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화해하는 개인과 사회
이응준 ( 시인.소설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시인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한 부분이다. 누구를 미워해서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미워하면 지는 것이고, 싫어하면 적어도 비긴다. 미워할 것을 사랑하면야 좋겠지만, 보통 사람인 우리가 그렇게까지야 할 수 있겠나. 미워하면 괴로움에 갇히지만, 싫어하면 자유로울 수 있다.” 미워하면 아직 뭐가 남아 있는 것이다. 그 무언가 속에 ‘병든 사랑의 폭력과 욕심’이 도사리고 있다. 원래 나쁜 것보다 더 나쁜 게 원래는 좋은 것이어야 하는데 나빠진 것이다.
사랑은 곧잘 썩어서 미움의 거름이 된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는 게 많다는 사람들도, 그들의 그 사랑도 잘 안 믿는 편이다. 대신 싫어하는 게 분명해서 멀리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을 신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사람들의 사랑이 진짜인 경우가 적잖다.
인생을 살다 보면 어둠을 가지게 돼 있다.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시구처럼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은 ‘회고적 성향’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뭐 대단한 정신 질환 진단을 받지 않았음에도, 무슨 위법과 패륜을 저지른 게 없는데도, 특히 홀로 남은 시간만 되면 지난 날들을 떠올리며 버거워하는 ‘과거병 환자’가 정말 많다는 거다.
이런 정신적 그늘의 양적 증가가 여러 사회문제의 드러나지 않는 원인인 경우가 많다.
정치인과 정치인 지지자들을 보면 다 악어 같던데,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나르시시스트가 옆에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자는 소리가 유행인 마당에 언뜻 믿기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진짜로 그렇다는 것이고, 오히려 그런 멘털이 취약한 사람들일수록 증오를 통해 자기 위로를 삼기도 한다니 진지하게 생각해 볼 가치는 있다. 앙드레 지드는 이렇게 갈파했다. “우리의 피로함은 사랑이나 죄악 때문이 아니다. 지난 일을 돌이켜 보고 탄식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라고.
결국 이것은 타인과 나 사이의 일 이전에 내가 나에게 지나치게 많은 질문을 던져서 생기는 ‘자의식 과잉’의 병이다. 미움보다 나은 게 싫어함이되 그보다 더 나은 건 ‘잊는 것’이겠지만, 자신에 대한 질문을 당장 줄이기 힘들다면 그 질문을 지혜롭게 만드는 건 어떨까 싶다.
물과 얼음은 본래 동일한 존재이지만, 다른 상황에서 다른 존재로서 존재한다. 물은 얼음이 되기 전에는 자신이 얼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얼음은 물로 되돌아간들 얼음이었다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 물과 얼음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져서는 안 된다. 물에게는 물에 대한 질문을, 얼음에게는 얼음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와 여유가 있는 개인들이 우울과 증오가 덜하고 파국이 없는 사회를 구현한다. 과거라는 망상에 사로잡히지 말고 미래라는 몽상에 속지 않아야 하니, 삶은 현재에 있다. 불완전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햇살 속의 먼지처럼 가벼워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