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9 이야기
여름방학 끝나고 새로운 학교에 전학하여 등교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당중국민학교 (애당초) (앞으로
초등학교로함) 5학년 2학기입니다.
반 배정은 4반 담임은 박현태선생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신적으로 잘못되었고 어린학생들에게 화풀이하는
성격의 소유자 (지금 같으면 바로 교단에서 퇴출감)
필통검사하면 지우개가 없어서 때리고 칼이 없어도
연필이 몇자루 이상 없어도 마찬가지고 분이 안풀리면
일렬로 칠판을 보게하고 바지를 엉덩이 밑으로 내리게 하고
엉덩이 때리고, 양말을 베껴 발바닥 때리고
겨울에는 청소하기위해 양동이에 있는 차가운 물을
얘들에게 뿌리고 아무튼 광적인 존재이었지...
그리고 나는 이욱이라는 친구을 알게되어 친하게 지냈는데,
가정형편이 어렵다고 욱이가 자신의 엄마에게 말을하여
겨울부터 5학년 끝날때까지 욱이네 집에서 학교를
다녔고, 욱이네 집은 학교정문을 나오면 왼쪽으로 조그만
가면 개천이 있는데 거기골목에 있는 집들은 모두가
땅반 개천반 위에 지운 집이며 욱이네 집은 안쪽으로
쭈욱들어가서 있었고, 거기서 조그만 더들어가면 막걸리
만드는 양조장 있고 거기서 나오는 찌끔이을 먹고 취하여
헤롱헤롱 하였던 생각이 나네요.
전학 오기전부터 엄마는 보험회사를 다녔지만 이사온 후에도
4남매가 모두 학생이니 가정형펀이 필기미가 안보이니
밀가루 수제비도 거를때가 허다하여, 누나들은 학교에서
오면 도라지 까는 부업을 시작하여 7가구중 3집 아낙네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자 부업을 하였으며, 그댓가는 돈으로
주는것이 아니고 고구마로 주면 그것을 주식으로 먹었지요.
우리집을 제외한 6가구의 풍속도를 적어보겠습니다.
첫번째 우리방 왼쪽방 ; 30대후반의 남자이고 여자는 어여쁜
아낙에 예쁜두딸과 할아버지하고 살았는데(여기서는 무조건
하나의 방이다) 두딸을 너무나 이쁘게 키워서 친엄마인줄
알았는데 직장여직원하고 눈이 맞어 두딸과 할아버지까지
모시고 나온 사례
나중에 친엄마, 손위시누이 세넷명이 왔는데 모두가
큰소리가 나지않고 점잖게 얘기하고 갔고...
두번째 왼쪽방 ; 딸만 여섯을 둔집인데, 이저씨는 이발사이고
아주머니는 식당에 다니시며 매일 식당에서 남는 반찬과
누룽지와 찬밥을 갖고와서 애들을 먹이는데.이집아저씨는
기술이 있는데도 집에서 빈둥빈둥 어쩌다 일이 있어
나가시면 단가가 안맞는다고 노니 친정엄마는 화가나도
계속해서 쌀을 퍼나르시고,
우리방에서 오른쪽 첫번째방 ; 이집이 대단한집이지요.
이집은 아들이 다섯이고 네째가 딸이며,
이딸은 현경이와 영례가 아는 나행자입니다.
아버지가 교육자였는데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자식
교육시키고 먹고살기 위해서 서울로 온 가정이며
이집 아주머니는 경성주물 담벼락에서 포장마차를
하셨지요
첫째 나?? 는 서울대 사범대학 학생회장이어서 영등포
경찰서 요지 인물로 데모때면 정보계 형사들이 감시하였고
민청학련 사건때는 수배령이 내려져 형사들이 대기
지금은 두부부가 모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음
둘째 나 ?? 는 성남고등학교 졸업, 형과 마찬가지로 형의
동선을 파악하기 위해 감시를 많이 받아었지
지금은 여의도 순복음교회 목사로 재직하고 있음
세째는 학교를 포기하고 형들 뒷바라지를 위해 공장을
다닌걸로 알고. 늦깍이 공부하여 회사생활한다고 들었고
네째딸이 우리하고 동갑이고 초등학교는 어디에 다녔는지는
모르나 중학교는 영등포시장쪽에 있는 새마을학교를
다니걸로 알고 지금은 아직도 미혼으로 사회복지사로
활동하고 있음 (수소문을 취하여 났는데 연락이 안됨)
다섯째, 여섯째는 펑범한 학생으로서 지금은 모두가
학교 선생이라고 들었음
현재의 이집 사정을 알고 있는것은 양남동 판자집
철거할때 시흥시 신천리 복음자리 마을에 우리
외삼촌댁하고 같이 이주하여 아직도 그동네에
살고 있는 관계로 외숙모를 통해서 듣게 되어서
알고 있으며 지금은 나 행자 만 그동네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첫댓글 박현태선생님은 공포 그자체..약9년전 초교모임에 오셨는데 작은키에.일본의 레슬링선수 안토니오 이노끼를 연상시키는 외모..그분이었나 싶은게 반갑기만 하더라..그해 가을을 끝으로 화곡동소재 초교교감으로 정년퇴직 하신다했지..그 당시 담임선생님은 모두 어떻게 돼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