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54
8월19일[연중 제20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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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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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cUxEg92_3o
[서울대교구 송제원 안드레아(사목국 교육지원팀 담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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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재물과 관련해서 때로는 용기도 필요하고, 때로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재물과 관련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늘 고민해야 할 질문 한 가지가 있습니다. 과연 재물이 주님 나라 입국과 영원한 생명을 획득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재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하는 고민입니다.
오늘 복음이 풍기는 뉘앙스는 재물이 천국과 영생으로 가는 길에 큰 장애물이 되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 대한 보다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것입니다.
재물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듯한 저희 수도자들에게도 이 부분은 참으로 큰 고민거리입니다. 적극적인 홍보 활동과 목숨을 건 후원 회원 확보로 막대한 부를 창출하는 공동체들이 있습니다. 그를 바탕으로 엄청난 규모의 수도원과 시설을 건립하고, 본인들도 모르게 서민들은 엄두도 못 낼 럭셔리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물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한 사랑의 실천도 많이 하십니다. 그러나 규모가 확장되면 될수록 청빈과는 거리가 먼 생활로 전락하고 맙니다. 벌써 그 공동체는 천국이나 영생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탁발과 섭리에 의존하기에, 내일 먹을 양식도 확보되지 않고, 매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다면, 거기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과 위화감이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청빈을 사는 데 있어서도 조화와 균형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관건은 재물을 어떻게 모으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대 부자들을 미워하거나 경멸하지 않으셨습니다. 정직하게 일해서 모은 재물은 주님이 주신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그 재물을 통해 가족을 부양하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관대하게 나눌 때, 그러한 재물은 축복이요 선물로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경계하시는 부는 부정한 방법으로 남을 짓누르고 축적한 천박한 부, 절대 나누지 않는 이기적인 부입니다. 그저 한도 끝도 없이 모으기만 모았지, 죽어도 나누지 않은 재물을 주님께서 슬퍼하실 부끄러운 부입니다.
가끔 형편에 맞지 않게 과도한 기부나 헌금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즉시 따로 모시고 가서 차근차근 설명해드립니다. 바야흐로 백세 시대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자식들, 절대 확실한 보험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건강과 노후를 위해 지혜로운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다 퍼주고 나중에 쫄쫄 굶다가 무료 급식소 신세 지면, 누구 책임입니까?
재물과 관련된 오늘 주님 말씀, 때로는 지혜가 필요하고 때로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재물에 너무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지는 않은지? 재물이 주님보다 상위에 위치하고 있지는 않은지 잘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우리 수도자들도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어찌 보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24시간이라는 시간이 재물입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하루하루 우리네 남은 인생이 재물보다 더 중요한 자산입니다. 이 소중한 자산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잘 계획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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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wSELVQVB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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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진리의 차이점: 도움의 은총과 생명의 은총>
오늘 복음에서 돈이 많은 젊은이는 어떻게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될지를 묻습니다. 그는 사실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 압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주소를 잘못 찾아왔다는 식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여기서 예수님은 선한 일에 관련된 분은 아버지 한 분뿐이라고 하십니다. 아버지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데, 생명을 유지하려면 계명을 지키라 하십니다. 이는 구약의 율법입니다.
그러자 그는 구약의 율법을 다 지켜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제 ‘완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냥 생명이 아닌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방법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아직 예수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 복음은 더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 나라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십니다.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하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지으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아리송하기 그지없는 내용이지만, 사실 ‘율법’과 ‘진리’의 차이점을 알면 쉽게 이해가 되는 복음입니다. 요한은 율법과 진리, 그리고 은총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요한 1,17)
이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말씀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44)
구원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우리를 이끄시는 분은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예수님께 이끄실까요? 바로 율법을 통해서입니다. 율법은 창조자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입니다. 이 계명을 실천하는 이들은 그리스도께 옵니다. 물론 여기에서도 말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은총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종을 아들 이사악의 신붓감을 찾으라고 하란으로 보냈습니다. 레베카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라 처음 보는 사람이 물을 달라고 하자 그 하인과 낙타에게 물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러자 하인은 그녀에게 장신구를 달아줍니다.
하인이 율법이라고 한다면 장신구는 은총입니다. 그러나 이 은총은 이사악에게 다가갈 힘을 주는 것뿐이지 그것 자체로 구원은 아닙니다. 구원은 이사악과 혼인하여 가지게 되는 아브라함의 유산입니다.
레베카가 이사악에게 다가오자 이사악은 그녀를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 사라의 처소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사라는 이사악이 어머니를 잃은 아픔을 달래주었으므로 레베카를 사랑합니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레베카의 구원이 완성됩니다.
우리는 레베카와 같습니다. 창조자, 적어도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계명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지키려 할 때 하늘에서는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할 도움을 주십니다. 저에게는 이 도움의 은총이 ‘하.사.시.’였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갈 수 있었고 성체 안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악에게 어머니를 잃은 아픔은 무엇과 같을까요? 왜 당신께 오는 이들을 그 자리에 채워 당신 자신을 위로하려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아픔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피조물들이 배고픈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뜻을 부자 청년에게 전달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진리는 그리스도를 위로하고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하는 계명입니다.
분명 이웃을 돕는 것은 구약의 계명일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필요를 위해 요구하시는 계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그분 안에 머물게 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나에게 붙어있어라!”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위로해드리기 위해 성체조배를 하였습니다. 이 성체조배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하는 저에겐 진리가 된 것입니다. 또한 사제서품 때 성구인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도 저에겐 그리스도께 붙어있게 만드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로하는 계명이고 내가 그리스도 품 안에 머물게 만듭니다.
율법도 도움의 은총이 필요했다면, 진리는 생명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생명은 하느님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옵니다. 만약 제가 그리스도께 붙어있기 위해 따라야 하는 진리에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신 감동이 없었다면 그 계명에 그렇게 목숨을 걸고 붙어있으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부자 청년처럼 그렇게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 안에 머물려면 은총도 필요하여 성사를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부자 청년에게 부족했던 것은 생명의 은총,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아직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언젠간 가능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사막의 교부 성 안토니오도 오늘 부자 청년처럼 부모의 죽음으로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늘 복음을 듣고는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사막으로 들어가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생명의 은총인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생명까지 바치셨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힘이 없다면 진리는 자신 안에서 실현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로 힘을 얻는 진리가 있어서 그것을 실천하여 그리스도께 머물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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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터넷에서 감동을 주는 글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그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먼저 보낸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2009년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퍼져나갈 때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처럼 공포의 대상은 아니었지만 사스에 걸리면 사망률이 높았습니다. 딸이 사스에 감염되어서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딸은 아이를 가진 산모였습니다. 산모의 남편은 딸과 함께 임진 중에 있는 아이도 하늘나라로 보내자고 했습니다. 엄마도 사위의 의견에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의료진은 산모가 2달만 버텨주면 아이는 태어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산모는 그렇게 2달을 버텨 주었고, 드디어 아이는 태어났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서 산모는 모든 힘을 바친 후에 하느님께 갔습니다. 의료진과 아이와 산모를 위해서 기도했던 사람들은 기뻐했지만, 산모의 남편과 산모의 부모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어느덧 중3이 되었다고 합니다.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닙니다. 생사불이(生死不二)입니다.
음악인 노영심씨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노영심씨는 2009년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이 선종하신 후에 추모 음악회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처음 나온 기획안은 예술의 전당에서 음악회를 개최하는 안이었다고 합니다. 비용은 5,000만 원 정도였다고 합니다. 노영심씨는 김수환 추기경님을 추모하는 음악회를 좀 더 의미 있게 하고 싶었고, 전국 교도소를 순회하면서 음악회를 개최하는 안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한 번의 음악회도 좋지만 김수환 추기경님의 추모 음악회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준비 위원회도 그 안을 받아들여서 전국 교도소를 순회하면서 음악회를 하였고, 서울에 와서 사형제 폐지 음악회로 마무리 했다고 합니다. 노영심씨를 잘 모르지만, 노영심씨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도소와 세상도 둘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밀과 가라지가 밭에서 같이 자라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선악불이(善惡不二)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미래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과거도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시간의 차원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존재의 차원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은 바로 지금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 지금 감동이 없다면, 지금 기쁨이 없다면, 지금 감사가 없다면 영원한 생명은 허상(虛像)일 뿐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옷’이라는 이야기를 남겨주었습니다. “그대의 옷은 그대의 아름다움은 많이 가리면서도 아름답지 못한 것은 가리지 못하는 것. 그대는 옷으로 개인의 자유를 얻으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갑옷이 되고 사슬이 됨을 깨닫게 되리라. 그대가 옷을 좀 덜 입고 살을 좀 더 내놓아 태양과 바람을 더 많이 만날 수 있기를. 생명의 숨결은 태양 속에 있고, 생명의 손길은 바람 속에 있으므로. 잊지 말라. 부끄러움은 순수하지 못한 이의 눈을 가리는 방패일 뿐. 순수하지 못한 것이 거기 더는 있지 않을 때, 부끄러움은 오히려 마음의 족쇄, 마음의 얼룩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한, 잊지 말라. 대지는 그대 맨발의 감촉을 기뻐하고, 바람은 그대의 머리카락과 장난치기를 갈망하고 있음을” 오늘 복음에서 한 젊은이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젊은이에게 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살인해서는 안 됩니다. 간음해서는 안 됩니다. 도둑질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해야 합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젊은이는 규율과 율법이라는 옷을 잘 입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예수님께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체면, 가식, 율법이라는 옷까지 벗으라고 하십니다. 욕심, 시기, 질투라는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진정한 자아를 보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자아를 보면 누군가에게 묻지 않아도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보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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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9,16-22: 하느님 나라와 부자 젊은이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16절) 돈 많은 젊은이가 예수께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청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 계명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8~19절) 젊은이는 그 계명들을 지켜왔다고 말한다. 그는 그것 외에 영원한 생명을 위해 또 다른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에게 더 큰 계명이 주어진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1절)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그것을 잃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다. 율법을 따르면서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는 슬퍼하며 떠나갔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의 선택만이 남아있다. 여기서 판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즉, 악을 끊고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그분을 본받고 그분이 가신 길을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따라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이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도움을 주는 사람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영적인 부를 나누어 받아 자신에게 모자라는 것을 채움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해도 영적인 선물은 풍성히 받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일 것이다.
그 젊은이는 이 말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22절) 그는 재산을 아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계명들을 잘 지켜왔다고 했지만, 그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던지 아직은 미성숙한 사람이었다. 젊은이의 비극은 그 자신의 재물을 가지고 이웃에게 봉사하기보다는 그 재물에 더 아까워하고 마음이 집착되어 있다. 당연히 예수께 등을 보이지 않을 수 없으며, 무엇인가 둘 중의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데, 결국 재물을 포기할 수 없을 때, 오늘 복음의 젊은이처럼 슬픈 얼굴로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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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복음이 잘 이해되지 않아 앞뒤로 다시 보았습니다. 십계명뿐만 아니라 이웃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라는 계명까지 지켰는데 무엇이 아직 불완전하였을까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것이 그 계명들을 모두 지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그는 왜 따라나서지 못하였을까요?
예수님을 따라오라는 말씀이 어려웠을 수도 있겠지만, 복음서에서는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22)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어려웠던 것은 그 재물을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그에게, 많은 재물을 가진 채 평생 자선을 베풀며 살라고 하였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면 이미 그렇게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요구하신 것은, 지금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흔들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부자 청년은 그리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가진 재물이 많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가진 것이 없었다면 겪지 않았을 어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가진 것이 많고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선한 일을 해서 하늘 나라를 얻으려고 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것 없이 어린이처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재물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가졌다 하여도, 그것 때문에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19,21) 가지고 있는 것을 하늘 나라를 위하여 모두 내놓고, 빈 몸으로 길을 나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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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먼저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16-22)
1) 여기서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는, “그의 ‘재물에 대한 애착심’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입니다. 그는 지상에서는 많은 재물을 소유하면서 살기를 원하고, 하늘나라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기를 원했는데 예수님께서는 둘 다 누릴 수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 그 생명만 추구해야 합니다. 재물이든 다른 무엇이든 간에 허무한 것들에 마음을 두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가 슬퍼한 것은, 둘 다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즉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슬펐던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는 자기 자신이 너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서 슬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떠나갔다.’는 말은,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그냥 가버렸다는 뜻은 아니고,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을 나중으로 미루었다는 뜻입니다.
2) 재물을 많이 가진 부자들이 재물에 대한 애착심도 큰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긴 한데, 가진 재물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별로 다르지는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가진 것이 없어서 오히려 더 재물에 대해 집착하고, 더 많이 욕심을 부리기도 합니다.
그러니 “부유한가, 가난한가?”를 묻기 전에 먼저, 즉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는가? 가지고 있는 재물이 없는가?”라고 묻기 전에 먼저,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재물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0-23) <그런데 이 말씀은, “재물을 악하게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이 나쁜 것이지 재물이 나쁜 것은 아니다.”는 아닙니다. 악한 일의 원인은 악한 마음이지만, 재물 자체에도 사람을 지배하는 악한 마성(魔性)이 숨어 있고, 그래서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끊어버리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3)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삶’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나를 따라라.”라는 말씀입니다. <재물을 모두 버린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소유’나 ‘청빈’을 강조한 가르침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무소유나 청빈을 실천한다고 해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빈손’이나 ‘빈 몸’이 아니라, ‘믿음’과 ‘따름’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 유다도 다른 사도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빈손’과 ‘빈 몸’으로 따랐을 것입니다.
유다가 언제부터 마음이 돌아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을 배반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그는 겉으로 보기에만 ‘빈손’과 ‘빈 몸’이었을 뿐이고, 마음속에는 탐욕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요한 12,6) 그 탐욕은 그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4) 이야기의 첫 부분에 있는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라는 말씀은, “나를 ‘사람’으로만 생각하면서 어찌하여 나에게 ‘하느님의 선’과 ‘영원한 생명’을 묻느냐?”라는 뜻이고, 이 말씀은, 당신을 믿는 일이 먼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유대인들도 십계명은 잘 지켰습니다. 신앙과 종교가 아예 없는 사람들도 착하게 살고 불우이웃 돕기도 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나라는 곧 예수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만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립니다.>
물론 예수님을 몰라서, 또는 예수님을 알 기회가 없어서 못 믿은 경우에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면서도 믿기를 거부한 경우에는, 예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기를 그 자신이 거부해서, 그 생명을 못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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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 (19,21)
늘 살아오면서 직면하는 의문이지만, 정말 주님을 따르고 주님과 함께 살면서 내게 무엇이 부족하기에 아직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가, 라는 의문이 듭니다. 그토록 주님께서 많은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사랑으로 나의 잘못을 용서해 주심을 느끼고 살아가는데도, 그리고 수도원에서 늘 주어진 모든 일과표를 따라 충실히 살아가는데도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내적 텅 빔과 공허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님, 제게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의 부자 청년의 의문,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19,20)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은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되리라.”(19,21)라는 말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를 점 더 명확하게 알아듣기 위해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6,20~21) 라는 말씀을 전제하고 들으면 더 좋겠지요. 그런데 이 구절은 통상적으로 특별 성소에 대한 전형적인 초대로 이해되어왔지만, 이는 지나치게 협의로 이해한 측면이 강하다고 봅니다. 이 내용은 바로 모든 인간의 실존이며 보편적인 삶의 문제이기에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요건입니다.
오늘 복음의 청년에게서 느껴지는 인상은 그의 질문에 이미 내포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의 질문은 지극히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19,16)라고 묻습니다. 무슨 일을 해야! 곧 그의 관심은 존재의 측면보다 활동과 소유의 관점에서 묻고 있다는 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마치 자신의 행위나 소유로 취득하고 획득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지극히 교만하고 당당한 태도를 제쳐두고 대견하게 여기시며 그에게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19,17)하고 그의 질문에 동일한 눈높이에서 답변하십니다. 답변의 근저에는 선이란 무슨 일이나 활동이 아니고 어떤 분 곧 존재라고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그 부자 청년의 잘못된 관점을 선한 마음에서 수정해 주십니다. 곧 요점은 선한 일이 아니라 선한 분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이러한 그릇된 관점은 단지 부자 청년만이 아니라 우리 의식 또한 별반 차이가 없으리라 봅니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영원한 생명, 구원을 취득하거나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은총을 누릴 때 선물처럼 주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가끔은 망각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분명 젊은이가 한 질문은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으로 고쳐 답변하신 의도를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고 내리시는 선물이지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있고 획득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 예수님은 계명을 지켜라, 고 언급하시는데 그 계명이란 모든 사람(=유다인들)이 익히 알고 있는 십계명의 일부에다 이웃사랑을 덧붙여서 말씀하십니다. 이에 그 젊은이는 명쾌하게 그런 계명들을 다 지켜왔노라고 응답하면서 이에 대화를 끝내지 않고, 그럼에도 제게 무엇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는 곧 그 젊은이의 내면 깊이 내재해 있는 보다 더 초월적인 그 무엇을 향한 갈망에서 기인한 물음이라고 예수님도 이해하시고 받아들이시려는 듯싶습니다. 물론 그 질문의 밑바닥에는 완벽하고 완전해지고 싶은 욕심이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그 젊은이의 열정과 젊음의 표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대화의 결과 예수님께서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19,21)라는 회피할 수 없는 최종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그 젊은이에게 던집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그 젊은이의 호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슬퍼하며 떠나갔다고 성서는 슬픈 결말을 보여줍니다. 소유욕에 대한 집착이 과하긴 하지만, 그 젊은이가 자신이 그토록 추구하던 영원한 생명과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내적 갈망이 본의 아니게 자신이 가진 재산 때문에 슬퍼하며 떠났다는 사실이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가장 장점이며 디딤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기실 가장 큰 장애물이자 걸림돌이 되리라고 생각이나 했었을까요. 아, 이게 인생이구나 싶네요. 그토록 추구하던 것을 목전에 두고서 돌아서야 하는 그 처지라니.
예수님은 그 젊은이의 선한 의도를 꿰뚫어 보셨기에 그에게 다소 충격적이고 역설적인 제안을 하셨던 것이라 봅니다. 그것은 그 젊은이가 보다 완전한 존재를 꿈꾸고 있다고 보았기에 지금껏 몸에 밴 관습이나 타성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의식과 행동양식을 보여 달라고 초대했지만, 그는 결국 장애물을 넘지 못하고 슬퍼하며 떠나갔던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 갈망하던 완전한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까닭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어쩜 머리에서 마음으로 그리고 온 존재로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겪어야 하는 진실은 우리 내면에 깊이 뿌리박힌 애착 곧 나와 나의 소유물 그리고 나의 꿈과 이상, 내가 살아온 세상과 관계에 억눌리고, 묶이고, 사로잡혀서 그런 모든 것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끊어버리지 않고서는 추구할 수 없는 삶이라, 는 것입니다. 어쩌면 단지 그 젊은이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겪어야 하고 깨달아야 하는 우리의 내적 현실이며 상태입니다. 신앙생활 혹 제자의 삶은 이론이 아닌 실천으로, 머리가 아닌 몸으로, 상상이 아닌 체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젊은이는 우리 내면을 비추어 주는 거울과 같은 존재인가 봅니다. 교황님께서 수도자들과 만남에서 강조하신 면도 가난의 삶을 살도록 촉구하셨습니다. 아 그 부자인 젊은이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궁금하네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1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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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유대인들은 부와 재산은 하느님께서 주신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부와 재산을 가지는 것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 어떤 역할을 하리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오늘 <복음>의 부자 청년처럼, 무슨 선한 일을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오 19,1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켜라.”(마태오 19,17)
이는 생명을 얻는 데는 선한 일을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오 19,20) 하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오 19,21)
율법을 지키는 것이 생명으로 가는 길의 시작은 되지만, 완성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곧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더 나아가 행해야 할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완전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질병이 없고 건강한 사람, 실수하지 않고 죄짓지 않는 사람, 악습이 없고 상처주지 않는 사람, 상처가 없고 성숙하고 교양 있는 사람, 능력 있고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완전무결한 사람,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일까?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당신께로 와서 따르라고 하십니다. 곧 재물의 노예가 되지 말고, 받은 복을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복을 받은 이는 복을 주는 이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팔라”, “주라”, “오라”, “따르라”는 네 가지를 실행하라 하십니다. 이는 산상설교에서 말하는 십계명을 넘어, 이웃사랑을 넘어, 원수사랑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는 것까지 따르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부자 청년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자기 자신을 가리고 있는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기고, 그의 실상이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사실, 부자는 자신의 영생을 위해 죄짓지 않고 율법을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가 율법을 지켰다 하나 단지 자신을 위하여 죄를 짓지 않았을 뿐,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지는 안했던 것입니다. 곧 사랑을 행하지는 안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을 넘어서, 자신을 비우라고 하십니다. 나아가서 자신을 비우는 것을 넘어서, 자신을 나누고 선을 실행하라고 하십니다. 곧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라고 하십니다.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일, 바로 이것이 당신을 따르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마태오 19,21-22) 우리도 오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따라 나서는지, 아니면 머뭇거리고 주저하거나 슬퍼하고 되돌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들려주신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말씀을 따름으로써,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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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오 19,21)
주님!
주님께서는 저의 허울을 벗기십니다.
가리고 있는 겹겹의 옷을 벗기시고, 벌거숭이로 만드십니다.
제 자신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위해서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제 이기심의 옷을 벗기십니다.
이기심과 자애심을 버리고, 가진 것을 다 나누게 하소서.
나아가, 낮은 이를 섬기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던 당신을 위하여 하고, 당신께 찬미와 영광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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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재산이 넉넉하고 지위가 높음을 ‘부귀’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부귀를 누리고 싶어 합니다만, 부귀는 칼날이나 창과 같아서 조금이라도 방종하게 굴면 사람의 뼈와 살을 베고 찌릅니다.
그런데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역사책 『설원』에는 부귀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부’는 만족할 줄 아는 데 있고 ‘귀’는 물러남을 구하는 데 있다.” 만족하고 물러날 줄 아는 지혜만 있다면 부귀를 누리는 사람들 모두 예수님을 따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 예수님께 질문을 드린 한 젊은이가 모든 계명을 잘 지켰음에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주님 말씀에 슬퍼하며 떠납니다. 사실 젊은이의 질문은 두 가지 다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하는가?’였고, 둘째는 ‘아직도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이 두 번째 질문을 스스로 되묻고 생각하도록 하십니다. ‘내게 부족한 것이 아니라 차고 넘치는 것이 무엇일까?’로 말입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 많은 무엇이 우리를 차지한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자유의 한계를 깨닫고, 우리의 욕망이 무엇인지 올바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사랑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라는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의 말을 인용하시면서 ‘친절한 사랑은 오로지 내어 주고 섬기는 데서 오는 기쁨을 체험하게 한다.’(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94항 참조)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구약 성경의 시편도 이 ‘부’와 ‘귀’를 노래합니다.
“누가 부자가 된다 하여도, 제집의 영광을 드높인다 하여도 불안해하지 마라. 죽을 때 그 모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으며, 그의 영광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 영화 속에 있으면서도 지각없는 사람은, 도살되는 짐승과 같다.”(시편 49[48],17-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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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세속적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만큼 예수를 따른다.>
갈릴래아에서의 선교활동을 마치신 예수께서는 유다지방을 두루 거쳐 예루살렘으로 상경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 마태 19,1-20,34)
예수님을 따라 열두 사도들은 물론, 여인들까지 포함된 큰 제자단과 많은 사람들, 그리고 어린아이들까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이 사람들은 예수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며, 마지막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짐작이나 하고 있을까?
마태오는 지난 토요일,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신 내용의 복음(19,13-15)에 이어 오늘과 내일 복음으로 ‘예수추종’에 관한 가르침(19,16-30)을 들려준다. 예수추종에 관한 대목의 가르침은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① 부자청년이 재산을 버리지 못하여 예수추종을 거부했다는 이야기(16-22절),② 부자의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단언(23-26절), ③ 예수추종에 대한 보상에 관한 대담(27-30절)이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주제와 한 가지 결론을 담고 있는데, 처음 것이 나중 것에 종속되고, 예수추종으로 종결된다고 하겠다. 그 과정은 부자청년의 질문을 계기로 전개된다.
첫 번째 주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계명을 준수하라는 것이고, 두 번째 주제는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원전(原典)이 되는 마르코복음의 같은 대목(10,17-22)과 비교하여 보면 마태오의 의도를 잘 읽을 수 있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원전을 약간 수정하였다.
이야기의 발단은 한 젊은이가 예수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선행(善行)에 대하여 질문한다.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조건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서, 십계명(출애 20,12-16; 신명 5,16-20) 중에서 부모를 공경하라(제4계명), 살인하지 말라(제5계명), 간음하지 말라(제6계명), 도둑질하지 말라(제7계명), 거짓 증언하지 말라(제8계명),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열거하신다.
마지막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레위 19,18)은 마르코에 없는 것을 마태오가 첨가하였다. 그 이유는 이미 산상설교(마태 5-7장) 안에 들어있다. 산상설교에서 이웃사랑이 직접 언급된 바는 없지만, 이웃사랑은 예수님의 대당명제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충분히 부각되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율법학자와의 대담에서 하느님사랑(신명 6,5)과 이웃사랑(레위 19,18)의 계명을 율법서의 가장 큰 계명으로 천명할 것이다.(마태 22,34-40)
청년이 이 모든 계명들을 어릴 적부터 잘 지켜왔다고 하니, 그에게 영원한 생명은 보장된 셈이다. 그러나 영생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일까?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하겠습니까?”(20절) 라는 청년의 질문이 계속된다.
마르코는 이 대목에서 예수께서 청년을 보시면서 “너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10,21)고 말씀하신다. 유대교에 의하면 사람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때 완전하게 된다. 예수께서도 산상설교에서 6개의 대당명제 끝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고 말씀하셨다.
여기서의 완전함은 유대인들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며,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율법의 근본정신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시는 인간의 완전함은 단순한 계명 준수를 뛰어넘는 것이다. 즉, 계명 준수와 함께 선행과 추종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복음에서 보듯이 부자청년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난 뒤에 예수추종을 요구받는다.(21절) 그러나 그는 부자였기 때문에 풀이 죽어 떠나가 버린 것으로 오늘 복음은 끝난다.(22절)
계명을 지키며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다. 우리는 재산을 많이 가진 부자로서 계명을 지키며 살아 갈 수도 있고, 큰 재산 없이 가난한 자로서 계명을 따라 살아 갈 수도 있다.
중요한 사실은 한번 계명을 지킨 것으로 영생을 보장받거나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푼다고 해서 당장 완전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계명 준수와 선행은 종말론적인 영생과 완전함을 위해 평생을 두고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덕행이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과 완전함은 미래지향적이다.
부자청년은 지금까지 계명을 잘 지켜왔다는 결과로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은 듯하지만 그가 살아있는 동안 계속해서 계명을 준수해야 하는 조건이 남아 있다.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 것도 신나는 일이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더욱 신나는 일이다. 완전함은 최종적으로 예수를 추종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 추종은 또다시 역으로 세속적 소유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세속적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만큼 예수를 추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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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동네 산책을 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비둘기, 까치 등의 새를 쉽게 볼 수 있는데, 사람이 바로 옆을 지나가도 도망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둘기, 까치가 애완동물처럼 키우는 것도 아닌데, 야생동물이라 할 수 있는 이 새들은 도망가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 새들도 사람들이 자기를 해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섬에 들어가기 위해 배를 탔는데 기러기가 계속 배를 쫓아옵니다. 사람들은 갑판에 모여 기러기를 향해 새우깡을 던져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새우깡에 맛을 들인 기러기는 다른 먹잇감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또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노력 없이 편한 방법으로 먹이를 구하는 그 모습이 걱정되었습니다. 실제로 먹이 주는 사람이 없어져서 자생능력이 없어진 기러기들이 죽는다는 뉴스 기사를 본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나 지인에게 계속 도움만 받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두 번이야 도울 수 있겠지만, 계속된 도움 요청이 있다면 서로 상처를 받게 됩니다.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계속 도와주어야 하느냐며 화를 낼 수 있고, 또 반대로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도움 요청을 외면할 수 있느냐면서 화를 내면서 상대에 대한 상처의 골이 커지기만 할 것입니다.
도움에만 의존하면 스스로 설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무조건 우리의 도움을 다 들어주신다고 믿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성장을 위해 당신 손길을 거두시기도 합니다. 진짜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지키면 된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밖에 더 필요한 것이 없는지 다시 묻지요.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재산을 포기하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그가 슬퍼하며 주님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계명을 모두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열심히 살고 있던 젊은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예수님께 자랑하듯 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본인의 결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젊은이가 예수님을 곧바로 따를 수 있도록 재산을 모두 없앨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알아서 모든 것을 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야 그가 진정으로 성장하면서 주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결단에 대해서 묵상했으면 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는 과연 어떤 결단을 하고 있을까요? 혹시 알아서 해달라면서 자신이 선택하고 해야 할 것을 주님께 미루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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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를 옭아매는 것>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니면 흐뭇합니다. 언제든지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쓰지 않아도 든든합니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저는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닙니다. 평상시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간혹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을 알게 되면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주머니를 비워놓던 사람은 그런 것에 자유롭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답을 알려 주셨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19, 21). 그러나 젊은이는 답을 얻었으면서도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답을 얻었으면 그대로 해야 합니다. 답을 얻었으면서도 그대로 하지 않아 하늘의 보화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본인의 책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면서 길을 알려 주시고 동행하여 주시지만, 본인이 거부하는 데는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부자에게는 돈이 전부입니다. 그의 재산은 곧 목숨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은 단순히 자선을 베풀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이 있으니 문제입니다. 사람 나고 돈 났다는 것을 알지만 돈에 매이는 것이 사람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아프리카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는 젊은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돈 때문에 형제 부모도 없는 사람처럼 싸우는 사람들의 추한 모습을!
주목할 것은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이라는 말씀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공로를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공로로 구원을 얻지 않고 주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재물로부터의 자유를 갖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님을 우선으로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학식도 명예도 권력도 재물에 속합니다. 그러한 것을 지니면 지닐수록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 것은 다 재물로 볼 수 있습니다. 훌훌 털어버리고 먼저 따름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더 큰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그리고 항상! 주님”을 앞세울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5). 버림으로써 얻는 신비에 눈뜨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이라는 것은 또 다른 무엇으로부터의 옭아매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만을 갈망하여 세상 것에 자유로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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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나라 가까이>
마태오 19,16-22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그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나라 가까이>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마태 19,21)
나에게서
너에게로
다가가는
그만큼
하느님나라에
더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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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생명’이신 주 예수님스>
-나를 따라라-
어제 주일 강론에서 저는 하늘에서 내려 온 생명의 빵, 예수님을 선택할 때, 예수님께 선택될 때 참행복임을 역설했습니다. 참행복에 예수님을 대체할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생명의 빵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참행복이요 모든 행복이 뒤따를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이를 요약하여 흥겹게 노래로 고백한, 모두가 좋아하는 어제의 화답송 후렴 시편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사람!”(시편 34,9)
오늘 복음도 어제의 연속선상에 있는 듯 합니다. 어떤 젊은이가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이 질문은 옛 사막의 스승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공통적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의 내적 갈망을 대변한 어떤 부자의 물음입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저는 이 물음에 속으로 웃었습니다. 바로 생명의 빵이자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이런 질문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접근이 참 치밀합니다. 어떤 부자의 문제가 무엇인지 꿰뚫어 통찰했음이 분명합니다.
우선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 했을 때 어떤 젊은이는 당당히 고백합니다. 참으로 훌륭한 신자임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적 목마름은 여전할 뿐입니다. 다음 오고가는 대화가 오늘 복음의 중심입니다.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바로 사막의 성 안토니오를 결정적으로 회심케한 예수님의 말씀이요, 모두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제자들이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많은 재물을 지니고 있었기에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합니다. 과연 이 결정적 시험에 통과할자 몇이나 될런지요. 외적으로 계명을 잘 지킨 삶이었지만 삶의 중심에는 주님이 아닌 재물이 자리잡고 있었던 부자 젊은이였습니다.
요약하면 재물에 소유되어 갈 길을 잃은, 삶의 목표와 방향을 잃은 젊은이였습니다. 이보다 더 큰 영적 재난, 불행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는 여정에 초대받은 젊은이인데 안타깝게도 그 결정적 구원의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계명을 잘 지켜서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자기를 버리고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는 것이 구원의 길임을 몰랐던 젊은 부자였습니다. 더 이상 내적성장은 좌절되었고 영원히 영적 목마름을 지닌채 살아가게 된 젊은이입니다. 바로 젊은 부자의 예화를 통해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과연 날마다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는 삶에 충실한지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어라’, ‘나를 사랑하라’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따라라’ 명령하십니다. 소유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젊은 부자는 주님을 따르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자 청년처럼 누구에게나 똑같은 포기를 명령하지 않습니다. 각자 나름대로 날마다 평생 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면 됩니다. 여기서 다시 인용하는, 늘 나눠도 늘 새로운 제 자작 좌우명 고백 기도시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은 주님을 따르는 이 길 하나뿐이겠습니다. 재물을 소유하되 재물의 종이 아니라 주님의 종이, 주님의 제자가 되어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묵묵히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신 생명의 빵,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버림과 따름의 여정은 그대로 회개의 여정과 일맥상통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는 예수님은 물론 참된 제자의 예표가 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생애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을 나타내는 상징이 됩니다. 주님은 에제키엘 예언자의 아내의 죽음을 상징으로 삼습니다. 두 말씀이 그대로 하나로 이어집니다.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네 눈의 즐거움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너에게서 앗아가겠다. 너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마라.”
이어지는 모든 말씀이 주님의 처사에 동요하지 말고 주님의 제자답게 묵묵히, 담담히 받아들이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상징하는바 우상들을 섬기며 많이도 탈선했 죄를 지었던 이스라엘의 불행입니다.
“나 이제 자랑스러운 힘이고 너희 눈의 즐거움이며 너희의 영의 그리움인 나의 성전을 더럽히겠다. 너희가 두고 떠나 온 너희 아들딸들도 칼에 맞아 쓰러질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참된 제자의 예표가 되는, 부단히 주님께 돌아와 주님을 따르라는 회개의 예표가 되는 에제키엘 예언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모시고, 주님을 따르는 회개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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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기껏 사랑하고>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오늘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몇 가지 조건이랄까 단계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른 복음에선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라고 달리 말씀하십니다.
둘을 합치면 완전한 사람이란 부족함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고,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부족을 하나하나 메꿔가야 할 것입니다.
첫 번째로 십계명의 대인 계명 준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십니다. 대인 십계명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 외에 나머지 계명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처럼 다 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이것도 이웃 사랑이긴 하지만 소극적이고 그래서 부족하지요. 그래서 대인 십계명을 다 지켰다는 부자에게 더 적극적인 사랑을 주문하십니다.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이 말씀만 가지고는 팔아서 다 주라는 것인지 일부만 주어도 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폐나 해를 끼치지 않는 정도의 사랑이 아니라 이웃 특히 가난한 이웃에게 보탬이 되는 적극적인 사랑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완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직 아닙니다.
이것을 다 했어도 마지막 한 가지 곧 주님을 따르는 것, 이걸 하지 않으면 작은 것 하나 놓친 것 정도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는 불완전입니다
사실 앞의 모든 것 곧 대인 십계명의 준수, 자기 소유물의 포기, 이웃을 위한 자선,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해야 하고, 그래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 곧 주님 따름, 이것을 위한 것이니 아무리 앞의 것들을 모두 다 했어도 이것을 하지 않으면 다 헛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잘못은 가난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을 않은 것이고, 가장 잘못한 것은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것은 다 천국 가기 위한 것이고 천국 가기 위한 것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단한 사랑을 했지만 인간적인 세상 사랑에 그치는 사랑, 그래서 기껏 사랑하고도 천국에 가지 못하는 사랑을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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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
<완전한 사랑!>
오늘 복음(마태19,16-22)은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지켜야 할 계명들인 이웃 사랑의 계명들을 알려주십니다.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 19,20)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참으로 이상합니다. 젊은이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많았던 부자 젊은이가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 물었고, 예수님께서는 그 물음에 답을 주셨는데, 그 젊은이는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정말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가?'
부자 젊은이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정말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지 않고, 머리로만 생각으로만 영원한 생명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죽음의 또 다른 의미'는 '내가 잡고 있는 것들, 소유하고 있는 것들과의 완전한 이별, 완전한 내려놓음'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또 다른 의미'는 '완전한 사랑실천'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랑'인 '또 하나의 예수 사랑'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따라가도록 합시다! 그래서 그 너머에 있는 영원한 생명에로 좀 더 가까이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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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마태 19, 21)
나누는 법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삶의 방향 전환은
언제나 지금
이순간입니다.
많은 재산이
오히려 가장
소중하신 주님을
놓치게 만듭니다.
젊은이의 많은 재산은
가야할 방향마저 잃게
만듭니다.
소유욕과 집착은
또 다른 소유욕과
집착으로 나갈 뿐입니다.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며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 똑 같은
사람들입니다.
삶과 죽음을
만나게 됩니다.
무엇이 본질인지를
깨닫게됩니다.
재산과 재물에
이용당하지
않아야 합니다.
재산과 재물이
아무 것도 할 수없도록
우리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나눔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올바른 나눔은
우리를 욕심과 잡착에서
나오게 합니다.
우리모두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없어질 것이 아닌
영원한 것에서
우리 본모습을
되찾아야합니다.
나눔은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참되게 사는 길이
나눔이라는
사랑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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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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