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해가 가고 새해가 오지만 세상사는 해에 따라 다르지 않다.
먹고 사는 문제로 늘 팍팍할 뿐이다.
꿈속에서 배가 부른 일 어쩌다 좋은 일을 만나 기뻐하고 슬픈 일을 당하여 울기도 하지만,
지나고 나면 모두가 허망하다.
굶주린 사람이 꿈속에서 배부르게 밥을 먹으면
기뻐서 노래하면서 그것이 꿈이 아닐까 의심을 하다가 깨고 나면 더욱 배가 고플 뿐이다.
세상사가 바로 그런 것이다.
을해년(1635) 12월 내가 양양부사(襄陽府使)의 명령을 받았다.
이 때 새로 국상(國喪)이 있어 조야(朝野)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기에 혼자 편안하게 행장을 꾸릴 겨를이 없었다.
해가 바뀌기 사흘을 남기고 마침내 출발을 하여 세 밤을 자고 홍천(洪川)의 촌가에 이르렀다.
곧 병자년(1636) 정월 초하룻날이었다.
초가 서너 칸으로 된 집은 제도가 비록 초라하였지만 창과 벽이 제법 온전하여 훈훈한 기운이 사람을 감쌌다.
부엌과 온돌, 뜰이 깔끔하여 한 점 티끌도 없었다.
나지막한 울타리가 집을 에워싸고 있는데 가시나무를 섞어 심어놓았다.
남향으로 출입하는 문이 나있는데 섶을 엮어 만든 문짝도 달려 있었다.
방 바깥에는 헛간 몇 칸이 있는데 곡식 10여 말을 쌓아두었다. 그 곁에 패놓은 땔감이 있어 개울물을 길어다 밥을 지었다.
나는 돌아보고 탄식하였다. “즐거운 인생이구나.
저들은 우리가 거느리는 하인이 많고 접대를 두로 잘 받는 것을 보고서 모두 부러워하고 경외하고 있구나.
저들이 우리가 도리어 이처럼 저들을 부러워한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처와 첩이 함께 대꾸하였다. “그러하네요. 부러워하는 것은 정말 그렇지요.
그러나 저들은 비록 그다지 부유하지는 않지만 안정된 재산이 있어 끼니를 이어나갈 방도가 있지요.
우리들은 험한 땅을 딛고서 벼슬하는 당신을 따라다니고 있으니, 이는 한 번 배를 불리고자 하기 때문이지요.
배를 불리고 나면 바로 쓸쓸하기가 예전과 한가지랍니다. 이것은 꿈속에서 배를 불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어요?”
내가 말하였다. “그 말대로라면 정말 꿈속에서 배를 불리는 것이겠구려.”
이에 느낌이 있어서 이를 설(說)로 짓고는 제목을 꿈속에서 배를 불린다는 뜻에서 몽포(夢飽)라 이름 붙였다.
그 설은 이러하다.
예전에 가난한 사람이 살았다. 한달에 겨우 아홉 번 밥을 먹었고 나머지는 늘 굶주렸다.
남들이 일년 내내 배 불리 먹는 것을 부러워하였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밤 홀연 꿈을 꾸었다.
성대한 밥상을 받아 배부르게 먹었다. 뒤에는 밥과 떡이 넘쳐나고 앞에는 먹거리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배부르게 먹어 기뻐하고 배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불렀다. 도리어 진짜 배가 부른 것이 꿈속인 것 같았다.
그러다 홀연 깨어나 보니, 곧 한 바탕 꿈이었다.
처음 꿈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뱃속이 그래도 든든한 듯하였지만 조금 지나자 허기가 더욱 심해졌다.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이 전보다 배가 되었다. 차라리 꿈을 꾸지 않은 것이 더 나을 성 싶었다.
그러나 굶주리나 배부르나 한번 지나고 나면 모두가 허망하다.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꿈속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
아, 배를 불리는 방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제 힘으로 밥을 구해 먹어 배를 불리는 경우가 있고, 남에게 얻어서 배를 불리는 경우가 있다.
제 힘으로 밥을 구해 먹어 배를 불리는 경우는 그 배부른 것이 항상 계속되지만,
남에게서 얻어서 배를 불리는 경우는 그 배부른 것이 항상 계속되지 못한다. 어찌해서 그러한가?
남에게서 얻는 경우는 주거나 빼앗는 일이 남에게 달려 있고,
제 힘으로 밥을 구해 먹으면 굶주리든 배부르든 자기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라의 은혜를 입어 한 고을을 다스리는 일을 여러 번 하였지만, 한 번도 내 힘으로 밥을 먹은 적이 없다.
오직 벼슬하여 녹봉을 받는 것에 의존하였으니, 바깥에서 얻은 것이라 하겠다.
이 때문에 벼슬을 얻으면 배가 부르지만 얻지 못하면 굶주리게 되었다.
십수 년 이래로 여러 번 배가 불렀고 여러 번 굶주렸다. 여러 번 꿈을 꾸었고 여러 번 꿈에서 깨어났다.
굶주리기도 하고 배부르기도 하였고, 꿈을 꾸기도 하고 꿈에서 깨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다 나이가 일흔이 가까워졌다.
앞으로 살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굶주린 것과 배부른 것을 모두 하나의 커다란 꿈으로 돌릴 수 있을는지.
굶주리는 것과 배부른 것, 잃고 얻는 것을 마음에 개의치 않게 되기를 바란다.
아, 이제야 나는 이런 것을 면할 줄 알겠구나.
* '장자(莊子)'의'제물론(齊物論)'에서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그것이 꿈인 줄도 모른 채, 꿈속에서 또다시 꿈인지 따지다가 깨고 나서야 꿈인 줄을 안다.
크게 깨어난 뒤에야 우리 인생이 커다란 하나의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였다. *
원문
乙亥季冬之月。余受襄陽之命。于時新遭國恤。朝野遑遑。不暇治行自佚。隔歲三日而遂行。越三宿到洪川村舍。
卽丙子元日也。草屋可三四間。制雖朴陋。而窓壁稍完。煖氣襲人。竈突庭除潔凈無纖埃。短籬纔繞屋而雜以荊棘。
向南開出入之所。而用柴荊焉爲扉。房外有虗架數間。積粟十餘斛。傍有折薪。汲澗而炊。余顧而歎曰樂哉生涯也。
彼見吾騶卒之夥。供頓之備。必歆艶而敬畏之矣。渠安知吾反羡渠之至於斯耶。妻妾齊應曰然。羡之誠是也。
彼雖不甚豐。其有恒産而有可繼之道者乎。吾輩跋履險阻。從子于官。盖將以一飽也。旣飽而還。蕭瑟猶夫前也。
此與夢飽何異。余曰若說然。眞夢飽也。感而爲之說。因以夢飽命篇。昔有窶人。三旬纔九食。餘日長飢。
羡人腹飽卒歲者。盖有年矣。忽一日夜。夢餉大饌。飯甑溢於後。飣餖羅於前。舍哺而嘻。皷腹而歌。
反以眞飽爲夢。忽復蘧然而悟。乃一夢也。其始覺也。腹猶夥然也。俄而饑益甚。思食倍於前。不如不夢之爲愈也。
然飢飽一過之後。都是幻也。未知何者爲眞。何者爲夢也。噫。飽之道有二焉。有食其力而飽者。有得於人而飽者。
食其力而飽者。其飽也有常。得於人而飽者。其飽也不常。何者。得於人者。與奪在於人。食其力。飢飽在於己也。余受國恩。
屢享專城之奉。而曾不食其力。惟官食是靠。盖得於外者也。故得之則飽。不得則飢。凡十敎年來。幾飽而幾饑。幾夢而幾覺也。
或飢或飽。或夢或覺。而年已迫七十矣。從今以往。能復幾何日而飢與飽同歸於大夢也歟。庶不以飢飽得喪嬰其懷。
噫。而今以後。吾知免夫。
- 박홍미(朴弘美),관포집(灌圃集) 中에서
해설
조선 중기의 학자 박홍미(朴弘美, 1571-1642)는 보통의 문인처럼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승문원 정자로 출발하여 사헌부와 홍문관 등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나갔다.
도승지도 지내고 참판에도 올랐다. 이러니 벼슬운이 그다지 나빴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일상적인 삶을 살다가 1635년 65세의 나이에 양양부사에 임명되었다.
세밑에 임명이 된 데다 마침 국상이 있어 화려한 행장을 꾸리지 못한 채 강원도로 향하였다.
1636년 1월 1일 홍천에 이르렀다.
한 시골 사람의 집에 유숙하게 되었는데 그다지 부유하지는 않지만 제법 논마지기가 있어 먹고 사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들은 하인과 병졸을 데리고 임지로 가는 벼슬아치의 처지를 부러워하였지만,
박홍미는 오히려 욕심 없이 사는 그들이 부러웠다.
한겨울 추운 날씨에 부임하느라 고생하는 것이 나을 것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박홍미가 이런 뜻을 비치자 처와 첩은 웃었다.
남편의 임지를 따라 먼 길을 나서 잠시 부귀를 누리기도 하지만, 돌아서면 다 허망한지라,
마치 꿈속에서 배불리 밥을 먹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 말에 박홍미는 깨달음을 얻었다.
송(宋)의 시인 황정견(黃庭堅)은 “굶주린 사람은 늘 배불리 먹는 꿈을 꾸고, 병든 사람은 늘 의사 만나는 꿈을 꾼다.
[饑人常夢飽, 病人常夢醫]”라 하였다.
배고픈 사람이 꿈속에서 실컷 밥을 먹는 꿈을 꾸는 것처럼, 벼슬에 굶주린 사람은 늘 벼슬하는 꿈을 꾼다.
그러나 꿈속에서 배를 불려보았자 꿈에서 깨어나면 허기만 더 느껴질 뿐이다.
배를 불리는 것은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을 통하여 밥을 먹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제 힘으로 밥을 벌어먹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통하여 배를 불리자면 그 여탈권이 다른 사람에게 있으니, 먹어보았자 꿈속의 일일 뿐이다.
이와 달리 제 힘으로 밥을 벌어먹는 것은 적게 먹어도 배가 부른 법이다.
박홍미는 꿈속에서 배를 불리는 일이 허망한 것처럼 세속적인 출세라 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벼슬살이에 굶주려 허겁지겁 벼슬길에 나서지만 이는 꿈속에 배를 불리는 것처럼 허망할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제 손으로 농사를 지어 밥을 먹고 사는 가난한 농부의 삶이 오히려 부러웠던 것이다.
박홍미는 양양부사를 끝으로 남의 힘으로 밥을 먹는 벼슬살이를 그만두었다.
이 글을 쓴 다음해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었고, 이에 서산(瑞山)의 시골마을로 낙향하여 6년 남짓
스스로의 힘으로 밥을 먹고 살다 세상을 떠났다. 꿈속에서 밥을 먹지 않은 것이니 배가 든든하였으리라.
- 이종묵(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박홍미(朴弘美) 1571(선조 4)∼1642(인조 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초명은 경립(敬立), 자는 직재(直哉)·군언(君彦), 호는 관포(灌圃).
현룡(顯龍)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현감 윤환(尹#환18)의 딸이다.
1603년(선조 36) 사마시에 합격하고, 160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거쳐,
1611년(광해군 3) 병조좌랑, 1614년 대동찰방을 지냈고, 그뒤 정언·지평·수찬·교리·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사친(私親)인 김씨를 추숭(追崇)할 때 반대상소로써 극간(極諫)하였으며,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한 옥사와 1615년 인목대비유폐사건 등이 일어나자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조익(趙翼)이 장유(張維)에게 천거하여 벼슬길에 다시 나왔으며,
첨정(僉正)과 장례원판결사를 거쳐 승정원동부승지에 올랐다.
1624년(인조 2) 병으로 인하여 외직을 구하였으며, 창원부사로 임명되어서는 청렴과 덕정으로 여섯번이나 포상이 내려졌다.
그뒤 1629년 승지에 임명되고 경주부윤·삼척부사·도승지를 거쳐 1635년 이조참판 및 양양부사(襄陽府使)를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강도(江都)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을 얻어 서산에서 죽었다.
일찍이 장유·이식(李植)·정홍명(鄭弘溟) 등과 함께 문명을 떨쳤다.
저서로는 《관포집 灌圃集》 3권 2책이 있다.
참고문헌 :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嶺南人物考. 〈吳錫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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