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 수행은 어떤 것인가?
대승불교에서는 ‘본래성불(本來成佛)’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중생은 본래 성불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잘못 이해하면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말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미 성불했는데 성불을 위한 수행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성불’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본래성불’이라는 말은 수행의 바른 길을 제시하기 위해 이야기된 것입니다.
마조 도일(馬祖 道一) 선사가 남악 회양(南嶽 懷讓) 선사 아래서 공부할 때의 일입니다.
도일 선사는 날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부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좌선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양 선사가 도일 선사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무엇 하러 좌선을 하는가?”
도일선사가 대답했습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 좌선을 합니다.”
이 말을듣고 회양 선사는 기왓장을 가지고 와서 숫돌에 갈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마조 선사가 물었습니다.
“스님은 무엇 때문에 기왓장을 숫돌에 갈고 계십니까?”
회양 선사가 “이것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 셈이네.”
하고 대답하자, 마조 선사가
“스님 기왓장을 간다고 해서 그것이 거울이 되겠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회양 선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좌선을 한다고 해서 부처가 되겠느냐?”라고 되물었습니다.
이 말에 마조 스님은 크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 대화를 잘 음미해 봅시다.
회양 선사가 마조 선사에게 좌선을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수행자들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 수행을 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부처와 중생 이라는 분별심이 있습니다.
나는 중생이다. 좌선을 하여 깨달으면 중생에서 부처로 변할 것이다.
이런 기대를 가지고 수행하는 사람은 바른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왓장을 숫돌에 간다고 해서 기왓장이 거울이 될 수 없듯이,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다면
중생이 수행을 한다고 해서 부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참모습을 살펴보면서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모두가 본래청정한 비로자나불입니다.
다만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무명에서 갖가지 분별심(分別心)을 일으켜
허망한 생사의 세계에 빠져 있을 뿐입니다.
수행은 허망한 생사의 세계를 일으키고 있는
무명과 분별심(分別 心)을 소멸하여
자신이 본래 생사가 없는
부처임을 자각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조 스님은
중생과 부처를 분별하고 앉아서
부처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회양 선사는 이것을 깨우쳐 바른 수행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기왓장을 숫돌에 갈았던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본래성불’은
이러한 의미입니다. 이 이야기는 불교수행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본래성불’은
‘자아’는 죽지 않는다는 상견도 아니고, ‘자아’는 죽으면 사라진다는 단견도 아닙니다.
생사(生死)라는 생각 자체가
무명에서 일어난 허망한 망상이므로
무명이 있으면 망상에 의해 생사의 세계가 벌어지고,
망상이 사라지면 본래 청정한 법계의
실상이 드러난다는, 연기하는 세계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무명과 망상을 버리고
실상의 세계를 깨닫는 것이
중도 수행입니다.
올바른 중도 수행은 어떻게 가능할까?
십이연기에 이러한 의문의 해답이 있습니다.
십이연기의 마지막 부분은 태어남과 늙어 죽음입니다. 즉 생로병사(生老病死)하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십이연기는 이러한 우리의 현실이 무명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무명이 있으면 생사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십이연기에는 유전문(流轉門)과 환멸문(還滅門)이 있습니다.
무명이 있으면 행이 있고, 이렇게 차
례로 연기하여 마지막에 생과 노사가 있다는 것은
유전문입니다.
그리고 무명을 없애면 행이 없어지고,
이렇게 차례로 없어져서 마지막에
생과 노사가 없어진다는 것이 환멸문입니다.
이와 같이 생사는 유전문에서는 있지만
환멸문에서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유전문은 어떤 것이고
환멸문은 어떤 것일까요?
유전문은 무명의 상태에서
허망하고 거짓된 자아를 집착함으로써,
생사의 괴로움을 느끼며
살고 있는 중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법문입니다.
환멸문은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과 욕탐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무명과 욕탐을 버리고
중도수행, 즉 팔정도를 닦는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법문입니다.
따라서 십이연기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
상견이나 단견에 떨어지지 않고
무명에서 비롯된 허망한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즉 본래 생사가 없는
열반을 얻기 위한 중도(中道) 수행(修行)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연기법이라는
중도에서 생사를 벗어나기 위한
진정한 수행이 가능하게 됩니다.
불교란 무엇인가
저자 이중표
출판 불광출판사
발매 2017.04.24.
상세보기
태그
#중도
#수행
#성불
#마조도일
#남악회양
#좌선
#부처
#분별심
#생사
#십이연기
불교의 대승적 실천, 육바라밀(六波羅密)
2017. 5. 23.
(3)
열반(涅槃)과 해탈(解脫)
2017. 5. 22.
(1)
중도 수행은 어떤 것인가?
2017. 5. 18.
(3)
중도(中道)는 중용(中庸)과 어떻게 다른가?
2017. 5. 12.
부처님은 왜 침묵했을까?
2017. 5.
첫댓글 유전문은 무명의 상태에서 허망하고 거짓된 자아를 집착함으로써, 생사의 괴로움을 느끼며 살고 있는 중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법문입니다. 환멸문은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과 욕탐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무명과 욕탐을 버리고 중도수행, 즉 팔정도를 닦는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법문입니다. 따라서 십이연기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 상견이나 단견에 떨어지지 않고 무명에서 비롯된 허망한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즉 본래 생사가 없는 열반을 얻기 위한 중도(中道) 수행(修行)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연기법이라는 중도에서 생사를 벗어나기 위한 진정한 수행이 가능하게 됩니다.
본무생사ㆍ 중도수행ㆍ 무무명 역무노사진 ㆍ환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