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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두로에 머물다
행 21:1-6
1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5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행 21:1-6 / [바울의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 에베소의 장로들과 작별한 우리는 배를 타고 고스로 직행하여 이튿날 로도에 들렀다가 기기서 바다라로 갔다. 2) 바다라에서는 수리아 지방의 베니게로 가는 배를 바꾸어 타고 3) 멀리 바라보이는 구브로 섬을 왼편에 끼고 수리아를 향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두로에 닿았다. 거기서 그 배는 짐을 풀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4) 우리는 배에서 내리자 신도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한 주일을 지냈다. 그 신도들은 성령께서 이르신 대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만류하였다. 5) 한 주일이 지나서 우리가 배로 되돌아가게 되자 온 교회는 물론 심지어 부인들과 아이들까지 모두 바닷가에 나와서 우리를 전송해 주었다. 우리는 거기서 다같이 기도를 드렸다. 6) 작별인사를 하고 우리가 배에 오른 뒤에야 그들도 집으로 돌아갔다.
밀레도를 떠난 사도 바울 일행이 잠시 두로에 머물며 성도들과 교제를 나눕니다. 두로의 성도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고난 받을 것을 전합니다.
밀레도에서의 작별(1-2) 바울과 누가, 드로비모와 아리스다고 등의 사도 바울 일행은 밀레도의 성도들과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헤어짐의 인사를 나눕니다. 이 헤어짐은 사도 바울과 그의 제자들에게는 매우 어렵고 아쉬운 작별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도 그 길이 고난의 길인 것을 알았고,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밀레도의 성도들도 사도 바울이 가는 길이 고난의 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살아서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마지막 인사인 것입니다. 바울은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를 거쳐 바다라에서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에 승선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두로의 제자들(3-4) 사도 바울의 일행이 탄 배는 수로를 따라 순항하며 나아갑니다. 그리고 드디어 가나안 서북방 두로에 도달하게 됩니다. 두로는 시돈과 함께 베니게의 오랜 항구 도시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교도의 도시로 번영과 부패의 상징으로 예수님의 책망의 대상이었습니다(눅 10:13). 이러한 도시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씨앗이 되는 성도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있었습니다. 이들은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흩어진 성도들과 사도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두로에서 이레를 머물게 됩니다. 두로의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사도가 받을 예루살렘에서의 고난을 알게 되어 만류한 것입니다.
바닷가에서 합심기도(5-6) 마치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류하였던 베드로의 인간적인 염려의 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서 두로의 제자들이 믿음이 없이 인간적인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이제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있는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만류를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을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광의 길이 아닌 고난의 길인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충성스럽게 따르는 사도바울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행 20:22). 두로의 제자들은 바울을 위하여 기도하고 아름답게 보낼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적용: 당신을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고 있나요? 당신은 지금 누구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나요? 중보기도의 동역자가 되길 바랍니다.
연예인이나 아이돌에겐 그들을 추종하는 팬클럽이 있습니다. 연예인들의 동선과 그들이 무엇을 할 지, 그들이 좋아하는 음식, 자주 들르는 장소,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는 사람들, 바로 사생 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것, 싫어하시는 것, 그분께서 하실 일을 알고 싶어 하며, 그분께 가까이 가기 위해 노력하여 아예 그분 거처에 들어가려는 하나님의 사생 팬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생 팬은 24시간 그분과 함께 동거해도 지탄은 커녕, 그분께 칭찬을 받는데도 그렇습니다.
< 설 교 >
일사각오의 신앙
행 20:1-16 / 김 조 목사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생명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생명의 존엄성을 바르게 인식하고 주어진 삶이 보다 값지고 은혜로우며 하나님의 아름다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성도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이 고기를 먹되 피는 먹지 말라고(레17:11-14) 여러 번 반복하신 것은 피는 생명이기에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렇게 귀중한 생명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여 조그마한 어려움도 이기지 못하여 자살을 하여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에 자살 2위라고 합니다. 한다는 연예인, 정치가, 사업가들이 오죽하면 죽었겠는가 할 수도 있겠으나 죽을 각오로 하면 무엇을 못하겠고 안 될 것이 있겠습니까? 자살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무서운 범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것 불순종입니다. 보이는 세상이끝이 아니기에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하는 한 여자 에스더의 부르짖음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의 조국을 구했습니다.(에7:3, 4:16)죽기를 각오했다는 것은 분명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는 것으로 바울사도가 “주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13)하신 말씀을 보니 그는 죽기를 각오한 신앙이었기에 “일사각오의 신앙”이라 제목하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바울사도가 전도여행을 마치고 밀레도를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여러 곳을 거쳐 갈 때에 바울사도를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두 번씩이나(4~12)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을 당하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 올라가지 말라고 강권하였으나 “너희가 어찌하여 울면서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고 나무라시면서 죽을 각오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사도도 성령의 인도로 (19:21, 20:22,23)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운데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로 올라가지 말라 하시니 서로 다른 것 같으나 믿음의 형제들은 존경하는 사도를 위함이요 바울사도는 성령의 지시를 순종하는 것이라 다른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13-14절)
주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하니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셨으니 예루살렘에 가서 교회를 돕고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예수의 이름을 위하여서이기에 이것이 자기의 생각이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었기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하였던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에 죽으신 것 아시고 호산나 찬송 소리 들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이 “내 원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 지기 원하고 기도하셨던(마26:39)것과 같은 심정입니다. 성령께서 미리 가르쳐 주셨으니 피하거나 도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기에 죽어도 해야 한다는 일사 각오의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성도여!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살아가게 하시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된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평안과 안일만 위해 산다면 당장은 좋을 수 있겠으나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이 없습니다. 적당한 핑계 대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죽을 각오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은혜 베푸실 줄 믿습니다.
2. 사명의식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13, 20:24)
바울 사도는 한 마디로 사명에 불타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명 위해 생명도 버리겠다는(20:24)것입니다. 육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이 더 귀하고 값진 것이기에 죽을 각오도 한 것입니다. 사람이 오래 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세상에 것 많이 가졌다는 것이 귀한 것이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얼마나 했느냐는 것이 귀합니다. 왜 살아야 하느냐는 목적의식이 분명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할 때에 그 삶이 보람 있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먹다 죽다”하는 인생 되지 말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하신 말씀 기억하고 다 자신의 욕망과 욕심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사43:7,21)내게 맡겨진 사명 위해 일사각오가 되어야 합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명예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 위해 애굽 왕궁의 낙도 버리고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사명 다하고 받을 상을 바라보며 세상 것 버림으로(히11:24~26)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고 복을 받았습니다. 바울사도도 그 좋은 가문, 학벌, 명예, 권세를 배설물처럼(빌3:8)여겼던 것이 사명 때문이었기에 그는 크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명의식 분명히 하고 일사각오 함으로 하나님의 더 크신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3. 자신의 희생하는 것이었습니다.(12-14절)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헌신적인 의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 흘리시며 죽기까지 희생하심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하라 되게 하셨으니(롬5:10) 이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이요 헌신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환란 결박이 기다린다 함에도 올라가기로 결심한 것은 교회와 복음전파를 위한 자신의 희생을 들어낸 것이요 울며 간권하는 믿음의 형제들의 만류를 “어찌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고 나무라신 것은 일시적인 자기감정이나 사사로운 인정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사명 다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3)하심으로 자기희생적인 의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스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육신의 생명을 더 연장하는 보다 귀한 것인 줄 알면 주를 위해 희생함으로 더 큰 복 받읍시다. 한 교회를 30년 넘게 섬기며 어려울 때 마다 큰 교회에 청빙 고 거절 할 때마다 손해 보고 바보 같았으나 오늘날 삼락교회가 있게 되고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죽자 하는 자 하나님이 살리시고 복주십니다. 큰 복 받으시기 원합니다.
말씀 마치려 합니다.
신사참배 옥고를 치루시고 순교한 분들이 더 좋은 것 귀한 것을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며 하나님이 명하시고 맡겨 주신 사명이 생명보다 귀하기에 자기 좋은 것 버리는 희생과 헌신으로 죽을 각오로 신앙 되시고 죽고자 하면 살려주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하시고 큰 복 누리시기를 소원합니다.
생명이냐? 사명이냐?
사도행전 21:1-16 / 서금석 목사
작가 에도슈샤쿠가 쓴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일본에서 기독교 탄압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던 17세기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유능한 선교사였던 페라이라 신부가 배교했다는 소식에 접한 포르투칼의 예수회에서 다시 세바스챤 로드리코 신부를 몰래 일본에 잠입시킵니다. 삼엄한 단속과 엄청난 박해 속에서 결국 로드리코 신부도 일본에 상륙한 지 한달 여만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체포되면서 "결코 배교하지 않고 장렬하게 순교하리라" 다짐하였습니다. 로드리코는 이미 일본에 파견되었던 선교사들이 얼마나 참혹한 고문을 받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뜨거운 열탕에 며칠이고 빠뜨린다든지, 귓불에 구멍을 뚫어 거꾸로 매어 단다든지 하는 고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드리코는 순교를 다짐하고 밤을 지새고 있었지만 직접적인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에 밤새도록 고문당하는 신도들의 신음 소리만 듣게 되었습니다. 고문하는 사람이 로드리코 신부에게 속삭입니다. "너도 배교해라. 만일 네가 배교를 하지 않으면 저 사람들은 저렇게 죽어갈 것이다" 그래도 로드리코 신부가 배교를 하지 않자 고문하던 사람이 한 수 더 떠 얘기했습니다. "그래 너는 신앙의 지조를 잘 지켜 천국을 갈 수 있다고 하자. 네가 배교를 한다면 저 사람들이 놓여 날 수가 있는데, 너는 너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고통 속에 있는 저들의 비명 소리를 외면한다는 말이냐?" 저는 여기서 「침묵」이라는 소설의 이야기를 계속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 로드리코 신부의 고민을 다시 한 번 생각하려고 합니다. 로드리코는 그토록 많은 신도들이 신앙을 위해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배교한 신도들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이 배교를 함으로써 그들을 살려야 하는가? 어떤 것이 진정한 신앙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의 길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앙생활하면서 간혹 어떤 것이 진정한 신앙의 길인지,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 되지 않아 곤혹스럽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으시지요? 오늘 말씀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밀레도에서 두로까지(1-6)
"1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행선하여 바로 고스(Gos)로 가서 이튿날 로도(Rhodes)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Patara)로 가서 2베니게(Phoenicia)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구브로(Cyprus)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Syria)로 행선하여 두로(Tyre)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
바울은 이 당시 제3차 전도 여행의 마지막 여정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했기에 바울은 매일 배로 힘든 항해를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고스는 비옥한 작은 섬으로 의사가 될 때 누구나 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Hoppocratic Oath)"로 우리에게 알려진 의사 히포크라테스의 고향으로 큰 규모의 의학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로도는 섬이름도 로도이고 그 섬의 항구 이름도 로도인데 장미가 많이 나서 장미의 섬으로 불리울 정도였습니다.
바다라는 아름다운 항구도시이자 거대한 상업 도시였습니다.
두로는 베니게의 오랜 항구도시로 대표적 이교(異敎)도시요, 번영과 부패의 표본으로 성경에 시돈과 함께 늘 책망의 대상이 되었던 도시였습니다.
1.'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 작별의 의미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간곡한 고별 설교로 권면을 마친 후 작별합니다. 여기서 작별하고의 헬라어 '아포스파스덴타스(?ποσπασθ?νταs)'는 어떤 사람 또는 물건으로부터의 분리를 뜻하는 '아포(?π?)'와 '끌다', '당기다'의 뜻은 '스파오(σπαω)'의 합성어로 '찢어 놓는다'는 뜻입니다. 의미적으로 해석하면 두 사람이 붙어 있는 것을 억지로 떼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과 에베소 교회 장로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헤아릴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불확실했고, 어쩌면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 접하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 역시 바울의 이 힘든 여정을 짐작하고 있었을텐데, 작별하는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래도 바울은 하루도 지체하지 않고 매일 매일 여정을 강행합니다. 밀레도에서 고스로, 고스에서 로도로, 로도에서 바다라로 바다라에서 두로까지 배타고 계속 예루살렘으로의 길을 재촉했습니다.
2. '제자들을 찾아' -제자들을 찾는 의미
"4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오랜 항구도시 두로에서 배의 짐을 내리기 위해 배가 항구에 머무는 동안 바울은 제자들을 찾아나섰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이란 바울에게 직접 배운 제자들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으로 믿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두로에 있는 제자들과 약속해서 만난 것 같지는 않고 어디에 있든지 전도하고 양육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바울은 배가 머무는 동안 여기 저기 수소문하여 찾아내어 평소대로 양육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니었는데 어디를 가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저기에 예수 믿는 사람 많이 있는데 예수 믿는다는 사실을 서로 알게 되면 뭔가 속으로 통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여행하다가 예수 믿는 사람 만나면 뭔가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또 하나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말합니다. 성령의 감동이 그냥 왔겠습니까?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는 도중에 배의 형편이 좋지 않아 할 수 없이 두로에 잠시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로에서도 바울은 쉬지 않고 말씀 가르치고 기도하며 양육하는 일에 전심을 다했습니다. 이런 바울을 지켜보던 제자들도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간이 있을 때마다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는 일에 관심을 가집시다. 딴 재미보다 사람키우는 일에 재미를 느껴야 합니다. 제구실하는 성도로 잘 이끌어 주는 일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3. 바울과 제자들의 작별
"5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 새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니라"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작별할 때도 무릎꿇고 기도했는데 여기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대체로 서서 기도했는데 왜 무릎꿇고 기도 했을까요? 의식화한 기도 보다 더 절실한 기도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예루살렘 길을 말렸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을 보면서 제자들은 이것이 마지막일 것이라고 여겼을 지도 모릅니다. 바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던 제자들의 마음 역시 간절하지 않았겠습니까? 바울을 위해 무릎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최선이 아니었겠습니까?
2. 두로에서 가이사랴까지(7-14) -생명(生命)이냐? 사명(使命)이냐?
"7두로로부터 수로(水路)를 다 행하여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이튿날 떠나 가이샤라에 이르러 일곱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9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두로에서 가이샤라 방면으로 35km 지점에 위치한 소항구가 돌레마이입니다. 돌레마이에서 가이샤라까지 육로로 갔는지 배로 갔는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배로 갔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가이샤라는 돌레마이에서 남쪽으로 50-60km 지점에 위치한, 로마치하에서 유대지방의 행정 장관이 거주하는 정치적 도시로 거대한 항구도시이기도 합니다. 가이샤라에서 바울은 일곱 집사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유하게 됩니다. 전도자 빌립은 사도행전 8장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최초로 전도했던 사람아닙니까? 그에게 딸 넷이 있었는데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v8) 했습니다. 여기서 처녀란 결혼하지 않은 여자지요. 이 당시 대부분 교회 봉사를 과부들이 했던 것을 비추어 보면 대단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지금은 예언 은사가진 사람들이 드물지요.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예언 은사를 가진 사람이라면 하나님처럼 떠 받들려고 하는 부패된 호기심 때문입니다. 어찌되었든 한 가정에 전도하는 아버지와 예언하는 딸이 있으니 얼마나 은혜와 축복이 넘치는 가정이었겠습니까?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들- 목회자가 되었든, 평신도가 되었든 하나님께서 반드시 가정과 후손을 축복해 주십니다.
1. 아가보의 예언과 의미
"10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바울이 빌립의 집에 상당기간 머물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는 마음에서 여행을 급히 서두른 까닭에 심신이 피곤했기도 했고, 오순절까지는 시간의 여유도 있었기에 휴식을 겸해서 빌립의 집에 머물며 예루살렘에서 해야 할 일을 계획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선지자 아가보가 다시 등장합니다. 이미 사도행전 11:28에서 온 세계에 큰 기근이 있을 것을 예언하던 예언자입니다. 아가보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체포된다'고 예언합니다. 아가보는 자기의 손과 발을 바울의 허리 띠로 묶으면서 이 허리따의 주인이 이처럼 될 것이라고 실연(實演)으로 보여 줍니다. 바울 자신도 밀레도 교회의 장로들에게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행 20:23)고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고난을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체포되어서 감옥에 갇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2. 가지 말아라 - 생명을 지켜라
아가보의 예언을 전해들은 바울 일행과 가이샤라에 있던 성도들의 반응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12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 현지의 성도들과 바울을 수행중이던 사람들이 합세하여 예루살렘 행을 만류합니다. '권하다'는 말은 표준새번역에서는 '간곡하게 만류했다'고 표현했습니다. 두로에 있던 성도들도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말렸습니다. 가이샤라에 오니 선지자 아가보가 실제 연기까지 하면서 예루살렘에 가면 만나게 될 체포사건에 대하여 보여주면서 모두들 만류하고 있습니다. 가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여러분이 만일 바울이었다면 가야 한다고 하시겠습니까? 주위에서 모두들 만류하니 못이기는 체 하고 주저 앉겠습니까? 예루살렘에 가기만 하면 붙잡혀 감옥에 넣어지는 것은 물론 생명까지 어찌 될른지 모르는 상황 아니겠습니까? 말리는 사람들이 단순히 '가지 말라' 한 마디만 했겠습니까?
만일 붙잡혀 감옥간다면 복음 전하는 것도 끝장 아닙니까? 바울 사도여 당신은 아직 더 일하셔야 합니다. 로마에도 가셔야 하고 스페인도 가셔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잡히면 끝장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고 직접 로마로 가십시다. 이렇게 설득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여 고집 고만 좀 부리세요. 예루살렘에 가지 않는다고 당신이 평안한 내일을 살려고 한다고 누가 생각하겠어요?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당신도 예루살렘에 가지 말아야 해요. 가서 붙잡히는 것이 능사가 아니지 않아요.
사도 바울도 갈등 많이 했을 것입니다. 과연 어느 것이 하나님 뜻일까?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처럼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어느 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일까? 예루살렘에 가서 투옥 되는 것이냐? 아니면 비켜 가는 것이냐? 누구인들 스스로 감옥가는 것 원할 사람 있겠어요? 제 발로 가는 것 누가 좋아하겠어요? 우선 생명을 지켜야 사명도 감당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3.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 사명이다.
"13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간다.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라.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사명을 위하여,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체포는 물론 죽을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사명 내가 꼭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사도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고백한 말이 있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4)>
바울은 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생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명을 위하여 생명을 내놓을지언정, 생명을 위하여 사명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심정이었습니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오순절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전하는 사명은 꼭 감당해야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참으로 어려운 결단을 했습니다. 바울이라고 생명 귀한 줄 몰랐겠습니까? 예루살렘 가지 않는다고 주의 일 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곳에 가서 복음 전한다고 주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의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복음 전하는 것이 주의 뜻으로 믿었습니다.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예수께서 네 몸으로 나실 것이라 알려줍니다. 마리아는 깜짝 놀라 사내도 알지 못하는 제가 어떻게 아기를 낳겠습니까? 반문하자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자 보세요. 아무리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정혼한 남자가 있는데 결혼 전에 처녀가 정혼한 남자의 아이도 아닌 아이를 낳는다는 일 - 얼마나 수치스럽고 곤욕스런 일입니까? 그래도 마리아는 말합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개인적으로는 곤욕스럽긴 해도 하나님 뜻을 이루는 일이라면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개인적으로 볼 때 입장이 난처하고 형편이 곤욕스러워도 하나님 뜻이라면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믿음이 여러분에게도 있습니까?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존심이 믿음보다 강합니다. 자존심 때문에 쉽게 믿음을 던져버립니다. 성도 여러분. 때로 내 자존심이 좀 구겨져도, 내가 환난을 좀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인내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뜻 이루려면 환난도 각오해야 합니다. 환난 당합니까? 역경이 있습니까? 문제는 내가 믿음 가운데 있기만 하면 됩니다. 왜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合力)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성도 여러분, 생명보다 사명을 귀히 여겼던 사도 바울에게서 귀한 믿음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매일 매일 무엇을 위해 사십니까? 우리 중에 한가하게 사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바쁘게 삽니다. 그런데 그 바쁨이 주님 주신 사명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평생 아침부터 밤까지 나 하나, 내 가족 하나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바쁘지는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가 평생 예수 믿을 텐데, 언제인가 하나님과 마주 앉아 지나온 삶을 결산할 때가 분명히 올터인데, '너는 내 가 준 생명, 내가 준 인생, 나를 위해서는 무엇을 하고 왔느냐?' 물으신다면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우리 삶을 통해 무엇하기를 원하시는 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러한 영적인 사명을 깨닫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100년만에 주신 새 성전에서 무엇을 하시기를 원하시는지, 새 성전을 통해 무엇 하시기를 원하시는지 이것을 모른다면 실패한 인생입니다. 오래 살고, 짧게 살고가 문제가 아니라 내 삶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느냐 모르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 한 목숨 언제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 이것만 이룬다면 미련이 없다는 바로 그 사명 - 무엇입니까? 이것 아셔야 해요. 그래야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하지 않아요.
성도 여러분. 내게 주신 사명(mission)이 무엇입니까? - 평생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며 살겠다. 남에게 사랑하며 베풀며 살겠다. 성전에서 봉사하며 살겠다. 한 곳이라도 내 손으로 가꾸며 살겠다. 댓가를 바라지 않고 헌신하며 살겠다.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님 사랑 느끼게 하며 살겠다. 사명을 다 하려면 손해 볼 수도 있어요. 신변에 불이익, 위험이 올 수도 있어요. 그러나 사명이기에,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이기에 기꺼이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아직도 그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십니까? 기도하세요. 말씀보세요. '평생 이것이 사명이다' 가슴에 확신이 올 때까지 기도하세요. 새벽기도하세요. 이것 모르면 평생 믿었다 해도 빈 그릇 가지고 하나님 만나게 됩니다. 우리 춘천 중앙의 성도들은 사명 위해 기도하시고 바울처럼 목숨까지는 못 받치더라도 최선을 다 합시다. 그러면 내 인생이 달라져요. 가정과 직장이 달라져요. 교회가 달라져요. 교회의 일거리가 내 눈에 보이십니까? 이것이 사명이다 내가 하세요. 땀 흘려하시고 내 주머니 털어 하세요. 하나님 하는 것 기쁨이요 영광이 아닙니까? 사명을 앞세우며 사시기 바랍니다.
3.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으로(15-16)
"15이 여러날 후에 행장(行裝))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새 16가이샤라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
가이샤라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00km나 되는 먼 거리였습니다. 요즈음은 100km정도는 한 시간이면 갈 수가 있겠지만 당시의 도로 사정이나 교통수단을 생각하면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전할 구제금과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말에 싣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16절의 나손은 바나바와 같은 고향 구브로 사람으로 예루살렘에 큰 집을 가진 부자였습니다.
정리하면서
생명이냐? 사명이냐? 바울은 생명보다 사명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사명- 무엇입니까? 사명을 모른다면 곤란합니다. 답답한 삶입니다. 죄송하지만 멍청한 삶입니다. '누가 뭐라해도 이것이 내게 주신 사명이다'- 이 사명이 먼저 분명해야 합니다. 사명 위해 때로 신변의 불이익과 손해가 온다해도, 환난과 곤욕스러움이 온다해도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선을 이루어 주실줄 믿습니다.
1.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기 위해 말씀보고, 기도드리는 데 힘쓰시기 바랍니다.
2. 사명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어떻게 하든 담대하게 그 사명 이루도록 달려 나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행 20:1-14 / 박근호 목사
'2002 한일 월드컵'이 만들어낸 말 중에 가장 유명한 말은 한국과 스페인의 8강전에서 사용된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구호일 것입니다. 월드컵 이후 정치, 경제, 문화 등등 사회 모든 영역에서 이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꿈 깨'라는 말도 그 못지 않게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면 '꿈 깨'라고 일침을 놓는 것은 유머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모든 꿈이 다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경계적 표현도 되겠습니다.
'이루어져야할 꿈'이 있는가 하면 '이루어져선 안될 꿈'도 있습니다. 모든 꿈이 다 이루어져야할 현실일 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꿈 속에는 바람직하지 못한 인간의 허상과 욕망이 배어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꿈은 이루어진다'는 이 말은 신앙적 입장에서 볼 때 그렇게 바람직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걸러짐없이 그냥 사용하기에는 그리 적절한 말은 아닌 것이라 여겨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할 말은 따로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는 말일 것입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우리 다같이 한번 외쳐보십시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드와이트 무디에게 어느날 짓궂은 교인이 찾아와서는 그가 읽는 성경책을 좀 보자고 요구해왔습니다. 무디는 그 사람에게 너무 오래 봐서 이제는 다 헤져버린 자신의 낡은 성경책을 보여줬습니다. 그 성경책은 무디가 읽으면서 줄치고 표시하고 글도 써놓고 해서 여간 지저분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리저리 뒤적거려보던 그 교인이 무디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여기 써놓은 T, P라는 글자가 무슨 뜻인가요?' 그 질문에 무디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T자는 Tried의 약자이고, P자는 Proved의 약자입니다...' Tried는 '시험해 보다. 연습해 보다'는 뜻이고 Proved는 '확인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어가다가 그 말씀이 마음에 와 닿으면 Tried 라고 써놓고 시행을 하고, 또 그 실천으로 인해 성경이 약속한 결과에 이르게 되면 Proved라고 써서 그 말씀이 진리임을 확증했다는 것입니다. 즉 그 글자들은 무디 스스로 생활 속에서 말씀을 실천해 봄으로써 정말 그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입증했다는 표시였습니다.
그러니 무디의 삶이 어떠했겠는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성경 말씀 하나하나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그것이 그런가 안그런가 확인을 했다니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을까 짐작되는 일화입니다. 내 뜻이나, 내 바람이나, 내 꿈이 아니라 말씀을 실천함으로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과 바람과 꿈을 이루어드렸던 자가 무디였던 것입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꿈은 내가 꾸는 게 아닙니다. 만약 내 마음대로 꿈을 꿀 수 있다면 TV도 필요 없고, 영화관도 필요 없을 겁니다. 진정한 꿈은 내 속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요 부여되는 것입니다. 그게 참 꿈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꾼 꿈도 야곱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꿈이었습니다. 요셉의 꿈도 마찬가지이고 요엘 선지가 '말세에 늙은이들이 꾸게 될 것'이라고 한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꿈이 진짜 꿈입니다.
그러나 어디 그렇습니까? 대부분의 인간의 꿈이라고 하는 게 자기 욕망의 분출이거나 자기 욕구의 변형임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사실 오늘 이 땅의 혼돈과 무질서와 공허는 바로 그러한 변질된 꿈의 추구가 만들어내는 어지러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마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외치지만 그 꿈이 이루어지는 세상은 결코 꿈같은 세상이 아니라 더욱 처절하고 냉엄한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 꿈을 이루어 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가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을까요?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결코 쉽지 않은 얘기입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 뜻을 앞세우고 내 꿈보다 하나님 꿈을 먼저 꿈꾼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구호가 되어야 합니다. 야고보 장로도 자기 계획을 세우고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골몰하는 인생들을 향해서 '너희가 도리어 주의 뜻이면 우리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것이라고 말하라'고 권면하지 않습니까?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외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구호를 그 누군들 외치지 못하겠습니까? 문제는 무디처럼 'Tried 하고 Proved 하느냐 하는 겁니다. 실천하고 확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 구체적으로 오늘 여기에 실현되어가는 하나님의 뜻, 그러한 삶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비롯한 우리 믿음의 선진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자기들의 꿈을 이루어간 게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간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믿음의 조상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도 그러한 위대한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 차례에 걸친 전도여행으로 이방땅에 생명의 복음을 증거한 충성된 종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아 복음 전파를 위해 세 번씩이나 소아시아 지방으로, 유럽으로 전도 여행을 다닙니다. 그때의 전도여행이란 것이 어떠했겠는지는 우리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날과 같은 여행이 아닌 온갖 위험과 불확실함이 사방에서 압박해 오는 그런 고행의 연속이었습니다.
지난 주간에 제가 휴가를 보내면서 한 사흘 여정으로 안가본 우리 땅을 밟고 왔습니다. 구미를 출발해서 경남 진주로, 통영으로, 거제로, 그리도 다시 진주로 나와 전남 순천, 보성, 벌교, 광주 그리고 전북 전주를 거쳐 구미로 돌아왔습니다. 경북, 경남, 전남, 전북, 충남... 이렇게 5개도를 돌아오니 자동차 주행 메타기가 1000Km를 가리켰습니다. 4Km를 10리로 치는 우리 식으로 환산을 해보면 2500리 길을 다녀온 셈입니다.
만약 그 정도의 길을 2천년 전 바울이 여행했다면 얼마나 걸렸을까요? 그의 세 차례 전도여행은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었다는 것을 고후11:23절 이하의 그의 간증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거기서 이렇게 자신이 여행 중에 당한 일들을 열거합니다. "옥에 갇히기도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도 하였고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태장으로 세 번, 돌로 한번 맞았고... 또 세 번 배가 파선해서 밤낮을 암흑 속에서 지낸 적도 있었고 여러 번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했고... 거기다 여러 번 자지도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었노라...' 그러나 그런 전도여행을 통해서 복음이 이방인들 사이에 전파되어 비로소 기독교가 세계를 향해 뻗어가는 종교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그러한 이방을 향한 기독교 복음을 공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준비를 합니다. 자기의 이방 사역을 예루살렘 모교회의 사도들로부터 인준받아야 그의 선교적 열매가 공식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들도 만나고 또 여러 교회에서 연보한 것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할 필요도 있고 해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복음을 위해 그렇게 수고하고 애쓰며 헌신한 바울을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특히 그를 미워하고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유대인들의 적대감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왠지 바울의 신상에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늘 새벽말씀처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가 유대인들의 손에 고초를 당하셨듯이 그렇게 바울 또한 고난받게 되리라는 것을 감지헸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본문 4절에 보니 "바울의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권면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제자들이 바울을 향해 '예루살렘행을 금지하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자, 과연 이런 처지에서 바울은 어떻게 처신할까요?... 가야할까요, 가지 말아야할까요? 가는 게 하나님의 뜻일까요, 가지 않는 게 하나님의 뜻일까요?... 당사자 바울로서는 갈등하고 번민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20:22절에 보면 그는 이미 단단한 결심을 하고 길을 떠나왔었습니다. '보시오, 나는 이제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오. 그러나 성령께서 내게 알려주시기를 각 성에서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시오. 하지만 나는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오...' 그런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고 서로 부둥켜안고 울면서 3년 동안 정들었던 에베소를 떠나왔습니다. 그런데 두로에 도착하자 이번엔 이곳의 제자들이 바울의 여정을 가로 막고 나서는 겁니다. 그것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말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두로에서 이레를 그렇게 시달리며 머문 후에 겨우 저들을 떨치고 가이사랴로 갔더니 이번에는 아가보라는 한 예언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들이 저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 하고 또 그 말을 들은 여러 사람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강권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바울은 여기서 하나의 딜렘마를 경험합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내 발걸음이 과연 주의 뜻인가, 아니면 나의 고집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예루살렘행을 막고 있습니다. 그것도 성령의 감동으로... 그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은 뭡니까? 자기 고집을 세워 가는 겁니까?
행20:22절에 보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노라... 그곳에 가면 내게 환난이 있고 고통이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내게 알려주셨다...' 그리고 21:1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그곳에서 결박만이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고 있노라...' 가면 환난이 있고 고통이 있다고 성령께서 자기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그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온통 가지 말라고 난리입니다. 이 상충된 현실 속에서 과연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는가 말입니다.
헷갈리지 않습니까? 같은 성령께서 바울에게도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하나님의 뜻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일까요 안가는 것일까요? 성령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바울을 지지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면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하는 제자들을 지지하고 있는 것입니까?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이게 참 묘한 국면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결정하시겠습니까?...
구약성경에 보면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쫓을 때 다윗이 역으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씩이나 맞게 됩니다. 그런데 그 타이밍이 얼마나 절묘한지 모릅니다. 정말 얼핏 생각하면 '야, 이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절호의 기회야'라고 쾌재를 부를만 합니다. 그런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다윗은 한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만납니다.
하나님이 사울의 군사들을 잠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부하들은 '이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원수 갚을 기회를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자기가 애를 쓰거나 손에 피를 묻힐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냥 말 한마디면, 아니 그냥 모른 채 가만히 있기만 해도 팔자가 뒤집힐 순간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정말 기막힌 찬스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해버려도 좋은 순간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에게 너무도 좋은 그 기회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해버리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칠 수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다윗을 남달리 아끼시고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유리한 순간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해버리려는 유혹을 많이 받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같은 것과 하나님의 뜻은 다릅니다.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회피하고는 욥바 항구로 도망칩니다. 그런데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가 막힌 타이밍입니다. 요나는 얼른 그 배에 올라 다시스로 내뺍니다. 그럼 그게 하나님의 뜻일까요? 그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잘 분별해야 합니다. 상황이 절묘하다고 하는 것과 자기가 따라야할 하나님의 뜻과는 전적으로 다른 겁니다.
우리가 한해의 2/3를 살아오면서 이런 어리석음을 저질렀던 적은 없었는지 한번 되돌아보십시다. 하나님의 뜻을 빙자해서 자신을 합리화하며 살아오지는 않았는지요. 결코 지혜롭고 바람직한 생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윗같은 성숙한 영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깊은 영성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런 영성을 갖지 않고서는 이 세상을 올바로 분별하며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너무나 복잡 다단하고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많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구별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성령이 막으시고 있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단지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고난받을 것을 알려주고 계실 뿐입니다. 바울에게도 그것을 알려주셨고, 또 바울을 아끼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이것은 그 길을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고난을 예고하는 것은 그러니 그 길을 가지 말라고 막는 것과는 다른 겁니다.
그럼 왜 성령께서 이렇게 역사하시는 걸까요? 성령의 그러한 역사는 바울과 그의 동료들의 각오와 헌신을 더욱 다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가는 길은 전보다 더한 그의 헌신과 각오 없이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동료들의 기도와 후원없이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들 그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아는 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도 모든 걸 다 가르쳐 주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냥 모르는 건 모르는 겁니다. 20:22절에 보면 바울은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21:11절에도 보면 성령께서 그냥 막연하게 '체포당하여 고난 당할 것'만을 암시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다 낱낱이 샅샅이 알아서 이루어드리는 게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밖에 모릅니다. 우리는 그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겁니까?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꿈을 당신의 종들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그들의 기도와 헌신을 통해서 이루어가십니다. 그러기에 성령께서는 저들에게 미래에 대한 암시를 통해 저들의 입을 통해 신앙고백이 쏟아지게 만드시는 겁니다.
이 현실 속에서 바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신앙고백을 더듬어 보십시다. 20:22절 이하에서 그는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해도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또 21:13절 이하에서는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면서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각오도 되어 있다'고 제자들을 독려합니다. 그러자 저들 모두는 다같이 한 목소리로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기도하고 이 일에 대한 정리를 하게 됩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제 한해의 2/3를 보내고 1/3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 날의 삶의 목표는 무엇이었습니까? 앞으로 남은 날의 삶의 목표는 또 무엇입니까? 내 꿈, 내 소원, 내 뜻을 이루려 살았습니까? 이제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살아가십시다. 내가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드리고자 살면 하나님은 우리의 꿈을 이루어 주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십니다.
꿈은 내가 꿀 수도 이룰 수도 없는 것으로 하나님이 주시고 이루시는 은총입니다. 그러니 무엇이 참 지혜이겠습니까? 내가 내 뜻을 이루어가는 게 지혜로운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내 뜻을 이루어주시도록 하는 게 지혜로운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후자의 삶을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거느리고 있는 병사 중에 알렉산더 대왕과 꼭 같은 이름을 가진 졸병이 있었습니다. 동명이인이지요. 그런데 이 졸병이 아주 문제가 많은 사고뭉치 고문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졸병의 잘못된 행실로 인해 왕의 이름에 수없는 누가 끼쳐지고 욕이 돌아가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졸병이 실수할 때마다 상관들은 기합을 주면서 '알렉산더, 이놈!'하고 매질을 하곤 하니 그 이름으로 인해 왕에게 늘 불명예가 돌아가곤 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들은 황제가 어느 날 조용히 막사를 찾아옵니다. 마침 그날도 아니나 다를까 졸병 알렉산더는 술에 만취되어서는 물건을 때려부수고 행패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대왕은 조용한 곳으로 그를 불러내어서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자네,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그제서야 정신이 든 병사 알렉산더는 벌벌 떨며 어쩔 줄을 모릅니다. 대왕 알렉산더가 사고뭉치 병사 알렉산더에게 묻습니다. '자네 이름이 분명 알렉산더인가?' '예, 그렇습니다.' '언제부터?' '저의 아버지가 제 어렸을 때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제가 알렉산더가 분명합니다.' '그렇군. 그런데 자네의 그 이름 때문에 내게 누가 돌아오고 내 이름이 욕되게 될 때가 많은가 보더구먼...' 그리고 끝으로 정색을 하고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알렉산더! 이제 내가 네게 명령한다. 네 이름을 바꿔라! 만일 그렇지 않으려거든 네 행실을 바꿔라! 알겠느냐!...'
이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행실을 바꾸든지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우리 믿는 사람의 소행 하나하나에 따라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기도 하고 영광이 돌아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남아있는 이 석달 동안만이라도 주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인생들이 되십시다. 그게 바로 내 뜻, 내 꿈을 이루는 지름길입니다.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것이 여러분과 저, 우리 모두에게 2002년도 남은 날들, 아니 남은 여생의 아름다운 표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외침은 '꿈은 이루어진다'에 앞서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꿈도 아름답게 이루어 질 것입니다.
죽을 것도 각오하였느니라
행 21:1-14 / 김진홍 목사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 하나 해드리면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5년 6월 런던 광장에서 육군 중령 브라운은 시계탑을 보며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렸습니다. 브라운은 우연한 기회에 젊은 여성작가 주디스의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전쟁 속에서 그녀의 글은 한 줄기 빛처럼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작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답장이 2주 후에 왔고, 두 사람은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사랑의 감정이 싹튼 브라운은 주디스에게 사진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사진 대신 질책의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제 얼굴이 보고 싶으신가요? 당신이 말해왔듯이 당신이 정말로 저를 사랑한다면 제 얼굴이 아름답던 그렇지 못하던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요?” 자신의 요청에 이런 반응을 보인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더 이상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나서 귀국하는 브라운은 주디스와 만날 약속을 했습니다. “런던 전철역 1번 출구에서 제 책을 들고 서 계세요. 저는 가슴에 빨간 장미꽃을 꽂고 나갈 거예요. 하지만 제가 먼저 당신을 아는 척 하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이 먼저 저를 알아보고 만약 제가 당신의 연인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모른 척하셔도 됩니다.” 브라운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주디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금발의 전형적인 앵글로 색슨계의 미인(美人)이 나타났습니다. 브라운은 녹색 옷을 입은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넋을 잃고, 그녀를 향해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지나갔습니다. 순간 브라운은 그녀의 가슴에 장미꽃이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6시. 멀리서 가슴에 장미꽃을 단 여인이 아주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왔습니다. 그 순간 브라운의 머리속은 백지장처럼 하얘졌습니다. 다가오는 여인은 못생기다 못해 흉측했습니다. 한쪽 다리를 잃은 그녀는 한쪽 팔만으로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얼굴 반쪽은 심한 화상으로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짧은 순간 브라운은 심한 갈등을 느꼈습니다. ‘그녀가 자신을 모른 척 해도 된다고 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군. 정말 그녀를 모른 척 해야 하나?’ ‘아니야. 원망해야 할 상대는 독일군이야. 이 여인 역시 전쟁의 피해자일 뿐이고… 3년 동안 난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녀를 사랑했어. 이건 변할 수 없어. 이제 와서 그녀를 모른 척 하는 것은 비겁하고 함께 했던 시간을 배신하는 거야.’ 브라운은 그녀에게 다가갔습니다. “잠깐만요!” 그녀가 돌아보자 브라운은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녀의 책을 들어 올렸습니다. “제가 브라운입니다. 당신은 주디스이지요?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브라운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니에요… 전 주디스가 아니고 페니예요… 저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조금 전에 녹색 옷을 입은 여자분에게 부탁을 받았어요. 장미꽃을 달고 이 앞을 지나가 달라는… 그리고 저에게 말을 거는 분을 식당으로 모셔오라고 하더군요.” 식당에 들어서자 녹색 옷을 입었던 주디스가 환한 웃음으로 브라운을 반겨주었습니다. 브라운과 주디스의 가교 역활을 하였던 페니가 “감동적인 사랑의 실화”라는 제목으로 영국 '타임즈 지'에 이 이야기를 게재했고, 곧 영국 전역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저가 설교를 시작하면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하나님도 때로는 우리에게 이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하나님도 우리의 진심을 알고 싶어 하십니다.
축복의 하나님은 때론 시련의 가면을 쓰고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가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때론 아픔의 가면을 쓰고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가 있습니다.
주고 싶어 어쩔 줄 모르시는 하나님은 때론 우리에게 달라고 하실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진심을 보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시험(test)'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언제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하나님께 여러분의 신실한 믿음을 보여드리십시오.
사도행전 21장부터는 새로운 주제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제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21장부터 새롭게 전개되는 주제는 사도 바울이 겪을 핍박과 환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제부터 사도 바울은 죄수의 몸이 됩니다.
이제 본문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오직 복음만이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의 발걸음이 닿은 곳마다의 지명들이 성경에 그대로 기록되었습니다.
행 21:1-3절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본문에 나오는 ‘고스 섬’에는 그 당시 사람들이 믿고 있던 치료의 신 에스쿨라피우스(Aesculapius)의 신전과 그것에 부속된 의학교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우리가 흔히 의학의 원조라고 일컫는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의 고향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이곳에서 약 70마일 정도 떨어진 ‘로도'에는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알려진 높이 150피트의 거대한 태양신 콜로수스(Colossus)라고 불려지는 아폴로 석상이 있었습니다.
물론 바울 일행이 이곳을 지날 때는 이 거대한 석상이 지진으로 파괴된 지 오랜 후였습니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주전 224년에 파괴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찬란한 희랍 문화가 여전히 숨 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바울 일행이 바다라로 가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섬을 바라보며 시리아로 항해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바울 일행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그 지명을 기록한 내용을 읽으면서 의아한 생각을 감출 수 없습니다.
왜 바울은 그 당시 희랍 문화가 숨쉬고, 로마 문화가 움트는 지역을 방문했으면서도, 그가 경험한 그 곳의 문화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느냐는 점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성지 순례 등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그곳의 사람들, 건축물, 음식 대한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본문에서 그런 묘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지나가는 말로도 한마디 하지 않아요.
그 이유가 무엇이지요?
혹자는 바울이 문화 예술적인 안목이 없기 때문이라고 혹평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바울만한 문화에 대한 식견을 가진 사람도 쉽지 않아요!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지요?
그것은 바울의 관심이 오직 복음 전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의 눈에는 오직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그가 입을 열어 말하고자 하는 것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이별할 때 한 ‘고별설교’를 통해서 그의 결심을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이 말씀을 영어 번역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 아니면 나의 생명은 가치가 없습니다.(my life is worth nothing unless I use it for the work assigned me........)”
여러분은 어느 순간에, 어떤 일을 할 때에 여러분의 생명이 가치 있다고 느껴지십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라고 했습니다.
복음전하는 일! 그것은 생명의 가치를 논할 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만이 직장도 의미가 있고, 직업도 의미가 있고, 재산도 의미가 있고, 성공도 의미가 있고, 결혼도 의미가 있고, 학문도 의미가 있고, 잘 난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이 점을 확실히 하십시오.
모든 것은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 구원은 영원합니다.
죤 웨슬리 목사님은 그의 후예들에게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당신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마시오. 이 일로 시간을 보내고, 이 일에 당신이 쓰임 받도록 하시오. 보시오. 당신이 얼마나 많은 설교를 했느냐, 또 얼마나 많은 일에 관심을 가졌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최선을 다해 영혼을 구했느냐 못 구했느냐가 문제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죄인을 데려와 회개시켜 구원받게 하시오.”
2. 죽을 것도 각오하였느니라.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 가면 환난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 차례에 걸쳐 듣게 됩니다.
밀레도에서 예언을 들었을 때입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3-24)”
두로에서 성도들을 만났을 때입니다.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행 21:4)”
가이사랴에서는 아가보라는 예언자가 실제로 행동을 해보이면서 예루살렘에서 될 일을 예언합니다.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행 21:11-13)”
이에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13절을 다 같이 읽읍시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저는 어제 설교를 준비하면서 ‘만일 내가 바울과 같은 입장에 처하게 된다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누군가가 거기에 가면 손해를 보고, 고난을 당하고,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다고 미리 말해준다면 나는 복음을 위하여 그곳에 갈 수 있을까?’
갑자기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모르고 갈 수는 있었습니다.
저가 25년 전 이집트에 온 가족을 이끌고 선교사로 갈 때에는 그 땅이 그렇게 어려운 이슬람지역인지 모르고 갔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이슬람 근본주의가 무엇인지?’ ‘무슬림 형제단이 무엇인지?’ ‘압둘 라흐만이 누군지?’ 모르고 갔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가야한다면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내 믿음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라는 생각에 속상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의 진심을 보려고 때론 손해를, 때론 고난을, 때론 목숨까지 요구하신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진심을 보여 달라고 하시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주님, 번지수가 틀리네요. 저는 저의 소원과 뜻을 이루는데 도움을 얻기 위하여 왔을 뿐입니다. 주님의 뜻은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하실 겁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의 믿음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믿음을 갖게 되길 열망합니다.
3.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행 21:14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뜻과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살림살이에 대한 계획이 있습니다.
자녀 교육에 대한 계획이 있습니다.
목회 계획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길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꼭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출생은 실수도 불운도 우연도 아닙니다.
혹 부모님은 계획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계획하셨습니다.
시139:13-18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 보다 많도소이다.”
그렇습니다.
부도덕한 부모는 있을지라도 부적절한 자식은 없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부모의 계획과 상관없이 태어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목적 없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도 우연히 하지 않으시고, 절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부단히 알려고 해야 합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서로 상충될 때는 내 뜻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일평생 살아가면서 배우는 것은 바로 내 뜻을 주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일입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란 바로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나를 죽이는 고통입니다.
■ 찬송가 425장을 작사한 폴라드(Adelaside A. Pollard)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셨습니까? 폴라드 양은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는 것이 꿈에도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뇨와 신경 계통의 병을 안고 병상에 뒹굴어야만 했습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기도모임에서 옆에서 기도하는 한 할머니의 기도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주님이시여, 저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좋사오니 주님의 뜻과 섭리만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할머니의 기도소리를 듣는 순간 그의 마음이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고집이 부서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집념이 녹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계획이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선교사로 나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것이지만, 거기에 자기의 뜻이 온통 지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비로소 마음에 평안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이때의 경험을 찬송시로 적은 것이 바로 425장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주님 발 앞에 엎으리니 나의 맘속을 살피시사 눈보다 희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병들어 몸이 피곤 할 때 권능의 손을 내게 펴사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온전히 나를 주장하사 주님과 함께 동거함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성도가 마지막 해야 할 말은 바로 이것이어야 합니다.
건강하든 병이 들든, 일이 잘 되든 잘 안 되든, 순풍을 만나든 풍랑을 만나든, 이 땅에 더 살도록 생명을 연장하시든 우리를 그의 품으로 불러 가시든 우리가 해야 할 신앙고백은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과 계획이 우리에게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사랑하는 백성을 절대로 손해 보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사랑하는 백성을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사랑하는 백성을 결코 섭섭하게 대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사랑하는 백성을 차선으로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오직 복음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최선임을 알고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모든 논의를 종결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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