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1일 대림 제4주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가 1, 26-38)
“Behold, I am the handmaid of the Lord. May it be done to me according to your word.”
말씀의 초대
다윗이 하느님의 궤가 천막에 머무르는 것을 안타까워하자, 주님께서는 나탄 예언자를 통해 다윗의 후손이 주님의 집을 지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그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하실 것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을 맺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신비로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신다고 하며 하느님을 찬송한다(제2독서). 가브리엘 천사가 전하는 예수님의 탄생 예고이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이를 낳을 것이며 그 아이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놀라운 소식을 전한다. 마리아는 주님의 뜻에 순종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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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대림 시기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대림초 네 개가 모두 켜집니다. 때가 다 찼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세주의 ‘오심’이 임박했음을 압니다. 오늘 미사의 입당송은 이사야서의 예언을 따라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하여라.” 이 말씀의 라틴 말 첫 구절을 따 이름 지어진 ‘로라테’(rorate)는 교회 전례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대림 시기의 기도로 소중히 여겨졌습니다. 많은 성가에 이 구절이 붙여졌고, 성탄절을 앞둔 9일 동안 동트기 전에 봉헌하는 미사를 ‘로라테 미사’라고도 했습니다. 이 미사들이 오늘 미사와 마찬가지로 이사야서의 말씀을 입당송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전례 안에서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희망과 설렘에 차 하늘이 영적 목마름을 가시게 하는 이슬을 내리고, 구름이 죽어 가는 세상을 살릴 의로움을 뿌리며, 땅은 마침내 구원을 꽃처럼 피어나게 하기를 노래합니다. 그러나 성탄절의 문턱에서 우리는 세상의 어두움 속에 던져진 이들, 곧 ‘문밖의 사람들’을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요절한 독일의 시인 보르헤르트가 전후 독일의 비참함을 보며 쓴 희곡 『문밖에서』의 서문에 나오는 절규는 오늘 우리에게도 들려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집은 저 문밖에 있다. 그들의 독일은 저 밖에, 밤이면 빗물 속에, 거리에 있다. 이것이 그들의 독일이다.” 성탄절은 ‘문밖에서’ 서성이며 절망하는 이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소외된 형제들과 함께하는 곳에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십니다. 오늘 미사의 복음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구원의 빛이 어떻게 이 어두운 세상에 오게 되었는지를 잘 알려줍니다. 바로 마리아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대림 시기의 마지막 주일에 우리는 마리아의 순명의 응답을 기억하며 성모님을 바라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심리학자 알버트 엘리스(Albert Ellis)는 세상살이가 힘겹게 느껴지는 세 가지 믿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성공해야 하고’, ‘누구나 내게 잘 대해 주어야 하며’, ‘세상은 반드시 살기 쉬워야 한다.’
사실 이런 믿음을 간직하고 있지요. 그런데 실제로 그 믿음이 내 삶 안에서 잘 이루어지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바람과는 달리 성공하지도 못하고, 사람들은 내게 차가운 시선을 보낼 때도 많고, 세상은 그리 살기 쉬운 곳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살이는 왜 이렇게 힘겨울까요?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왜 이렇게 힘든 세상을 우리에게 주신 것일까요?
만약 앞서 말한 ‘~ 해야 한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만을 위한 믿음이며, 계산적인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행복을 원하고 있으며, 사랑에 근거하는 굳건한 믿음을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자기만을 위한 그리고 철저히 계산적인 믿음이 더해질 때 주님의 사랑을 우리 안에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인생은 일어나는 일이 10%, 그리고 그 일에 대한 반응이 90%를 좌우한다.”
삶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좋은 날과 나쁜 날이 나눠질 수 있습니다. 즉, 잘못된 믿음으로 나온 내 반응이 실제로 어렵고 힘든 삶을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굳건한 믿음을 간직하고 계신 분은 언제나 기쁘고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성모님의 믿음을 묵상해봅니다. 아직 남자를 모르는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 잉태 소식을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들었을 때 얼마나 당황하셨을까요? 요셉과의 결혼이 파혼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며, 결혼 전에 임신함으로 간음했다는 세상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맞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계산하면 할수록 있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지요. 그래서 “절대로 그런 일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답같이 보이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모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 모든 일에 대한 결과를 계산하지도 않습니다. 천사가 말한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말을 굳게 믿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언제나 최고라는 마음, 나는 단지 주님의 종일뿐이기에 무조건 따를 수 있다는 겸손한 마음. 이런 믿음이 바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예수님을 품에 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4개의 대림초가 모두 다 켜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얼마나 하고 있나요? 단지 구유나 성탄트리를 만들어 놓고는 ‘모든 준비 끝’이라고 외치는 것은 아니겠지요? 성모님과 같이 하느님께서 최고이고 그분의 일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굳건한 믿음만이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알아보고, 믿음으로 들으며, 믿음으로 실천하는 오늘을 만들어 보세요.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힘써라(알버트 아인슈타인).
나는 최고의 투수야~~
어느 날, 한 어린이가 뒤뜰에서 혼자 야구를 하면서 야구공을 공중으로 던져서 배트로 때리는 놀이를 했습니다. 그는 공을 던질 때마다 소리쳤지요.
“나는 가장 위대한 야구타자다.”
그리고 배트를 휘둘렀지만 헛스윙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심판 역할도 했기 때문에 아쉽게 소리쳤습니다. “원 스트라이크!”
그 아이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야구공을 집고 공중으로 던지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가장 위대한 야구타자다.”
그리고 전보다 더욱 힘차게 배트를 휘둘렀지만 두 번째도 헛스윙을 했습니다. 그가 다시 소리쳤습니다. “투 스트라이크!”
그 아이는 잠시 배트와 볼을 자세히 살펴본 후에 세 번째로 공을 던지며 소리쳤습니다.
“나는 가장 위대한 야구타자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배트를 휘둘렀지만 세 번째도 볼을 치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쉬워하며 소리쳤습니다. “쓰리 스트라이크! 아웃”
그런데 곧바로 기쁜 음성으로 소리칩니다.
“내가 지금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야구타자를 삼진 시켰어. 나는 최고의 투수야!”
반대로 생각하면 가장 좋은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실망하지 마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주님과 함께 하도록 하십시오. 당신은 주님의 가장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 성모님처럼 절실하게 갈망하라 >
-전삼용신부-
한국 애니매이션으로 한국에서보다는 미국과 세계 전역에서 엄청난 흥행을 거두었던 ‘넛잡(The Nut Job); 땅콩 도둑들’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외국에서 벌어들인 수익이 1억 3천만 달러라고 하니 대박이 난 영화입니다.
공원에 사는 조금은 아웃사이더인 설리라는 남자 다람쥐가 있습니다. 그가 공원에 사는 다른 동물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만 먹을 것을 구하려다 겨울을 나기 위해 마련해 두었던 아주 조금의 식량마저 다 날려버리게 됩니다. 공원 동물들의 통솔자 라쿤은 공원식구들의 만장일치로 설리를 추방하여 도시로 쫓아 보냅니다.
도시로 가서 갖은 고생을 하던 설리는 땅콩을 파는 가게를 발견하지만 그 안에는 무서운 개가 있고 들어가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철저한 준비와 계획을 통해 엄청난 양의 땅콩을 빼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 공원 동물들의 통솔자 라쿤은 먹을 것이 풍부해지면 공원 동물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을 것을 알기에 자신 편의 동물들을 시켜서 이 계획이 실패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설리 다람쥐는 그 방해를 이겨내고 땅콩 부대들을 빼내어 굶어 죽어가는 공원 동물들을 살린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무언가를 절실히 원하게 되면 바뀌는 것이 무엇일까요? 땅 속에 보물이 묻혀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라도 그 보물을 차지하려 할 것입니다. 좀도둑들도 무언가 하나 훔치기 위해 며칠 동안 그 집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거기에 누가 사는지 사람들이 언제 들어오고 언제 나가는지 어디로 들어가서 어디로 빠져나와야 할지 등을 미리 철저하게 준비하고 작업을 벌인다고 합니다. 무언가를 원하게 되면 그것을 얻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노력을 하는 등의 에너지를 쓰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을 당신 안에 받아들였던 성모님의 모범이 나옵니다. 곧 며칠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태어나십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태어나시게 하기 위해 오늘 복음만큼 완전한 모범을 보여주는 복음은 없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당신 안에 오시겠다는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기꺼이 받아들이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한 질문이 아닙니다. 성모님은 ‘믿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여인 중에 복되신 분’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의 한 이 말들은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을 지니고 가브리엘 천사에게 물어보신 위의 질문은 천사의 말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 하기에 그 방법을 물어보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동정을 지켜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도 모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모님에게만 하느님께서 오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성모님만이 천사를 처음 만나는 그런 상황에서 침착하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볼 수 있는 적극적인 갈망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땅콩을 훔치기 위해서도 ‘어떻게’ 훔쳐야 하는지 계획을 세운다면, 하느님을 맞아들이기 위해서도 ‘어떤 일’을 준비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려고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기 위한 그런 구체적인 노력이 없다는 것은 실제로는 하느님나라를 원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분을 원하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안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예화 중 이런 것이 나옵니다.
제자가 스승한테 매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찾을 수 있나요?”
그리고는 매일 똑같이 신비스런 대답을 들었습니다.
“갈망함으로써.”
“그렇지만 저는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갈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분을 못 찾지요?”
하루는 스승이 그 제자와 함께 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승은 제자의 머리를 물속 깊숙이 밀어 넣고서 그가 숨이 턱까지 차올라 풀려나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 칠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제자는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다 와서야 겨우 풀려났습니다.
다음 날 스승이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어제, 자네 머리를 물속에 넣었을 때 왜 그렇게 몸부림을 쳤나?”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 그랬습니다.”
“바로 그걸세. 그렇게 하느님을 숨 막히도록 간절하게 찾는다면 반드시 하느님을 만나게 될 걸세.”
사실 우리가 무언가를 절실하게 원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주의 가치를 안다면 그것을 위해서 전 재산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나라의 가치를 안다면 그것을 위해 잠자는 것도 포기하고 노력할 것입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수녀가 되어 도시의 부유층 자녀들이 다니는 사립학교 교사로 20년을 재직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항상 텅 비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길을 가던 중 한 여인의 비명소리를 듣습니다. 그녀는 위독한 환자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갑니다. 첫 번째 병원에서는 돈 없는 환자의 치료는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었고, 두 번째 병원에서는 신분이 낮은 사람은 치료해 줄 수 없다는 소리를 듣고 문전박대를 받았습니다. 세 번째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그 여인은 이 수녀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이 수녀는 조금씩 차가워지는 여인을 가슴에 품고 이렇게 결심합니다.
‘이제부터 내가 서 있을 곳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의 곁이다.’
그리고 아주 구체적으로 아침 일어날 때부터 밤잠자리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누구도 흩트려 놓을 수 없는 확신에 찬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 분이 마더 데레사 수녀님입니다. 이분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비로소 알게 된 것이고 그 가치를 아니 목숨을 바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무언가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것을 얻으려 하다가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진정으로 원하지 않기에 몇 번 시도하다가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진정으로 원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당신 보물을 내어주실 리가 없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가치도 모르고 그래서 그것을 원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무언가를 주려고 하실 때 그것을 절실하게 원하는지를 보십니다. 절실하게 원하면 적극적으로 그 얻는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에 옮기며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영국군이 전쟁에 참패하여 거의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몇몇의 잔여병들만이 숲속으로 도망쳤는데 그 중 ‘부수’ 장군도 그들과 함께 끼어 동굴 속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참패한 것이 수치스러워 칼을 빼어 자살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동굴 어귀에서 거미가 거미줄을 치려고 애쓰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거미는 바람으로 인해 6번을 연거푸 실패합니다. 그러나 7번째에 가서 거미줄을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지켜본 장군은 다시 일어나 싸워서 결국에서는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고 합니다.
거미는 그 거미줄을 치지 못하면 굶어죽게 됩니다. 이것이 절실함입니다. ‘넛 잡’에서 자신이 음식을 구하지 못하면 많은 동물들이 굶어죽게 된다는 설정이 나오는데 바로 그 절심함이 설리 다람쥐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물에 빠진 베드로가 예수님께 손을 내미는 것도 절실함입니다. 신앙을 가진지 꽤나 지났는데도 겨우 주일미사에만 간신히 나오고 있다면 하느님나라의 가치를 진정으로 알고 있는 신앙인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지옥에 가는 것이 두려워서 최소한만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하느님은 당신의 보물을 절대로 주시지 않습니다. 각자가 원하는 만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을 포기할 정도로 그분을 절실하게 원합니까? 그래야만 우리 안에 당신 자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겸손한 삶
-내 삶의 문장의 주어는 하느님이다-
-이수철신부-
모든 덕중의 덕이 겸손입니다.
오늘은 겸손한 삶에 대한 묵상 나눔입니다.
사막 수도자의 일화입니다.
-암마 테오도라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수행도, 밤샘기도도, 그 어떤 고행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오직 겸손만이 할 수 있다.
악령들을 모두 몰아낸 한 독수자가 있었다.
그가 악령들에게 물었다.
'무엇이 너희들을 달아나게 했는가? 단식인가?'
그들은 대답했다. '우리도 먹지 않고 마시지도 않는다.'
'밤샘 기도인가?'
그들은 대답했다. '우리도 잠을 자지 않는다.'
'그러면 어떤 힘이 너희를 몰아냈는가?'
그들은 대답했다. '겸손을 제외한 그 무엇도 우리를 쫓아낼 수 없다.'“-
성인들의 특징은 한결같이 겸손한 삶에 있습니다.
겸손한 사랑, 겸손한 믿음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겸손은 그대로 지혜입니다.
하느님은 겸손하시고 또 겸손한 자를 당신의 일꾼으로 쓰십니다.
오늘 나자렛 촌 동네의 마리아를 찾아 온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도 하느님의 겸손을 깨닫습니다.
무엇이 겸손한 삶입니까?
하느님이 내 '삶의 문장'에 주어(主語)가 되어야 겸손한 삶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다윗의 겸손을 일깨우는 하느님의 사람, 나단 예언자입니다.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란 말에 이어
나단은 다윗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업적을 수없이 열거하면서 다윗의 겸손을 일깨우십니다.
온통 하느님인 '내'가 다윗을 위해 하신 일들입니다.
다윗의 온 '삶의 문장'에 주어는 하느님 '나'뿐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인 '내'가 해준 일들로 가득한 다윗의 삶입니다.
바로 다윗의 전 삶이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마지막으로 다윗은 물론 성탄을 준비 중인 우리에게
메시아 탄생의 축복까지 예언하십니다.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 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겸손을 일깨운 후 주시는 주님의 축복입니다.
주님은 겸손한 이들을 축복하십니다.
아니 겸손 자체가 이미 축복입니다.
겸손할 때 마음의 평화와 기쁨입니다.
세상에 주어가 없는 문장이 어디 있습니까?
삶의 문장에 하느님이 빠진 문장이라면 이건 삶의 문장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여 무의미한, 허무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내 삶의 문장에 주어가 될 때 비로소 삶의 중심이 잡히고 삶의 의미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세상에 '하느님' 주어가 빠진 문장 같은 삶을 사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바로 하느님 '주어(主語)' 대신 나를 주어로 할 때 바로 이게 교만입니다.
하느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 모두 내가 한 일이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도저히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생각을 바꿔 내 삶의 문장에 하느님을 주어로 넣고 곰곰이 묵상해 보십시오.
내 지난 삶의 의미가 환히 계시될 것입니다.
온통 하느님께서 하신 은혜로운 일들로 가득함을 깨달을 것입니다.
저절로 감사로 가득찬 삶이 될 것입니다.
감사는 은총을 담는 그릇입니다.
감사할수록 은총 가득한 하느님이 내 삶의 문장에 주어이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내 '삶의 성경'의 렉시오디비나입니다.
가브리엘의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는 마리아는
분명 삶의 문장의 주어인 하느님을 마음 깊이 새기며 이 인사말을 렉시오디비나 했을 것입니다.
바로 내 삶의 문장에 주어는 하느님이심을 깨닫는 것이 은총이자 겸손입니다.
오늘 복음의 겸손한 마리아를 찾아와 다시 그의 겸손을 일깨우는 가브리엘 천사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이 말씀 또한 제가 고백성사 때 가장 많이 써드리는 보속 처방전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내 삶의 문장에 주님을 넣고 묵상해보면 얼마나 은총 가득한 삶인지 담박 들어납니다.
바로 마리아에게 하신 축복의 말씀은 내 경우에도 그대로 해당됨을 깨달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바로 주님이 마리아는 물론 내 삶의 주어임이 분명 드러납니다.
아무도 내 삶의 주어인 주님을 대치할 수 없습니다.
주님 자리에 다른 것을 넣을 때 바로 우상이 됩니다.
주님만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내 삶의 문장에 나를 주어로 넣고 살기에 감사는 없고 불평 불만에 삶은 무거운 짐이 되어 버립니다.
나단을 통해 다윗을 축복하신 주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마리아를 축복하십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내 삶의 문장에 주어로 확고히 자리 잡을 때
비로소 겸손한 믿음이요 대부분 문제들은 저절로 해소됩니다.
내 눈이 아닌 하느님의 눈으로, 내 마음이 아닌 하느님의 마음으로 매사 대할 것이니
바로 이것이 지혜요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고백할 때, 하느님께 기도할 때 비로소 나는 내 삶의 문장에 '내'가 주어가 됩니다.
오늘 새벽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시편 기도를 바치며 새삼스럽게 깨달은 진리입니다.
내가 하느님께 믿음을, 사랑을, 희망을, 순종을 고백할 때,
또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때,
비로소 나는 내 삶의 문장에 주어가 되고 하느님은 목적어가 됩니다.
하느님이 계시기에 의미있는 내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없이 누구에게 순종하고 기도하고 찬미하고 감사하겠습니까?
또 하느님 아닌 누구를 믿고 희망하고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찬미와 감사는 영혼의 양 날개입니다.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라 있는 인생입니다.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로마16,27).
바오로가 바치는 장엄한 하느님 찬미입니다.
여기 뉴튼수도원 복도를 걸어 기도하러 가던중 게시판에 눈길이 멎었습니다.
밖에서 온 수십여장의 성탄축하카드로 가득 채워진 게시판을 보며 순간 떠오른 생각입니다.
'아, 연결은 새명이요 소통이구나.
탄생하실 주님이 각자 삶의 문장의 주어이기에 이런 소통의 연결이 가능하구나.'
그렇습니다.
믿는 이들 간에 연대와 일치가 가능한 것도
모두가 똑같은 주님을 내 삶의 문장의 주어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진정 믿는 이들 모두의 '삶의 문장'의 주어(主語)는 하느님입니다.
삶의 문장에 하느님이 아닌 내가 주어가 될 때 교만이요
하느님과 관계는 물론 이웃과의 관계도 불통이 되어 버립니다.
하느님이 없으면 겸손도 없습니다.
내 삶의 주어가 하느님이심을 깨달아
하느님께 순종하고 찬미와 감사를 드릴 때 겸손한 삶, 축복의 삶입니다.
이런 겸손은 그대로 하느님의 축복을 담는 그릇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참으로 겸손케 하시며 믿음의 순종(로마16,26)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 당신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
(시편89,2).
아멘.
주님을 낳아 드려라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대림 초 4개 모두에 불이 당겨졌습니다. 빛이 밝아진 만큼 우리의 마음도 맑고 밝아지길 희망합니다. 이 시간 믿음으로 순명하는 삶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성탄준비를 잘 하고 계시죠?
우리 성당마당에는 이미 구유를 만들었고, 주변의 나무에는 반짝이 등을 달았습니다. 멀리서도 종탑의 빛나는 별을 볼 수 있습니다. 학생들도 열심히 성탄 예술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고마운 분들에게 카드를 보내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지역 어르신들 700여분을 초대하여 사랑의 점심 나눔 행사도 하였습니다. 합동판공성사도 하였습니다. 어찌 보면 성탄 준비가 끝난듯합니다. 그러나 외적인 준비를 통하여 내면의 거룩함에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남은 시간 마음을 다잡아 주님께서 품으셨던 바로 그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기, 질투, 분노, 미움과 원한을 품은채로 예수님을 맞이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 마음이 이기적이고 자만심이 가득 찬 마음이라면 아기 예수님께서 편안히 머물 수 없습니다. 열심히 일했지만 우리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서는‘성탄준비 끝!’하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장식을 달고 집을 꾸미는 것보다 더 중요한 마음의 성탄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선물을 주고 성탄트리를 장식하는 것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깨끗이 정돈된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신 성모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궁전이 되어 성령께 대한 온전한 의탁의 모범이 되신 성모님처럼 성령께 귀 기울이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성모님이시라면 어떻게 처신 하셨을까? 곰곰이 생각하며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에 눈뜨는 성탄의 준비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대데레사는 우리에게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그대의 몸을 지니고 있을 뿐 지상에서 그리스도는 더 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손과 발을 지니고 있을 뿐 그리스도는 손도 발도 없습니다. 그대의 눈은 이 세상을 자비로 바라보시는 바로 그분의 눈이요, 그대의 두 발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려 걸음을 내딛는 바로 그분의 발이며 그대의 두 손은 세상을 강복하시려 펼쳐 드신 바로 그분의 손입니다. 그리스도는 더 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몸이 바로 그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잘 표현해 놓은 곳이 있습니다. 1729년에 지어진 미국 샌디에고 미션성당에 가시면 제단정면에 양 팔이 없는 십자고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손이 되어드려야 한다는 간절한 호소를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손을 필요로 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1,31).는 천사의 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마리아는“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반문했지만 결국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하고 응답하였습니다.
사실,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응답 없이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순명이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마땅하고 옳은 일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이기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고통과 시련이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는 당시의 풍습대로 하면 돌팔매로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죽이고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아니 우리를 위한 구세주를 세상에 낳아드렸습니다.
성경은“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루카1,3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일을 혼자 하시길 원치 않으십니다. 인간의 협력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응답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믿음과 순명의 모범이듯 요셉 성인은 이집트로 피하라는 명을 들은 즉시 깊은 밤에 일어나 조금도 불쾌한 마음 없이, 또 본국으로 돌아올 기약도 묻지 않은 채 즉시 거룩하신 아기를 안고 가셨습니다. 그것은 역경에서 순명 하라는 모범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앙은 어려울 때 증거 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술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예수님께 하신 어머니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예수님의 대답을 듣게 됩니다. 그때 어머니는 이유를 달지 않고 사람들에게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물이 술이 되는 기적을 체험케 되었습니다.
어부인 베드로가 밤새 한 마리 고기도 잡지 못했을 때 ‘주님이 시키는 대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치고’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어부라는 자존심을 내세웠더라면 능력의 주님을 체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는 계산을 하는 한 그만큼 주님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행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셨기에 마땅히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말씀대로 행하면 행할수록 그분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일상 안에서 어떤 처지가 되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하고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도구삼아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종은 종입니다. 선택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은 내 생각, 내 뜻을 접고 주인이 원하시고 기뻐하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주님을 흠승하라’ 하시면 흠승하고, ‘원수를 사랑 하라’ 하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이유나 핑계가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 예언자를 통해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되고 너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하신 주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큰 힘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부자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그리고 아버지께 효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러므로 주님의 손발이 되고, 눈이 되고 그분의 몸이 되어 주님을 간절히 기다린 사람들의 기쁨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매번 정성껏 준비해 봉헌한 귀한 예물은 주님께서 크게 받아 주시고 또 큰 은혜로움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되돌려 주실 것입니다. 현세에서도 주시지만 하늘에 보화를 쌓는다는 기쁨이 더 큽니다. 이번 구유예물은 아이티에서 사목하시는 신부님께 전해져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대로 쓰여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어렵고 힘든 일, 곤란하고 궂은 일에 지체 없이 나설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 당신의 도구와 연장이 될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응답하십시오! 그리하면 예수님께서 바로 그곳에서 탄생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낳아드릴 방을 마련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 하나의 예수, 구세주가 되어야 이웃이 구원됩니다. 사랑합니다!
-조재형신부-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각 교구의 교구장님들께서 교구의 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주된 내용은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본 받자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가난한 이들의 모습으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맞이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각 교구의 교구장님들은 ‘보육원, 요양원, 장애인 공동체, 노숙인’들을 찾아가셔서 성탄 미사를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화려한 성탄장식 속에 계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연말에 이루어지는 각종 시상식에 계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권력, 명예, 재물이 가득한 곳에 계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던 분들이 있습니다. 양들을 돌보던 목동들이었습니다. 별자리를 보고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왔던 동방박사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은 깨어있었고,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기 위해서 행동을 하였습니다. 많이 배웠고, 율법의 수호자라고 했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가득한 책 속에서 탄생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헤로데와 대사제들도 예수님의 탄생을 몰랐습니다. 권력의 중심은 예수님께서 태어나기에는 너무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당에 있을 때, 성탄 무렵에는 봉성체를 다니면서 어르신들을 위해서 떡을 준비했습니다. 몸이 아프신 어르신들, 외로운 어르신들, 전기장판에 겨우 몸을 의지하시는 어르신들에게 작은 정성이지만 성탄선물로 떡을 드렸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시던 어르신들이 생각납니다. 빈첸시오 회원들은 ‘쌀, 김치, 불고기’를 나누어 드렸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몸소 사람이 되신 성탄은 바로 나눔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온전히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도시빈민 사목’을 하는 동창 신부들을 만났습니다. 가난한 분들과 함께 지내는 동창들입니다. 친구들에게 저녁을 대접했지만 저는 더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저는 교구와 교회라는 견고한 울타리 안에서 너무 편하기 지내는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하였습니다. 추운 겨울 칼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면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연대하는 동창신부들이 몸은 비록 힘들어도 주님의 탄생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우선권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교회의 존재이유는 바로 지금 굶주린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헐벗은 사람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에게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나누었다면 주님의 성탄을 의미 있게, 보람 있게 맞이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깊은 골짜기를 메울 수 있습니다. 높은 산을 평평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랑과 정의가 입을 맞추고 진실과 평화가 손을 잡으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가난한 이들의 모습에서, 지금 병든 이들의 모습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드렸던 동방박사들처럼 우리들도 우리들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그 주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사람의 뜻, 세상의 뜻, 욕망과 성공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대림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에게 오시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대림의 진정한 의미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했던 성모님처럼 우리들 또한 이제 나의 뜻이 아니라, 욕망과 욕심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행동하는 것입니다.
대림 4주일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신비’를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부족하고, 죄를 많이 지었고, 별로 잘 한 것도 없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권능과 모든 권세를 가지진 분이 아주 연약한 아이의 모습으로 비천한 마구간에 태어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한해를 보내며 많은 모임이 있는 때입니다. 후회와 아쉬움도 있는 때입니다. 걱정과 근심이 나의 앞을 가로 막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 다가올 성탄을 생각하면서 좀 더 경건한 마음으로, 좀 더 기쁜 마음으로, 좀 더 따뜻한 마음으로 나를 위해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주님과 함께 주님과 더불어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잉태
-인영균신부-
어제는 밤늦게까지 수도원 바로 아래에 있는 왜관 성당에서 판공성사를 도와주고 왔습니다. 고해성사를 주는 사제는 힘들지만,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무거운 짐을 벗어놓고 기쁘게 돌아갔습니다. 마음이 참 쁘듯합니다. 하느님의 품은 그만큼 넓습니다. 우리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짐의 무게는 정말 무겁습니다. 이 무게를 무시하면서 살 수는 있지만 계속 짊어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가면 갈수록 더 무거워지고 끝내는 무너지고 맙니다.
‘하느님은 자비이시다’는 말은 참입니다. 자비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은 당신 작품인 우리가 짐에 허덕이며 살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이 원의가 이제 사람으로 오십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사람으로 오시는 그분의 이름을 알려줍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1). 본래 히브리어로 ‘예슈아’(????????) 또는 ‘예호슈아...’(??????????)라는 흔한 유대인 이름입니다. 이것이 그리스어로 넘어와서 신약성경에서는 ‘이에수스’(?ησο?ς)라고 합니다. 그 뜻은 심오합니다.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구원입니다. 우리 어깨의 짐을 벗겨 자유롭게 살도록 하십니다. 마리아의 자유로운 순명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응답하면 우리는 또 다른 마리아가 됩니다.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의 거룩한 힘 덕분에 우리는 우리 몸으로 구원을 잉태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이의 짐을 가볍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모태에 하느님의 자비를 잉태하여 구원을 세상에 낳는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마리아처럼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려면
-김찬선신부-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칠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요 며칠, 복음에 매번 등장하는 존재가
천사 가르리엘과 성령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그제는 요셉에게,
어제는 즈카르야에게 갔다가
오늘은 마리아를 찾아가느라 사뭇 바쁩니다.
그리고 천사는 성령께서 함께 계실 것이고,
충만할 것이라는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이 천사의 약속을
믿은 사람들과 믿지 않은 사람이 갈립니다.
요셉은 묵묵히 이 말을 믿고 받아들인데 비해
마리아와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과 관련하여 몇 마디 주고받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가 의심을 한 데 비해
마리아는 이 말을 믿고 받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었기에 마리아의 문은 하느님께 활짝 열렸고,
우리도 믿을 때 우리를 활짝 열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는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는 침입자이기에 그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그에게는 감추고 보여주지 않습니다.
몇 달 전 저는 성경을 전공한 사람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성경이 아니라 어떤 일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는데
사람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이 가득 차 있어서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예 문을 닫아 걸어버리고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것은 시작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겉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성경을 공부한 사람이 어찌 이리 믿지 못하는고?
자기한테도 도움 되지 못하는 그런 공부와 지식을 뭣에 쓰나?
그러므로 엘리사벳이 자기를 방문한 마리아에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고 칭송하듯
우리도 마리아처럼 말씀을 믿어야 열 수 있고,
열어야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진정 믿음의 여인이고
주님의 말씀에 열려있는 여인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말을 천사의 말을 듣자마자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고 대답하고는
즉시 자신의 태를 열므로써
하느님의 말씀이신 주님을 잉태하십니다.
다시 얘기하지만 믿음이란 가능성을 믿는 것이고,
말씀하신 것이 헛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그리 될 거라고 믿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말씀에 자신을 개방하여
말씀의 잉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개방과 관련하여
오늘 복음에서 더 눈여겨봐야 할 것은
마리아처럼 믿을 때 우
리도 성령께 자신을 열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을 때 우리는 성령께 마음도 열고 태도 열게 되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두려움 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케 됩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성령의 정배,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라고 합니다.
풀어 얘기하면 성령의 정배가 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어머니도 되라는 겁니다.
성녀 클라라와 자매들에게
“성령의 정배가 되셨다.”고 얘기한 프란치스코는
모든 신자들에게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그리스도께 결합될 때 우리는 정배들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때 우리는 그분의 형제들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분을 모시고 다닐 때 우리는 어머니들입니다.”
성탄을 앞둔 우리도 마리아처럼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려면
주님의 말씀을 믿는 자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즈카르야처럼 주님의 말씀을 의심치 말고
성모 마리아처럼 믿으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다른 어떤 말보다 주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낳는 쏟아부음과 따름
-기경호신부-
기다림의 연속인 우리의 삶! 그리고 기다림의 절정인 대림4주! 얼마 남지 않은 '성탄'과 '새해'를 기다리며 뭔가 새로운 것, 화려한 전례와 의식 준비로 바쁜 우리에게 오늘 복음의 마리아는 참으로 청아하면서도 소중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결혼 준비와 신혼의 단꿈에 젖어 들뜬 나날을 보내고 있던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라는 천사의 말에 몹시 당황하며 혼란에 빠진다. 그러나 마리아는 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자신을 쏟아부어 '예' 하고 응답하셨다. 그 응답에는 하느님의 사랑의 씨앗이 뿌려졌고 성모님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셨다. 우리도 각자의 계획도 좋지만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1,37).
천사는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루카 1,31-32) 하고 일러준다.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예수님은 바로 우리에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리는 징표이다. 그러기에 요한 사도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1요한 4,7)라고 말한다.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 가운데 오시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의 징표이다. 사랑이신 그분은 세상에 사시면서 사랑에 대해 말씀하셨고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보여 주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주님을 이 세상에 보여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사랑'이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예' 라는 응답이 있었기에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사람이 되어 오실 수 있었다. 이로써 마리아께서는 새로운 계약의 중개자가 되셨다. 마리아의 응답으로, 못 하실 일이 없으신 분께서 가난한 모습으로 사람이 되어 오셨다. 따라서 인간은 연약하면서도 하느님의 품위를 지닌 존재임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이 놀라운 신비는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말고는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길이 없다.
마리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셨기에 거룩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 앞에서 거룩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주님의 어머니로 선택을 받았다. 그래서 옛 교부들은 "마리아는 몸으로 우리 주님을 잉태하시기 전에 마음으로 먼저 잉태하셨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이처럼 확고한 믿음 안에서 하느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며 우리 자신을 그분의 도구로 봉헌하는 삶에서 드러난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를 통해 다시 육화의 신비를 이 세상에 전하기를 원하고 계신다.
이번 성탄에는 우리 모두가 사랑의 주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아니 우리가 주님 안에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 참된 사랑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탄생하셨던 참된 사랑이신 예수님은 이제 우리가 다시 이 세상에 사랑으로 태어나기를 바라고 계신다. 다윗처럼 자신의 신앙을 위대하게 봉헌하고 마리아처럼 그분의 종으로서 온전히 내맡기는 자만이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신 당신의 거처이셨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 안에 가난하고 소외받은 이들을 위한 구유를 마련할 때 주님은 우리 안에서 다시 태어나실 것이다. 이제 나만의 아이, 우리 가문만을 일으킬 아이가 아니라 모두에게 기쁨과 도움이 되는 '하느님의 아이'를 낳고 키우도록 하자. 성모님과 같은 믿음으로 ‘쏟아부음’과 ‘따름’의 삶을 겸손하게 살아감으로써 나의 구유에 생명을 낳아 키우는 성탄을 준비하도록 하자.
-한상우신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 말씀이 나자렛 고을의 마리아에게 도달합니다.
다가갈 수 없는 거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모든 것을 말씀의 눈으로 바라보는 은총의 시간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는 더더욱 우리를 구원해 줄 말씀에 힘입어 말씀을 따라가는 시간들입니다.
하느님 말씀이 가능성을 위한 뼈와 살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안에서 가능성을 만납니다.
가능성을 믿고 걸어낼 수 있는 힘또한 하느님께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하느님 말씀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의 아름다운 몫이며 아름다운 생명의 향기가 되어줍니다.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일지라도 말씀은 믿음을 빚어냅니다.
하느님 말씀으로 우리 인생을 되돌아보는 치유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삶의 단계 단계마다 말씀은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말씀은 피상적이지 않습니다.
말씀을 믿고 받아들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치유라는 탄생이 있겠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서공석신부-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제자들의 제자들이 중심이 된 신앙 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들이 믿고 있던 바를 첨가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가브리엘 천사와 마리아의 대화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은 실제 대화를 녹취하여 기록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초기 신앙 공동체의 믿음이 반영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구약성서 구절들을 짜깁기하여, 이 이야기를 만들었고, 역사 안에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초기교회가 믿었던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듣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거론된 가브리엘 천사는 유대교 묵시문학 저서 중 하나인 다니엘서(8,18)에 언급된,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천사입니다. 그 천사는 마리아에게 ‘기뻐하여라.’라고 인사합니다. 그 인사는 구약성서의 예언자 스바니야가 예루살렘을 향해 한 말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니 기뻐하라(3,14)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 안에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에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라는 호칭은 사무엘서(1사무 1,17-18)의 엘리가 장차 사무엘의 어머니가 될 한나에게 한 말입니다. 한나는 수태치 못하는 여인입니다. 어느 날 엘리가 그에게 하느님의 은총으로 수태할 것이라고 예고하면서 ‘은총이 가득한 이’라고 불렀습니다. 루가복음서는 마리아의 수태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된 일이라고 말하기 위해 가브리엘 천사가 이 인사를 하게 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묻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천사는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신다.’고 답합니다. 이 말은 성령이 내려 오셔서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창세기(1,2)에서 가져 왔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세상이 창조되었듯이, 성령이 새로운 생명 하나를 마리아 안에 창조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새로운 생명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에 대한 말이 있습니다. 수태치 못하는 여인이던 엘리사벳이 수태한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말과 더불어 천사의 말은 끝났습니다. 창세기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수태치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늙은 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온 천사가 일 년 후에는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하자, 사라가 그것을 엿듣고, ‘다 늙은 몸으로 어떻게 아기를 낳으라고 하면서 웃었습니다.’(창세 18,14). 그때 천사는 ‘하느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 탄생 예고 이야기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이사악의 어머니 사라 그리고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이 세 여인을 상기시키는 말로 꾸며져 있습니다. 한나와 사라는 구약성서가 언급하는 수태치 못하는 여인이고, 엘리사벳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수태치 못하는 여인입니다. 이 세 여인들에게 공통된 것은 수태치 못하는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생산력이 없는 여인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로 수태하여, 이스라엘과 그리스도 신앙 역사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인물들을 출산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마리아가 처녀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수태치 못하는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는 인류의 생산력이 탄생시킨 인물이 아니라, 인간의 힘이 불가능한 곳에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신, 구원의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마리아가 처녀라는 말을 생리학적 의미로 알아듣지 말아야 합니다. 성서는 생리학 교과서가 아니고, 신앙의 문서입니다. 마리아가 처녀라는 말은 독신으로 사는 것이 좋다거나, 하느님이 처녀를 더 좋아하신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예수라는 구원의 인물은 구약성서의 이사악, 사무엘, 혹은 세례자 요한과 같이 인류역사가 생산하지 못하는 곳에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신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을 사실 보도로 보고, 처녀인 마리아가 기적적으로 잉태하였다고 말하면, 예수는 신화(神話)적 인물이 되고 맙니다. 인류 역사에는 영웅 탄생 신화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개국 신화에도 기적적 탄생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단군(檀君)을 비롯해서,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과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모두 기적적 탄생 신화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인류가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는 곳에 하느님이 특별히 창조하여 베푸신 구원의 생명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인류는 강하고 풍요로운 것을 지향합니다. 가난하고 허약한 생명은 우리의 눈에 실패작으로 보입니다. 하느님도 우리가 강하고 풍요로울 때,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인류역사는 상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알려주신 하느님은 달랐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의 자비와 보살핌을 배워 실천할 때,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의 자비와 보살핌은 우리가 전혀 모르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또 사랑하는 사람에게 극히 제한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비와 보살핌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자비와 보살핌을 널리 실천하다가 예수님은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초기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의 생명이 하느님의 것이었다고 말하기 위해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를 처녀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생산력의 산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령이 마리아에게 내려오신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은 하느님이 새롭게 창조하신 생명이라고 신앙 고백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살아서 보여준 자비와 보살핌 안에 하느님의 일을 읽어낸 초기 신앙인들이 그들이 믿고 있던 바를 구약성서의 언어를 빌려 만든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초자연과 기적을 바라며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인류역사 안에 발생하는 자비와 보살핌의 실천들 안에 하느님의 손길을 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해마다 기념하면서 하느님이 인류역사 안에 은혜롭게 새로운 일을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깨달은 하느님의 일을 우리의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실천하며 살겠다고 각오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를 모두 행복하게 하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자비와 보살핌의 실천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그것을 하면서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김순곤신부-
통일왕국을 이루고 사방의 원수로부터 평온해진 어느 날, 다윗은 예언자 나탄에게 하느님의 성전을 지어 바치겠다는 뜻을 전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그와 달랐습 니다. :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이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을 어디에 모 셔야 하는지 그래서 하느님을 어디서 만날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을 하게 합니다.
그곳은 ‘너와 나의 삶의 자리’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 ‘나는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하였다.’(2사무 7,9 참조)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우리가 돌로 된 성전(건물) 안에서만 하느님 을 찾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성전 밖에서사람들을, 특히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만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전 안에서’ 십자가에 입을 맞추기 위해 까치발을 디딜 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보게 친구, 자네는 내 발에 입 맞추기 위해 나를 밟고 있다네!” 말하자면 우리가 이웃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외면한채 성전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곳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살아 있는 돌(사람)’로 이루어진 성전(삶의 현장)입니다. 물론 이 말은 감실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과 성당 안에서의 신심활동의 불필 요성을 말하는 것은 아닐 터이지요.
복음에서 천사 가브리엘은 성모님에게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 임마누엘 하느님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인간의 삶의 자리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자리임을 확증해주시는 것이지요(마태 1,23 참조).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 가운데, 특히 가난한 이들 가운데 탄생하시고 머무르십니다.
성탄을 목전에 둔 우리가 깊이 성찰하고 새겨야 할 대목인줄로 믿습니다. 아멘!
당신이 하는 말이 당신의 운명을 결정한다
-박영식신부-
우리는 결혼을 할 때, 우정을 맺을 때, 취직을 할 때, 성품성사를 받거나 종신서원을 할 때, 등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하느님이나 사람들과 ‘예’라고 약속하며 살아간다.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결단을 뜻하는 ‘예’라는 말 대신에 ‘아니오’라는 말을 듣거나 이 말을 되풀이하는 사람의 생명은 고갈되고 사라지고 만다. 부부는 서로 ‘예’라고 하면서 맺은 결합을 통해 아기라는 새 생명체를 낳는다. 부모가 아기의 존재를 인정했기에 아기가 이 세상에 올 수 있게 된다. 이처럼 태어난 아기가 부모와 많은 사람들에게 ‘예’라는 인정을 받아야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다. 만일 부모가 처음에는 ‘예’라고 했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아 ‘아니오’라고 했다면 그 아기는 아예 빛을 보지 못했거나 일찍 이 세상을 떠나 가버렸을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고자 하셨을 때 마리아가 내린 믿음의 결단인 ‘예’가 필요했다.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계획에 순종하도록 마리아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다. 그분은 마리아의 결단을 통해 마리아의 모태에 잉태되고 전 인류가 죄와 영원한 죽음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해주셨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이 성령의 힘으로 거처하시는 신전이 되었다.
우리는 마리아의 믿음을 본받아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 마음과 가정과 공동체와 사회에 모셔야 하겠다. 세례 때 하느님께 말씀드린 ‘예’라는 믿음의 결심을 날마다 영성체 때나 성경을 읽을 때 되풀이하자. 어떠한 시련이나 세속의 유혹 앞에서도 결코 ‘아니오’라고 하지 않으려고 애써야 하겠다. 믿음은 하느님께 다 자란 나무를 선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작은 씨앗을 하나 받아 평생을 두고 큰 나무로 키우는 것과 같다. 성모님의 모태에 잉태되신 예수님은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세례를 받는 이들 마음속에 잉태되신다.
“그러나 사는 이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살고 계시는 분은 오히려 그리스도이십니다.”(갈라 2,20).
우리는 자신이 작아지고 그분이 커지시게 하여 그분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셔야 하겠다.
하느님께 ‘예’라고 응답하는 사람은 이웃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끝까지 사랑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이웃이 원하는 곳에, 이웃이 원하는 모습으로 있어준다. ‘예’를 많이 말하는 사람은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인 반면, ‘아니오’ 하는 사람은 능력이 한정된 사람이다. ‘예’라고 하는 마음은 모든 일을 밝게 만들어내는 반면, ‘아니오’하는 사람은 모든 일을 어둡게 한다. 말은 그대로 된다. 우리 입에서 부정적인 말이 나오면 모든 상황이 부정적으로 되고, 긍정적인 말이 나오면 상황이 긍정적으로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해야 하겠다. 이처럼 인생과 세상일을 긍정적으로 보는 데 습관이 된 사람은 낙관적 성격을 가지고 인생을 밝게 기쁘게 산다. 이러한 삶이 곧 구원 받은 삶이다.
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성격이 되고,
행복은 성격에 달려 있고,
성격이 운명이 되어,
당신의 삶을 결정짓는다.
마리아의 순종과 성탄 - 이기양 신부- 임종을 앞둔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식들을 불러 앉히고 부인에게 루카복음 15장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눈을 감고 깊은 명상에 잠긴 채 이 말씀을 들은 다음, 자녀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기고 하느님께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얘들아, 방금 들은 것을 절대로 잊지 마라. 하느님을 무조건 신뢰하여라. 그분의 자비를 결코 의심하지 마라. 나는 너희를 사랑하지만, 내 사랑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하느님 중심으로 살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자식들에게 자기의 재산이나 무덤 관리에 대해서 유언을 했을 터이지만 일생을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에 대한 소설을 썼던 그였기에 하느님을 가장 귀중한 유산으로 자녀들 가슴에 깊이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탄을 앞두고 일생을 하느님 안에서 사셨던 성모 마리아를 만납니다. 어느 날 문득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인사를 드리며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1)는 말씀을 전달 합니다. 깜짝 놀란 마리아가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하고 반문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루카 1,35-37) 고 알리자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며 주님의 뜻을 받아들였고, 인류를 구원 할 메시아를 이 세상에 낳으셨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욕망을 좇았다가 힘든 인생살이와 죽음을 벌로 받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이 이 세상에 죽음과 저주를 가져왔다면 성모 마리아의 순종은 구세주 탄생으로 이어져 이 세상에 축복과 구원을 가져다줬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은 축복과 구원이지만 자기 욕망을 따르는 삶의 결과는 죽음과 저주라는 것을 명확하게 말해줍니다. 이것은 비단 아담과 하와 시대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똑같다는 것을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이스라엘 첫 번째 임금 사울입니다.
사울은 하느님의 큰 은총 속에 이스라엘 첫 번째 임금으로 뽑혀 영광의 자리에 올랐지만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못하고 결국 자기 욕망을 좇다가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과거 성경 시대 인물들에게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에도 똑같이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마치 아담과 하와 시대를 방불케 합니다. 하느님을 떠나 스스로 서보려고 자기를 믿고 욕망을 추구하다가 죽음의 길로 떨어졌고, 노예 같은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아담과 하와의 어리석은 모습들이 지금도 곳곳에서 드러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죽음 문화를 상생 문화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오늘 성모 마리아께서 보여주셨습니다. 내 지식과 경험을 떠나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 생명과 축복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많은 환자들의 소망을 들어주셨습니다. 소경이 눈뜨기를 청하면 볼 수 있게 해주셨고, 나병 환자가 고쳐주시기를 청하면 손으로 만져서 치유해 주셨지요. 예수님은 죄를 짓고 죽음에 처한 여인을 용서해 주셨고, 세 번씩이나 당신을 배반했던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품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청하는 사람을 결코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삶의 중심을 하느님 말씀에 두고 현실 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삶이라는 것을 생활에서 체험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