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스토리] 두예 편: 제3회 중국 통일의 무공
(사진설명: 아름다운 수양산)
제3회 중국 통일의 무공
나라의 수호신이라 불리던 절비삼공(折臂三公)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양호(羊祜)가 세상을 떠났다. 진무제는 소복차림으로 양호의 장례식에 참석해 눈물을 비오 듯 흘렸다. 그 날 천지도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듯 하늘 땅이 꽁꽁 얼어 붙었다. 진무제의 눈물도 얼어서 수염에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정남대장군 양호를 파견해 오(吳) 나라를 점령함으로써 나라의 통일을 이루려 생각한 진무제가 어찌 출정도 하기 전에 유명을 달리한 장군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양호의 장례를 치르고 궁에 돌아온 무제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양호가 임종 전에 했던 말이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작금의 오 나라 군주는 포악하기 그지 없어 싸우지 않고도 오 나라를 정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회를 놓쳐 손호(孫皓)가 죽고 오 나라 사람들이 현명한 군주를 새로 세운다면 오 나라는 천연 요새인 장강을 이용해 강적이 될 것이니 그 후환은 엄청날 것입니다…소신의 사후 평동장군(平東將軍) 두원개가 소신의 뒤를 잇게 하십시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사마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여봐라! 조서를 내려라! 평동장군 두예를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에 봉해 형주(荊州)의 모든 군사(軍事)를 총괄하게 한다. 또 그에게 추봉거(追鋒車)를 하사하고 제2부마 칭호를 내린다.”
추봉거란 달리는 속도가 아주 빠른 차량을 말한다. 무릇 대장군이라면 다수가 몸집이 우람지고 큰 칼을 잘 쓰며 말을 타고 전장을 주름잡지만 나약한 선비에 말도 탈 줄 모르는 두예는 손에 깃털부채를 들고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위풍당당하고 느긋하게 추봉거에 올라 전쟁을 지휘했다.
대장군이 된 두예는 군사를 정돈하고 사기를 진작시켰으며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오 나라의 서릉도독(西陵都督) 장정(張政)을 급습해 대승을 거두었다. 그 무공으로 두예는 식읍(食邑) 365가구를 상으로 받았다.
두예는 장정이 오 나라의 요충지를 수비하는 명장임을 알고 있었다. 동시에 장정이 부끄러워 자신의 참패를 오 나라 군주 손호에게 보고하지 않을 줄도 알고 있던 두예는 생포한 오 나라 병사를 손호에게 돌려보냈다. 과연 손호는 대로해서 무창감(武昌監) 유헌(劉憲)으로 장정을 교체해버렸다. 대전을 앞두고 군 통수를 바꾼 것으로 인해 그 후 오 나라는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다.
진(晉)나라는 군사를 6갈래로 나누어 수륙 두 길로 동시에 천연 요새인 장강을 돌파하려 계획했다. 두예는 서쪽 코스의 지휘를 맡았고 익주자사(益州刺使) 왕준(王浚)의 수군도 두예가 지휘했다.
태강(太康) 원년(元年, 280년) 두예는 병력을 강릉(江陵) 일대에 배치하고 참군(參軍) 들인 번현(樊顯)과 윤림(尹林), 등규(鄧圭) 등 장군들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게 했다. 과연 두예의 예상대로 10여일 동안 진 나라 군사는 장강 기슭의 여러 도시를 점령했다.
이어 두예는 주지(周旨)와 오소(伍巢) 등 장군에게 8백의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밤도와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낙향성(樂鄕城)을 기습하게 했다. 그들은 도처에 진 나라의 군기를 꽂고 파산(巴山)에 불을 지르며 오 나라 군사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오 나라 도독(都督) 손흠(孫歆)은 요새가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 깜짝 놀라 물었다.
“설마 진 나라 군사에 날개가 달려 장강을 날아 넘은 것이냐?”
두예의 이 계략으로 오 나라 군사 만 여명이 진 나라에 항복했다. 주지와 오소는 두예의 지시에 따라 혼잡한 틈을 빌어 군사를 거느리고 낙향성에 잠복했다. 손흠이 파견한 군사가 왕준에게 패한 오 나라의 패잔병을 데리고 낙향성으로 돌아올 때 주지도 패잔병들 속에 잠입해 손흠의 장막까지 들어갔으나 손흠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날이 어둡자 주지는 손흠을 생포해서 강을 건너 돌아왔다.
두예의 군중 장병들은 두예가 고작 8백 명을 파견해 오 나라의 도독을 생포해 온 것을 보고 “계략으로 작전을 대신하고 한 명을 만 명으로 쓰네(以計代戰一當萬)”라는 노래를 지어 두예 장군을 칭송했다.
두예는 통수를 잃은 오 나라 군사가 혼란에 빠지자 진 나라 군사를 지휘해 일거에 강릉을 점령했다.
장강의 상류를 평정하자 원강(沅江)과 상강(湘江)의 남쪽에서 시작해 교주(交州)와 광주(廣州)에 이르기까지 모든 오 나라 군사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 그들은 진 나라 소리만 들어도 항복했다. 두예는 진 나라의 부절(符節)을 들고 조정을 대신해 오 나라 군사의 항복을 받고 오 나라 장병들을 위로했다.
이번에 죽거나 생포된 오 나라 각 급 관리는 도합 120여 명에 달했다. 두예는 즉시 결단을 내려 많은 포로와 그 가족들을 강북(江北)으로 이주시키고 남군(南郡)의 여러 지역에 치장사(置長史)를 두었다. 형주 지역이 안정을 되찾자 도주했던 오 나라 사람들이 분분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첩보가 연이어 날아드는 그 나날에 진 나라의 도읍인 낙양에서는 큰 웃음거리가 생겼다. 왕준이 먼저 사람을 시켜 오 나라 도독(都督) 손흠의 수급을 보내왔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두예가 생포한 손흠을 낙양으로 압송해왔던 것이다. 조정 안팎에서는 모두 승리를 경축하는 동시에 죽었던 손흠이 생포된 우스갯소리를 전하며 ‘계략으로 작전을 대신하고 한 명을 만 명으로 쓴(以計代戰一當萬)’ 두예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한편 군사정세는 아주 좋았으나 많은 사람들이 오 나라를 계속 공격하는 것을 반대했다.
“곧 장마철이 되어 돌림병이 유행할 것입니다. 과거 위무제(魏武帝)가 적벽(赤壁)에서 참패했고 위문제(魏文帝)는 강을 건너지 않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오늘날 건국한지 백 년에 가까운 오 나라가 그렇게 쉽게 무너지겠습니까? 내년에 다시 공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장군들의 말에 두예는 쇠뿔은 단김에 빼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승리의 기세를 따라 계속 공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후에 사자성어가 된 많은 고전들을 말하기도 했다.
“고대에 악의(樂毅)는 제서(濟西)의 전역을 통해 강대한 제(齊) 나라를 병탄했습니다. 지금 우리 군사의 사기는 대나무를 쪼개듯 하늘을 찌릅니다. 대나무의 상단 몇 마디만 쪼개면 그 하단은 아주 쉽게 해결되어 큰 힘을 들일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이로부터 ‘파죽지세(勢如破竹)’라는 사자성어가 유래했다.
사람들은 진남대장군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겨 여러 갈래로 군사를 나누어 육지와 수로로 동시에 말릉(秣陵)으로 진군했다. 오 나라 군대는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 진 나라 군대가 이르는 성읍마다 백기를 걸고 항복했다. 왕준의 군함이 천심의 철쇄(千尋鐵鎖)를 깨고 건업(建業)을 공격하자 오 나라 군주 손호는 이미 대세가 기운 것을 알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오 나라가 망하고 진 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다. 두예는 큰 무공을 세웠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