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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절집 풍경] ③ 순천 선암사
[불교신문3661호/2021년4월13일자]
사진=손묵광 사진작가 글=여태동 기자
‘천년 꽃절’에서 종단스님들 수행할 날 오길…
전통사찰 고즈넉함 간직한
가장 아름다운 사찰 중 한 곳
승보사찰 송광사와 쌍벽
승선교 강선루 야생다원
홍매가 어우어진 풍경 절경
조계종 사찰이지만
태고종 강제점유로 ‘미입주’
최근 조계종 제20교구로 지정
올바른 권리회복 위해 노력 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정호승 시인의 ‘선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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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아름다운 사찰을 이야기할 때 순천 선암사를 빼놓을 수 없다. 조계산을 두고 동쪽에 자리한 선암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길 450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통사찰의 고즈넉함을 간직한 가장 아름다운 사찰 중의 한 곳으로 손꼽힌다. 반대편 서쪽 산 중턱에 자리한 승보사찰 송광사와 쌍벽을 이루는 사찰이다. ‘뒤’이라고 쓰여진 선암사 해우소(화장실)까지 아름답기로 이름이 높다.
선암사의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첫 상징물은 승선교(昇仙橋)다. 신선이 하늘로 오른다는 다리다. 보물로 지정돼 있는 이 다리는 높이가 7m, 길이가 14m요, 너비가 3.5m다. 길쭉한 화강암을 다듬어 장대석(長臺石)으로 만들어 연결해 반원형의 무지개(虹蜺)다리로 만들었다. 다른 보조장치를 사용하지 않고 아치형으로만 돌을 연결한 정교한 솜씨가 일품이다. 다리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무지개 다리의 부드럽고 둥근 천장모양은 예술작품의 극치를 보여준다. 가히 신선이 다리위로 승천할 것 같은 분위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무지개다리를 중심으로 좌우의 계곡 기슭까지는 둥글둥글한 냇가 돌을 사용해 석벽을 쌓았다. 다리 좌우의 측면석축도 주변의 크고 작은 돌을 올려 짜맞추듯이 쌓아 자연미를 살려 아름다음을 더했다. 무지개 다리 한복판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으로 삐죽 나와 있다. 석축에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는데 예로부터 이 돌을 제거하면 다리가 무너진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선암사를 중건할 때 세운 것으로 알려진 승선교는 1698년(숙종 24) 호암대사(護巖大師)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길 바라며 100일기도를 하며 일어난 설화가 전한다. 호암대사는 자신의 기도가 헛되자 낙심하여 벼랑에서 몸을 던지려 했다. 이때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는데 그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圓通殿)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고 선암사 입구에는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승선교를 지나 선암사 입구에는 ‘강선루(降仙樓)’가 있다. 신선이 승선교를 통해 승천했다가 강선루에 내리는 형국이다.
6·25 한국전쟁 이전에는 전각 9동을 비롯한 총 65동이나 되는 건물이 있었다. 하지만 전쟁 중에 불타고, 현재는 대웅전, 원통전, 팔상전, 불조전(佛祖殿), 강선루(降仙樓) 등 크고 작은 20여 동의 건물이 남았다. 전쟁의 화마는 선암사를 비켜가지 않았지만 그나마 남아있는 건물이 있다는 것만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한다.
보물로 지정돼 있는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팔작(單層八作)지붕으로 조선중기의 건물이다. 지붕면의 정면은 사다리꼴과 직사각형을 합친 모양이고, 옆면은 사다리꼴에 삼각형을 올려놓은 모양으로 전통한옥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대웅전 앞에는 역시 보물로 지정돼 있는 선암사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선암사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또 하나는 고목의 매화들이다. 대웅전 뒤편 고즈넉한 돌담길을 따라 수백 년 된 홍매고목이 이른 봄 꽃망울을 터트리면 선암사를 찾는 상춘객들이 넘쳐난다. 특히 사진작가들에게 선암사 홍매화는 잊을 수 없는 출사지로 손색이 없다.
홍매 뿐만 아니라 선암사 경내 곳곳에는 고령의 동백이 겨울부터 봄까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는데 동백 한 그루에 붉은 동백 뿐만 색깔이 다른 동백이 함께 피고 있어 그 아름다움은 배가된다.
선암사의 야생다원에서 나오는 차의 맛은 차인들에게 익히 알려진 바다. 매년 출시량이 적어 맛을 보기가 힘든 선암사 야생차는 차인들이 그리워하는 차맛이기도 하다. 선암사 선원 안에 자리한 수곽도 차인과 사진작가들에게는 꼭 보고 싶은 모습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이 켜켜이 자리하고 있는 고즈넉한 선암사는 근현대 불교역사에 있어 혼란을 겪고 있지만 정작 선암사의 전각들은 아름다운 자태를 세인들에게 아낌없이 전해주고 있다.
선암사는 조계종단이 소유권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까지 소유권을 행사하고 있지 못하는 사찰이다. 소위 ‘미입주 사찰’인 셈이다. 최근 사찰을 무단 점유하고 있는 태고종의 소송으로 또다시 문제가 불거진 상태다. 선암사를 둘러싼 분규는 통합종단 이전인 1961년부터 대처 측의 불법점거로부터 시작됐다. 통합종단 출범과 함께 선암사가 대한불교조계종 제20교구본사가 됐지만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던 대처측은 물리력을 동원해가며 물러나지 않았다.
당시 대처측이 물리력을 앞세워 버틴 사찰 가운데 교구본사로는 유일하게 선암사만 남았다. 조계종은 수차례 선암사에 대한 권리회복에 나섰으나, 그때마다 대치와 충돌을 반복했다. 태고종 창종과 대처 측의 태고종 가입으로 종단 간 문제로 비화되며 선암사에 대한 불법점거가 장기화되기에 이르렀다. 최근 태고종이 소송을 제기한 것에 대해 대법원의 납득할 수 없는 판결로 혼란이 일어나 조계종은 선암사를 ‘대한불교조계종 제20교구본사’로 다시 지정하고 올바른 권리행사를 위한 활동에 나섰다.
‘산사의 정원, 천년 꽃절’이라 불리는 선암사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돼 대한불교조계종 스님들이 여법하게 수행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염원한다.
➲ 순천 선암사는…
조계산 기슭 동쪽에 자리 잡은 선암사는 백제 성왕 7년(529년)에 아도화상이 비로암을 짓고, 신라 경문왕 1년 도선국사가 선종 9산 중 동리산문 선풍으로 지금의 선암사를 창건했다.
선암사 주위로는 수령 수백년 되는 상수리, 동백, 단풍, 밤나무 등이 울창하고 특히 가을 단풍이 유명하다. 또한, 절 앞에 아치형의 승선교가 있다. 대웅전 앞 좌우에 서 있는 삼층석탑도 유명하다.
사찰 전통문화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절의 하나로 보물 7점 외에도 장엄하고 화려한 대웅전, 팔상전, 원통전, 금동향료, 일주문 등 지방 문화재 12점이 있고, 선암사 본찰 왼편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높이 7m, 넓이 2m에 이르는 거대한 바위에 조각된 마애불을 볼 수 있다. 2009년 12월에 사적 제507호로 지정되었으며,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千佛千塔 이야기④ 순천 선암사(仙巖寺)
브라보마이라이프 기사입력일 : 2018-09-12
김신묵 시니어기자
우리나라 열세 번째 세계유산, ‘한국의 산사 7곳’ 네 번째
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 네 번째는 순천 선암사이다. 선암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조계산 동쪽에 위치하며, 숲으로 둘러싸인 넓은 터에 가람을 배치하였다. 많은 대중이 생활하는 대규모 산사였기 때문에 사방으로 둘러싸인 ‘ㅁ’자 형태인 건물이 많이 건립되었다.
절 서쪽에 신선이 바둑을 두던 평평한 바위가 있어 ‘선암사’라 이름 붙였다는 전설이 있는데, 백제 성왕 5년(527)에 아도화상(阿度和尙)이 현재의 비로암지에 창건하였고 청량산(淸凉山) 해천사(海川寺)라 하였다.
이창주 도선국사는 현 위치로 절을 옮겨 중창하였으며 1철불 2보탑 3승탑을 세웠다. 삼창주 의천 대각국사는 대각암에 주석하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여 호남의 중심 사찰로 키웠는데 정유재란 때 큰 피해를 당한 이후 여러 차례 중창 복원과 화재 등이 반복되면서 절 이름도 조계산 선암사로 다시 청량산 해천사로 개칭, 복칭을 반복하다가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선암사는 (승려들이 결혼할 수 있는) 태고종의 총본산이며 유일한 태고총림(太古叢林)이다. 총림(叢林)이란 승려들이 참선 수행하는 선원(禪院)과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을 말하는데 조계종에 5대 총림(조계, 영축, 가야, 덕숭, 고불총림)이 있고, 태고종 유일 태고총림이 있다.
정조 13년(1789), 임금이 후사가 없자 눌암이 원통전에서, 해붕이 대각암에서 100일 기도를 하여 1790년 순조 임금 출생하였으며, 순조는 즉위 후 선암사에 인천대복전(人天大福田) 편액과 은향로, 쌍용문가사, 금병풍, 가마 등을 하사하였다.
선암사 일원은 사적 제07호로 지정되었으며 보유 문화재에 국보는 없으나 보물 제395호 삼층석탑과 400호 승선교 등 14점의 보물 및 다수의 유무형 지방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선암매(천연기념물 제88호)로 부르는 400년 이상 된 우리 토종 고매화(古梅花)가 유명하다.
조계산(曹溪山) 선암사(仙巖寺)
선암사는 순천시 서북쪽 상사호 상류 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데 조계산의 동쪽이며 반대쪽 조계산 서쪽에는 송광사가 위치하고 있다. 트래킹 코스로 선암사-송광사 구간을 찾는 사람도 많다. 절 아래 식당가를 지나 매표소부터 절집까지 이십 분 남짓 숲길을 걸어 올라간다.
특히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만나는 승선교(昇仙橋)는 선녀들이 목욕을 하고 하늘로 오른다는 다리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로 손꼽힌다. 숙종 24년(1698) 호암 대사가 백일기도에도 관음보살을 뵙지 못하자 벼랑에서 몸을 던졌는데 이때 관음보살이 나타나 받아주시니 감동하여 원통전과 승선교를 세웠다고 한다.
예전에는 승선교를 지나 계곡을 건너야 절에 갈 수 있었는지 모르나 지금은 계곡을 건널 일 없이 절까지 큰길을 따라가므로 무심코 지나칠 수 있다. 승선교를 지나려면 그 아래 작은 무지개다리를 건너갔다가 승선교로 다시 건너와야 한다.
승선교 뒤에 있는 강선루 역시 오른쪽에서 흘러와 큰 개울과 합쳐지는 작은 시냇물 위의 선원교(仙源橋)라는 작은 다리 위에 세워진 2층 누각으로, 예전에는 누각 아래로 다리를 건너다녔겠지만 지금은 그 옆으로 넓은 길이 나 있어 옛 맛을 잃어 아쉽다.
승선교에 못미처 2개의 승탑군(부도전)이 있는데 먼저 만나는 곳이 숲속의 비석거리이고 두 번째가 선암사 동승탑군(東僧塔群)인데 이곳에 눈길을 끄는 탑비가 있어 발길을 멈추게 한다.
19세기 큰 스님으로 추앙을 받던 상월 스님의 탑비는 후학들을 사랑했던 스님을 기려 제자를 가르치던 강원(講院)을 향해 비석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승탑군을 지나 승선교를 건너 강선루 아래로 숲길을 걸어 올라가면 선암사에 도착한다. 방문객을 처음 맞이하는 건 일주문이 아니라 삼인당이라는 멋스러운 원형 연못이다. 대개 절집은 앞마당쯤에 연지(蓮池)를 꾸며놓고 있지만 선암사 삼인당은 조금 다르다.
삼인당 앞에는 전통찻집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창 넓은 찻집에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듯 전통찻집에 앉아서 삼인당 연못을 바라보는 멋스러움이 나름 괜찮은 곳이다.
선암사 숲길 내내 이어지는 순탄한 오르막 지형은 삼인당 연못을 지나도 계속 이어지는데 아직 일주문은 보이지 않고 한번 휘돌아 꺾어진 길 오른쪽으로는 계곡물이 흐른다. 그 너머에는 차밭이 늘 푸르게 깔려 있으며 왼쪽 높은 언덕 위에는 주목받지 못하는 하마비(下馬碑) 하나가 서 있다.
조금은 급격해지는 오르막 경사로가 한 번 더 굽어지면 비로소 일주문이 나타난다. 몇 개의 계단 위에 화려한 지붕을 이고 선 일주문은 좌우로 담장이 이어진 특이한 형태로 여느 사찰의 일주문과 달리 특정한 영역이나 큰 건물로 들어서는 대문의 느낌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오르막 계단 위에 범종루가 있고 범종루 아래로 누하진입(樓下進入)을 하면 만세루가 나온다. 만세루는 누하(樓下) 없이 좌우로 돌아 들어가니 바로 대웅전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일주문을 지난 후 천왕문, 금강문, 인왕문 등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선암사의 3무(無)에 기인하는데 조계산의 주봉이 장군봉인지라 불교의 호법신인 사천왕상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대웅전에 부처님을 혼자 모셨으니 좌우 협시불이 없다는 것이다. 대웅전 가운데에 큰스님이 드나드는 전용문을 어간문(御間門)이라고 하여 신도들은 못 드나들게 하는데 선암사에서는 부처님처럼 깨달은 분만 드나든다고 하여 가운데에 사람 출입을 위한 문은 없다는 것이다.
만세루는 원래 강당으로 총림에서 많은 학승에게 강학을 하는 곳이다. 원래 강당은 금당의 뒤쪽에 있어야 하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웅전 앞에 위치하게 되었다. 예불 시 큰 스님 몇 분만 대웅전에 들어가고 나머지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은 강당에서 예불에 동참하는 형태로 진행되다가 지금은 모두 대웅전에 들어가서 올린다고 한다.
대웅전 영역은 이렇게 만세루와 대웅전이 마주 보며 가운데 마당에 석탑 2기가 세워져 있고 왼쪽에는 설선당, 오른쪽에는 심검당이 있는 ‘ㅁ’자형 네모꼴 구조이다. 대웅전의 왼쪽에는 음향각이 오른쪽에는 지장전이 있으며 심검당 아래 만세루 옆으로는 범종각이 있다.
범종각에는 종을 치는 나무, 즉 당목(撞木)이 있는데 종을 매다는 용뉴(龍鈕)가 사실은 용의 셋째 아들 포뢰(蒲牢)이다. 이 포뢰는 고래를 무서워하여 당목을 고래 모양으로 만들어서 두드리면 종이 더 크게 운다는 것이고 그래서 선운사의 당목이 고래 모양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답사 결과 고래 모양이라던 선운사 당목은 머리 부분을 잘라낸 모양이어서 충격적이었다. 원래 이런 모양이었는지 아니면 용 이야기를 모르는 채 무심코 잘라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너무 아쉬웠다. 생각 없이 자른 결과가 아니기 바란다.
대웅전 영역 뒤로는 조사전, 불조전, 팔상전이 나란히 있고 그 뒤로 순조 임금 출생을 기도한 원통전이다. 원통전은 주원융통(周圓融通)한 자비를 구한다는 뜻인데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관음전이라고도 한다. 많은 사람이 찾아와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곳이다.
원통전의 뒤쪽은 응진당 영역이며 그 오른쪽은 무우전 영역인데 그 사잇길이 유명한 선암매가 피는 공간이다. 응진당 출입문에는 ‘湖南第一禪院’(호남제일선원) 현판이 달려 있다. 응진당을 중심으로 몇 개의 당우가 있으며 응진당 뒤에는 작은 산신각이 다소 옹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선암매 공간을 건너 오른쪽 무우전은 태고종정이 머무는 공간으로 비공개지역이다. 그런데 그 뒤에는 각황전이며 여기에 철불이 모셔져 있어 답사객들은 자꾸만 들여다보고 싶은 것이다.
더 뒤로 나가면 숲속에 숙종 때 세운 중수비(전남 유형문화재 제92호)와 1929년 세운 선암사 사적비가 서 있고 일반인 출입을 금지한 선원 뒤쪽으로 동부도(보물 제1185호)와 북부도(보물 제1184호)가 있다. 답사꾼들에게는 필수 지역이지만 금지구역이라 아쉽다.
또 하나 선암사의 명물은 ‘뒷간’이다. ‘깐뒤’라고 우스개 소리하는 선암사 뒷간은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214호로 영월 보덕사 해우소와 함께 도지정 문화재 화장실로 지정된 곳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에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정호승
[선암사 판결] 역사인식 부족·싸움 내모는 사법부...명백한 ‘판결 오류’
불교신문 기사 승인 일 : 2022.07.14.
이경민 기자
법원, 선암사 등기 말소 항소심에서
‘대한불교조계종선암사’ 삭제 명령
“조계종 실체없다” 판단한 원심 및
대법원 차체험관 판결 논리 수용
편향 논리 적용한 ‘코드 판결’ 현실화
합법 소유 보다 실질 점유 인정한 판례
선암사 말사 비롯해 미입주 사찰에 영향
7월20일 차체험관 파기환송심 파급 주목
조계종이 제20교구본사 선암사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광주고법 민사1-2부(재판장 이수영)가 7월7일 태고종선암사가 조계종선암사를 상대로 제기한 등기명의인표시변경등기말소 항소심에서 “조계종선암사 전 주지는 말소 등기 절차를 이행하라”며 태고종선암사 손을 들어준 데 따른 것이다. 2016년 법원이 “조계종 스님들이 거주하지 않아 조계종선암사의 실체가 있다고 볼 수 없다”며 조계종선암사로 등기한 건물과 토지 등을 말소하라는 원심 판결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재판부는 이번 판결에서 ‘조계종선암사는 사찰로서 실체가 없다’는 점을 근거로 피고 측 조계종선암사의 항소를 각하(却下)하는 결정을 내렸다. 각하 결정은 청구인의 소가 구체적 요건을 갖추지 못해 재판에 들어가지 않고 소송을 끝내는 것으로 사실상 법원은 조계종선암사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자격 자체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한 셈이다. 법원은 대신 항소심 당사자로 피고 측 조계종선암사 전 주지를 지목하고 말소 절차를 이행하라고 명령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조계종선암사는 사찰로서 실체가 없으므로 전래사찰로서의 선암사 지위를 승계한 것은 태고종선암사”라며 “태고종선암사가 각 부동산의 실제 소유자로 조계종선암사 전 주지는 각 소유권보존등기의 말소등기절차를 이행하라”고 했다. 조계종선암사 측이 말소해야할 등기 대상은 대웅전을 비롯한 20여 개 건물과 약2만6000㎡(약 8000평)에 달하는 사찰 부지, 826만4000㎡(약 250만평)에 상당하는 임야 등이다.
이번 판결을 두고 교계에서는 ‘애당초 예상했던 결과’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번 재판부가 태고종선암사 손을 들어준 결정적 근거는 2020년 12월24일 대법원의 ‘순천 차(茶)체험관 철거 소송’ 파기환송 판결에 있다. 당시 대법원은 소유자인 조계종선암사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건립한 차체험관을 철거하라는 1심과 2심 판결을 뒤집었다. “불교재산관리법에 따른 관할관청의 등록만으로 특정 종단에 소속되었다고 볼 수 없다”며 “사찰(조계종선암사)로서의 실체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당사자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이 조계종선암사를 사찰로서 실체가 없다고 판단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전래사찰 선암사가 자율적 의사 결정에 따라 조계종 소속으로 합의를 하였는지 △조계종이 지속적으로 임명한 주지가 인적 물적 조직을 관리하며 대표로 임무를 수행했는지 △선암사 경내에서 불교의식을 행하는 등 종교 활동을 지속적으로 행했는지 △독자적인 신도들을 갖추고 있는지 등의 여부다.
이번 등기 소송 판결에서도 이 같은 대법원 논리는 그대로 적용됐다. 재판부는 차체험관 철거 소송의 대법원 판결을 인용해 “어느 사찰이 특정 종단에 가입하거나 소속 종단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사찰 자체의 자율적 의사결정이 기본 전제가 돼야 한다”는 법리를 받아들여 “조계종선암사는 당사자 능력이 없다”고 판시했다. 합법적으로 이뤄진 종단 등록에 앞서 불법이라 할지라도 실제 거주하는지의 여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는 대법원 결정에 부합하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예상했던 결과’라는 평가 바탕에는 사법부 판결에 대한 불신이 작용하고 있다. 이번 판결은 2020년 12월24일 있었던 차체험관 철거 소송의 대법원 판결을 상당수 인용했다. 조계종선암사의 정당한 소유권을 인정하고 철거 명령을 내린 1심과 2심 판결을 뒤집은 대법원 판결은 당시 ‘코드 판결’ 의혹으로 선암사 소송의 전반적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를 샀다.
당시 원심을 뒤집고 태고종선암사 손을 들어준 차체험관 철거 소송의 주심 판사는 김상환 대법관. 등기 말소 소송 1심에서 태고종선암사 쪽에 승소 판결을 내린 김형연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당시 등기 말소 소송 재판장)과 같은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이다.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에서 ‘코드 인사’ ‘코드 판결’ 등의 논란으로 사법부 내 편향적 구성과 판결의 중심에 섰던 우리법연구회,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으로 분류된다.
두 사람의 판결 논리에서도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김상환과 김형연 모두 조계종선암사의 합법적 종단 등록 이전에 태고종선암사의 불법 점거를 용인한 점, 조계종선암사가 실제로 거주하지 않아 사찰로서의 실체가 없다고 주장한 점, 관할청에 따른 통합종단으로의 등록을 선암사 대중 결의에 의한 종단 등록이 이뤄지지 않아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고 한 점 등을 판결 근거로 삼았다.
이번 판결이 불러올 파급 효과는 결코 적지 않다. ‘불교재산관리법에 따른 관할관청에의 종단 등록만으로 사찰의 종단 소속을 섣불리 결정할 수 없다’는 재판부 이번 결정은 합법적 소유권자인 조계종선암사의 권리를 전면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재판부가 ‘사찰의 자율적 의사결정’을 주장해 태고종선암사의 권리를 인정하는 판례를 남기게 되면 종단 등록 여부와 상관없이 실제 거주하고 있다는 이유로 사찰에 대한 법적 소유권을 넘기는 선례를 남기게 된다.
현재 조계종이 법적 소유권자로 실질적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사찰은 15곳에 이른다. 미입주 사찰 문제의 중심에 있는 선암사 판례가 다른 14곳 사찰에 영향을 줄 것이 불 보듯 뻔하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이번 판결에 따라 선암사 산내 암자인 대승암, 대각암, 운수암, 청련암, 향로암과 산외 있는 향림사, 도선암 등과 관련된 소유권 문제도 불거질 우려가 크다.
무엇보다 이번 판결은 한국불교 정체성을 정면으로 부정한 판결이라는 오명을 벗기 어렵다. 비구 대처 간 합의로 구성된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현 조계종) 출범으로 선암사는 1962년 국가 법률에 의해 통합종단 제20교구본사로 지정됐다. 조계종단 소속으로 토지 및 건물 소유권 등 조계종선암사로서의 모든 권한을 국가로부터 합법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재판부는 지난 60여 년간 태고종선암사의 불법 점거로 조계종선암사가 정당한 권한을 행사해오지 못했음에도 태고종선암사의 불법 점거를 용인했다. 이번 판결을 두고 총무원 기획실장 법원스님은 “사법부가 종단 간 분규를 조장하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판결을 내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계종 제20교구본사 선암사는 법원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상고할 예정이다.
한편 현재 광주지방법원에 계류중인 차체험관 철거 파기환송심이 7월20일 열릴 예정이어서 등기 말소 소송 결과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선암사 암자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순천 선암사에 부속되어 있는 산내 암자.
[개설]
선암사 산내 암자는 현재 4곳으로, 대각암, 비로암, 운수암, 대승암이다. 조선 후기에는 13곳 이상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1707년(숙종 33) 채팽윤(蔡彭胤)이 찬술하고 이진휴(李震休)가 글씨를 쓴 「조계산선암사중수비」에 의하면, 당시 선암사에 상주하는 승려가 250인, 법당(法堂) 8위, 전사(殿舍) 12위, 요사채 16위이며, 산내 암자로 13처가 있고, 부속 암자로 용안산(龍眼山) 선적암(善積庵)과 운동산(雲動山) 도선암(道詵庵)이 있다고 하였다. 즉 18세기 초에는 13곳의 산내 암자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여러 기록에서 선조암(善助庵), 향로암(香爐庵), 청련암(靑蓮庵), 무성암(無性庵), 수도암(修道庵), 백련암(白蓮庵) 등의 암자명이 확인된다. 특히 선암사성보박물관에는 선조암의 불화가 소장되어 있으며, 1691년(숙종 17) 향로암에서는 만각(晩覺)이 ‘사분율칠취대목초(四分律七聚大目抄)’와 ‘불설우바새오계상경(佛說優婆塞五戒相經)’을 1책으로 묶어 『사분률약목(四分律略目)』이라는 책을 간행하기도 했다.
[건립경위 및 변천]
1) 대각암
대각암은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머물렀고 또 대각국사 의천의 승탑[순천 선암사 대각암 승탑, 보물 제1117호]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1644년(인조 22)에 탄원(坦元)이 중창(重創)하고, 1735년(영조 11)에 벽천(碧川)이 3창, 1939년 춘광과 성암 등이 4창하였다. 법당이 있는 건물은 맞배지붕과 팔작지붕을 이은 ‘ㄱ’자 형태이며 승방이 함께 있다. 그 맞은편 아래쪽에 대선루(待仙樓)가 있는데, 1719년(숙종 45)에 처음 짓고 1860년(철종 11)에 중수했다.
2) 비로암
비로암은 대각암에서 북서쪽으로 약 1㎞가량 급한 경사를 올라가서 팔부능선에 있다. 비로암은 선암사의 모태로서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여 ‘해천사(海川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는데, 1652년(효종 3) 탄원(坦元)이 중수하였고 침굉(枕肱) 현변(懸辯)[1616~1684]이 주석하였다. 그리고 19세기 대강백이었던 경운(擎雲) 원기(元奇)[1852~1936]가 비로암에서 『화엄경』을 사경하여 6년 만에 완성하였는데, 이때 한 글자를 사경할 때마다 일배(一拜)했다고 전한다.
3) 운수암
운수암은 ‘북암’이라 불리는데 운수납자(雲水衲子)들이 수행하는 곳이라 하여 ‘운수암’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해붕, 월파, 다오, 벽파, 청호 등 강백들이 거처하며 대승암[남암]에 겨룰 만한 강원을 운영했으나 일제강점기와 조계종과의 분규를 거치며 거주하는 승려가 거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만성화상이 최일 월광 보살과 최일 심화 보살의 도움을 받아 1979년 초겨울부터 불사를 시작하여 1980년 겨울까지 1년에 걸쳐 암자를 복구했으며, 1997년에 그 중창비를 세웠다.
4) 대승암
대승암은 ‘남암’이라 불리는데 순천 선암사를 대표하는 강원이 있던 곳이다. 대승암 강원이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상월(霜月) 새봉(璽封)[1687~1767]이 1754년(영조 30) 화엄대회를 개최한 이후로 보인다. 특히 침명(枕溟) 한성(翰醒)[1801~1876]이 1829년(순조 29)부터 선암사 대승암 강원(講院)에서 약 30년 동안 후학들을 가르침으로써 더욱 번창하였다. 침명 한성의 전강(傳講)제자는 함명(函溟) 태선(太先)이었고, 함명 태선은 1866년(고종 3) 가을에 경붕(景鵬) 익운(益運)에게 강학을 전하였다. 또 경붕 익운은 경운(擎雲) 원기(元奇)에게 강학을 전하고, 경운 원기는 금봉(錦峰) 병연(秉演)에게 전하여 대승암의 강맥이 근세까지 이어짐으로써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4대 강맥으로 평가받았다.
5) 백련암 터
이 외에 대승암 가는 길에 한옥 건물이 한 채 있는데 옛날에 백련암이 있던 터이다. 한옥은 템플스테이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거의 활용되지 않고 있다.
조계산 도립공원 안내도
조계산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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