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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9. 묵상글 ( 2024년 12월 19일. - 즈카르야를 반면교사 삼아. 등 )
* 이수철 신부님: 아직 / 04:55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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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9. 2024년 12월 19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2.19 03:28
- 즈카르야를 반면교사 삼아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고,
그 가운데서도 즈카르야가 더 중심에 있습니다.
천사의 말을 믿지 않은 사람이 즈카르야였기 때문입니다.
판관기 삼손의 탄생 경위에 천사의 말을 들은 것은
아버지 마노아가 아니라 그의 아내였는데
세례자 요한의 탄생 경위에는 즈카르야가
천사의 말을 들었고 그러나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쩌자고 믿지 않았을까요?
청원이 받아들여졌다고 천사가 말하는 것을 보면
자기가 청원한 것이 받아들여졌는데 어쩌자고 믿지 않았을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믿지 않은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젊었을 때 그 말을 들었으면 그 말에 너무 기뻐했을 것이고 즉시 믿었을 텐데
너무 늙었고 세월이 너무 많이 흐른 뒤에 들었기에 얼떨떨해서 그랬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하느님은 참 고약한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의 타이밍에 맞추지 않는 분이십니다.
즈카르야가 아기를 주십사고 젊을 때 청할 때는 주지 않으시다가
다 늙어 포기했을 때 주시니 이것은 무슨 심보입니까?
인간 욕심의 타이밍이 아니라 인간구원의 타이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굳게 믿듯이 시간의 주인은 언제나 하느님이실 뿐 아니라
특히 구원의 시간은 하느님께서 주인이시고
그중에서도 인류 구원의 시간은 더더욱 하느님께서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내 욕심을 받아들여 주시기를 청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구원해주시기를 우리는 청해야 할 것이고,
그때를 하느님께 맞추는 것을 즈카르야를 보고
다시 말해서 즈카르야를 반면교사 삼아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즈카르야를 반면교사 삼을 일이 또 있습니다.
침묵입니다.
즈카르야는 뚫린 입으로 불신을 토로했고,
그 결과 침묵을 당했습니다.
이것을 보고서 우리는 불신의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아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말에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는 하느님께 대해서든 인간에 대해서든 불신의 말은 침묵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침묵이 숙성되어 입을 열어야 할 때가 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입은 열려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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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9. 2024년 12월 19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상대의 이야기를 자신의 스토리로 바꾸는 식의 대화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즘 몸이 안 좋은데?”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나도 안 좋아.”라고 말합니다. “새 옷 하나 사야겠는데?”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나도 사야 하는데….”라고 받아칩니다.
몸이 안 좋다는 친구에게 “너만 힘든 게 아니야. 나도 안 좋아.”라고 말한다면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나의 아픔에 조금도 공감하지 못하는 모습에 실망하게 되고, 나의 아픔을 별것 아닌 것처럼 말하는 것에서 서운함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때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어디가 안 좋아?”라고 물으면서 그의 아픈 마음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갈 수 있어야 했습니다. 사실 상대의 말과 행동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상대가 자기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했는가는 전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이 기분에 맞춰서 말과 행동을 유추해서 조작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굳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그보다 상대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하는가에 집중하면 아주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듣다’를 뜻하는 영어 ‘hear’와 같은 발음을 가진 ‘here’는 ‘여기’라는 뜻입니다. 이를 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의 말을 듣고 공감하려면 여기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들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지 않으면 제대로 들을 수 없습니다. 또한 여기에 있으면서 상대방이 아닌 나에게만 집중되어 있다면, 진짜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상대에게 좋은 기분을 전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천사가 사제인 즈카르야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대해 말해주지요. 하느님의 뜻이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전해준 것입니다. 하지만 즈카르야는 천사에게 어떤 말을 합니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
자기만을 바라보는 부족한 믿음은 ‘여기서’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듣지 않으니,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에 부족한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벙어리가 되어 말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만을 바라보면서 말하지 말고, 침묵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의미입니다. 이제는 자기 뜻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과연 주님께 어떤 기분을 전달할 것 같습니까? 주님 뜻에 맞춰있다면 주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뜻에만 맞춰있다면 주님께서는 내게 크게 실망하고 서운해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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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생은 끊임없이 배우고,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안주하지도, 안일하지도 않으면서 늘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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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9. 2024년 12월 19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어제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 대한 말씀을 들었고,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에 대한 말씀을 듣습니다. 곧 어제는 “의로운 사람”(마태 1,19) 요셉의 이야기였고, 오늘은 “하느님 앞에 의로운 이들”(루카 1,6)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이야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예고는 구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고 너무 늙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서 거룩한 인물이 태어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사실, 성경에는 여러 거룩한 여인들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창세 11,30), 이사악의 아내 레베카(창세 25,21), 야곱의 아내 라헬(창세 29,31),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1사무 1,2), 그리고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삼손의 어머니인 마노아의 아내(판관 13,2), 그리고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루카 1,7)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거룩한 인물들을 낳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간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장소와 시간은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곧 세례자 요한의 잉태 예고 장소인 성전의 ‘성소’와 예수님 잉태 예고 장소인 ‘나자렛’은 두 제단 곧 두 계약을, 그리고 옛 계약에 따라 ‘제사를 드리는 시간’에 벌어진 이 일은 구약 시대와 신약을 연결해줍니다. 따라서 요한의 출현은 옛 계약의 율법과 사제직이 끝났음을 알려줍니다. 이는 경계가 무너지는 일입니다. 벽이 무너지고 막힌 것이 사라집니다. 이는 우리를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사실, 요한은 불임인 늙은 여인에게서 태어나고, 그리스도는 동정인 젊은 여인에게서 태어납니다. 여기에는 어떤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막시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구약의 인물인 요한은 늙은 여인의 식어버린 피에서 태어나야 했고, 장차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주님은 꽃처럼 피어나는 처녀의 몸에서 피어나셔야 했던 것입니다.~그리고 즈카르야는 의심했기 때문에 목소리를 잃었고, 마리아는 곧바로 믿었기에 세상을 구하는 ‘말씀’을 잉태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아기의 잉태를 알려주면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줍니다. ‘요한’이란 이름은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다’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명이 주어집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7)
이처럼, ‘요한의 사명’은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을 드러냅니다. 곧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일’(루카 1,17)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의 사명을 되새겨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안에 혹은 우리가 만나는 이 안에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탄생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미 자비를 입었으니, 기뻐하며 자비를 선포하고 베푸는 일입니다.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 1,24)
주님!
당신께서는 저의 무능과 허약 안에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피하고 도망쳐도 보물을 찾듯 찾아오시고,
거부하고 배신해도 목숨처럼 아끼시며 끝까지 버리지 않으십니다.
주님, 지금 지체치 마시고, 당신의 일을 완수하소서.
제가 응답하게 하시고, 당신의 자비를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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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9. 2024년 12월 19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구름만 많고 비는 내리지 않는다
즈카르야와 엘리자벳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계명과 규율을 어김없이 지키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어쩌다가 성전에서 봉사할 기회를 갖곤 하였습니다. 마침 즈카르야가 제비에 뽑혀 성전에 들어가 분향을 드리고 밖에서는 온 백성의 무리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주님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분향제단 오른쪽에 섰습니다. 즈카르야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루카1,13-14).
그러나 즈카르야는 하느님께 기도하면서도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아기가 받게 될 이름, 요한은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천사의 말을 의심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눈에 보이는 표징을 구했습니다. 결국, 즈카르야는 이 불신 때문에 천사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질 때까지 벙어리가 되어,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된 것이 곧 하느님께서 개입하셨다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즈카리야의 의심, 그리고 유다인들이 표징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구원의 다가옴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불신 따위에 구애받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조건 없이 그리고 끝없이 쏟아지는 하느님의 은총을 말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만 담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으면 담지 못할 뿐입니다.
하느님 은총의 역사에는 인간의 자발적인 협력이 꼭 필요합니다. 인간은 이미 자유의지를 선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시는 구원이나 멸망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의심함으로써 은총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니, 그 자체가 멸망이 되고 믿는 이들에게는 구원의 근원이 됩니다. 사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요한20,29).
즈카르야는 벙어리가 되어, 한 주간의 사제 직무를 끝내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꼭 지키시는 분이라는 확실한 표징을 간직한 채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는 말을 하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게 되었고 그가 고백합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1,25).
즈카르야에게 말씀을 꼭 지키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주신 분, 엘리사벳에게 주님께서 굽어보셨다는 믿음과 감사를 고백하게 하신 분, 그분께서 우리에게도 구원을 약속해 주시고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혹 ‘밀운불우’(=하늘에 구름만 빽빽하게 끼어 있을 뿐 비가 되어 내리지 못하는 상태, 여건이 조성되어 징조는 나타나지만 일이 성사되지 않아 답답하고 불만이 폭발할 것 같은 상황을 비유한 말입니다)일지라도 실망하지 말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은총의 비를 기다려야겠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은총의 때를 놓치지 않도록 깨어 있는 오늘이길 바랍니다. 혹 무엇을 움켜쥐려고 애쓰는 모습이 있다면 내려놓고 비워내는 가운데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 당신의 길을 제게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제게 가르쳐 주소서. 당신의 진리 위를 걷게 하시고 저를 가르치소서. 당신께서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니 날마다 당신께 바랍니다”(시편25,4-5).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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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9. 2024년 12월 19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구역장 회의 때입니다. 복음 나누기할 때 수녀님이 ‘스스로 조심하여’라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수녀님이 한국에 갔을 때입니다. 수도복을 입었는데도 ‘아줌마’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수녀님은 기분이 나빴지만 생각해 보니 아줌마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아줌마라는 말은 ‘아이 주머니’의 준말이라고 합니다. 수녀님은 예비자 교리를 통해서, 성경 공부를 통해서 많은 이들의 영적인 엄마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스스로 조심하여’라는 말을 묵상하면 부정적인 생각이 많았다고 합니다. 2024년을 지내면서 ‘스스로 조심하여’ 좋은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30일 피정을 다녀왔고, 성지순례도 다녀왔다고 합니다. 스스로 조심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저도 ‘스스로 조심하여’라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본당 사제는 파수꾼과 같고, 등대지기와 같고, 배의 선장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파수꾼은 밖에서 오는 위험으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는 사람입니다. 등대지기는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배를 보호하는 사람입니다. 배의 선장은 배가 안전하게 항구에 도착할 수 있도록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2025년 저는 파수꾼의 마음으로, 등대지기의 마음으로, 선장의 마음으로 스스로 조심하여 지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에서 우리는 삼손과 세례자 요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두 인물의 탄생에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계획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삼손과 세례자 요한 모두 불임의 가정에서 태어난 특별한 인물로, 그들의 탄생은 하느님의 개입과 섭리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두 인물의 탄생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 하느님이 어떤 계획을 이루어 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삼손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선택된 나지르인입니다. 그의 부모에게 천사가 나타나 아들을 나지르인으로 키우라고 명령한 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삼손의 생애는 인간적인 약점과 실패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지 못할 때의 한계를 상기시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선택된 인물입니다. 그의 어머니 엘리사벳 역시 불임 상태였으나, 천사가 찾아와 요한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요한은 삼손과 마찬가지로 나지르인으로서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위해 봉헌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삼손과 달리 자신의 사명을 철저히 수행하며 겸손과 순종으로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삼손은 육체적 구원의 상징이지만, 세례자 요한은 영적 구원의 준비자로서 사명을 완수합니다. 삼손은 자신의 약점 탓에 실패했으나, 요한은 끝까지 겸손과 헌신으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삼손의 구원은 임시적이고 제한적이었지만, 요한의 역할은 예수님의 구원을 영원히 준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삼손과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신뢰하고,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삼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인간적 약점을 인정하며,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 겸손과 순종으로 하느님께 헌신하는 삶의 중요성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약함과 한계를 넘어 자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고, 겸손과 순종으로 그 길을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목적은 세상의 명예와 세상의 성공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길은 바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초는 자신을 태울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듯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를 태워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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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9. 2024년 12월 19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즈카르야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미 늙은 나이의 자신과 그 못지않게 나이 들어버린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기쁜 일이면서 동시에 많은 걱정을 가져올 일이기 때문입니다.
TV나 라디오를 켜면 우리나라 출산율을 걱정하는 뉴스나 광고들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왜 낳지 않을까요? 낳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낳고 난 후가 문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즈카르야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요? 자기 자녀가 잘되는 것을 보는 것이 부모의 소망입니다. 자녀의 자녀를 보는 것도 부모에게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나이가 많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어린 자녀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나야 할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인간적입니다. 그렇게 인간적인 고민과 걱정으로 묻습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기도는 받아들여졌고 요한의 탄생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 계획 안에 있었습니다. 기도는 받아들여졌지만, 사용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아들이 평범한 사람이 되길 바랐을지 모르지만, 그는 하느님의 소리로 사용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세요. 인간적인 생각과 마음도 우리 기도 안에 들어있겠지만 하느님은 그것을 뛰어넘는 계획을 세우고 계십니다.
요한을 하느님 계획 안에서 사용하셨듯이 우리도 하느님 계획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전하며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세우신 계획입니다.
⭐새우만두
어느날 미사 후 자매님 한 분이 만두를 주셨습니다.
아직 식지 않은 뜨끈한 만두였습니다.
삼각형 모양에 만두소는 새우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모양도 신기하고 맛도 신기했습니다.
특히 새우 꼬리가 살짝 드러나 있는 것이 입맛을 더 자극했습니다.
만약 꼬리가 밖에 나와 있지 않았다면, 숨겨져 있었더라면 새우만두의 매력은 덜했을 것입니다.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점심 전 만두를 해치워버렸습니다.
추운 겨울입니다.
김모락 호빵
뜨끈한 어묵꼬치
따끈한 각양각색의 만두….
특히 지금 즐길 수 있는 계절의 맛템들입니다.
맛있게 드시고 든든한 겨울 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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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9. 2024년 12월 19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를 찾아 오시는 하느님
“희망하라, 기뻐하라, 사랑하라”
“오 옛세의 뿌리여 만민의 표징이 되셨나이다.
주앞에 임금들이 잠잠하고
백성들은 간구하오리니
더디 마옵시고 어서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대림 제2부, 세 번째 12월19일 저녁성무일도시 마리아의 노래 ‘오후렴’이자 오늘 복음 환호송입니다. 12월17일부터 12월23일까지 계속될 ‘오후렴’에 반드시 들어있는 ‘오시어’ 라는 말마디입니다. 어서 빨리 오시오 우리를 구원해달라는 참 애절한 기도입니다.
새삼 대림시기뿐 아니라 우리의 평생이 오시는 주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대림의 나날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만 있는게 아니라 사람을 찾는 하느님도 있습니다. 우리 사람을 찾아 오시는 겸손한 사랑의 하느님! 이것이 진짜 복음입니다. 아주 예전 작품이지만 여전히 애송하는 하늘이란 시입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요즘 어지러운 현실을 보며 어린왕자에 나오는 바오밥나무를 생각합니다. 서로 미워하고 배척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완전히 심리적 내전상태입니다. 나라나 사회나 개인이나 악을 상징하는 바오밥나무들이 너무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일부 내용입니다.
“어린왕자의 별에는 무서운 씨앗들이 있었는데...바로 바오밥나무의 씨앗이었다. 그 별의 땅은 바오밥나무 씨앗투성이였다. 그런데 바오밥나무는 손을 너무 늦게 쓰면 영영 없앨 수가 없게 된다. 바오밥나무가 별을 온통 차지하고는 뿌리를 내리면서 별에 구멍을 뚫는 것이다. 그래서 별은 작은데 바오밥나무가 너무 많으면서 별이 산산조각 나고 마는 것이다.”
흡사 바오밥나무들 천지같은 지구별 세상같습니다. 사람도 흡사 바오밥나무 같습니다. 나라도 사회도 가정도 내 마음도 바오밥나무들이 깊이 뿌리고 있는 듯 보입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가라지보다 참 두렵고 무서운 것이 세상의, 내 안의 악의 바오밥나무들입니다.
영적전쟁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부단히 평생 바오밥나무를 뽑아내거나 크게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 바로 영적전쟁의 핵심입니다. 바로 대림시기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치열한 우리 삶의 준비와 덕의 실천으로 내적 악의 바오밥나무를 제어해야 합니다. 바로 그 모범이 복음의 자카리아 엘리사벳 부부요 판관기의 마노아 부부입니다.
첫째, “희망하라!”입니다.
희망의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희망의 순례자들입니다. 절망이 대죄입니다. 단테의 신곡 지옥문 입구에는 “여기 들어오는 그대, 희망을 버려라” 글자가 쓰여져 있다합니다. 희망이 없는 절망의 거기가 지옥입니다. 절망이 바로 나를 파괴하는 바오밥나무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악은 우리를 소외시키고, 우리의 꿈을 소멸시키고, 우리를 외롭게 하고, 우리를 좌절케 한다.” 바로 절망이 악의 실체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아이를 갖지 못한 노년의 자카리아, 엘리사벳 부부나, 마노아 부부는 결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을 찾고 기다렸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을 갈망하고 열망하며 끝까지 견뎌내고 버텨내며, 기다리고 인내했음이 분명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때가 되니 하느님은 당신 천사를 통해 두 부부를 찾아 오셔서 아이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마노아 부부의 아들은 삼손이요, 자카리아 엘리사벳 부부의 아들은 세례자 요한입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의 선물이요 각자 사명이 주어집니다. 우리 역시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신의 한수같이 각자 고유의 사명이 주어진 인생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기뻐하라!”입니다.
기쁨의 하느님입니다. 희망의 기쁨이요 희망과 기쁨은 함께 갑니다. 희망의 주님에게서 샘솟는,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기쁨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기쁨이요, 이 기쁨이야 말로 참영성의 표지입니다. 이 희망의 기쁨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거둬냅니다.
참으로 희망과 기쁨보다 더 좋은 명약도 없습니다. 절망이란 악의 바오밥나무가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는 희망의 기쁨입니다. 제 분명한 추측은 마노아 부부, 자카리아 부부, 아이는 없었지만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기쁘게 살았을 것입니다.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하여 우울하게 슬퍼하며 어둡게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여자는 아들을 낳고, 이름을 삼손이라 불렀다. 아이는 자라나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
삼손은 태양을 뜻하는 히브리말에서 나온 이름이니 태양과 같은 아들을 두었으니 마노아 부부의 기쁨은 더욱 컸을 것입니다.
자카리아의 아내 엘리사벳은 잉태후 다섯달 동안 숨어지내며 고백합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 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
감사와 기쁨이 가득한 엘리사벳의 고백입니다.
참으로 마노아 부부나 자카리아 부부, 모두가 절망스런 환경중에도 한결같이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기쁘게 감사하며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셋째, “사랑하라!”입니다.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행이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의 수행입니다. 마노아 부부의 행적에 사랑이야기는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사이좋은 부부의 모습을 통해 감지되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고 사랑하며 갈망했기에 주님의 천사도 친히 그 부부를 찾아 오셨습니다.
참으로 간절한 사랑으로 하느님을 찾을 때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입니다. 주님을 찾는 갈망이 없으면 주님은 우리를 찾아 오시지도 않고, 주님이 찾아 오셔도 우리는 주님을 알아 보지 못합니다. 즈카르야 엘리사벳 부부가 얼마나 하느님 믿음과 사랑에 충실하고 한결같았는지는 다음 대목이 입증합니다.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어제 나름대로 다짐하며 실행하기로 한 내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적게 먹고, 적게 말하고, 적게 쓰고”에 이어, “많이 기도하고, 많이 공부하고,
많이 나누고”, 셋의 ‘적게’에 셋의 ‘많이’ 또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아 오시는 은총의 대림시기입니다. 아니 평생 날마다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찾는 갈망이, 열망이, 그리움이 있어야 주님도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참 좋은 삶이 희망과 기쁨, 사랑의 삶이요 악의 바오밥나무의 성장을 막는 최고의 처방입니다. 날마다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희망의 사람, 기쁨의 사람, 사랑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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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9. 2024년 12월 19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지 않으면 못한답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루카 1,20)
빛이
스민 벗이여
오롯이 빛나세요
빛나지 않으면
빛나지 못한답니다
믿음이
키운 벗이여
오롯이 믿으세요
믿지 않으면
믿지 못한답니다
진실이
밝힌 벗이여
오롯이 진실하세요
진실하지 않으면
진실하지 못한답니다
기쁨이
돋운 벗이여
오롯이 기뻐하세요
기뻐하지 않으면
기뻐하지 못한답니다
희망이
이끈 벗이여
오롯이 희망하세요
희망하지 않으면
희망하지 못한답니다
사랑이
품은 벗이여
오롯이 사랑하세요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못한답니다
살림이
살린 벗이여
오롯이 살리세요
살리지 않으면
살리지 못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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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9. 2024년 12월 19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로서 즈카르야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으로서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다 나이가 많았다.(루카 1,5-7)
예언자로 태어나 진리를 위하여 죽다
저는 그[세례자 요한]가 놀라운 방식으로 태어난 사실과 놀라운 방식으로 살해당한 사실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중요한 일로 설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예언자로 태어나 진리를 위하여 죽었기 때문이지요. 그는 태어나면서 구원자의 오심을 예고하였고, 죽음으로 헤로데의 근친혼을 단죄하였습니다(마태 14,3-12 참조). 하느님께서는 약속에 따라 비상한 방식으로 태어난 이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이 비상한 죽음으로 세상을 떠나도록 운명을 정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을 고백함으로써, 하느님께 선물로 받은 자기 몸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즉 요한의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에 의한 것이었지요. 그의 출생과 죽음은 오직 하느님의 일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토리노의 막시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이와 관련하여 내가 여러분에게 제시한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다.” 이 구절을 외부 세계와 연관지어, 그가 우리와 함께 먹고 마셨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은 영적인 세계와 연관지어 이해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실로 자신의 단일한 본성 속에서 아들을 낳으십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영의 가장 영적인 자리에서 아들을 낳으십니다. 가장 영적인 곳이 바로 영적인 세계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터는 나의 터가 되고, 나의 터는 하느님의 터가 됩니다. 이 터를 잠시라도 엿본 사람이라면 일천 냥의 금화를 한 잎의 가짜 동전을 대하듯 할 것입니다. 이 가장 영적인 터에서 여러분의 모든 것을 아무 이유 없이 행하십시오. 여러분이 천국을 위해서, 혹은 하느님을 위해서,혹은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서 행동한다면, 여러분은 스스로를 위해서 제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최선의 방책인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난롯가나 마구간에서 일하는 것보다 영성 · 종교적 헌신, 감미로운 황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에 의해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마치 하느님을 붙잡아, 그분의 머리에 두터운 외투를 덮어씌우고, 긴 의자 밑으로 밀어 넣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한정된 방법으로 찾는 사람은 그 방법을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그 방법 속에 숨어 계신 하느님은 놓치고 말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방법도 동원하지 않고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라야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붙잡습니다. 어떤 사람이 천 년을 살면서 삶에게 “왜 사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면, 유일한 대답은 “나는 살기 위해서 산다’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삶은 자신의 터에서 살고, 스스로에게서 솟구치기 때문입니다. 삶이 이유없이 사는 것은 스스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스스로의 터에서 행동하는 사람에게 “왜 당신은 행동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리고 그가 이 물음에 제대로 대답한다면, 그 대답은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나는 행동하기 위해 행동한다."(299)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성체의 예수님과 함께 희생이 되다
“왜 히야는 순종하지 않니? 그 우유를 마시면 아주 좋은 희생을 하는 건데 ...... 엄마가 저렇게 슬퍼하시지 않니?"
“그래! 난 그렇게까지는 생각 못 했어."
완전히 감동된 소녀는 어머니를 불러 사과한 다음 어머니가 권하는 것은 무엇이든 먹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다시 가져 온 우유를 싫은 내색을 조금도 하지 않고 다 마셨다. 그리고 루치아에게 말했다.
“그것을 억지로 마시기 위해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를 네가 안다면! "
이때부터 언제든지 권하는 것은 우유건 스프건 무엇이든지 받아 먹었다.
“이런 것을 먹기는 너무 어려워. 그래도 아무 말 없이 먹어.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기뻐하시도록."
어머니는 히야친따가 우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랑하는 딸의 회복을 바라는 일념에서 영양만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느 날, 같은 우유잔과 함께 쟁반에 먹음직한 탐스런 포도송이를 담아 가지고 왔다.
“히야야, 우유가 당기지 않거든 이 포도라도 좀 먹어라."
“엄마, 고마워요. 우유 마시겠어요. 포도는 필요 없으니 도로 가져 가세요."
소녀는 가슴에 걸리는데도 애써 마셨다. 어머니는 이제 딸이 우유를 좋아하게 되었나보다 하고 생각하며 흐뭇해했다. 히야친따 곁에는 마음의 벗인 루치아가 있었다.
그녀는 루치아에게 말했다.
“그 포도 참 맛있게 보였지! 허나 예수님께 바치고 싶었던 거야."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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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9. 2024년 12월 19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주연을 맞을 조연의 탄생 예고 /
박윤식 [big-llight] 2024-12-18 ㅣNo.178584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첫 번째 사건이다. 주연이 등장하기 전, 조연의 바람잡이는 어쩌면 필수니까. 사실 복음에서 예수님의 등장은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가장 큰 기쁜 소식이다. 그러니 조연의 등장도 하느님의 지상 순례에서 필수다. 그의 역할은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자 선구자로 파견된 예언자다. 그의 탄생 예고는 주님의 성소에서 사제 직무중인 즈카르야에게 천사의 귀띔으로 시작된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요한의 부모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들 부부는 의롭게 사는 우리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가 하는 의문을 안고 살았을 게다. 날마다 기도하면서 아이를 기다리다가 결국은 늙어 아이를 낳을 수없는 나이에 이르렀다. 그런데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나이였었을 때 믿을 수없는 일, 그토록 기다린 아들을 곧 가지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 부부를 통해 이스라엘 구원의 역사를 준비하는 하느님의 계획이 드러난다. 온갖 치욕에서도 의로움을 잃지 않고 충실하게 살았던 그들 부부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즈카르야는 천사의 모습을 보자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천사의 음성은 뚜렷했다. 순간 그는 아내를 떠올렸다. 나이를 봐서라도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여자이다. 그래서 말을 더듬는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지요? 저와 제 아내는 이미 나이가 많아도 한참이나.”
이에 가브리엘 천사는 그를 질책한다. 그러고는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일러준다. 순간 즈카르야는 입안에 경련을 느끼면서 깨닫는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직감하게 된 거다. 말은 잃었지만 깨달음의 은총을 얻었다. 그 아들이 세례자 요한이다. 아버지 희생으로 탄생한 이다. 아마도 즈카르야는 이 고통을 요한을 낳을 때까지 참고 또 참았으리라.
“너도 기뻐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하리라. 그는 주님 앞에서 큰 인물로,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를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할 게다. 이렇게 그는 먼저 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온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그렇게 요한의 사명은 하느님 백성이 주님을 맞아들이는 데 필요한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천사는 ‘침묵’중에서 아들의 탄생을 기쁘게 기다리라고 일렀다.
우리네 삶에도 하느님 계획이 스며있다. 비록 우리가 지금 그 삶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내셨기에 반드시 우리 삶을 이끄시고 섭리하시리라. 중요한 건 어떤 상황과 누구의 말에도 흔들림 없이 하느님 뜻을 묵묵히 실천하며 성실히 사는 거다. 어느 날 문득 우리 삶을 돌아볼 때, 마치 수많은 시간들 안에 온통 하느님의 은총이 있었음을 깨달을 테니까.
이로써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에 관여하실 때, 마음의 준비를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벌하실 때에도 최소한의 응답을 바라시고, 은총을 내리실 때에도 준비를 바라신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는 주님을 맞는 준비에 대해 알려 준다. 바로 기도와 회개의 삶으로 돌아가는 거다. 충실히 신앙의 삶을 산 이들에게는 반드시 그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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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9. 2024년 12월 19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게 될 것이다”(루카 1,20).
하느님께서는 믿지 못하는 즈카르야를 ‘침묵’ 안에 머물게 하십니다.
침묵 속에서 그는 하느님의 신비를 깨닫게 되고,
세례자 요한의 할례식 때,
“그의 이름은 요한”(1,63)이라고 글 쓰는 판에 아기의 이름을 적으며 하느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되었기 때문에,
엘리사벳은 나이 많은 자신이 어떻게 임신하게 되었는지 알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엘리사벳이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온전히 하느님의 시선 안에 머물게 하십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이 모든 일이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신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1,24-25 참조).
‘경건한 침묵’과 ‘온전히 하느님의 시선 안에 머무름’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는 방법이며,
하느님과 대화하는 방법입니다.
믿음은 침묵과 하느님의 시선 안에 온전히 머무르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자라납니다.
생각 없이 떠들어 대는 수다, 소란스러움, 요란함, 남들의 시선을 의식함 등 이런 방법으로 믿음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성체 앞에 있는 시간은 우리를 ‘경건한 침묵’과 ‘하느님의 시선’ 안에 온전히 머물도록 초대합니다.
예수님 성탄을 준비하며 성체 앞에 머무는 시간을 자주 가지면 좋겠습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게 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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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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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9. 2024년 12월 19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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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9. 2024년 12월 19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루카 1, 14)
겨울에도
탄생이 있고
겨울 속에서도
빛은 빛으로
빛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이름이
기쁨의 빛이
됩니다.
기쁨을
만드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기쁨은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기쁨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더 추운 곳을
향하는
기쁜 탄생입니다.
저마다의
탄생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자신의
역사에서
다시 만나는
탄생의
의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아름다운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어느 이름은
치욕이고
어느 이름은
기쁨입니다.
은총 안에는
삶에 필요한
기쁨과 환희
평화가
있습니다.
탄생으로
삶을
빚어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틀림없이
이루어지는
기쁨의
의미입니다.
기쁨은
기쁨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서
기쁨으로
탄생합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이름이 빛이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삶도
기쁨의 빛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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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9. 2024년 12월 19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힘을 포기할 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엘리사벳의 외침을 통해 평생에 걸쳐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두 노인이 겪었던 고통과 수모가 얼마나 컸던 것인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 복음 1장 25절)
사실 세례자 요한의 부모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의롭고 흠없는 사람들, 성덕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즈카르야는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였고, 엘리사벳 역시 첫 대사제인 아론의 후손이었습니다.
당시 관습에 따르면 사제는 사제의 딸과 결혼해야 했었기에, 사제 즈카르야는 사제 가문의 딸 엘리사벳과 혼인한 것입니다.
또한 유다인들에게 있어 사제직은 친자식에게만 이양되었습니다.
따라서 즈카르야의 아들 세례자 요한 역시 일찌감치 하느님께 봉헌된 거룩한 사제로 점지되어 있었습니다.
즈카르야라는 이름이 지닌 뜻은 ‘하느님께서 기억해주셨다.’입니다.
엘리사벳이라는 이름이 지닌 뜻은 ‘하느님께서 맹세하셨다.’입니다.
이름에 걸맞게 두 사람은 거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도 올곧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에 충실했으며 하느님의 뜻에 절대 순명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두 사람에게 꽤나 큰 시련을 겪게 하십니다.
예상과는 달리 두 사람에게 늘그막이 되도록 자녀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지만, 하느님께서는 두 사람이 호호백발이 되도록 그냥 두셨습니다.
놀랍게도 노부부가 세상 뜰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황혼기에야 겨우 아들을 허락하셨습니다.
비록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난 후의 응답이었고, 너무 늦은 감이 드는 응답이었지만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응답에 기쁨과 감격에 찬 어조로 외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
아무리 목이 빠지게 기다려도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앞에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하느님을 크게 원망했습니다. 섭섭함도 많았습니다.
“저희가 도대체 뭘 잘못했길래?” 하는 억하심정도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하느님께 충실했습니다.
끝까지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성전에서 충실하게 봉사했습니다.
항상 기도 안에 살았습니다.
고통스러웠지만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이런 두 사람의 항구한 신앙, 충직한 종의 모습에 마침내 하느님께서 응답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힘을 포기할 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도 인간의 능력을 내려놓을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녕 하느님을 만나고 진하게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그냥’ 모든 것을 맡겨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께서 주도하시는 흐름에, 그분의 물결에 그냥 내 존재 전체를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체험의 출발점은 어디입니까? 하느님은 내 힘이 다한 곳에서 체험됩니다.
하느님은 내 존재의 비참한 곳까지 내려가 외롭게 되었을 때 비로소 체험되는 존재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며 완전히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풀이 죽을 때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는 곳에서 비로소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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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9. 2024년 12월 19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
요한의 출생에 대한 예고는 구원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느님께서는 아기를 못 낳는 엘리사벳의 몸에서 거룩한 인물이 태어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신다. 천사는 기적적인 출생과 아이의 이름에 대해 예고하기 전에 먼저 “두려워하지 마라.”(13절) 한다.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지어 준 아기 이름 요한은 주님께서 은총을 베푸신다는 뜻이다. 이 은총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은총,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하느님의 은총을 세상에 선포하러 왔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했고 하느님 은총의 기쁜 소식을 전했던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이미 은총을 선포한다. 때문에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하였다고 한다.
엘리야와 요한은 둘 다 독신이었다. 두 사람은 다 거친 옷을 입었고 광야에서 살았다. 둘 다 정의를 지키다 왕과 왕비에게 박해를 받았는데, 엘리야는 아합과 이제벨에게(1열왕 19,1-3 참조) 요한은 헤로데와 헤로디아에게 받았다(마태14,3 참조). 엘리야는 불 마차를 타고 하늘에 오름으로써(2열왕 2,11 참조) 사악한 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고, 요한은 순교를 당해 하늘나라에 들어감으로써 사악한 자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17절) 백성들을 불신에서 신앙으로 돌려놓아서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17절) 하는 역할을 하였다.
즈카르야는 자신의 나이, 백발이 된 머리카락, 힘을 잃어버린 몸을 떠올렸다. 또 아내가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는 사실도 떠올렸다. 그래서 장차 일어나리라는 천사의 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이렇게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던 즈카르야는 목소리를 잃었고, 마리아는 곧바로 믿었기 때문에 세상을 구원하시는 말씀을 잉태하실 수 있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25절) 나이 많아서 갖게 된 아들 때문에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낸 엘리사벳은 요한을 잉태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며 주님을 찬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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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9. 2024년 12월 19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자녀는 부모가 태어나기 전부터 기대한 대로 된다
오늘 복음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구세주의 선지자가 그에게서 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는 믿지 못합니다.
그것을 믿었다가 아니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창피만 당할 것입니다.
그가 평생 청해온 것이면서 믿지 못하고 청했던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냥 그렇게 되는지, 안 되는지 시간이 지나 보면 알 것을 해 보지도 않고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게 될 것이다.” 천사가 즈카르야의 입을 막아버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런 벌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말이 진실임을 믿기를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믿지 못하고 엘리사벳과 합방을 하지 않았다면 요한은 태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녀의 미래를 위해 부모의 믿음은 절대적입니다. 자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차곡차곡 자녀의 미래를 설계한 부모는 자녀의 성공을 지켜보게 됩니다.
리처드 윌리엄스는 두 딸, 비너스와 세레나 윌리엄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들을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로 키우겠다는 확고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TV에서 한 테니스 선수가 우승 상금으로 4만 달러를 받는 것을 보고, 테니스의 잠재적 기회를 깨달았습니다.
흑인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스포츠에서 찾은 것입니다.
그는 딸들이 태어나기 2년 전부터 전혀 무지했던 테니스에 관심을 가지고 78페이지에 달하는
‘챔피언 육성 계획서’를 작성하였습니다.
비디오 레슨과 도서를 통해 독학하며 딸들에게 직접 테니스를 가르쳤습니다.
특히, 그는 딸들을 벽에 세우고 빠른 속도로 공을 쳐 내며 방어 능력을 키우는 등 독특한 훈련 방법을 도입했습니다.
리처드는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은 실패를 계획하는 것과 같다.”라는 신념 아래, 딸들의 훈련뿐만 아니라 정신적 성장에도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딸들은 아버지의 지도 아래 혹독한 훈련을 견뎌냈으며, 나중에는 아버지의 헌신과 비전에 깊은 감사를 표했습니다.
세레나는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항상 우리를 믿어주셨고, 그 믿음이 오늘의 우리를 만들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미리부터 믿고 계획하여 자녀를 키우면 자녀는 성공할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중에야 테니스 재능을 깨닫고 시작한 이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준비된 이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실험을 자녀에게 한 대표적인 심리학자가 루돌프 폴가르입니다.
헝가리의 심리학자 루돌프는 “천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자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는 자녀들을 체스 천재로 만들 것이다.”라고 계획을 세웠고,
그 믿음에 따라 자녀들에게 체스를 가르쳤습니다.
첫째 수잔 폴가는 세계 4위까지 올랐고,
둘째 소피아 폴가는 여성 선수 1위,
셋째 주디트 폴가는 당시 최고의 체스 천재였던 바비 피셔를 꺾고 당당히 최연소 세계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께서 자녀에게 어떤 삶을 바라는지 깨닫고 그렇게 준비하고 키우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훌륭한 자녀를
키워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 앞에서도 큰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녀의 선택권을 박탈했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빼앗긴 자녀는 부모에게 이용당한다 느끼기에 온전한 자존감으로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만약 그런 것이었다면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의 말은 모호합니다.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는 자녀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란 믿음은 가져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만 그렇게 창조하셨을까요? 우리 모두도 세례자 요한처럼 귀한 인간입니다.
다만 부모가 그렇게 믿어주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자녀가 어디까지 성장하느냐가 달렸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렇습니다.
부모는 유대인들이 자녀가 하느님의 것임을 인정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한 목적이 있을 것이란 것은 믿어주지만, 그의 삶을 구체적으로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찾아가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보면 될 것입니다.
어머니는 어긋나는 아우구스티노를 보면서 하느님은 그런 삶을 살라고 창조한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우구스티노는 회개하고 하느님 앞에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분명 우리 자녀가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 앞에 큰 인물이 되려고 창조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삶의 방향은 본인이 찾아가도록 유도하며 믿어주고 기도해주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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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9. 2024년 12월 19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의 일’은 인간의 과학과 상식을 ‘초월’합니다.>
“즈카르야가 천사에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말하자,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한편 즈카르야를 기다리던 백성은 그가 성소 안에서 너무 지체하므로 이상하게 여겼다.
그런데 그가 밖으로 나와서 말도 하지 못하자,
사람들은 그가 성소 안에서 어떤 환시를 보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몸짓만 할 뿐 줄곧 벙어리로
지냈다.
그러다가 봉직 기간이 차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였다. 엘리사벳은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 1,18-25)”
1)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제가 무엇으로 그것에 관해 알 수 있겠습니까?”인데, 자기가 믿을 수 있도록 어떤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말입니다.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는
자기가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하는 이유를 말한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자신과 아내 엘리사벳이 너무 늙어서
아기를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도 아니고, 믿음이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그가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한 것을 잘못이라고(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을 못하게 된 것은 ‘벌’이 아닙니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라는 말은,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한 말은 모두 천사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아들이 태어나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은, “하느님 말씀은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러니 그 말씀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을 겉으로만 보면, 믿지 못한 것에 대해서 말을 못하게 되는 ‘벌’을 준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아니고, 즈카르야가 요청한 대로 ‘표징’을 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즈카르야가 갑자기 말을 못하게 된 것이 표징이 아니라, 아기가 태어난 후에 다시 말을 하게 된 것이 표징입니다.
“그 모든 일은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표징.
<그런데 왜 표징을 그런 식으로(‘말’에 관한 일로) 주었을까?
아마도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 ‘선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기의 사명이기 때문에, 표징도 ‘말’에 관한 일로 주어진 것 같습니다.
즈카르야가 사제라는 것을 생각하면, 믿음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은 사제 자격이 없다는 것을, 또 하느님 말씀을 전할 자격이 없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즈카르야는 믿음을 완전히 갖게 될 때까지 ‘사제 자격 직무 정지’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가 믿음을 완전히 가진 때는 아기가 태어났을 때입니다.
따라서 그가 아들이 태어나기를 기다린 시간은,
침묵 중에 하느님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이 아니라, 반신반의 하면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2) 즈카르야는 말을 못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듣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루카 1,62).
그러나 글을 쓸 수는 있었기 때문에(루카 1,63),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엘리사벳에게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믿지 못한 일을 엘리사벳에게 믿으라고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자신의 잉태를 ‘하느님의 일’로 믿으면서도, 아기의 사명을 이해하지는 못하고,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으로만 생각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모든 것을 완전히 깨닫게 되고 알게 된 때는 마리아가 방문했을 때입니다(루카 1,40-45).
3) ‘하느님의 일’은 인간의 과학과 상식을 초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과학과 상식이 ‘믿음’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 걸림돌을 극복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즈카르야의 경우처럼 천사가 나타나서 직접 설명을 해 준다면 좀 더 쉽게 믿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도움이 없다면,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일이 ‘하느님의 일’인지, ‘사람의 일’인지 판단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 됩니다.
<그 일이 고통스럽고 불행한 일이라면 특히 더 그렇습니다.
만일에 지금 어떤 고통을 겪고 있다면, “주님은 나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더욱 굳게 믿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기도하는 동안에 평화를 얻는 일은 누구든지 금방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평화는, 하느님의 뜻을 알게 해 주는 깨달음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불행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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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9. 2024년 12월 19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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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9. 2024년 12월 19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
우리가 살다보면 예상하지 못하는 일들이 벌어 질 때가 있습니다.
하다못해 약속을 하고 만나는 장소에 가다가 보면 평소에는 아무 일도 없던 고속도로에서
교통체증이 일어난다든지, 어떤 행사를 할 때에 그렇게 좋던 날씨가 갑자기 춥거나 눈비가
내리는 낭패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체념을 하며 교통체증은 시때가 없다느니 예측 못하는 것이 자연이라느니 불평이
터져 나올 법도 합니다.
성탄을 앞두고 교회의 전례는 판관기의 삼손과 셰례자 요한의 출생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삼손의 가족에 대해서 우리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단 지파에 소속된 마노아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임신할 수 없는 몸으기 때문에 아기를 낳지 못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마노아의 부인에게 천사를 보내시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보라, 너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어서 자식을 낳지 못하였지만,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조심하여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말고, 부정한 것은 아무것도 먹지 마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판관 13,3-5)
마찬가지로 사제 즈카리야의 아내는 아론 집안인데 아기를 낳지 못하는 몸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늙은 나이이기 때문에 그 집안에는 더 이상아 아이를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즈카리야가 성전에서 분향 당번 사제 직무를 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루카 1,13-14)
한편 생각하면 마노아의 부인이든, 즈카리야의 부인 엘리사벳이든 평생을 아이를 못 낳는
‘돌계집’의 신세에서 벗어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여인에게는 수치였는데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그 구속에서 자유롭게 해 주신 것입니다.
루카복음은 즈카리야가 자신의 부인이 너무 늙은 나이게 임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지 않자
천사 가브리엘은 그를 벙어리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약속대로 엘리사벳에게
세례자 요한을 잉태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인이 아기를 갖지 못하는 것은 순간의 고통이 아니라 평생의 아픔이며 수치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모두를 기다리시며 그 이야기를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구원의 역사에는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듯 고통을 스며 있습니다.
어쩌면 그러나 십자가에서 부활의 기쁨을 이끄시듯 삼손과 세례자 요한의 출생의 이야기도
구원으로 이어주시는 것입니다. 당장 겪는 고통에 움찔할 것이 아니라 미래까지 연결시키시는
주님의 손길에 그 모든 것을 맡기는 신앙의 여유로움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항상 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어쩜 너무 동떨어지게 다를 수 있음도 새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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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9. 2024년 12월 19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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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9. 2024년 12월 19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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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9. 2024년 12월 19일.
여호와의 날을 기다리는 삶
<2024.12.19> 아침을 여는 묵상 (말 3:13~4:6절)
❝여호와의 날을 기다리는 삶❞
❚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 인내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자에게 영광스러운 구원을 약속하셨고, 인도하십니다.
✔ 여호와의 날을 기다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하나님은 정한 날에 기억하시고, 특별한 소유로 삼으시기 때문입니다(3:13~18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고서도 깨닫지 못한 것을 지적하십니다(13절). 그들은 하나님이 교만과 악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에 대해 아무 심판도 행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면서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이며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부정했습니다(14~15절).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16절).. 그들이 나눈 이야기들을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13~15절의 내용과 정반대의 내용이라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을 대적하는 악한 세상 풍조 속에서도 믿음을 굳건하게 지켜 나아가는 자들의 소리를 ‘...여호와께서...분명히..’(16절) 들으십니다. 그리고 신실한 그들의 행위들과 말들을 기념책에 기록해 놓으십니다. 그리고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내가 그들을 아끼겠다...’(17절) 말씀하십니다. ‘특별한 소유’에 해당하는 ‘쎄굴라’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매우 소중하게 소유하신다는 의미(출 19:5, 신 7:6;26:18)를 나타냅니다. 마치 소중한 것을 금고에 넣어 두고 금고를 잠그는 행위입니다. 그만큼 소중한 재산이나 보물이나 소유물로 여기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자녀를 아끼는 부모처럼 아껴주십니다. ‘아끼다’라는 말은 ‘어떤 대상을 불쌍히 여긴다’라는 의미로 불쌍히 여겨 주시기 때문에 마땅히 죽여야 할 상황에서도 죽이지 않고 생명을 보존해 주시는 행위입니다. 끊임없이 범죄하고, 대적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국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달콤한 유혹과 거센 핍박과 조롱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야 하는 것은 그런 믿음의 행위 자체를 하나님이 분명히 기억하시고, 부르짖는 간구의 소리를 분명히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저장 폴더 안에 차곡차곡 자료들이 저장이 되어 지는 것처럼 우리의 말과 행위가 하나님의 저장 폴더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허점투성이고, 매일매일 실수와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보배로운 존재로 여겨 주시고, 아껴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만을 온전히 경외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잠잠하지 않고 친히 행동하시는 날을 소망 중에 기다립시다.
➲ 하나님은 정한 날에 치유하시고, 영광의 자리에 앉히시기 때문입니다(4:1~3절).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1절).. ‘그때’(3:18)를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무시무시한 불과 모든 것을 집어삼켜서 태워버릴 듯한 불의 이미지로 비춰집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최후 심판 날은 두렵고 떨리는 날이 되며,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마치 용광로 속에 금속이 던져짐으로 말미암아 녹아 버리듯이 철저히 소멸되고 말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날이 오면, 불이 그들을 살라서, 그 뿌리와 가지를 남김없이 태울 것이다...’(1절b,새번역)... 또한 그들은 의인의 발바닥 밑에서 재로 나뒹굴게 될 것(3절)입니다. 반대로 그 날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게...’(2절)될 것입니다.
깊은 절망과 굴욕과 패배와 낙심의 날이 끝나고 승리와 영광과 회복의 날이 온다는 확신이 있기에 오늘도 믿음으로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생명의 밝은 빛을 비추어 주심으로 눅눅한 감옥과 같은 삶에서 빠져나와 자유롭게 세상을 마음껏 활보할 수 있는 축복과 은총을 주심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모릅니다. 그 어느 상담사보다 나의 상태를 잘 알고 계신 주님이 상처와 아픔에서 치유하여 주시고, 멋진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날마다 새 힘을 공급하여 주심을 확신합니다. 세상의 힘과 권력과 물질은 언젠가는 사라지고 마는 불에 타고 남은 재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용광로 불같은 날에 심판과 멸망이 아닌 치유하시고 영광의 자리에 앉히시는 그 은혜를 통해 새 힘을 얻게 됨을 감사함으로 바라봅시다.
➲ 하나님은 정한 날에 돌이키시고 관계의 회복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4~6절).
‘...너희는 모세에게 명령한 율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여라...’(4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신 율법은 모세 개인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에게 주신 것으로 모든 세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5절). ‘엘리야가 와서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하게 하고, 자녀가 아버지를 사랑하게 할 것이다. 그들이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와서 이 땅에 저주를 내리겠다..’(6절,쉬운성경)... 하나님이 여러 방법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고 계심에도 그들이 돌이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저주로 그 땅을 치실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을 대망하며 살아가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율법을 온전히 이루신 분이시며 우리 자신은 결코 율법으로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구원을 예비하며 심판의 날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때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광명한 빛 가운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울러 진리를 알지 못한 자들, 세상을 위해 살아가는 이들이 돌이켜 복음 안에서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엘리야와 같이 그리고 세례 요한과 같은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크고 두려운 그 날에 심판의 대상들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송아지가 나가서 뛰노는 거처럼 하나님 앞에서 뛰며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시금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궁극적인 관계의 회복을 이루실 하나님을 소망의 눈으로 바라봅시다.
오늘도 묵상한 말씀들이 믿음과 행위로 삶 가운데 드러남으로 치료하는 광선을 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뿐 아니라 성령님과 함께 주님이 다시 오셔서 장차 완성하실 하나님 나라를 날마다 소망하며 기다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말 3:13~4:6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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