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치미
강호엔 내공 쌓인 고수들이 많다. 요즘 공중파나 종편 방송에서 먹방에 이어 쿡방 열풍이 대단하다. 출연진들의 면면이 탤런트나 개그맨 이상의 인기란다. 그들은 명성에 걸맞은 경제적 이득도 함께 따른다고 한다. 그 경지까지 오르기엔 남모를 노력이 분명 따랐을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때는 지금의 이런 시절이 오리라곤 본인이나 주변 사람들도 감히 내다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집 식생활은 품격 아닌 근근이 생존 유지를 위한 엥겔지수가 나오리라 본다. 근래 내가 부식 자재를 마련하는 편이라 자연히 부엌일에 관심이 많이 간다. 세세한 요리 과정까지는 잘 몰라도 어깨 너머나 곁눈질로 한 수 두 수 익혀가고 있다. 냉잇국이나 무청시래기로 된장국정도는 끓여 먹는다. 냉이도 들판에서 내가 손수 캐 온 것이고 무청 시래기도 지인 텃밭에서 구해 온 것이다.
중년이 지나면 교외에 자그마한 텃밭을 가꾸고 싶은 마음을 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런데 막상 텃밭을 마련해 가꾸다 보면 무엇에 얽매임이 무척 힘들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단다. 농사 경험 미숙으로 시행착오도 많고 이것저것 욕심을 부리다보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은 경우도 생긴다. 그래서 누군가 제안하길 텃밭 소유하지 말고 텃밭 가꾸는 지인을 잘 사귀어두면 좋단다.
북면 어느 산기슭에 정년보다 이르게 퇴직해 텃밭을 가꾸며 소일하는 지인이 있다. 봄부터 여름까진 내가 산과 들로 나가 산나물 들나물을 뜯어 오느라 지인 농장에 들릴 겨를이 잘 나질 않았다. 가을과 겨울엔 지인 농장에서 이런 저런 푸성귀를 마련해 우리 집 식탁 찬거리로 유용하게 삼는다. 얼마 전 가을에 걸어둔 무청 시래기를 가져와 삶아 껍질을 벗겨 된장국으로 잘 끓여 먹는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무청 시래기도 등급이 있다. 지난해 도동서원을 찾아가다 보니 자동찻길 도로변 노천에서 시래기를 말리는 것을 보았다. 시골길이라 차량이 많이 다니질 않아도 매연이나 분진을 뒤집어쓰지 않을 수 없다. 거기 비해 지인 텃밭 시래기는 농막 시렁에 걸어 말린 청정지역이다. 이걸 삶아서 줄기의 껍질을 일일이 까면 식감이 좋다. 삶아 냉장고 냉동실에도 보관해 두었다.
지인 텃밭엔 어른 허리 높이만한 옹기 독이 몇 개 있다. 지인은 이 옹기를 아주 소중하게 활용한다. 초여름 텃밭에서 매실을 수확하면 매실 효소를 빚고 매실주를 만드는데 이만한 용기가 있을 수 없다. 커다란 옹기에다 매실 꼭지를 따 깨끗하게 씻어 설탕을 버무려 백일 정도 두면 잘 발효된 효소가 된다. 매실에다 담금주용 소주를 가득 채워두고 몇 달 지나면 갈색의 매실주가 된다.
지인은 여름을 나면서 쓴 옹기는 가을이면 또 한 차례 쓰임새가 있다. 단감과 대봉을 제법 수확하는 지인이다. 감을 선별하다보면 크기가 작아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나오기 마련이다. 지인은 이것을 버리지 않고 깨끗이 씻어 옹기에다 담아 겨울을 난 이듬해 봄에 뚜껑을 열면 향이 독특한 감식초가 된다. 주변에 이 감식초에 맛을 들린 몇몇 사람은 감식초가 숙성되기를 기다린다.
겨울나기에서 옹기가 또 한 번 빛을 보는 데가 동치미 담글 때다. 지인은 초창기엔 경험 미숙으로 실패를 하기도 했단다. 그러나 근래 와서는 지인이 담근 동치미는 먹어본 사람은 그 솜씨 풍미를 인정해준다. 크기가 작은 무를 골라 소금을 약간 굴러 두고 통마늘과 풋고추를 마련한다. 사등분한 사과와 배를 넣는다고 한다. 이런 재료들이 옹기에 들어 달포쯤 지나면 동치미가 익는다.
지인 텃밭은 암반을 통과해 뽑아 올리는 지하수가 있다. 여름엔 손이 서늘하고 겨울엔 오히려 손이 시린 줄 모른다. 지인이 담근 동치미의 좋은 맛을 결정하는 데는 이 지하수도 한 몫 하지 싶다. 진돗개와 삽사리가 묶여 있지만 가끔 말동무가 필요한 지인이다. 내가 온천장 부근에서 냉이를 캐 지날 때면 지인한데 들린다. 지인이 담근 동치미를 맛보지 않을 수 없다. 집에까지 퍼 온다. 2016.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