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지원자가 몰린 가운데 그는 ‘대한민국 국비 유학생 1호’로 뽑혔다. 미국 아이오와대에서 방사선생물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헤밍웨이나 토머스 하디의 소설을 즐겨 읽을 만큼 그는 영어 리딩에 자신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도 미국행은 ‘상상을 초월한 모험’이었다.
“서울 여의도에서 프로펠러기를 타고 도쿄로 갔어요. 거기서 비행기를 타고 하와이에서 내렸죠. 하와이 식당에 갔는데 아는 음식이 없는 거예요. 샌드위치, 햄버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유일하게 아는 음식인 아이스크림만 하루에 6번 시켜 먹었죠. 미국에만 오면 아이오와대에 자동적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하와이 호놀룰루, 샌프란시스코, 솔트레이크시티, 오마하, 디모인을 거쳐 버스를 타고 캠퍼스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5일이 걸렸어요.”
“암 전문의가 내 병을 왜 몰랐을까”
‘유전자 치료법’을 연구하던 어느 날, 그에게 위기가 닥쳤다. 1993년 8월 일본 도쿄 학회에 다녀온 그는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보통 2~3일이면 회복되던 컨디션이 1주일 지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당장 피검사를 했다. 빈혈이란 진단을 받았다. 그 원인을 파악하기위해 추가 검사를 하자 믿을 수없는 결과가 나왔다.췌장암 3기였다. 무시무시한 암덩어리는 소장과 임파선까지 퍼져있었다.
▼ 처음 암 선고를 받고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앞이 캄캄하더군요. 나는 다른 사람보다 병을 더 잘 알잖아요. 우리 집사람한테도 목이 메어 말도 잘 못하고…. ‘내가 암 전문의인데 왜 3기가 될 때까지 모르고 있었을까’ 하는 후회도 들었어요. 자기 건강에 대한 지나친 확신을 갖고 있어서 몸을 소홀히 한 거죠.”
▼ 수술도 어려운 상태 아니었나요?
“췌장은 물론 위의 3분의 2, 담낭, 소장 조직을 떼어내는 어려운 복부 수술이었어요. 우리 병원에서 가장 경험 많은 주치의 2명이 8시간 동안 저를 수술했어요. 수술을 받다가 사망할 확률이 10~15% 됐죠.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더라도 암이 재발하거나 전이되기 때문에, 저는 ‘1년 반에서 2년 정도 생명을 유지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 정말 건강해 보이시는데…. 암환자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얘기 안 하면 아무도 몰라요.”
▼ 신체 장기의 중요한 부분을 떼어내셨는데, 식사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나요?
“수술 후 적응하는 데만 2, 3년이 걸렸어요. 일단 먹는 양이 반으로 줄어들었죠. 담즙이 안 나오니까 기름기 있는 음식은 소화를 못 시켜요. 몸을 회복하기 위해 면역 기능을 높이는 음식을 많이 연구했습니다. 주로 버섯을 달여 차로 마셨어요.”
▼ 암 환자가 회복하는 데 좋은 음식을 더 추천해주세요. 브로콜리도 암 치료에 좋다고 들었습니다만.
“브로콜리는 암 예방에 더 좋다고 알려져 있어요. 음식을 택할 때 ‘암 예방에 효과가 있는지, 암 전이를 방지하는 데 좋은지’ 구별하는 게 좋아요. 암 치료 중인 환자가 회복하는 데 비타민이나 미네랄이 좋습니다. 암을 없앨 때 정상 조직도 많이 손상되거든요. 정상 세포 재생을 극대화하려면, 균형 잡힌 식단으로 음식물을 섭취해야 하는데 가장 쉬운 방법이 종합 비타민을 먹는 거예요. 비타민B나 비타민C가 손상된 조직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합니다.”
▼ 적정 섭취량은 얼마나 됩니까?
“‘비타민C를 얼마나 섭취해야 하는가’는 전문가마다 의견이 다른데, 치료를 위한 메가 도우즈(mega dose·대량 투여)는 10~20g입니다. 보통 사람은 그렇게 복용하기 힘들어요. 비타민C는 물에 녹기 때문에 한 번에 섭취하면 다 빠져나옵니다. 천천히 먹거나 아침, 점심, 저녁 세 번에 나눠서 먹는 것이 좋아요.”
연구를 통해 배운 인내
암환자에게 먹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일지 모른다. 지난한 항암 치료 과정은 고통과 공포의 연속이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몸의 탄력은 떨어진다. 기력이 쇠해 한곳에 집중하기조차 어려운 상태. 그는 일에 매달리며 이 시기를 버텼다.
“병원에서는 수술 후 6개월 동안 집에서 쉬라고 했어요. 하지만 저는 방사선 치료가 6주 만에 끝나자마자 업무에 복귀했어요. 다른 사람이 보면 ‘유 머스트 비 크레이지(you must be crazy)!’라고 할 만했죠. 일을 하면 좋은 건 잡념이 적게 생긴다는 거예요.”
▼ 남다른 마인드 컨트롤 방법이 있었나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려고 노력했어요. 사람은 생각하기에 달려 있잖아요. 죽을병이라고 생각하면 우울해지니까. 디프레스(depress) 되면 염증을 만드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많이 생겨요. 미래를 바라보면서 ‘1, 2년 더 살더라도 주어진 사명에 충실한 삶을 살자’고 생각했어요.”
▼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세상을 원망하신 적은 없습니까. 주변사람들에게 짜증이나 화를 낸다거나….
“신기하게도 투병하는 동안 ‘내가 암을 극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매일, 매주, 매월 강해지더라고요. 1년 지나니까 몸에 자신이 붙었어요. 예를 들어 힘차게 진찰실에 걸어 들어온 말기암 환자와 부축을 받아 걷는 초기암 환자를 비교해보죠. 의사는 전자의 경우를 더 예후가 좋다고 말합니다. 암 진행 상태보다 환자의 퍼포먼스가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몸에 지장이 없더라도 정신적으로 우울하면 퍼포먼스가 나쁘더라고요. 이걸 잘 아니까 좀 더 쉽게 극복할 수 있었어요.”
▼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게 쉽지 않은 일 같습니다.
“제가 걸린 암은 100명 발병하면 99명이 죽는 병으로 알려져 있죠. 사람들이 대개 빨리 포기하는데, 저는 연구를 통해 희망을 배웠어요. 연구하다보면 99%가 실패잖아요.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1% 가능성에 매달렸어요. 그렇게 얻은 성공은 최고의 만족감을 주죠. 투병과정도 마찬가지였어요. 큰 병에 걸렸지만, 작은 희망을 향해 노력해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지독한 인연이 있을까. 학자로서 암을 평생 연구하는 것도 모자라, 병의 고통을 온몸으로 체득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환자에게 건네는 그의 조언은 그 어떤 의사의 말보다 힘과 진정성이 넘친다.
“직접 겪었으니까 환자들에게 좀 더 개인적으로 다가갈 수 있죠. 희망을 줄 때도 좀 더 리얼리스틱한 얘기를 해줄 수 있고요. 암환자가 느끼는 고통, 부작용, 공포감이 어떤 것인지 잘 알기 때문에 ‘다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김 박사는 암과의 인연을 통해 인생을 배웠다고 한다. 엄청난 시간과 비용, 노력이 드는 항암치료제 개발 과정은 그에게 인내를 가르쳤다. 그는 연구원을 지망하는 후학들에게 “호기심이 없다면, 기나긴 연구 과정을 견딜 수 없다”고 조언한다. 암 투병 경험은 세상을 대하는 마음가짐도 바꿔놓았다.
“생사의 기로에 서다보니 세상을 초월해 보게 됐어요. 예를 들어 누가 시간 약속에 늦는다면, ‘무슨 이유가 있겠지’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사소한 문제로 마음 상하는 일이 사라졌어요.”
“항암치료제 개발은 사명”
암이 발병한 지 17년이 흘렀지만, 그는 건강하다. 특별한 병치레도 없었다. 항암치료를 받으며 67㎏에서 58㎏까지 내려간 몸무게는 현재 63㎏으로 회복한 상태다. 건강 비결을 묻는 질문에 그는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줬다.
“수분을 많이 섭취해야 해요. 이건 암환자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특히 60~70대 병원 입원 환자의 60% 이상은 탈수증 때문에 병원에 옵니다. 물을 충분히 마시지 않으면 산성 계통의 염증이 많이 생겨요. 만성 염증은 만성병의 근원이 될 수 있고요. 소변 색깔이 짙으면 물 섭취가 적다는 뜻입니다. 소변이 맑아질 때까지 물을 마시는 것이 좋습니다.”
김재호 박사의 항암치료제 개발은 현재진행형이다. 남들이 무서워서 벌벌 떠는 암을 초전박살 낸 그의 의지라면 못할 게 없을 듯하다. 긍정의 힘을 보여준 그의 삶이,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그의 연구가 우리에게는 희망이다.
“저는 축복받은 사람이에요. 암 수술을 받은 뒤 내게 주어진 인생은 보너스 같은 것이죠. 남들은 이 나이에 좀 더 쉽게 사는 방법을 찾지만, 항암치료제 개발을 완료하는 것은 제 사명이에요. 남은 임상에 대한 예감도 좋습니다. 제 연구로 고국에 공헌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