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윤관'
설마 나라에서 판사를 굶어 죽게 하겠느냐?
전남 해남은 한반도의 남서쪽 끝에 자리한다.
6·25 발발 직후 국군이 남동쪽 낙동강 전선으로 밀려갈 때, 지킬 사람이 없던, 해남군에서 남은 주민들이 뭉쳐, 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을 향해 총을 들었다.
중무장한 적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지만, 의미 있는 호국 역사를 만들었다. 이때 주민을 이끌었다가 북한군에 끌려가 희생된 현산면장의 장남이 훗날 대한민국 대법원장이 됐다.
작고한 12대 대법원장 '윤관'이다.(2022.11.14별세)
그의 어머니는 미역을 팔아 6남매를 홀로 키웠다. 두 아들은 모두 판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명예 이상의 풍요를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의 말씀을 이렇게 회고했다.
“설마 나라에서 판사를 굶어 죽게 하겠느냐? 판사는 의식주를 해결하고, 거기에 약간의 여유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공직자는 명예를 존중해야 한다! 네가 판사로서 귀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할뿐, 부자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2001년 월간조선 인터뷰)
광주법원 판사때 누군가 쇠고기 몇 근을 신문지에 싸서 집에 놓고 갔다. 그것을 보자마자, 그는 집 앞 빈터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외부 접촉을 피해 평판사 때부터 점심은 항상 구내식당에서 끝냈다. 취미도 돈 안 드는 등산이었다.
북한산만 수백 번 올랐다고 한다.
70세 이후엔 명예직까지 버리고, 주로 경기도 용인 자택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지냈다.
병원에도 택시를 타고 홀로 다녔다. 병원 앞에서 1시간 동안 택시를 기다린 적도 있었다. 숨 거두기 전 그는 “어머니”를 반복해 불렀다고 한다.
1993년 대법원장이 됐을 때, 한국사회의 모든 권위가 무너지고 있었다. 법조계 역시 비리사건이 꼬리를 물었다. 공직자 재산 공개로 부동산 투기 의심을 받는 법관이 쏟아졌다. 그때 윤관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 법원이 위기를 넘겼다고 법조인들은 말한다.
대법원장때도 그는 구내식당 음식을 집무실에 가져와 점심을 해결했고, 판공비를 아낀 돈으로 법원 직원들에게 명절 선물을 전했다.
그는 치우치지 않았다.
그래서 영장실질심사 제도처럼 검찰과 정치권의 반발이 거셀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법개혁을 무리 없이 성공시킬 수 있었다.
행정법원, 특허법원 설립도 그가 대법원장 때 결정됐다. 부드러움이 날카로움보다 강했다.
윤 전 대법원장은 청렴 일화가 오히려 업적을 가린다고 할 정도로 한국사법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진실로 대법원장 다웠던 그의 별세 소식을 듣고 슬픔을 가눌 길이 없다.
부디 영면 하소서!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