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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회고록 41] 박근혜, 희미한 미소 띤 채 “내일 감옥 가는 건가요?”
유영하 변호사가 본 박근혜 전 대통령
출판사로부터 “변호사님이 곁에서 본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글을 기고해 주시면 좋겠다”는 제의를 처음 받았을 때,
그냥 지나가는 말인가 했다.
하지만 계속된 출판사의 제의에 대통령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막상 글을 쓰려고 하자 어디부터, 어떤 말부터 해야 할 것인지가 정리되지 않고 몇 날을 입가에서 맴돌기만 했다.
돌아보면 지난 7년이 바람처럼 지나갔다고 생각하지만, 너무 아팠던 시간이라서 떠올리는 것 자체가 내게는 고통이었다.
“대통령님께서 변호를 맡아 주시라고 합니다.”
JTBC에서 태블릿PC 관련 보도를 한 2016년 10월 24일 나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들과 저녁식사 중이었다.
일행 중 한 명이 JTBC 보도를 확인해 보라고 했을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청와대 문건이 외부로 유출됐다는 내용의 보도 중에 낯익은 아이디가 눈에 들어왔고,
내가 알고 있는 아이디였기에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치면서 지나갔다.
검찰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검찰 조사를 공식 통보한 2017년 3월 15일 오후
서울 삼성동 박근혜 전 대통령 자택을 찾은 유영하 변호사.
중앙포토
며칠 뒤에야 당사자와 통화가 됐지만 이미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쓰나미가 닥치듯이 한순간에 모든 것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현직 대통령을 조사해야 한다는 성난 여론이 들불처럼 번져가면서 대통령 탄핵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최악의 사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으로 사태 추이를 지켜보던 2016년 11월 13일 오후 민정수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대통령님께서 변호를 맡아 주시라고 합니다.”
집사람과 함께 군에 간 아들을 면회 중이었다.
당시 언론을 통해 검찰 수사 진행 상황을 지켜보면서 걱정을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현실로 다가올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대통령의 변호를 맡아야겠다는 말을 들은 집사람의 얼굴도 굳어졌고, 나도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몸담고 있던 로펌의 대표에게 전화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그날 짐을 싸서 나와 그 부근에 있는 오피스텔로 옮겼다.
현직 대통령의 검찰 조사를 앞두고 변호인으로 선임됐다는 언론 보도가 나가면 이를 취재하려는 언론 때문에 로펌의 업무가
마비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고, 소속 변호사들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붕대 감은 손으로 내 유세 도와주러 온 박 대통령
대통령을 만나러 관저로 들어가면서 처음 대통령을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2004년 4월 14일 오후 2시30분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대통령은 손에 붕대를 감고
군포시에서 총선에 출마한 나의 유세를 지원하기 위해 왔었다.
절제된 언어 구사와 따뜻한 웃음, 그리고 부드러움 속에 감추어져 있는 강인함,
대통령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그 모든 것이 나를 대통령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2008년 3월 21일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유영하 후보의 사무실 개소식장에 들어서고 있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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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저에서 만난 대통령은 “어려울 때마다 오시네요”라고 하시면서 자리를 권했다.
민정수석이 자리를 뜬 후 대통령이 말을 꺼냈다.
“내가 사람을 너무 믿었어요, 정말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어요.
밖에서 무슨 일을 하고 다녔는지 정말 몰랐고,
아무도 내게 최서원 원장(개명 전 최순실)이 하고 다녔던 일에 대해 말을 해 준 사람이 없었어요.”
묵묵히 대통령의 말을 받아 적으면서 머릿속은 점점 하얘져 갔다.
그날 이후 거의 매일 관저로 들어가서 언론에서 제기된 의혹에 대해 대통령께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을 정리하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상해 보았다.
며칠 뒤 검찰은 안종범 수석과 최서원씨를 기소하면서 대통령을 공범으로 적시했고, 바로 다음 날 민정수석의 사의 표명이 있었다.
전날까지도 전혀 사표를 낼 것 같은 기미가 없었기에 한동안 민정수석의 사퇴 이유를 찾기가 어려웠다.
야당은 탄핵소추를 기정사실로 했고, 여당인 새누리당의 분위기도 확연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대통령이 탄핵소추된 후, 나는 대통령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꼈다.
그후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에 대한 영장이 재청구 끝에 발부되던 날, 나는 헌재에서 탄핵이 인용될 것으로 판단했고,
탄핵이 인용되면 검찰은 대통령을 조사한 후 구속영장을 청구할 것으로 확신했다.
그리고 영장이 청구되면 당시 여론의 분위기상 법원에서 절대로 기각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예상했던 대로 사태는 흘러갔고, 누구도 멈출 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영장심사 앞둔 대통령 “내일 감옥으로 가는 건가요…?”
법원의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삼성동 사저로 들어가 대통령을 만났다.
늘 같은 모습, 같은 얼굴의 대통령은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내일 감옥으로 가는 건가요…?”라고 물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법원이 있는 그대로만 판단한다면 기각할 것입니다.
다만 여론에 영향을 받을 것이 걱정은 됩니다”고 말했지만,
내 목소리에는 이미 힘이 빠져 있었다.
대통령도 나도 다가올 운명을 직감하고 있었다.
2017년 3월 22일 피의자 신분으로 전날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청사를 떠나고 있다.
전날 오전 9시24분 서울중앙지검에 도착한 지 21시간20분여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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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30일 8시간30분 동안의 영장실질심사에서 검찰 주장을 반박하면서 재판부에 영장을 기각해 달라고 호소했다.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고, 최소한의 방어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절하게 매달렸다.
급기야 감정이 격해져서 나는 흐르는 눈물 때문에 말을 이어가기가 힘들었다.
심문을 마친 후 조사실에 머물다가 밖으로 나와 복도를 서성이던 중 검찰 직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영장이 발부됐다는 것을 알았다.
3월 31일 새벽 3시를 막 넘긴 시간이었다.
미동조차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던 대통령의 눈빛은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잖아요….
준비할게요….”
구치소로 대통령이 떠나고 난 후, 새벽 6시가 넘어 검찰청을 나왔다.
그날 오후 2시, 구치소로 가서 수인번호가 붙은 연두색 수의를 입은 대통령을 보는 순간 울컥했지만,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대통령의 극한의 시간은 시작됐다.
눈물이 터져나온 마지막 변론
주 4회 진행된 살인적인 일정의 재판을 묵묵히 감내하면서
하루 10시간 이상 의자에 앉아 미동조차 하지 않는 대통령을 보면서 새삼 대통령의 강인함을 느낄 수 있었다.
초연하고 담담하게 법정에 앉아 있는 대통령은 태산 같았다.
구속영장 만기가 다가오던 그해 추석을 앞두고 검찰에서 추가 구속영장을 청구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처음 재판을 시작하면서 예상을 했었지만, 실제 검찰이 영장을 재청구했을 때에는 너무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대통령은
“법원에서 영장을 기각할 것으로 기대하지도 않고, 추가로 구속영장이 발부되면 더는 재판에 출석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어떤 변론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변호인들은 모두 사임했으면 한다”고 미리 내게 말을 했었다.
뇌물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7년 5월 23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417호
형사대 법정에서 열린 첫 정식 재판에 출석해 유영하 변호사(왼쪽)의 안내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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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추가 구속영장이 발부된 후, 대통령은 재판부에 “앞으로 진행되는 재판에는 출석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말을 한 후 퇴정했고,
이어 나도 변호인으로서 마지막 변론을 했다.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규정하고 있는 무죄 추정과 불구속 재판이라는 형사법의 대원칙이 힘없이 무너지는 현실을
목도(目睹)하면서, 저희 변호인들은 더 본 재판부에서 진행할 향후 재판절차에 관여해야 할 어떠한 당위성도 느끼지 못하였고….
중략….
이에 오늘 모두 사임하기로 했습니다….
중략….
이제 저희 변호인들은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과 피울음을 토하는 심정을 억누르면서,
허허(虛虛)롭고 살기(殺氣)가 가득 찬 이 법정에 피고인을 홀로 두고 떠납니다….”
다음 날, 구치소에서 만난 대통령은 늘 같은 모습 그대로였다.
“기대하지 않았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견디겠습니다.”
규정상 사임한 변호인이 대통령을 계속 접견할 수는 없었다.
구치소 밖으로 탈옥, 꿈에서 깨고 허탈한 적도
그렇게 잔인했던 2017년이 가고 새해가 밝아오자마자 이번에는 국정원 특활비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됐고,
나는 구치소로 가서 다시 대통령을 접견했다.
만약을 대비해 선임계를 받았지만, 대통령은 사선 변호를 해봐야 결과는 똑같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선임계를 제출하진 않았다.
2018년에 접어들면서 대통령의 건강은 시나브로 나빠지고 있었다.
접견 간간이 통증을 호소하던 대통령은 어느 날부터는 접견이 시작되자마자 통증으로 인한 고통이 심해
잠을 자지 못할 정도라고 말했다.
좀처럼 아픈 것을 나타내지 않는 대통령을 알고 있기에 얼마나 심한 통증으로 고통을 받는지 짐작이 됐다.
음식이 너무 짜고 매워 먹지 못해서 컵라면으로 식사한다고 했을 때는 가슴이 먹먹해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이들은 구치소에서도 사식을 사먹을 수 있다고 알고 있지만, 구치소 안으로는 그 어떤 바깥 음식도 들어가지 못한다.
통증에 대한 것은 외부 진료를 통해 조금은 해결한다고 해도 식사 문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고령의 대통령이 컵라면으로 식사를 계속하다 보면 단백질 섭취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져 몸에 무리가 오면서
건강에 심각한 상황이 초래될 것이 분명했지만, 달리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허리통증만을 호소하던 대통령은 어깨, 고관절, 발목 등 다른 부위의 통증도 호소하기 시작했고,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외부 병원의 소견서는 어깨 부위의 통증은 수술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했고,
2019년 9월 중순 구치소 의료진의 건의를 마침내 법무부에서 받아들여 대통령은 서울성모병원에서 어깨 부위의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2017년 8월 30일 서울 서초동 서울성모병원에서 허리 통증으로 진료를 받은 박근혜 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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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70일 동안 병원에서 재활 치료를 받았지만, 수술 부위는 완쾌되지 않았다.
하지만 장기입원에 대한 부담으로 대통령은 구치소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날 나는 대통령과 구치소 밖으로 탈옥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누군가는 꾸며낸 이야기라고 조롱하겠지만, 그날 꿈에서 깨어나 느꼈던 그 허탈감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이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 대통령의 성격상 아프다는 말을 교도관에게 쉽게 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나도 허리디스크 수술을 두 번이나 했기에 그 통증이 어떤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통증이 심해지면 우울증이 오고, 우울증이 오면 삶에 대한 회의가 든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구치소로 환소한 대통령이 호소하는 통증에 나는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형이 확정돼 대통령이 기결수가 되자 더는 변호인 접견이 허용되지 않았다.
다행히 행정소송의 대리인 자격으로 일주일에 한 번 접견할 수 있었고, 하루 두 시간의 접견시간은 너무도 빨리 지나갔다.
그렇게 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가고, 하릴없이 1년이 지나갔다.
“책보기도 싫고, 아무 생각도 안 나요”…한계에 다다른 대통령
세상과 단절된 지 4년이 지난 2021년도 어김없이 밝아왔다.
편지글을 엮어 책을 만들기로 하면서 나 역시 바빠졌지만, 가을 무렵부터 대통령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기운을 차리지 못했고 그렇게 강하고 담대하던 대통령도 조금씩 가라앉고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요새는 책 보기도 싫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아요”라는 대통령의 지나가는 말이 내게는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대통령에게 한계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 그해 가을 무렵 대통령이 건네준 메모지를 받아보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보통사람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련과 고통을 겪고서도 단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던 대통령이었다.
나는 대통령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다.
강한 사람일수록 한순간에 모든 것을 던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담당 계장과 대통령의 상태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라도 빨리 ‘병원으로 이송해야 한다’고 요청했고, 구치소 측에서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삼성서울병원으로 대통령이 입원하고서야 나는 큰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병원에서도 대통령은 그렇게 좋아하는 음악이 소음처럼 들린다고 할 정도였지만,
주치의들의 세심한 보살핌 속에서 점차 안정을 되찾아 갔다.
4년9개월 동안 좁은 독방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오직 내가 접견 오는 날만 바깥사람과 말을 나눌 수밖에 없었던 대통령의 고통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버티어 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버리는 것은 순간적이지만, 참고 견디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은 자유의 몸이 됐고,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건강을 회복했다.
나도 접견을 마치고 나올 때마다 들었던 철문이 닫히는 소리를 더 듣지 않아도 된다.
이제 대통령은 지난 재임 시절의 잘잘못에 대해 기억나는 한, 있는 그대로를 회고록에 담았다.
“오직 나라를 위해 단 1분의 대통령의 시간도 함부로 쓰지 않았다”고 했던 당신 곁에는 지금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대통령의 진실은 세상에 그 얼굴을 드러낼 것이다.
2022년 3월 24일 오전 서울 일원동 삼성병원에서 퇴원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지자들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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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했던 많은 사람이 등 돌리고 떠나가도, 광풍이 몰아치던 광야에서 홀로 서 있을 때도 누구에 대한 원망도 없이
온몸으로 묵묵히 견디어 온 대통령을 보면 너럭바위 같다는 느낌이 든다.
아니, 대통령은 비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에도 늘 그 자리에 서 있는 큰 나무이고,
아무리 가물어도 그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깊은 물이었다.
끝으로, 역사를 관장하는 신이 존재한다면 옳고 그른 것을 있는 그대로 판단해 줄 것으로 믿으면서,
대통령의 힘든 시간을 함께할 수 있게 허락해 준 하늘이 있어 견뎌낼 수 있었고, 모든 것이 영광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