바리지 않는 마음으로 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에게 참된 마음으로 봉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하여 그분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는 것 같이 우리도 이웃을
대할 때 그런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내가 청하는
것을 이루어주시기를 원하지 않는가?
- 수원교구 상하 성 모세 성단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사순 제1주간 목요일
2017년 가해 3월9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마태 7,7-12)
‘종속과목강문계’ 생물시간에 배운 생명의 뿌리입니다. 지구에는
수많은 생명이 있습니다. 균류, 식물, 동물이 있다고 배웠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과학과 인식의 차원에서 이렇게 다양한 생명이 있는
별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파스칼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저는 이 모든 생명들이 존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진화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 힘이 시간과 우연의 결과라고
이야기 합니다. 창조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 힘이 하느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경제를 이야기는 사람, 과학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지구는 이
생명들이 충분히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넘치도록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파란 하늘, 푸른 바다,
넓은 평원, 높은 산, 시원한 계곡, 스치는 바람,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위험과 재난을 극복 할 수 있도록
특별한 재능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언어, 다음
세대에게 전해 줄 수 있는 문자,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손, 상상할 수
있는 생각을 주셨습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가는 배를 생각합니다. 노를 젓는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이 하고 싶을 때 노를 젓는다면 배는 험한 파도를
뚫고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배는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난파할지도
모릅니다. 파도가 거셀수록 함께 힘을 모아 같은 방향으로 호흡을
맞추어서 노를 저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일본에 쓰나미가 밀려왔을 때, 이어령 교수가 기고한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바다가 일어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늘 보던 파란 파도가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이 뛰놀던 여름바다의 눈부신 모래밭이 아니라 산처럼 무너지는
검은 파도였습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쉽게 휩쓸어버리는 허망한
동영상은 우리가 뽐내던 그 컴퓨터 CG가 아니었습니다. 규모 9의
지진과 함께 일본을 강타한 쓰나미였습니다.
앞으로 일본은 국가의 시스템 전체를 새롭게 바꾸지 않고서는 이
재난의 여진을 극복하기 힘들게 된 것입니다. 일본만의 일이 아닙니다.
이번 지진은 지구의 축도 2.5㎝나 기울게 했다고 합니다. 인간 문명
전체의 한계와 그 임계점을 드러낸 것이지요. 인간의 문명시스템을
바꾸지 않고서는 이 지구상에서 생존하기 어렵게 된 것입니다.
검은 파도가 덮칠 때 정쟁을 멈추는 일본인들을 보았습니다.
도쿄전력이 전후 처음으로 제한 송전을 하게 되자 피해 지역에
우선적으로 송전하도록 시민들은 일제히 자기 집 전선 플러그를
뽑았습니다. 남을 헐뜯던 인터넷은 사람을 찾고 돕는 생존의
게시판으로 바뀌고 트위터는 중얼대는 잡담에서 이재민을 돕는 생명의
소리로 변했습니다. 일본은 어느 나라보다도 지진에 대비하는 기술이
앞선 나라입니다.
일본 국민은 어느 나라 국민보다도 재난에 대비한 훈련과 질서의식을
갖춘 모범적인 국민입니다. 이번에도 지진이 일어난 슈퍼마켓의
현장에서 물건을 훔쳐가기는커녕 자신이 들고 있는 물건 값을 치르기
위해서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고 외국인들은
감탄하는 글을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아무리 그런 일본인들도
이웃나라 없이 혼자서는 살아가기 힘듭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일본보다 가난한 나라들도, 일본을 미워하고
시기하던 나라들도, 멀리 떨어져 무관하게 바라보던 나라들도 일본인을
돕고 위로하기 위해서 가슴을 열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은
경제대국이지만 친구가 없는 나라라고 스스로 비판해온
일본인들입니다. 그러나 주변에 함께 울고 함께 상처를 씻어줄 착한
이웃들이 있다는 것을 일본인들은 그 재난 속에서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들의 비유처럼 목숨을 구해주는 것이 바로
내 이웃임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바이오필리아(biophilia·생명애)야말로 부국강병의 이념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난 자연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인간의
왜소함과 나약함만을 배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이해관계로 얽혀
살고 정실로 손을 잡아 끼리끼리 살다가도 생명을 위협받을 때에는
하나로 뭉치는 힘을 자연의 재난을 통해 배우고 실천합니다. 독도
분규로 등을 돌렸던 한국인들도, 센카쿠열도로 총구를 맞댔던
중국인들도 지진이 일본인의 생명을 흔들 때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제일 먼저 도움을 주기 위해 재난의 땅을 향해 마음과 발길을 돌릴
것입니다.
한국은 일본을 향해 달려갑니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고 남의
행복이 나의 불행이 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새로운 문명은 독립
(INDEPENDENCE)도 예속된 의존(DEPENDENCE) 관계도 아닌
상호의존관계(INTERDEPENDENCE)의 생명공동체적 시스템에서
탄생할 것입니다. 일본을 강타한 지진이 태평양 연안의 모든 나라에
쓰나미의 위험을 불렀듯이 그에 대응하는 생명 역시 공감과 협력의
지혜에 의해서 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와 세계인들이 대비해야 할 문제는 어떤 선진
문명으로도 대응하기 힘든 환경의 쓰나미, 금융의 쓰나미, 정보의
쓰나미, 테러의 쓰나미입니다. 그리고 현대 문명의 임계점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지금 일본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처럼 생명의
구제입니다. 사사로운 이해관계와 정쟁과 그 많은 갈등이 생명
앞에서는 참으로 부질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생명을 구제하는 것은
돈도 권력도 아니고 바이오필리아(생명애),
토포필리아(topophilia·장소애), 그리고 네오필리아(neophilia·창조애)
와 같은 이웃을 향한 사랑이라는 것. 그것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자원이요 자본이라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멀고도 가까운 나라라고 했던 일본과 한국이 하나의
생명공동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생명을 자본으로 한 진정한
글로벌리즘이 무엇인지를 세계에 알릴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검은
파도를 이기는 우리의 블루 오션입니다.”
이어령 교수의 글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들려준 주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 이웃에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두드리고, 찾고, 열어야 하는 것은 바로 생명애 대한
사랑입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이가 되어주는 헌신과 봉사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믿음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신부 -
◈ [청주] 가장 강력한 힘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3월9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마태7,7-12)
가장 강력한 힘
“기도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도 양보하시는 힘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특권입니다.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그 자녀의 필요와 염려에 관심을 나타내실 수 있는 길이고,
주 하느님나라의 창고는 기도로 열리며 믿음은 그 열쇠를 돌리는
것입니다”(작자미상).
그런데 기도의 응답은 때때로 즉각 이루어 주십니다. 가르멜 산위에서
기도한 엘리야의 기도를 듣고 곧 불을 내려 주셨습니다. 천천히 적당한
때에 이루어주시기도 합니다. 다윗왕은 성전을 건축하려 하였지만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성전을 건축케 하였습니다. 어느 때는
이루어주지 않음으로 응답이 되게 하십니다. 기도의 응답은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들어주어서 손해가 될
것은 들어주지 않음으로 해서 유익하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큰 사랑으로 우리의 필요를 반드시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최선의 방법으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7,8). 라고 하셨습니다. 각자의
바람이 많이 있겠지만 세속적인 만족과 위로를 찾고 구하기보다 먼저
하느님을 찾고 갈망하여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청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욕정을 채우려는데
쓰려고 청하기 때문(야고4,3)이라고 하였으니 헛된 수고의 기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열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울지
않는 아이는 젖도 못 얻어먹는다.”고 했습니다. 먼저 청해야 합니다.
그러나 “누울 자리보고 발 뻗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들어주실 것을
청하십시오.
사실 문이라는 것은 열릴 때 열리고, 닫을 때는 닫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열고, 악에는 닫아야 합니다.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께는 물론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부모에게, 형제에게, 이웃에게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부와 명예, 명성의 유혹에는 문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마음은 열고 욕심의 입은 닫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주실 수 있는 분이고 따라서 우리는 받을 수
있으니 행복합니다.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만 구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고마운 응답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청하고, 찾고 두드리되 내 뜻이 아니라 주시는 분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길 바라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7,1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좋은 의향을 가지고 마음껏 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반복해서 청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그분 손에, 그분의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음성을 조용히 듣는 것입니다.”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입니다”(마더 데레사). 우리의 바람과 기도가 헛되지 않기를
빕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주는 것인가, 받는 것인가?
내가 무엇인가를 받을 때,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가?
주님과 더불어 베풀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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