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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기다리라 (수7:6-13절)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재물과 명예, 그리고 쾌락이다. 하지만 이 세 가지는 사람들이 진실로 참되고 좋은 것을 찾지 못하도록 늘 방해한다.’ 스피노자의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백 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갈 때에 그들에게는 작은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대로 자신들을 희망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힘들고 지칠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을 보시고, 간역자로 인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지도자 모세의 인도로 기적같이 홍해를 가르며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발걸음을 재촉할 때입니다. 마음 같으면 하루라도 빨리 가나안에 들어가고 싶었지마는 일은 뜻대로 되지를 않았습니다. 아무리 느리게 가도 14일 내지 15일이면 갈 수 있는 길을 무려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헤매고 다녔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는 출애굽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의 정신은 여전히 애굽의 풍속에 매여 있고, 노예근성은 여전했으며, 그들의 지식이나 사고방식은 이방적이며 세속적이고 나아가 도덕적이나 종교적으로 타락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애굽의 우상을 그대로 섬기고 있었고,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대가는 방탕과 쾌락과 안일이었습니다. 어제의 악습이 오늘 하루에 고쳐질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저들이 때 묻은 애굽의 생활을 완전히 씻어버리고 새 사람, 새 마음, 새 신앙으로 새 땅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광야의 모진 훈련은 끝나고 가나안 입성의 대업을 성취할 때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웠겠습니까. 훈련된 군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뛰어난 전략을 세운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었기에 그 말씀만 믿고 요단강을 건넌 것입니다. 오로지 법궤만을 앞세우고 건너갑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순종하는 자세로 전쟁에 임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는데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가 그대로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시니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군은 단 한 명의 피해도 없이 그토록 강한 적군을 다 물리칩니다. 세상의 상식으로는 적군의 성을 공격할 때 즉 공성전을 치를 때는 아군의 전력이 열 배는 되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아군의 피해도 적군에 비해 몇 배가 됩니다. 막강한 대군 앗수르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도 히스기야 왕을 항복시키지 못한 실례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가나안의 도성 여리고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 앞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맥없이 주저앉아 버린 것입니다.
전승한 이스라엘군은 이 여세를 몰아 두 번째 성인 아이 성으로 진군합니다. 조그마한 성이었기에 큰 군사 작전은 피하고 3천 명의 군대로 공격합니다. 그러나 의외의 사태가 발생합니다. 공격도 하기 전에 겁에 질려 무조건 항복하고 투항할 것으로 여겼던 아이 성 사람들이 용맹하게 반격을 시도한 것입니다. 그 결과 승전은 고사하고 36명의 사상자를 내며 어이없는 패전을 당하고 맙니다. 이 패전의 소식은 백성들의 마음을 녹게 하였습니다. 두려움과 공포가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다시 일어설 엄두조차 내지 못합니다. 너무나 자신만만하였기에 실패의 충격은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성공과 실패가 한순간에 엄습하면서 그들은 아연실색하고 망연자실하였습니다. 성공과 실패는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실패의 원인을 바로 찾고 그 원인을 수습하지 못하면 다시 성공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저들이 단 한 번의 실패를 놓고 낙심하고 괴로워했던 것은 이 일이 하나님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실패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나안 족속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해야 할 하등의 조건이나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은 두려움에 떨고 간담이 녹은 것입니다. 이렇듯 막강하다고 생각한 이스라엘 군대가 아이 성 공략에 실패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고 이 소문이 가나안 족속에게 퍼지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으로 오인 받게 됩니다. 이 사실은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엄청난 결과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가나안 일곱 족속이 동맹을 맺고 쳐들어 올 경우 이스라엘은 꼼짝없이 멸망 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에 한 번 실패했지만 그 실패는 상상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기에 실의에 빠지고 낙담하게 되고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 성 전투의 패배는 그 누구보다도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가나안 정복 전쟁을 시작하였고 완전한 승리를 보장 받았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이 성 전투의 직접적 패배의 원인은 아간의 범죄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경솔함도 간과할 수 없는 실패의 요소입니다. 거룩한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 지도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탐꾼을 파송한 후 삼천의 군사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보고를 받고 전략을 쉽게 결정해 버렸습니다. 이제 그는 옷을 찢고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땅에 엎드려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저물도록 있다가 기도합니다.
*수7:7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여호수아의 하소연은 그가 아무리 신실한 자라도 어려운 난관 앞에서 인간적인 나약성과 고뇌를 드러낼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줍니다. 오늘 실패하고 보니 어제 성공한 것까지도 기쁘지 않습니다. 여리고 성을 함락한 어제의 영광도 원망으로 바뀝니다. 나아가 요단을 건너온 것까지도 후회가 됩니다. 하지만 모든 문제의 원인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찾으려는 그의 태도는 바른 신앙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기도는 단지 전쟁의 패배로 인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패배의 결과로 대적들이 일어나 자신들이 당할 비참한 운명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것보다는 하나님의 크신 이름이 세상에서 능멸을 당할까 두려워했습니다.
*수7:9 가나안 사람과 이 땅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이렇게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여기서 우리가 하나 깨달을 것은 좌절과 실패에 직면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1. 스스로 성결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한 이유를 그들의 죄 때문인 것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 전투에서 그들의 노획물 중 일부를 자신의 소유로 감춘 아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진노하신 것입니다.
*수7:1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 처방으로 죄에 대한 성결을 명하셨습니다. 여기서 ‘성결하다’ 라는 말 “카다쉬”는 ‘깨끗하게 하다, 성별하다, 예비하다.’ 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과 규례를 범한 죄의 오염으로부터 깨끗하게 되며, 스스로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도록 예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성결하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깊은 탄식과 회개를 해야 합니다.
*고후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경건한 근심을 원하십니다. 깊은 탄식과 고민은 나의 존재를 일깨워 주며 실패의 원인을 찾아 줍니다. 신령한 고민, 신앙적 근심은 새로운 출발을 제공합니다.
2) 실패의 원인을 궁구해야 합니다.
*잠21:4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여호수아의 하소연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엎드렸느냐” 실패의 원인이 하나님에게 있느냐. 아이 성이 강하기 때문이냐.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물으십니다. 그 원인을 네가 스스로 찾아내라고 독촉하십니다.
3) 새로운 신앙고백을 해야 합니다.
*잠20:24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나와 교회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간 역시 이스라엘과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가나안으로 첫 발을 내디디고 다 같은 언약의 백성임을 확인하는 할례까지 시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간의 죄는 이스라엘의 성결을 깨트린 죄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전쟁에 들어가지 전에 하나님의 성별된 백성임을 먼저 깨닫게 하시려고 “너희는 스스로 성결하게 하라” 고 명령하셨습니다. 전체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는 중차대한 시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룩하게 되어 아름다운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공동체 내의 조화와 일치, 의롭고 거룩한 질서를 위해 새로운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4) 아간을 제거해야 합니다.
실제로 아간은 죄를 지었습니다.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 금덩이 하나를 감추었습니다. 감춘 것이 죄가 되어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실패로 유도하신 것입니다. “너희 속에 있는 아간을 죽여라” “아간을 제거하라” 그래서 돌로 쳐 죽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전쟁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간이 무엇입니까. 아간은 탐심을 품은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이 아간적 요소인 탐심, 정욕, 육체를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탐심은 금물입니다. 욕심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가 아간이 죽기 전에 물었습니다. 그때 그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이 나서 취하였나이다’ 이 탐심이 무서운 죄가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내일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급한 사람보다는 기다리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스스로 성결하게 한 자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다’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할”은 ‘바라다, 앙망하다, 의지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다림의 자세는 소망과 신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오직 그분의 처분만을 바라보는 것이 죄로 인해 실패한 성도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기다리게 하십니까. 그 정답은 이렇습니다.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 “기다리라. 그래서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는 자에게 선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애3:24-26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사실 우리는 좀 더 기다려야 합니다. 느긋하게 주님의 뜻을 기다리는 자세는 좌절과 실패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기다림의 사랑, 기다림의 신앙. 그 인내를 바로 여기서 생산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어제의 실패 때문에 내일을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내일은 없다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일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성결하게 하라.’ 그러면 새로운 시작과 궁극적인 승리를 쟁취할 내일은 내가 준비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내일의 주인이니 그 내일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중국의 제갈공명은 화전(火戰)을 준비해 놓고 이런 말을 합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람이 할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하늘이 주시는 내일을 기다려야 합니다. 실패의 원인을 제거하지 않고 무조건 내일을 기다리는 것은 망상입니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하루아침에 성공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낙선과 실패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가르쳐 준 귀한 성경 말씀을 늘 사랑하고 품에 지니고 다녔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가 실패했을 때에 악마는 늘 옆에 붙어서 하는 말이 ‘너는 끝났어’ 라고 했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이 실패와 좌절을 딛고 일어서서 더욱 큰일에 도전하라.” 고 하셨습니다. 링컨은 악마의 말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나아가 마침내 큰 역사를 이루는 위대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성결입니다. 인류의 미래는 스스로 성결한 자의 것입니다. 깊은 통찰과 참회로 우리 속에 있는 죄의 모든 뿌리를 뽑아버리고 잠잠히, 담대함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내일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승리의 내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자들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좌절과 실패를 경험합니다. 이러한 실패는 신앙생활을 매우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시험에 빠지게 합니다. 실패란 그것을 처음 경험했을 때 믿음이 있는 자나 연약한 자를 막론하고 매우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로버트 해일이라는 사람이 선교에 실패했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나에게 이러한 굴욕적인 경험이 없었더라면 마귀가 나를 소유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분은 실패 때문에 교만하지 않게 되었고, 실패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 전투의 성공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만했고 경솔했습니다. 아이성이 작다고 무시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실패를 경험하고 나서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신성한 약속과 능력 안에서 새로운 내일을 위해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났을 때 아무 것도 얻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쓰라린 굴욕만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산 아래에서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고 당황하다가 예수께 묻기를 ‘왜 우리가 저 아이의 귀신을 쫓아내지 못합니까.’ 라고 질문했을 때 주님의 답변은 ‘너희에게 믿음이 없는 연고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어려움이나 실패에 직면했을 때 좌절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의 능력과 권능과 임재를 믿어야 합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셔서 곤경의 자리에서 승리의 자리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실패를 당하자 곧 그의 옷을 찢었습니다. 그의 얼굴을 땅바닥에 대고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결점을 하나님께 진실로 고백하고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그는 탄식하며 무거운 음성으로 간구하는 고백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백성을 보살펴야 할 지도자인 자신이 힘을 잃었음을 철저히 고백했습니다. 이 기도는 즉시 응답 되었습니다.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심으로 엎드리고 부르짖기만 하면 즉시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올리버 크롬웰의 비서였던 밀턴은 ‘실락원’의 저자로 유명합니다.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가 정치 세력을 잃게 되자 그는 옥고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가정은 파탄에 이르렀고 자녀들조차 아버지를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건강이 악화되어 실명했으며 더 이상 볼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밀턴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부르짖었습니다. ‘아직은 낮이니 낮에 일하라고 하신 주님, 아직은 낮인데 어떻게 일하라고 빛을 거두십니까.‘ 울부짖고 기도하는 그에게 하나님의 영감의 빛이 임했습니다. 그는 아담과 하와가 낙원을 잃어버린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확실히 깨닫게 되었고 ’실락원‘이라는 저서를 집필하게 되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탄생한 이 책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었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결단코 침묵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규하듯이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의 실패의 원인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은 ’도둑질하고, 속이고, 자기들의 물건 가운데 두었다.‘고 하셨습니다. 온전히 바친 물건이라는 말 ’할렘‘의 뜻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지는 모든 제물은 불로 태우든지, 여호와의 창고에 보관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도둑질함으로 자기 자신까지 바쳐져서 저주의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허약하게 만들었고, 그 허약함이 전쟁의 패배를 가져왔으며, 그 패배는 죽음을 초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결코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말씀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하는 여호수아를 보시고 그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는 일어나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한 이스라엘에게 내일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승리의 내일, 영광의 내일, 축복의 내일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혹시 실패했거나 좌절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진심으로 회개하고 통회하고 자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일은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실패하고 좌절하면서 블레셋에서 도망쳐 나온 다윗이 아둘람 동굴에서 노래한 시가 생각납니다.
*시34:18-19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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