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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음성 듣는 삶
나는 '정통파 모태 신앙인'으로서 살아왔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일방통행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행위와 보상'으로 이해했다.
즉, 어느 정도의 자격과 수준을 갖추어야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안에는 나름대로 높은 '종교적 기준'이 자리하고 있었다.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들은 내 삶의 최우선순위였지만, 그런 일들은 결코 나를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으로 이끌지 못했다. 또한 온 정성과 노력을 다해야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생각해서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기도했지만, 사실 그 기도는 내 푸념에 가까웠다.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시면 '내가 잘해서 그렇지'라며 은밀하게 교만을 떨었고, 그렇지 않으면 '기도한다고 다 되겠냐'며 체념해 버렸다. 하나님께 '왜 어떤 기도는 응답하고, 어떤 기도는 응답하지 않으시는지' 여쭈어 볼 생각은 아예하지 못했다. 그저 하나님은 나의 일방적인 기도를 듣기만 하시고, 나는 하나님의 응답이 어떻든 군소리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무미건조했다.
사실, 내가 예배와 사역, 경건 생활에 열정을 쏟아 부었던 이유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에 있지 않았다. 오직 내 믿음의 성장, 내 필요의 충족, 내 사역의 부흥, 내 부르심의 성취에 있었다.
그러나 셀 세미나와 수양회를 통하여 성령의 능력과 역사를 '진하게' 맛 본 이후, 수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쌍방통행'으로 바뀌었다.
그분의 뜻과 입장, 속사정이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쉬지 않고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진리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주시옵소서'라고 구하기만 하는게 아니라
'제가 무엇을 하기 바라십니까'라며 감히 질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나는, 이러한 변화들이 참 놀라웠다. 무엇보다
무미건조하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해오던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닫는다는 사실이 가장 놀라웠다. 나는 예수전도단의 묵상과 중보기도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분별하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깨달은 내용은, 무차별하게 적용했다.
지금 돌아보면, '무식한 놈이 용감하다'는 말에 딱 들어맞는다.
혼자 착각하고 엉뚱하게 해석한 탓에 실수가 잦았지만,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는 기쁨과 감격으로 몹시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혼란을 겪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확신하여 그 대로 순종했는데, 결과가 정반대로 흘러간 적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의 실패에 대한 원인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돌려 책임을 회피하려 하고,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영적 지도자들의 모습은 더욱 혼란만 안겨 주었다.
평소에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라는 말을 입버릇 처럼 하던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보이다니,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내 머릿 속에는 수없이 많은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우리는 들을 수 있는 걸까?
커다란 영적 착각에 빠져 있는 건 아닐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일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이 따로 있는 걸까?
어떻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까?
내 방법이 틀려서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걸까?
하나님의 음성인지, 내 생각인지 어떻게 분별하지?
여러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함께 들었을 때,
다툼과 갈등없이 그 음성을 분별할 방법은 없을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데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아 할까?
'하나님의 음성'을 다룬 강의와 서적도 많이 탐구했지만, 가슴 한구석이 여전히 답답했다. 대부분의 강의와 서적은 '누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며,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었다.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그리 어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심지어 초신 자들이나 이전에 매우 방탕하게 살았던 사람들조차도,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누리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 앞에 있자니, 내 자신이 마치 '영적 지진아'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그리쉽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인지, 나 혼자만 어딘가 문제가 있어 보였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만한 자질이 내게는 없는 걸까,
아니면 저 사람들이 너무 신령한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저들이 너무 지나치게 매사를 영적으로 해석하는 걸까?'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음성을 자유롭게 듣는 서구인들보다 나를 더욱 미치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나 또한 하나님의 음성대로 이루어지는 삶의 역사를 여러번 경험해 봤다는 사실이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들어서 기도하며 순종한 일들이 열매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분명 나에게 말씀하는 분이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긍정할 수도, 부정 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요즘 들어, 하나님의 음성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는 사람들이 참 많아진 것 같다.
예전에만 해도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주제는 늘 '이단' 시비가 따라다녔다.
신령한 체험과 은사를 추구하는 몇몇 교회와 목회자만 다룬 주제였다.
하지만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이야기는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너나 할 것 없이 관심을 보이며, 배우고 싶어 한다.
최근의 기독교 서적과 설교, 강의, 세미나 등을 조사해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일반화되고 대중화되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교인과 교회가 하나님의 음성을 혼란스러워 한다.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성경적이고 체계적인 지침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이미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영적 청각 장애'가 있다고 의심하는 성도들도 많다.
그분과 동행하는 삶의 열쇠가 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른 사람에게 자기 뜻을 관철시키는 도구나 신앙 내공을 자랑하는 수단,
변명과 회피의 빌미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듣는' 것은 죽어라고 가르치면서
그들은 바를 공동체 안에서 확증하고 분별하는 데는 소홀했던 한국 교회에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갈급해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점점 더 늘어날 것 같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 듣는 삶을 더욱 확고히 다질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문화와 세계관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어떤 요소가 필요한지 설명할 것이다.
1.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못해 신앙” 하나님의 음성듣는 삶에 입문하다
세미나에서 말씀을 전하는 강사들이 하나같이 다음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여태껏 다니던 교회에서는 그런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예수전도단은 이단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더니‥‥ 정말 좀 이상한 데 아니야?' 그뿐이 아니었다 누구나 방언으로 기도했으며, 기도한 후에는 꼭 이런 말을 덧붙였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
전통적인 장로교에서 자랐기에 방언이 뭔지도 몰랐던 나였다.
그런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용한' 사람들 틈에 섞여 있으려니 얼마나 혼란스러웠겠는가. 나는 '교회와 학교, 집'이 인생의 전부인,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었다.
식사 시간이면 자동적으로 기도하고, 주일에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 갔다면 일주일 내내 불안하고 찜찜했다. 그러나 나는 늘 죄짓는 못된 놈이었으며, 하나님은 늘 용서하시는 분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내 마음속의 하나님은 감히 내가 기쁘게 할 수도 가까이 할 수도 없는 '산신령 같은' 분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전능하심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도,
삶 속에서 실제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경험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나는 믿음으로 싸워야 하거나 헌신이 필요한 일이 생길 때면,
"내가 그걸 어떻게 해? 난 못해! "라고 말 하는 편이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거나 부인했던 것은 아니 지만,늘 "못해! 할 수 없어! 안 될 거야!"를 외치던 사람이었다. 이는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신앙인의 모습일 것이다.
어쨌든 이런 '신앙의 소유자였던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외치는 사람들을 만났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의 음성이란게 정말 존재하는지, 그렇다면 그 정체는 대체 무엇인지, 사람들은 대체 그분의 음성을 어떻게 듣는지, 그 음성이 자기 혼자만의 착각과 오해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무엇보다도 이런 질문들의 답을 찾을 수나 있는 건지. 나는 정말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서는 '나도 이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움트고 있었다.
하나님을 늘 멀게만 느꼈는데, '이런 식으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도전받고 부러워하게 되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는 없지만
다른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는 있었던 것, 나는 그것을 갖고 싶었다. 그것은 바로 '친밀감'이었다.
도대체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음성이라는게 설명 하기는 어렵고 오해하기는 쉽기 때문에,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참 많았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라는 말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신학적 관점과 신앙적 관점으로 구분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음성은 신학적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모든 학문은 '논리성'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논리성이란 무엇일까?
수학 공식으로 설명하자면 'A=B이고 B=C이며, C=D다.
그러므로 A=C이며, A=D다'라는 것이다. 논리적인 관계가 성립해야 모든 과정이 합리적으로 딱 맞아 들어가면서 결론에 이를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중간 단계를 임의로 빼버리면 어떻게 될까?
이를 테면 'A=B이고 C=D다 그러므로 A=C이며, A=D다' 같은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인 비약은 결코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논리성 말고도 학문이 갖추어야 할 것은 '객관적 대상'이다.
어학은 언어를 연구하고 수학은 숫자를 연구하며 과학은 삼라만상의 이치와 법칙을 연구한다.
그렇다면 신학은 어떨까? '신' 즉 하나님을 연구하는 학문인 셈이다.
그러나 신학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 바로 하나님을 인간 논리의 틀 속에 다 집어넣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온 우주를 말씀으로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어떻게 피조물의 지성과 논리로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럴 수 있다면, 결코 그분을 절대적인 주권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은 필요 없다는 것인가?'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는 않다.
신학은 분명 신자들에게 유익을 준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수고하며 얻었던 '지혜'와 '체계'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꼭 필요한 학문이다. 다만 신학이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설명하고 증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학문으로서의 신학에는 논리성과 기본 전제와 단어의 정의가 매우 중요하다.
신학의 기본 전제는 '하나님의 음성과 말씀은 특별계시인 성경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개념을 바탕으로 신학을 배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면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사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신앙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바라보라
그렇다면 대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신학'이 아니라 '신앙'으로 받아들여야만 이 표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진정한 기독교는 종교와 삶을 구분하지 않는다.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이 분리된 삶은 위선자의 이중생활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하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빛을 이 세상에 비추는 자들로 부름 받았으며,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영광의 빛을 발하기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데, 이때 일어나는 '영적 깨달음의 과정'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인이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교제할 때,
그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과정이다.
특정한 상황이나 시간에 "하나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거나
"지금 저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라고 물을 때,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받게 되는 응답인 것이다.
행여 하나님이 "자꾸 묻지 좀 마라 이미 성경에 답을 다써 놓지 않았니?
그러니 답이 보일 때까지 계속 읽어라! "라고 딱 잘라 말하실까 봐 걱정된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
만약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이 필요할 때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반복해서 읽어야 할 것이다.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 온종일 성경만 읽는다면, 성경을 일독하는데 약 15일 정도가 걸린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데 최소한 15일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과연 이 계산이 맞는 걸까? 절대 아니다. 하나님의 일은 절대 '기계적 사고'로 바라볼 수 없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신학이나 특정 직분 혹은 은사를 받는다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은 하나님과 내가 맺은 실제적인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지 않다.
지극히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문제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여러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하나님의 실제적인 인도를 즉각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며 하나님을 '알아 가는' 체험의 과정이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정경)임을 믿고 인정한다. 성경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진 존재는 결코 없다. 우리 믿음의 최종 근거와 선택 기준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되어야 한다.
말씀에 모든 근거를 둔다. 자신이 들은 하나님의 음성이 성경말씀과 맞지 않거나 상반되면, 잘못 들었거나 읜수의 속임이라 인정하고 모두 다 잊어버린다. 성경을 대신하거나 그보다 우선할 수 있는 초자연적 체험이나 신비 현상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의 음성 듣는 삶'에 대해 강의할 때에도 이 부 분을 강조한다. "공중부양이나 유체이탈을 하거나 천사의 말을 생생하게 듣는 놀라운 체험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경말씀에 위배 된다면 미련없이 잊어버려야 건강한 신앙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이다.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 가고 교제 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방법과 수단으로 인도하고 지시하시는 그분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얻는 깨달음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다.
2. 하나님은 수다쟁이다.
어떤 일이든 오래 경험하다 보면, 알맹이는 잃어버리고 껍데기와 형식에만 매이게 된다. 신앙생활 또한 그럴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규명하고자 열띤 토론과 논쟁을 벌인다.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성령충만이라는 말과 성령세례라는 말은 같은 것인가?
다르다면,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것부터 구해야 할까?'
그러다 많은 사람이 '성령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라는 진짜 알맹이를 소홀히 여기게 된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중보기도의 올바른 정의와 방법을 놓고 다투다가
정작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다.
'국내 전도가 먼저냐, 해외 선교가 먼저냐'를 놓고 싸우다가
결국 아무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도 많이 봤다.
물론 형식과 틀은 중요하다. 하지만 거기에 담길 만한 적절한 내용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용보다 형식에 얽매인 나머지 비생산적인 논쟁과 다툼을 벌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싸움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근본으로 돌아갑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 또한 한국 교회 안에서 여전히 혼란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주제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올바른 개념과 이론을 정립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분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개념과 이론이 아니라 인격적 이고 친밀한 '진짜' 관계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1-2)
이 말씀은 온 세상과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보여 준다.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창조하다'와 '운 행하다'이다.
'창조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바라'는 '명확한 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에 따라 만든다'라는 의미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과 솜씨를 뽐낸다거나 자기만족을 얻으려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충동적으로 후다닥 해치 운 것이 아니라 목적과 필요에 따라 하나씩 차근차근 지으셨다는 얘기다.
왜 그렇게 하신 걸까? 하나님이 뭐가 부족해서 그렇게 애를 써가며 세상을 만드셨다는 말인가?
누구를 위해 그런 공을 들이신 걸까? 다음 성경말씀을 보자.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하나님이 그토록 수고하고 공들여 이 세상을 만드신 동기는 바로 아담과 하와, 즉 '우리'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첫 날, 첫 시간부터 사람을 염두에 두고 창조에 임하셨다.
하루에 하나 씩 하늘과 땅의 것을 만들면서 '이것은 아담을 위한 거야.
이 정도면 하와도 기뻐하겠지?'라고 생각하며, 기뻐할 우리의 모습을 상상하며 즐거워하셨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단어는 '운행하다'이다.
이 단어는 독수리가 하늘 위를 맴돌거나 헬리콥터 같은 비행체가 착륙지점을 선회할 때 쓰인다.
독수리는 먹잇감을 낚아챌 기회를 노리면서 하늘 위를 맴돈다.
창세기 기자인 모세는 왜 이런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설명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독수리가 온 신경을 먹잇감에 모으는 것처럼,
오랜 고민과 생각 속에서 모든 신경을 우리에게 집중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천지창조는 결코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굳이 수고하지 않아도 모든 일을 간단히 처리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 세상의 입주민인 우리를 위해 오랫동안 고민하셨고, 세심하게 계획을 세우셨다.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셨는지, 창조 작업이 끝난 일곱 번째 날에는 쉬셨다.
놀랍지 않은가? '쉬어야 겠어' 라고 생각하실 만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수고하셨다는 사실이 말이다.
애써서 뭔가를 만든 후에 그것을 바라보며 "보기 좋다"라고 말하며
기뻐한 경험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내 손으로 땀흘리며 수고해서 이뤄 냈다는 성취감 때문에 마음이 뿌듯해진다.
하나님 역시 그러하셨다. 피조물을 바라보며 짜릿함과 만족을 느끼셨다.
매우 공들인 작품이기 때문에 "좋다!"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창 1:10, 12, 18,21,31)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만족하실 수 있던 까닭은 작업의 완성도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것들을 지은 목적 때문이었다.
즉, 다양하고 오묘한 피조 세계의 멋과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살아갈
아담과 하와의 모습 때문에 즐거워하셨을 거라는 이야기다.
창조 작업을 시작한 둘째 날, 하늘을 만드시면서 이렇게 생각하셨을 것이다.
'아담이 이 하늘을 보면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할까?'
땅과 바다. 풀과 나무,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셨을 때는 어땠 을까?
그많은 별을 우주에 일일이 박으시면서 역시나 그것을 보고 좋아할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떠올리셨을 것이다.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에는? 아담과 하와에게 거대한 '사파리 월드'를 선물하시려고,
흐뭇해하며 바다에는 물고기, 하늘에는 새, 땅에는 동물들을 채우셨을 것이다
깊은 밀림 속에 사는 새가 그렇게 예뻐야 할 이유가 보이지 않았다. 어떤 학자들은 종족 번식 때문이라 고 주장한다. 암컷을 꾀려고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별로 수긍이 가지 않는 주장이다. 수컷이 예쁘지 않으면, 정말로 암컷이 절대 찾아가지 않을까? 아니다. 그렇더라도 나름대로 짝짓기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지에 서식하는 새들마저도 그렇게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그 이유는, 바로 그것들이 우리를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
이제 우리의 모습을 보자 맨 마지막에 창조된 인간은 '제작 방식'은 물론 '사양'까지
이전의 피조물들과 매우 달랐다.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다른 피조물을 만드실 때처럼 말씀으로 만드신게 아니라 직접 손으로 빚고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본 따 만드셨다(창 1:26).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
외적인 모습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과 사랑, 교제, 친밀함 등을 닳았다는 뜻이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신비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는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나는 이렇게 설명하고 싶다.
"삼위일체는 완벽한 사귐과 온전한 사랑의 관계다. "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사귀고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서 그런 관계를 맺도록 '특별 제작' 되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하나님과 아담의 사이를 사장과 직원의 관계로 생각하는 듯하다 마치 다음과 같다.
천지창조를 마치신 하나님이 아담을 불러 말씀하신다.
"이제부터 이 세계는 네가 맡아라. 난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다.
나 없다고 농땡이 치거나 게으름 피면 알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 이미 수량을 다 파악했으니까 관리 잘하고. 아, 임신한 동물들은 잘 돌보다가 새끼 낳을 때 잘 받아라 땡땡이치지 말고!" 하나님은 말씀이 끝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하늘로 올라가 버리신다. 그러고는 에덴동산에 설치해 둔 CCTV를 통해 아담을 감시하신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노예 계약'에 이렇게 당해 버린 아담은 드넓은 에덴동산을 누비며 쉴 새 없이 일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랬을까? 말도 안 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늘 아담과 함께 계셨다. 아마 에덴동산 소개는 물론 동산 관광 안내도 하나님이 직접 다 하셨을 것이다. 아담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깊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다. 하루는 하나님이 모든 동물을 아담에게 데려오셨다.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 주라는 뜻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하나님은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지 몹시 궁금하셨다.
이윽고 한 동물이 아담 앞에 섰다. 코에 아주 커다란 뿔이 달린 녀석이었다.
그 동물을 찬찬히 살펴보던 아담이 하나님께 이렇게 외치며 엄지를 들어 보인다.
"하나님! 어떻게 이런 동물을 만드셨어요? 코에 뿔을 달다니, 정말 기찬 아이디어예요! 정말 대단하세요! " 그러고는 코에 뿔이 달렸으니 '코뿔소'라고 이름 짓는다.
그 모습이 너무 기쁘고 대견했던 하나님 아버지는 박장대소하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래. 네 말대로, 이제 그 녀석을 코뿔소라고 부르자꾸나.
넌 대체 누굴 닳아 이렇게 똑똑한 거니. 관찰력이 대단해. 정말 멋지구나."
하나님과 아담의 '작명 놀이'는 즐겁고 기쁘게 몇 개월이나 이어졌을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상상이긴 하지만,
분명히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는 이 정도로 친밀하고 깊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지루 해하거나 외로워하지 않았다.
결코 "하나님이랑은 코드가 안 맞아서 같이 못 놀겠어요"라든지
"하나님, 저 외로워요"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저 같은 인간 하나만 더 만들어 주세요. 저도 저만의 친구가 필요해요! "라고
요구할 필요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하나님이 아담에게 인간과의 사귐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하셔서,
아담이 잠든 사이에 그의 갈비대 하나를 취해 '하와'를 만드셨다.
그때부터 아담과 하와는 늘 붙어 다니며 사귀고 교제했을 것이다.
아담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맺었던 사귐을 하와와도 맺었을 것이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과 아담, 그리고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일어난
모든 사귐과 관계의 기반은 무엇이었을까?
그것 은 바로 대화, 즉 '커뮤니케이션'이었다.
모든 관계가 서로 듣고 말할 수 있는 쌍방향 대화 위에서 만들어졌다.
수다 떨기의 고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함께 수다 떨 수 있는 아담을 만드셨고,
아담과 수다를 떨어 줄 하와를 만드셨다. 그리고 늘 모두 함께 모여 수다를 떨었을 것이다.
내 생각에 에덴동산은 절대 고요하고 조용한 곳이 아니었을 것 같다.
오히려 시끌벅적하고 왁자지껄하지만
정겹고 따뜻한 수다가 펼쳐지는, 동네 사랑방 같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음의 성경말씀을 보자.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1)
하나님은 말씀 그 자체이신 분이다. 이것은 그분이 쉬지 않고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입증해 주는 구절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가장 기본적인 전제가 있다면, 바로 이 말씀일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수다 떨며 사귀도록 창조하셨다.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아주 오래 전, 창조 이전부터 계획된 일인 것이다.
함께 수다 떨려면 격이 맞아야 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분이 이 땅에서 행하신 멋진 일 중 하나는 우리의 '신분을 바꾸신' 것이다.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15:15)
예수님은 '종'이었던 우리의 신분을 '친구'로 바꿔 주셨다.
이 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도 전에 일어났다. 왜 그러셨을까?
뭐가 그리 급하셨던 걸까?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우리에게 모두 전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인간에게는 문제가 있었다.
오래된 형식주의와 율법적인 종교생활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 대부분의 머릿속에 '하나님은 주인, 자신들은 종'으로 여기는 잘못된 사고가 박혀 있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종은 주인에게 거의 질문을 하지 않는다 주인 역시 종에게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다.
종은 그저 명령을 받고 순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종은 주인의 부분적인 필요만 전달받을 뿐,
주인의 원하는 바와 전체적인 계획에 대해서는 알 수도, 알 필요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수다 떨고 싶어 하시며, 그분의 뜻과 생각, 마음, 계획을 전부 나누기 원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종이었던 우리의 신분을 친구로 급히 상향조정하셨다.
종과 달리 친구는 듣고 질문하고 대화할 수 있다.
서로 의견을 충분히 나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갈등하고 싸울 수도 있는 '열린' 관계다.
또한 상대방의 생각과 추구하려는 바를 잘 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모두 전하시려고 우리를 친구 삼으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이 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들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하 나님께 들어야 한다. 들을 뿐만 아니라
친구로서 대화하고, 마음속 깊은 비밀까지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우리에게 얼마나 설명해 주고 싶어 하시는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멀리 떨어진 친구를 애타게 보고 싶어 하듯, 주님은 우리와 만나 수다 떨기 원하신다.
의지할 만한 친구가 누구에게나 한 명쯤은 있을 것이다.
힘 들고 어려울 때 만나고 싶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는 함께 의논하며 격려받고 싶은 친구 말이다.
이런 바람과 필요는 우리가 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생긴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완전히 다르시다.
예수님은 우리가 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를 친구 삼고 싶어 하신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약점 덩어리'인 우리를 친구 삼아 주신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내 양은 나와 수다 떨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과 친구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여러 가지로 오해한다.
그중 가장 심각하고 위험한 오해는,
영적 슈퍼맨이나 은사주의자만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7)
믿음은 들을 때 주어진다. 그런데 듣는 것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대인들이 지나가기 싫어하는 사마리아 지역으로 들어가신다. 그리고 남들이 없는 대낮, 수가 성 근처의 우물에 물을 길러 나온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먼저 알려 주신다.
전설 속의 메시아를 직접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곧바로 마을 사람들에게 달려가 자신이 메시아를 만났다는 사실을 전했다. 이에 곧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믿음을 고백하게 되었다.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요 4:39).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까닭은 주님을 먼저 만난 여인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믿게 된 것이다.
이것은 '간접적으로 듣고'믿음이 생겨난 경우다.
그 후, 수가 성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동네로 초청하여 이틀 동안부흥 집회를 연다.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의 말씀을 곁에서 '직접 듣게' 된 것이다.
그래서 수가 성의 사마리아인들은 우물가에서 주님을 만났던 여인에게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 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요 4:42)라고 고백한다.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그들이 들은 내용은 똑같았다. 하지만 '과정'은 달랐다.
하나는 남의 눈과 귀와 입을 통해 들었고, 다른 하나는 직접 예수님을 통해 들었다.
당신은 예수님이 어떤 방식으로 말씀해 주시기를 원하는가?
간접적으로 듣고 믿는 것과 직접 듣고 믿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당연히 직접 듣는 쪽이 아닌가?
그런데도 여전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일부 사람만의 은사가 아니라는 사실,
음성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약속된 특권이라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요10:27)
이 말씀에는 특별한 신학적 해석이나 신령한 계시가 필요 하지 않다.
예수님이 우리 목자시라는 것, 목자는 양을 부르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만 받아들이면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과 화목해진 사람은 누구나 즉시 그분의 양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 말을 하실 때, '내 대장' 양이나 '내 대표' 양, '내 착한 양' 같은 특정 수식어를 붙이시지 않았다. 예수님의 양이라면 누구나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얘기다.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시95:7)
이 말씀에도 '신령한' 양이나 '거룩한' 양, '헌신된' 양 같은 특정 수식어가 따라붙지 않는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 분을 알아 가고 교제하는 것은 몇몇 특별한 사람만의 특권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리 중 하나'가 아니라 '전부'로 바라보신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신다. 그리고 지위 고하, 남녀노소, 빈부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찾아가 그 음성 들려주기를 원하신다. 어떠한 혼란과 갈등이 찾아와도 '하나님은 네 목자시고 나는 그분의 양이며,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진리를 절대로 의심하지 마라. 이 진리에 늘 믿음으로 '아멘'을 외칠 수 있다면, 누구나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주님은 오늘도 살아 계셔서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다른 누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직접 들을 수 있다!
3. 당신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오래전, YWAM 설립자인 로렌 커닝햄 목사님이 우리나라에서 한 달 동안 전국 순회 집회를 하신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로렌 목사님의 보좌역을 맡았기 때문에, 한 달 내내 그분과 동 행했다.
평소에 나는 로렌 목사님이 20대 청년일 때부터 70대 노인이 된 지금까지
줄곧 하나님 손에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분을 곁에서 모시는 동안 그 답을 찾아볼 요량이었다.
한 달의 일정을 함께 보낸 후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로렌 커닝햄은 언제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산다. "
로렌 목사님은 언제나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묻고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는 사람이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로렌 목사님을 크게 쓰시는 이유였다.
어느 날 집회를 마친 후, 차를 마시며 쉬고 계시던 로렌 목사님께 이런 질문을 했다.
"목사님, 평생 전세계의 모든 나라를 방문하며 사역하셨는데,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으십니까?
이제 연세도 많으시고, 미국인 신분으로 여행하기 위험한 지역들이 늘어나고 있는데요.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로렌 목사님은 진지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희곤 형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도 어겨 본 적이 없네.
아무리 위험하고 두려운 일이라 해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일이라면 무엇이든 순종할 거라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때 그분의 표정과 목소리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로렌 목사님과 동갑내기인, 예수 전도단 설립자 오대원 목사님 또한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한 분이다.
언제 어디서든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묻고 들은 후에 하루를 시작하신다.
그래서 오 목사님은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들을 만날 때면 자주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물어보세요."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들어보세요."
YWAM동아시아 지역 책임자인 홍성건 목사님도 내게 예수전도단 대표직을 넘겨주면서 이렇게 충고하셨다. "희곤 형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과 교제하며 대화하는 일이야말로 대표로서의 성패를 결정할 거야!"
이 세분만이 아니다. 신앙의 깊이가 남다른 사람들, 영성과 성품, 능력을 인정받아 리더로 세워진 사람들, 영적인 스승으로서 기름부음 있는 사역을 펼치는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대화하며 살아간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크게 도전받는다.
'저렇게 대단한 사람들조차 하나님께 묻고 그 말씀에 따라 사역하며 살아 가는데,
그보다 한참 모자란 내가 어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가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을 테고,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편견과 선입관 때문에 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누군가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간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계실까?' '하나님은 정말 우리에게 말씀하실까?'
'말씀하신다면, 얼마만큼 말씀하실까?' 우리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백성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부분은 성경에 셀 수 없이 많이 나온다 하나님은 그 본질상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다.
목자 이신 주님은 자신의 양들을 부르고 인도하려 말씀하신다(시 23; 요 10:11). 뿐만 아니다.
하나님은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씀 하시는 분이다.
(렘7:13) "(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렘35:14) "(14)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그의 자손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한 그 명령은 실행되도다 그들은 그 선조의 명령을 순종하여 오늘까지 마시지 아니하거늘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끊임없이 말하여도 너희는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도다"
또한 시편은 하나님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고 말한 다(시 121:4).
주무시지 않는다면, 무슨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실까? 그분은 쉬지 않고 부지런히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그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부모와 가족, 스승, 친구, 교인, 저자 등의 사람들과
여러 형태로 다양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이세상에 가득 차 있는 소리 중에는 눈과 귀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런 것들은 '떠오르는 생각'이나 '내적 음성'의 형태로 우리 마음속에 들려온다.
우리는 이런 소리들을 과거에도 들었고 지금도 듣고 있으며 미래에도 듣게 될 것이다.
이러한 소리들은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누구의 음성인가'를 기준 삼아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두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소리들을 동시에 경험하며 살아간다.
심지어 스스로 똑같이 생각해서 결정한 것이라 해도,
어떤 것은 하나님의 음성일 수 있고 어떤 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닐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짜로 고민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가?'에 있지 않다.
바로 '누구의 음성을 들으며 살 것인가?'에 있는 것이다.
문제는 듣느냐 안 듣느냐가 아니라 수용이냐 거부냐다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전적으로 그 사람이 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체험과 감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비교적 수용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와는 반대로 진리와 교리를 강조하는 사람은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
한국 교회는 어떤 용어가 주는 느낌과 해석, 그에 대한 신학적 견해에 민감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다'는 말은, '듣느냐 안 듣느냐'라는 선택이 아니라
'받아들일 수 있느냐 거부해야 하느냐'라는 차원에서 논의될 수밖에 없다.
지도자가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 교회들은 대부분 이 말을 곧잘 받아들인다.
이런 교회의 지도자 들은 대부분 예수전도단 같은 선교단체에서 활동해 봤거나
그런 단체의 훈련과 세미나에 참석해 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다.
제자 훈련과 양육 프로그램을 많이 경험해 봤으며,
진리의 적용에 관심이 많다. 성경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생활 신앙'의 추구에 최우선순위를 둔다.
하지만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보인다.
대부분 신학적 관점에서 혼란을 느낀다.
신학교는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신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라고 하면,
마치 또 다른 하나님의 말씀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신비주의를 경계하고 초자연적인 것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도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려 주의한다.
또한 이런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면서
영적 권위를 오용하고 남용한사람들 때문에 상처받고 피해 입은 이들도 많다
하나님의 음성을 수용하는 쪽이든 거부하는 쪽이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할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교제하고 대화하신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안다.
하나님의 음성에 대 한 논의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고, 그들과 대화하셨다.
또한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갈급해 하는 개인과 공동체가 수없이 등장한다.
하나님의 음성이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귐과 교제임을 생각한다면,
누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사실은 이미 누구나 들으며 살고 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오해
예전과 달리 요즘에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설교와 세미나, 책을 많이 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음성을 잘 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무리 훈련을 많이 받고 뛰어난 강사의 메시지를 듣더라도 그 마음에 품은 잘못된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면, 지식은 늘어날 지언정 삶은 변하지 않는다.
이 시대의 한국 교회를 비꼬는 말 중에 '교인은 넘치는데, 성도는 드물다'는 얘기가 있다.
주일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 하는 사람은 많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참 생명을 충만히 공급받는 사람은 적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는 때도 없었건만,
실제로 그런 관계를 경험하는 사람은 여전히 드문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대체 왜 그럴까? 나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선입관 때문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사람과 사람이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려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렇다.
어떤 대중가요의 제목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대화가 필요하다. '
그러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대화할 생각조차 못한다.
대화도 하지 않는데, 어찌 그분의 뜻과 마음을 나눌 수 있겠는가.
그분의 뜻과 마음을 모르면, 속사람이 변하지도 않고 신앙생활을 생기있게 유지하지 못한다.
선한 영향력으로 세상을 바꾸기란 더더욱 불가능하다.
그러니 교인은 많고 성도는 드물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오해는 교회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조장한다.
나는 예수전도단에서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오랫동안 가르치면서,
사람들이 음성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를 몇 가지 발견 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것을 나누는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오해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신령해야 들을 수 있다?
성도들은 자주 이렇게 말한다. "제 기도가 부족해서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리는 것 같아요."
"영성이 부족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듣는 것 같습니다." 정말 그럴까?
신령하고 거룩한 행동을 해야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을까? 아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은 신령한 사람에게만 말씀하지 않으신다.
'성숙한 신앙'의 기준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그런데 자기가 세워 놓은 성숙의 기준을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내 신앙은 아직도 미성숙하다'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스스로 정죄한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갈3:5)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어느 누구도 율법을 모두 지키며 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은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지켜야 주님이 말씀하실 거야'라고 생각한다.
'가끔 기도하는 내게 말씀하실리가 없어'라고 스스로 단정 짓는다.
하나님은 정말 그런 분이실까? 죄지은 인간에게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걸까?
정말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부터 하나님과 아무런 대화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은 죄를 짓고 숨어 버린 아담을 찾으셨다.
(창3:9)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홧김에 동생 아벨을 때려죽인 가인에게도 말씀하셨다.
(창4:9-10)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부하의 아내와 간통하고, 결국 그 부하를 죽게 만든 다윗에 게도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다(삼하 12장). 성숙하고 신령한 사람이나 영적 리더,
혹은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생각은 엄청난 편견이며 오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말씀하신다. 듣는 사람의 조건과 상황 을 초월하여 말씀하신다.
심히 타락하여 더 이상 무너질 수 없는 사람조차 구원하시기 위해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거룩하게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매일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특권이다.
게다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 영접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말씀하실 때가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언제 어디서나 말씀하시는 분이다
큰일에 대해서만 말씀하시고 작은 일에는 관심 없으시다?
"나 같은 사람한테도 말씀하실까?" "자꾸 물으면 귀찮아하지 않으실까?"
"아무리 그래도 일상의 사소한 것들까지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은데·..
"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들은 특별한 경우에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기회는 줄어들고 만다.
큰일과 작은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은 먼저 어느 것을 말씀해 주실까?
많은 사람이 큰일이라고 답하겠지만, 정답은 '작은 일' 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작은 것에 충성하는 자에게 큰 것을 맡기는 분이시기 때문이다(눅16:10)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시 62:8)는 말씀이 있다.
'시시로'라는 말은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라는 뜻이다,
일의 중요도에 상관없이, 모든 상황과 일에서 하나 님의 음성을 듣고 의지하라는 얘기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 와 나누는 것이라면 아주 작은 대화까지도 기뻐하시는 분이다.
YWAM의 대표적인 지도자들 중에 조이 도우슨이란 분이 계시다. 이분은 YWAM 안에서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진, 영적 지도자다. 이분의 책인 』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한국과 미국에서 꾸준히 사랑받는 명저들이다.
나는 조이 도우슨 여사를 1982년에 처음 만났다 한국을 방문하신 그분의 강의를 듣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에 대한 것이었다.
조이 여사는 지나가는 말로 이런 얘기를 했다.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를 때조차 하나님께 어떤 색깔을 칠하면 좋을지 물어본다는 거였다.
처음에 나는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저렇게 신앙생활해도 되는 건가?
뭐 저런 것까지 묻는담? 그냥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을 칠하면 되는 거지.'
나는 조이 여사가 한 말의 의미를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사소한 것까지 하나님과 의논하며 함께하는 것이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 후에 조이 여사는 건강이 나빠져서 침대 생활을 해야 했던 적이 있다.
심한 고통 속에서 몇년 동안이나 꼼짝하지 못 했다.
그럼에도 조이 여사는 그 시간을 잘 견뎌낼 수 있었다고 간증한다.
그것은 바로 평소 습관처럼 훈련했던, 하나님과의 친밀함 덕분이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손톱에 빨간 매니큐어를 칠하든 파란 매니큐어를 칠하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지만 사소 한 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그분과의 친밀함을 유지하려 최선을 다하는 자세는 정말 아름답다
하나님은 이 처럼 사소한 일까지 묻는 사람을 좋아하시며, 그런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부모라면 누구나 아이들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공세를 한 번쯤은 경험해 봤을 것이다.
"엄마, 이건 뭐예요?" "아빠, 저건 왜 그래요?" "저건 또 뭐죠?"정말 쉬지 않고 재잘댄다.
내 경우에는 화가 나서 아이에게 성질을 부릴 때가 많았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꺼리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 아버지 또 한 그러하실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야, 야, 지겹다. 그만 좀 해라, 나도 피곤하니까 좀 쉬었다 떠들어라!" 하고 말씀하실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어떤 것을 물어도, 아무리 자주 물어도 결코 지겨워하지 않는 분이시다
이미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 입술을 통해 듣고 싶어 하시는 분이며,
지극히 작은 일에 대해서도 기쁘게 말씀해 주시는 분이다.
내 생각인가, 하나님의 음성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아마 많은 사람이 이 부분에서 가장 헷갈릴 것이다.
"이게 내 생각인가, 하나님의 음성인가?" 충분히 갈등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신앙이라는 것 자체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와 관련된 것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도 보이지 않는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말이다.
예수전도단은 중보기도를 할 때, 주의 음성을 듣고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한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기도하지만,
중보기도 시간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도 있다.
마음속에 떠오른 것이 자신의 생각인지, 하나님의 생각인지 고민하느라 한 마디의 기도도 못하는 것이다.
들으라고 해서 듣기는 했는데, 다 자기 생각 같아서 확신이 안 생긴다는 것이다.
나 또한 이런 문제로 10년 이상 고민하며 답을 구했다.
하지만 가슴 후련한 대답을 들려주는 책이나 강의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직접 해결해 보겠다고 결심하여 성경책 한 권만 들고 금식하며 그분께 매달렸다 명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는 문제라면,
분명 하나님이 비슷한 경우를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을 것 같았다.
나 같은 고민을 안고 있던 성경 인물을 찾아 연구해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으리란 확신과 기대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경에는 내 예상과는 다른 이야기만이 가득했다.
"이게 제 생각입니까, 하나님 말씀입니까?"라고 묻거나 갈등 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브라함은 어떤가? 아브라함의 고민은 자식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자식을 주신다는 것이 자신의 생각인지, 하나님의 생각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갈등하지 않았다.
사무엘이 이 문제로 갈등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하나님이 아닌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간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사무엘이 그렇게 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처음 들어보았기 때문이다
모세는 어땠을까? 호렙 산에서 불붙은 떨기나무 앞에 섰을 때, 모세는 어땠는가?
"이게 제 상상입니까, 하나님 음성입니까?"라고 물었던가? 그렇지 않다.
나는 정말 이 잡듯이 성경을 뒤져 봤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놓고 갈등하는 인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단 한 명도! 성경이 이런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다니, 놀랍지 않은가?
이 문제가 영적으로 정말 중요하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이에 대한 뜻과 사례를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기록도 찾을 수 없었다.
이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그 일은 문제가 될 소지가 전혀 없거나
성경에서 언급할만한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을 궁금해 한다면, 하나님이 일일이 답해 주셔야 할까?
그분에게는 그럴 의무가 없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겨우 인간의 궁금증 때문에 필요없는 부분까지 설명하고 이해시키려 하실 필요가 없다.
성경에 없는 질문까지 만들어서 고민하고,
그 때문에 온전한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우리가 오히려 어리석은 것이다.
성경을 읽는 것 외에 내가 기울인 또 다른 노력의 방편은 신학교였다.
나는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 예수전도단 사역을 내려놓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신학을 배우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성서신학을 강조하는 신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답은 보이지 않았다.
창세기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성경 어디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는 곧, 성경이 '내 생각인가, 하나님의 음성인가'에 대한 고민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성경에도 없는 문제로 고민하는 것일까?
나는 이것이 우리 민족의 정서와 사고에 남아 있는 '샤머니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샤머니즘은 저마다 독특한 방식이 있으며, 신비주의를 추구한다
(샤머니즘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자세히 설 명하겠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법도 특별한 방식 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외의 방식으로 말씀하실 때는 헷갈려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접근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에는 이 문제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있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한다 '샤머니즘 신앙에는 인간이 신적인 존재와 접촉하는 특정 방법이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어떨까? 하나님이 정해 주신 방법이 따로 있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내가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을 강의할 때 가장 많이 접하는 질문은
"당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어떤 방법으로 듣습니까?"이다.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비장의 무기'를 갖고 있을 거라 기대하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는'특별한 방법이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때 나는 하나님이 환상과 꿈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고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제한된 방법으로 말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음성을 '방법론적'으로 바라보면, 심히 헷갈릴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나님은 나귀를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민 22:28-30)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표현은 잘못되었다?'
하나님의 음성'이란 말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은 대개 이런 불만을 드러낸다.
"하나님이 사람처럼 말씀하신다는 얘기입니까?"
"하나님이 목소리를 갖고 계시다는 말은 금시초문입니다,"
"표현을 바꿔 보면 어떨까요?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라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같은 표현으로 말이지요."
그렇다면 성경은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뭐라 말할까?
(창3:8)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출19:19) "(19)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신4:36) "(36)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의 음성을 네게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의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네가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의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
(시95:7)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요10:3)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요10:27)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행22:14) "(14)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음성'에 대한 성경 구절이 아직도 더 필요한가?
이처럼 성경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표현인데, 우리가 사용하면 문제가 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라는 표현 역시 그렇다.
이 말은 사람 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성경의 권위에 버금가는 계시를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경이 그렇게 기록했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뿐이다.
4.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이유
영적인 삶을 살게 하려고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 말씀하신다
다음의 성경말씀을 읽어 보라,
(사55:1-3) "(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음성은 '레마‘다. 객관적으로 기록된 말씀을 의미하는 '로고스와 달리, 레마는 각 사람의 내면에 와 닿아 영적 생명을 공급하는 말씀을 뜻한다.
늘 읽던 성경말씀이 어느 날 갑자기 마음에 다가와 감동을 주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하나님의 음성 또한 레마의 말씀으로 주어질 때가 많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레마의 말씀을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죽어 있는 우리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다.
당신 주변의 성도들을 둘러보라. 복음을 듣자마자 '한방에' 회심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오랫동안 죄에 데해 고민하며 구원의 길을 헤매고 있었는데
난생 처음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전해 듣고는, 그 자리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회심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복음을 여러 번 듣고 교회도 몇 번 다니다가 회심한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하실 수 있으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다'는 진리와 '있는 모습 그대로,
십자가 앞으로 나오라'는 도전에 마음을 열고 회개하며 예수님을 영접했을 것이다.
레마의 음성은 이러한 깨달음과 도전이다. 여기에는 죽은 영혼을 살리는 능력이 있다.
그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영혼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레마의 말씀을 통해 영적 생명이 충만해 지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생생한' 레마를 경험해 본 사람만이,
종이에 기록된 지식과 정보로만 느껴지던 성경말씀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고백할 수 있다.
우리와 교제하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
예배? 헌금? 거룩함? 헌신? 아니다.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호6:6)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요17:3)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것'은 생명과 같다.
하나님을 알 때 의와 평강과 기쁨이 생기며, 희생하고 헌신할 용기가 생긴다.
성경에서 '어떤 것을 안다'라는 표현은, 지식의 습득이나 암기가 아니라 경험을 통한 체득을 의미한다
성경 퀴즈 대회에서 일등을 하거나 성경책을 몽땅 외운다고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분을 체험해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을까?
성경책 한 권 던져 주고는 "모든 내용은 여기 다 있으니까,
백번 읽으면 하나님을 알게 될 거야"라고 하면 될까?
성서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까지 받은 신학교 교수가
수업 중에 이런 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처녀가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나라 신화에 등장하는 박혁거세도 정말 알에서 태어난 걸까요?
우리는 동정녀 이야기를, 예수님을 신격화하려고 후대 사람들 이 만든 신화로 이해해야 합니다. "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물 위를 걸으실 수 있었겠습니까?
갈릴리 호수를 등진 채 걸어오시는레 마침 높은 지열로 아지랑이가 생겼고,
이 때 문에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보였을 뿐입니다. "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충격으로 심장이 잠간 멎었다가 다시 깨어나신 것입니다. "
대체 그가 받았다던 학위는 뭐란 말인가? 그가 정말 이런 말을 했다면, 과연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이처럼 하나님의 성경을 읽고 연구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알리려고 말씀하신다.
일방적으로 말씀하시는게 아니라 우리와 대화를 주고받으며 말씀하신다.
서로 알아 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은 친밀한 교제를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 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귀 기울이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 그분의 음성을 듣고 교제하며 배우기 원하신다.
정체성을 바꿔 주려고
신명기 28장에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장면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들려주시는 그 음성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배로운 백성이기 때문에 말씀하신다
누군가가 당신과 진심으로 대화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그 만큼 당신이 그 사람에게 중요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도 우리가 그분에게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너희는 나의 보배로운 백성이다"라고 말씀하신다(신 26:18).
이 말은 우리를 '보물'처럼 여기신다는 것이다.
우리를 창조하신 이래로 하나님은 이 진리를 늘 말씀해 오셨다.
우리가 그분 앞에서 우리의 가치를 바르게 알고 이를 가슴 깊이 새겨 두기 바라시기 때문이다.
"너를 보물처럼 아끼고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으며 자란사람일수록 자존감이 높다.
하나님의 음성도 그렇다. '듣는 것만으로도' 건강한 자존감과 정체성을 갖게하는 능력이 있다
우리를 뛰어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 말씀하신다
나는 아직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서투르지만, 곧잘 이런 칭찬을 듣는다.
"도대체 그런 결정을 어떻게 내리신 겁니까? 선견지명이 대단하십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
그럴 때마다 나는 씩 웃기만 한다.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알려 주신 일이기 때문에 딱히 할 말이 없어서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를 세상에서 높여 준다.
(신26:19) "(19) 그런즉 여호와께서 너를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사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시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너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
(신28:13) "(13)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하나님은 우리를, 온 세상의 칭찬과 명예, 영광을 취하는 사람들로 세우겠다고 약속하셨다.
또한 우리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높여 주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세속적인 성공이나 높은 지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 혹 은 공동체에게 영향력을 흘려보낼 수 있는 상황과 자리에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과 같은,
온 세상의 '복덩이'가 되어 다른 사람을 섬기고 복을 흘려 보내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사실 을 매우 간절히 알려 주고 싶어 하신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 에게 말씀하신다.
특별히, 치열한 입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 땅의 십대들이
"너희들을 높여 주겠다"는 그분의 음성을 들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난 십대들이 모든 민족 가운데 찬송과 명예, 영광을 취하며,
이 혼탁하고 어지러운 시대를 뒤집어 놓는 것을 상상해 보라.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는가!
우리가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기 때문에 말씀하신다
해외여행을 하면, 이따금씩 '국적'의 중요성을 배저리게 느낀다
국적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대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또한 해외에서 곤란한 일을 당했을 때 자국에서 힘을 써 주면, 그 나라 사람인 것이 자랑스러워진다.
이러한 노력은 특히 미국과 일본에서 가장 잘 이루어진다.
이 두 나라는 해외에서 자국민이 어려움을 당하면, 국가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한다.
간혹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피해를 입거나 납치당 할 때, 즉각 나서서 사태를 수습하는 것을 보면 부럽다. 그런데 이러한 국적이 영적 세계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가?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신26:19) "(19) 그런즉 여호와께서 너를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사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시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너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모든 나라 위에 세워졌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해외에 나간 사람 이 자국 정부의 보호와 도움을 받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 땅에 사는 우리를 보호하고 도우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능력있는 삶을 살게 하려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려고 말씀하신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개 거룩한 삶을, 남들과 구별되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거룩한 삶을 구별되먼다는 것만으로 정의한다면,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요즘 사회에 팽배한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조건 남과 다르게 독특하고 멋진 삶을 살면,
남들과 구별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삶은 어떤가?
속세를 떠나서 명상과 마음 수련을 즐기며 현자처럼 사는 사람들 말이다.
이는 분명 다른 사람과는 구별된 삶이다. 과연 이런 삶도 거룩한가?
성경이 말하는 '거룩'은 다른 것과 구별된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것을 말한다.
즉, '어떻게 행동하며,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며,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외적인 형식과 행위가 아 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과 가치의 문제라는 얘기다.
그래서 거룩한 삶을 살기란 매우 어렵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다스리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규칙대로, 율법적으로 살기가 더 쉬워 보인다 어떻게 해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늘에 속한 사람답게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일이 정말로 가능한 것일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삿6:10) "(10)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오히려 가나안 거민들이 섬기던 신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순히 또 다른 종교를 하나 더 갖는다거나 우상 앞에 제물을 바치고 절하는 차원이 아니다.
이 '세속적인 가치'와 '인간 중심적 사고'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한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이라 해도
언제든 다른 신의 말을 듣고 섬기게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다른신의 말을 들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이러니하게도, 이방신에 귀기울이던 이스라엘 백성은
그 신을 섬기던 이방 민족에게 철저히 약탈당하게 된다.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삿 6:2)
이 이야기의 결론은 매우 간단하다.
우리가 제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 해도 세상신의 음성을 들으면, 세상이 우리를 이긴다.
세상 신의 소리를 듣기 시작하면, 우리는 두렵고 무서운 마음에 굴을 파고 숨게 된다.
이것은 비단 구약시대에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실제로도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바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세상 신의 소리를 듣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아무 거리낌 없이 세상의 가치와 기준을 따라 살게 된다.
세상 신들의 소리는, 심지어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 일도 돈이 있어야 한다"라든지
"교회에서 대접 받으려면 돈도 있고 출세도 해야 한다",
"목사 자녀와 장로 자녀가 좋은 대학에 못 들어가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다"등의 생각이다.
직분이 무엇이든, 신앙 연륜이 얼마나 오래 되었든,
어떤 영적 체험을 했든 상관없이 많은 그리스도인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소위 '진리들'이다.
요즘에는 많은 신자가 자기 자녀에게 "좋은 학교 들어가야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
그러니 주일 오전 예배에만 참석해라.
말씀 읽고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수련회 참석하는 일은 대학교 들어간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라고 가르친다. 그 덕분에 세상 신들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사는 십대가 많다.
또한 교회 안에서도 얼짱과 몸짱을 추구하고,
심지어 헌신자들이 모였다는 선교단체 안에서도 그런 경향이 나타난다.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신앙을 도덕의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성적 순결에 대한 기준을 세상적 기준에 맞추고, 혼전 동거에 열린 입장을 취한다.
"정말 사랑한다면 그럴 수도 있지 뭐."
배우자를 고르는 일 또한 다르지 않다. 얼굴이 예쁘고 몸매가 늘씬해야 일등 신붓감이고,
경제적 능력이 있고 학벌과 배경이 좋아야 일등 신랑감이다.
물론 대놓고 물어보면, 다들 절대 아니라고 답한다.
하지만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선택이나 추구의 방향이 비그리스도인들과 다를 것이 별로 없다.
하나님의 음성 대신에 세상 신들의 소리를 따른 결과는 무엇인가?
십대 시절에 얼렁뚱땅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성인이 되 어서도 여전히 얼렁뚱땅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교회에서까 지 돈을 밝히는 사람은 결국 돈 때문에 낭패와 곤경에 빠진다.
세상 도덕을 성적 순결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하며 눈물 흘린다.
이러한 삶은 거룩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기는 커녕 세상 사람들과 구별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다른 신의 소리에 귀를 종긋 세우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걸까?
답은 간단 하다. 우리가 거룩한 삶, 남들과 다른 삶, 하나님을 위해 구별 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면,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므로 거룩한 삶을 살기란 어렵지 않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은 결코 모호하지 않다.
왜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거룩한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지혜롭게 하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고 싶어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고 싶어 하시는 지혜란 무엇일까?
암기 잘하고 시험문제 잘 풀고 성적 잘 나오게 하는 지혜일까?
아니면 일 잘하고 처신도 잘하고 사업도 잘하는 지혜일까?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왕이 된 솔로몬은 열왕기상 3장에서 하나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린다.
그리고 그날 밤, 하나님이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셔서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하신다.
이때 솔로몬은 무엇을 구했을까?
(왕상3:9-10) "(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솔로몬은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듣는 마음'을 구했다 흔히 사람들은 그가 '지혜'를 구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은 나오지 않는다.
솔로몬은 '듣는마음' 을 구했다. 영어로는 'listening heart'나 'understanding heart',
히브리어로는 '레브 쉐마'인 '듣는 마음'은 하나님의 음성과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심령을 의미한다. 솔로몬의 대답이 마음에 드신 하나님은 '듣는 마음'을 '지혜' 라는 말로 바꿔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왕상 3:11)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지혜 는 학식과 연륜이 높다고 얻는게 아니라 경청할 때 주어진다.
그런 맥락에서 야고보서 1장 5절을 바라보면, 새로운 깨달음 을 얻을 수 있다.
(약1:5)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가 '듣는 마음'이라면, 위의 성경 구절에는 무슨 의미가 담긴 걸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해 달라는 것이라면, 제아무리 유치하고 말도 안 되는 요청이라도 후히 주시겠다는 얘기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음성 을 듣고 지혜롭게 되기를 몹시 바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그분의 음성을 들으면 지혜롭게 택할 수 있다.
우리 하나님은 자녀들의 요청만 있으면 언제 어 디서든 말씀해 주시는 분이다.
전에 한 국제회의에 참석했을 때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오가는 것 같은데,
영어로 대화하는 바람에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모든 대화의 내응을 이해할 수 있도록 '듣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
그랬더니 정말 하나님이 네 귀를 열어 주셨다.
그 덕에 주제와 핵심을 알아차릴 수 있었고, 아무런 망신도 당하지 않았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지혜로움을 기대하시며, 늘 말씀하시 는 분이다.
우리를 강한 용사로 살게 하려고 말씀하신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도 록 말씀을 통해 능력을 주신다.
(빌4:13)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신28:1)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신28:7) "(7)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자신의 대적들과 능히 싸워 이길 능력을 공급받는다.
그래서 적들이 한 길로 쳐들어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게 된다.
상상만 해도 놀랍고 신나는 일이 아닌가!
세계 만민이 우리를 존경하고 따르게 하려면, 우리를 강한 용사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삶의 목적을 알게 하려고
'가야 할 길'과 '해야 할 일'을 알려 주려고 말씀하신다
한 해에 천여 명의 사람들이 예수전도단의 DTS에서 훈련 받고 있다
그들 중 대부분은 DTS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면서,
이 시간을 통해 부르심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간증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면서 그분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 분의 사랑과 뜻을 발견하여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DTS를 수료한 사람 대부분이 예수전도단을 '친정'이나 '고향'처럼 생각하며 그리워하고,
간사나 후원자 중보자가 또는 이런저런 모습으로 '예수전도단 식구'가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도 그렇다. 예수전도단에서 '받아먹은' 은혜가 있어서 지금까지 간사로 섬기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전도단에는 하나님을 더 깊이 있게 만나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 사역자들이 많다
그중 한 분을 소개하겠다.
바로 고장효성 간사님이다. 그분은 일류대학을 나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건설회사에 입사하여 중역의 자리 까지 올랐던, 소위 성공한 분이셨다.
국내외의 유명 건축물 중에는 그분의 손을 거친 것들이 많다.
서울 삼성동에 있는 코엑스(무역회관)도 이분이 감리단장으로 참여한 건축물이다.
그러던 중 이분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바로 예수전도단의 BEDTS(직장인 예수제자훈련학교)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운 후부터였다.
어느 날 아침, 그분이 묵상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네 사무실의 소파를 모두 없애고 회의용 탁자로 바꾸면 어떻겠니?" 그분은 즉시 그 말씀에 순종했다. 그랬더니 부하 직원들에 게 '권위적인 이미지를 벗어 던진 상사'라는 칭찬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아침마다 묵상을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구체적으로 듣게 되면서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뿐만 아니라 가정과 자녀양육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그러다 '회사를 그만두고 예수전도단에서 섬기라'는 음성을 듣고는,
월급 한 푼 없는 예수전도단의 전임간사로 아내와 함제 위탁했다.
놀라운 경력과 학식, 인생 연륜을 가진 분이지만,
늘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묻고 듣고 순종하신 분이셨다.
하나님이 기름을 부어 사용하실 수밖에 없는 신실한 종이셨다.
그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자 사역도 발전하고 부흥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해외의 직잖인 훈련프로그램을 일으키기 위해 세계 이곳저곳을 돌며 사역하게 되었는데, 중앙아시아의 키르키즈스탄에 강의하러 가시다가 우즈베키스탄 공항에서 심장마비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다
장례식에서 이분의 큰아들이 나눈 고백이 아직도 내 가슴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저희 아버님은 참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술과 담배를 늘 가까이하셨으며,
현장 일에 너무 바빠서 가족은 늘 뒷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BEDTS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친밀해진 뒤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음 성을 듣고 따르며 항상 가족을 위해 기도하시던 아버님의 모습은 마치 예수님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저도 제 아버님처럼 살고 싶습니다. "
하나님과 친밀하게 관계 맺으며 음성을 듣고 사는 사람의 영향력은 얼마나 놀라운가!
나는 그 장례식에서, 나도 장례식 때 자식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도전을 받았다 지금도 장효성 간사님을 생각할 때면,
"하나님께 물어보고 듣고 결정하세요"라는 그분의 조언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렇게 예수전도단 안팎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면서
인생 자체가 바뀐 사람들이 허다하다.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인생이 바뀌고 살아야 할 목적과
부르심도 발견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이렇게 책까지 쓰는 이유는, 실제로도 그런 사례들이 많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삶의 방향을 찾고 싶어 한다. 가야 할 길을 알 고 싶어 한다.
복음을 받아들인 후 하나럼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헌신한 젊은이들은
대부분 가야 할 길을 놓고 고민하며 기도한다.
설사 가야 할 길을 발견해도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린다.
오늘 해야 할 일을 찾아야만, 가야 할 길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가야 할 길파 해야 할 일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이런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들을 성 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렘42:1-4) "(1) 이에 모든 군대의 지휘관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호사야의 아들 여사냐와 백성의 낮은 자로부터 높은 자까지 다 나아와 (2)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의 탄원을 듣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해 주소서 당신이 보는 바와 같이 우리는 많은 사람 중에서 남은 적은 무리이니 (3)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4)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말을 들었은즉 너희 말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무릇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숨김이 없이 너희에게 말하리라"
하나님은 구하는 자들이 '갈 길'과 '할 일'을 깨닫도록 도우신다.
무엇으로? 자신의 음성으로 알려 주신다.
갈 길,즉 인생의 전환점이 필요할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생각을 물어보아야 한다.
나 역시 대학을 졸업한 후, 인생의 방향을 몰라서 무작정 하나님께 물었던 적이 있다.
그 때 하나님은 내게 에베소서 4장 12절 말씀을 주셨다.
(엡4:12)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말씀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사역자의 길을 걷고 있다.
나는 '이 일은 내가 해야 할 일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헷갈릴 때면,
이 말씀을 기준으로 선택하고 결정한다. 가야 할 길과는 달리 해야 할 일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삶의 방향뿐만 아니라
지금 해 야 할 구체적인 일들까지 말씀하시는 분이다.
우리가 하루 하루 살아가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이따금 나는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잊어버린 것 같아 찜찜할 때가 있다.
시간적인 여유도 있는데 마땅히 할 일이 떠오르지 않을 때, 해야 할 일을 가르쳐 달라고 하나님께 묻고 듣는다. 그러면 해야 할 일들이 곧바로 생각난다.
우리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으려 말씀하신다
이 땅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기본 원칙 중 하나는,
우리 같은 사람을 통해 그분의 일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맘대로 하나님을 앞질러 일하는 것도 원치 않으신다.
예수 그리스도마저도 결코 하나님보다 앞서 일하지 않으셨다.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자신의 뜻대로 행하신 적이 단한번도 없다(요 12:49, 14:10).
성자 하나님인 예수님이 자기 뜻대로 행하셨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음성에 따라 행하셨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그분의 음성을 듣고 순 종하는 일꾼이 될 수 있도록 음성을 들려주시는 분이다. 모든 사역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묻고 듣는 것이다.
자기 생각과 뜻대로 하는 사역은 아무리 열 심을 다해도 매우 위험한 일이다.
나는 신대원 시절에 한 노교수님이 "하나님의 일을, 육신의 냄새를 피우면서 하지 마라!"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 던 것을 항상 기억한다.
그 말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일꾼 이라면 모름지기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그 음성에 따라 일해 야 한다는 이야기다. 나는 선교단체와 지역 교회를 함께 섬기고 있다.
그래서인지 여러 곳에서 말씀을 전할 기회가 많다.
그러면 나는 제일 먼저 하나님께 '저를 통해 어떤 내용을 전하기 원하십니까?' 라고 질문한다.
또한 병원 심방을 가거나 슬픈 일을 당한 사람들을 찾아갈 때면 '무슨 말로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요?'라고 묻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적절하게 응답해 주신다.
이것은 나 같은 목사나 선교단체 간사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할 특권과 책임이 있다. 하나님은 자기 뜻대로 가 아니라 그분 뜻대로 행하는 일꾼을 세우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와 성도로 부름 받은 사람,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듣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명하시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
축복된 삶을 살게 하려고
복덩이가 되는 인생을 살게 하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의 삶은, 그 인생 전체에 하늘의 복이 임한다
(신28:2-6)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복은 그 사람이 사는 지역과 자연 환경, 하고 있는 모든 일,
관련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소유에까지 임한 다. 그 자녀와 노동의 결과,
기르는 가축, 그리고 심지어 집안 에서 사용하는 식기에까지 임한다.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 도 복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약속의 성취가 아닐까?
이 모든 축복의 조건은 단 하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 전체에 복을 주시려고 말씀하시는 분이다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기 위해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하늘을 열어 그분의 음성을 듣는 사람에게 단비를 내리시는 분이다.
대자연까지 동원하여 자녀들에게 복 주고 또 복 주시려고 음성을 들려주신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은사가 아니다
사무엘상 3장을 보면, 소년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을 섬기며 성전에서 살고 있었다.
"사무엘, 사무엘아!" 자신을 부르는 사람이 엘리 제사장이라고 생각한 사무엘은 곤히 자고 있던 그를 깨웠다. "제사장님, 부르셨습니까?" 곤히 자고 있는데 갑자기 깨우면, 누구나 짜증이 난다.
특히 뚱뚱한사람일수록 더 짜증내며 힘들어한다. 그런데 당시 엘 리 제사장은 굉장히 살쪄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엘리는 이렇게 말하며 짜증냈을 것이다
"잘 자고 있는데 왜 와서 난리야? 나는 안 불렀어. 그러니 어서 가! "
사무엘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기 처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하나님이 또 그를 부르셨다.
"사무엘, 사무엘아!" 이번에는 정확하게 들었다고 생각한 사무엘은 벌떡 일어나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갔다.
"대체 왜 그래? 꿈됐니? 나는 너 안 불렀다니까. 가서 자라!"
핀잔만 잔뜩 듣고 돌아온 사무엘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또 들려왔다.
아직 어렸던 사무엘은 그 밤에 자길 부를 사람은 엘리 제사장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음성이라고는 생각 조차 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 중 하나인 사무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얘기다.
사무엘이 엘리를 세번째로 찾아갔다. 영적으로 둔감해 있던 엘리는 그제야 감을 잡았다.
엘리는 '이거 혹시 하나님이 얘를 부르고 계신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삼상3:9) "(9)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어린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을 알려 준 것이다. 사무엘이 다시 돌아가 누웠더니,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무엘, 사무엘아! "
바로 그때 사무엘은 엘리에게 배운 대로 반응한다.
(삼상3:10) "(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사무엘은 드디어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을 배우고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평생 동안 하나님의 월대한 계획과 깊은 마음을 간직하며 살았던 대선지자 사무엘조차
처음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능숙하게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은사를 받는 대신,
그분의 음성 듣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진리를 모르거나
자신에게는 그런 은사 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분의 음성을 듣는 유익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신명기 28장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누릴 복과 듣지 않았을 때 받을 저주가 기록되어 있다.
분량을 비교해 보니, 저주의 내용이 복의 4배나 되었다(신 28:15-68).
여기에 기록된 저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누리게 될 축복의 정반대 현상들이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저주의 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하신 이유는
우리를 향한 협박이나 위협이 아니 라 '경고'이기 때문이다.
이 본문에는 '단 한명의 자녀도 저주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분의 사랑과 안타까움이 구구 절절 가득 담겨 있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베로 만든 띠를 사서 허리에 한 번 둘렀다가,
유브라데 강 바위틈에 감추라고 하신다. 얼마 후에 띠를 찾아오라고 하셔서 가 보았더니,
허리띠가 완전히 썩어서 쓸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때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렘13:8-11) "(8)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10)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따라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가 쓸 수 없음 같이 되리라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이란, 하나님 음성 듣기를 거절하고
자신들의 강팍한 마음을 따라 행한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이 썩은 허리띠처럼 될 것이라고 선언 하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속하여, 그분의 이름과 명예, 영광으로 세워진 자들이었다.
마치 허리띠가 허리에 속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 하나님 음성 듣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완전히 망가져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썩은 띠를 허리에 차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에는 버려질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제아무리 놀랍게 지음 받은 자들이라 해도 썩은 허리띠처럼 쓸모없게 될 것이다.
건빵 그리스도인
멋진 크루즈 여행을 떠나고 싶어서 오랫동안 돈을 모은 사람이 있었다.
어렵사리 휴가를 받아 들뜬 마음으로 표를 사서 승선했는데,
지갑을 집에다 놓고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미 배가 출발한 후였다.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걱정이 밀려 왔다. '여행하는 동안 음식을 어떻게 사 먹지? 난 이제 뭐 먹고 사나?' 난감해서 가방 안을 뒤져 보니 다행히도 건빵 한 봉지가 눈에 띄었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건빵아, 고맙다. 네가 날 살리는구나."
식사 때가 되면, 그 배에 탄 다른 사람들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진수성찬을 만끽했다.
그러나 그만은 자기 방에 틀어 박혀 건빵 몇 개와 물 한 잔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렇게 며칠 이 지났다. 도저히 허기를 달랠 수 없자, 그는 결국 선장을 찾 아가 이렇게 애원했다.
"선장님, 저는 너무나 이 여행을 하고 싶어서 오랫동안 돈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지갑을 집에 두고 와 버렸습니다.
그 래서 여태껏 건빵만 먹고 버텄습니다. 더는 못 견디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시면 하겠습니다.
나중에 변상하라면 얼마든 변상하겠습니다. 그러니 일단 밥 좀 먹게 해주세요."
그의 말에 선장은 매우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 손님 ! 손님이 지불하신 뱃삯에는 식대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습니까?
손님은 이 배의 모든 식사를 마음껏 드실 수 있습니다. 모두 공짜라고요!"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가? 나도 오래전에 비행기를 탔다가 이와 비슷한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식사 때가 되어 기내식이 나왔는데,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당황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저거 얼마예요?" 그래서 나는 "전부 공짜니까 걱정 말고 많이 드세요"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런 '건빵 그리스도인'이 있다.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죄 문제' 하나만 붙잡고 신앙생활을 한 다 이들은 정말 열심히 기도한다.
그런데 늘 회개 기도만 한다. 하나님 앞에서 늘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결코 죄에 대한 문제를 넘어서거나 떠나지 못하고, 그것을 신앙생활의 모든 것으로 삼고 살아간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회개와 죄사함'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 다. 회개와 죄사함은 신앙생활의 문을 여는 시작일 뿐이다.
죄 사함의 기쁨 이후에는 더욱 풍성한 기쁨과 감격이 기다리고 있다.
내적 치유의 기쁨, 용서를 통해 얻는 자유의 환희, 영적 전쟁의 승리,
영적 성숙의 깊이, 다스리고 정복하는 삶,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배우는 것‥‥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유익은 매우 풍성하고 짜릿하며 다양하다.
그런데 그런 축복이 있는 줄도 모르고 죄사함의 교리에만 매달려 있다면, 얼마나 불쌍한 일이겠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만 하면 온 열방까지 떼어 주시는 분인데,
그런 축복에 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니 정말 안타깝다 "주님, 열방은 됐고요.
그냥 괴번 주 복권 1등 번호나 알려 주세요!"
이들은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유업에 도무지 관심이 없는 '건빵 그리스도인들'이다
주님은 우리가 아파할 때 위로하시고, 잘했을 때 격려하시는 분이다.
고달픈 삶의 현장에서 함께해 주시고, 그분의 마음을 우리에게 날마다 알려 주신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 음성에 귀 기울이고 그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할 수 없어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이기에 더욱 가슴 아프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풍성한 유익을 누리며 산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인생을 살아라
주의 음성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온갖 좋은 것을 취하며 살게 될 것이다.
5. 하나님의 음성, 이렇게 들어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출발하라
사람들이 서로 대화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관계' 가운데 일어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먼저 하나님과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즉, 하나님과 친해져야 한다는 얘기다. 친해야만 서로에 대해 알 수 있다.
친해야만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성품이 어떤지 알 수 있다.
그래야만 상대방과 말이 통하고 신뢰가 쌓인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그분과 말이 통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말이 통하려면 그분에 대한 신뢰가 쌓여야 한다.
하나님을 신뢰하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체험하고, 그분의 성품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분의 성품을 아는 것은 오직 친밀한 관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그분을 알아가야 한다.
얼마나 인격적인 분이시며 얼마나 우리를 존중하시는지 체험해야 한다.
그분의 무한한 사랑과 용납과 인자하심을 경험해야 한다.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사유하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얼마나 교제하기 원하시는지 알아야 한다.
내 모든 말과 표현을 이해하고 모든 감정을 이해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전에,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한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점검하고 회복해야 한다면,
일단 여기서 책을 덮어 두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을 권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내적 요소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했다면,
이제 그분의 음성 듣는 법을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흔히 느끼는 어려움 중 하나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준비해야 하는 '기본 요소'를 배워 둘 필요가 있다.
이를 잘 이해하여 적용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믿음이 기본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믿음'이다.
(히11:6)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사람의 눈으로는 절대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없다(요 4:24). 그래서 우리에게는 믿음이 반드시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하 나님과 교제하며 음성을 들으려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분이 자기를 찾는 자들을 만나 주시고 상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이 사실은 이천년, 수천년이 지나도 모든 성도에게 항상 적용되는 절대 진리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으실,
언제나 동일한 분이기 때문이다(히 13:8).
그러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삶 속에서 함께하시며 말씀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작은 신음 소리에도 응답하시며, 우리 입술의 모든 말을 아신다.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 그리고 '내 양은 네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격려하신다.
이것을 믿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첫 번째 필수 조건이다.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
(시66:18) "(18)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은 '죄'다. 죄를 범한 영혼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님이 듣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 이를 가르고, 벽을 쌓는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면, 우리는 먼저 정결한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회개하지 않은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동시에 완전히 사함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매일 죄로 오염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죽이는 엄청난 죄를 짓는다.
그리고 그 후 정결한 마음을 달라고 간구한다.
나는 한때, 목사가 되면 '목사'라는 직함 때문에라도 유혹이 없어지고 거룩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목사 안수를 받고 나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자비량으로 사역하는 예수전도단 간사라고 물질에 대한 탐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탐욕과 싸우고 있다. 예수전도단은 강사에게 사례비를 넉넉하게 주지 못한다.
예수전도단 대표가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지역 교회에서 설교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 교회는 내게 예수전도단의 세배나 되는 사례비를 주셨다. 그때는 솔직히 기분 좋았다.
하지만 그 이후 한동안 재정적으로 힘들 때마다 내 안에는 '어디 나를 강사로 불러 줄 교회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그 생각과 싸워야 했다.
그때 나는 내가 얼마나 탐욕스러운 사람인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요즘 사람들은 편지 대신에 이메일을 쓴다.
메일함에는 보면 안 될 내용을 담은 음란 메일들이 짜증날 정도로 많이 들어온다
여러 통의 음란 메일이 와 있으면, 못 이기는 척하고 한 번 열어서
그 안에 있는 것들을 탐닉해 보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러면 마음이 더러워진다.
음란한 잡지나 영화, 사진들은 우리 마음속에 영상을 새겨놓는다.
이상하게도 그런 기억은 오래간다. 외로울 때마다 떠오르고, 심심하면 생각난다.
그래서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마음'을 구해야 한다.
그래야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
순종하려는 마음, 로드십
'로드십'(Loadship)이란,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주님'으로 부를 때 사용하는 한자 '주'는 '주인 주'다.
영어로는 마스터(Master), 즉 '주인'이다.
하지만 호칭은 그렇게 사용하면서도 하나님을 주인보다는 종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언젠가 내가 주로 하는 기도 내용을 자세히 적어 본 적이 있다.
거의 이런 내용들이었다. "주인님! 저 왔습니다. 제 말을 잘 들어주옵소서.
이러이러 한 것들이 제게 필요합니다. 주인님! 사주셔아 합니다
주인님! 서류는 제가 다 준비했으니 결재 도장만 찍으시면 됩니다.
급합니다 빨리 처리해 주십시오. 지금 제가 보는 앞에서 찍어 주소서,
두 번 생각하실 것 먼이 지금 바로 찍으소서."
이것이 과연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사람의 기도일까.
이 내용을 읽는데,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도 얼굴이 화끈거려서 혼이 났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도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
일단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고 나서 맘에 들거나 할만하면 순종하겠다는 배경을 깔고 듣는다.
이것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태도가 아니다.
그분을 종으로 부리는 태도다 만일 당신에게 종이 있는데,
그가 매번 이런 태도로 당신을 대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바로 내쫓을 것이다
그것은 주인을 대하는 합당한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면, 그분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로드십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주님,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는 것이 제게 복입니다. 종이 당신의 말씀을 듣습니다.
여기에 백지가 있사오니,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다 적어 주옵소서.
제 생각은 모두 내려놓겠습니다. 주님의 생각이 더 중요합니다.
제 뜻은 주님의 뜻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를 통해 주님의 뜻을 행하소서."
우리에게는 정말 이런 해도가 필요하다. 주님의 음성을 정말 듣고 싶다면,
일단 한번 들어보고 순종할지를 결정하는게 아니라 그전에 먼저 무엇이든 순종하기로 결정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태도다.
주인이 가라고 하면 가고, 멈추라고 하면 멈춰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신앙과 태도를 가진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사탄을 대적하라
하나님은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이루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사탄이 알고 있을까, 모르고 있을까?
당연히 잘 알고 있다. 사 탄은 하나님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존재지만,
우리보다 오래 살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계속 보았기 때문에 그 말씀의 능력을 잘 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까?
사탄은 그 또한 매우 잘 안다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 일할 사람을 찾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을 테니 말이다.
사탄은 하나님이 그분의 음성을 듣는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사탄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나님이 절대로 말씀하지 못하도록 막 을 방법을 갖고 있을까?
결단코 전혀 없다. 사탄은 하나님이 말씀하지 못하도록 막을 능력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사탄은 하나님의 역사를 어떻게 방해할까?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막는게 아니라 듣는 인간의 귀를 막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원래 사탄에게 속한 어둠의 자녀들이었기 때문이다(엡 5:8).
쉽게 말해 사탄의 '꼬봉'(부하)이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사탄은 모든 수법을 동원해서 우리의 귀를 막으려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전혀 듣지 못하도록 원천봉쇄 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전에 겁 부터 먹게 한다. 예수전도단에서 오랫동안 사역하면, 하나님의 음성에 관해 여러 가지 갈등을 겪게 된다. 원하던,원하지 않던 대개 그러 한 것 같다. 나는 그 와중에 사탄이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을 방해하려고 사용하는 주요 무기 세 가지를 파악하게 되었다.
두려움
열정적인 신앙으로 훈련을 성실히 받은 사람이라면, 한 번 쯤 이런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가 진짜 선교사로 가게 되는 건 아니겠지?
어쩌면 신학교에 가게 될 수도 있을 거야. 혹시, 이러다가 우리 집까지 팔라고 하시는 거 아니야?
그러면 나는 거지가 될 텐데. 그렇게 되면 우리 식구들이 무척 고생하게 될 텐데
이런 생각은 모두 사탄이 주는 두려움이다.
사탄은 왜 우리 에게 이런 두려움을 주는 것일까?
우리가 두려움에 정신이 팔 린 나머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일단 겁을 먹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지닌 막연한 걱정과 두려움이 실제로 일어나는 학률은 4퍼센트 미만으로 극히 적다.
쉽사리 순종할 수 없을 부담스러운 내용을 하나님이 말씀하실 거라는 두려움은 마귀의 궤계이며 공격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결코 우리 에게 두려움을 주지 않는다.
혼돈
아마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이런 고민을 가장 많이 할 것이다.
'이게 네 생각일까, 하나님의 음성일까? 뭐가 뭔지 헷 갈려서 못해 먹겠다!
'만약 그런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면, 십중팔구 길을 잘못 든 것이다.
그러한 혼돈의 결과는 평안이나 소망이 아니라 신앙의 회의와 혼란스러움이기 때문이다.
(렘29:11)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요14:27)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어떤 음성이 혼란을 가져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사탄이 주는 방해공작일 확률이 높다. 하나님은 내면의 혼돈까지 잠잠하게 정리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다음 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러한 갈등은 대개 샤머니즘의 영향 때문이다.
성경적 세계관을 가져야만 이런 갈등과 혼란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성경 인물 중에 '이것이 내 음성인가,
하나님의 음성인가'라는 문제로 갈등했던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의심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을 방해하고자 사탄이 사용하는 세 번째 무기는 '의심'이다.
'하나님은 정말 나 같은 죄인에게도 말씀하실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 나는 너무 평범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음성으로 믿고 일을 시작했다가 그게 아니었으면 어떻게 하지?'
'괜히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말했다가 내가 다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닐까?'
믿음의 반대말은 바로 의심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다 보면, 누구나 여러 가지 의심을 품는다
우리가 의심하는 까닭은 모두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양과 목자를 생각해 보라. 양은 자신의 목자를 본능적으로 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목자의 음성이 아니면 아예 쫓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1981년 우리나라 대학가에 휴교령이 내려진 적이 있었다.
이에 예수전도단 리더들은 학교에 갈수 없는 대학생들을 어떻게 섬겨야 할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모였다.
하나님은 대학생들을 모아 훈련시키고, 함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휴교령을 내릴 정도로 정부가 대학생들의 활동과 모임을 통제하던 시절에
그 음성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사람들을 모아 훈련할 만한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순종하며 대학생들의 모임을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예수전도단 대학사역의 출발이었다.
예수 전도단은 현재 수도권의 모든 대학과 지방의 여러 대학에서 훈련과 전도사역을 확발하게 펼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PDTS(목회자 예수제자훈련학교)를 시작할 때도 그랬다.
처음 시작할 당시만 하더라도, 그 일이 잘 이루어 질 거라고 믿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지역 교회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DTS가 열릴 수나 있겠습니까?
과연 몇 명이나 지원하겠습니까?"
게다가 당시에는 예수전도단 건물이 따로 없어서 장소를 임대해야 했는데,
지원자가 아직 많지 않아서 비용을 충당할 수가 없었다.
당시 PDTS 리더 중 하나였던 나는 하나님께 "하나님, PDTS를 꼭 열어야겠습니까?" 하고 몇 번이나 물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은 "꼭 열어야 한다! "고 말씀하셨다.
결국 우리는 지원자가 몇 명이든 상관없이 반드시 학교를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지원자가 금세 늘어나서 마침내 PD'rS를 시작할 수 있었다.
외국에서도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브라질 YWAM의 단기선교 팀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그들이 어디로 전도여행을 가야 할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모였는데,
하나님이 아마존의 한 지역에 사는 부족에게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부족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브라질 정부에 요청했는데,
그 지역에는 아무 부족도 살지 않는다는 회신을 받았다.
이에 팀 사람들은 다 시 한 번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로 했는데, 하나님의 음성은 이전과 똑같았다.
그 팀은 결국 순종하는 마음으로 길을 떠났다.
나침반을 들고 무작정 밀림을 헤치며 그 지역으로 들어갔는데,
브라질 정부마저도 존재 여부를 몰랐던 한 부족을 마침내 발견하게 되어 그곳에 복음을 전했다.
단기선교 팀 이야기는 실제 이야기다.
사람들이 하나림의 음성을 놓고 의심하는 이유는
대개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 무엇(예를 들면 자기 자신. 돈, 명예 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고 있으며,
그분의 음성을 듣지 않고 있었다는 증거다.
또한 믿음이 부족한 나를 사탄이 농락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탄은 두려움과 혼돈, 의심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읍성을 들으려는 사람들을 공격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의 이건 전략을 이미 모두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탄과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할 수 있다. 다음의 말씀을 보라
(약4:7)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누가 대적하는 자이고, 누가 피하는 자인가?
하나님께 복종 하는 사람은 사탄을 대적할 수 있고,
사탄은 그런 사람을 당해 내지 못하고 피하게 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 진리를 거꾸로 안다.
사탄이 대적하고 우리가 피하는 것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우리가 대적하고 사탄이 괴하는 것임을 기억하라!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도록, 어떻게 해서든 사력을 다해 방해할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사탄은 그 역사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기를 쓰고 우리를 속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여러 가지 생각으로 혼란스럽게 하거나 딴생각이 들게 해서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아니면 무슨 일이 생기게 만들어서 방해한다.
이상할 만큼 똑같은 패턴의 일이 발생하게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그 일이 사탄의 공격이 아닌지 분별해 볼 필요가 있다.
사탄에게 공격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먼저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회개할 것은 없는지, 정결한 마음을 가졌는지,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 마귀를 대적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의 보혈, 그리스도의 이름, 어린양을 증거 하는 말등으로 대적하면 된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를 속이는 사탄은 떠나갈지어다!"라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권세로 명하노니, 네게 겁을 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들은 다 떠나갈지어다!"라고 믿음으로 선포하라
그러면 마귀가 떠나갈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확신하느냐고 묻고 싶은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 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괴하리라"(약 4:7)
하나닙께 복종하고 사탄을 대적하면, 그들은 결코 우리를 방해하거나 속일 수 없다.
우리가 대적하면, 사탄은 피할 수 밖에 없다.
당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자신의 생각과 경험, 선입견을 내려놓아야 한다.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에 하나님의 음성을 끼워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내려놓은 자기 생각과 주장이 다시 떠올라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다. 일단 자신의 의지로 생각과 편견, 경험을 내려놓았다면, 진정으로 내려놓았음을 믿어라.
이것은 믿음의 결단이자 선포다 그런데도 생각이나 의견이 자꾸 생각난다면,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 여도 무방할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반드시 다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내 편견과 생각을 내려놓았을 때,
하나님이 전혀 다른 깨달음으로 말씀하실 때가 있다. 제3의 대안을 알려 주실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말씀을 묵상하면 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그렇다.
머릿속의 성경 지식들 이 편견으로 작용할 때가 많다
'이거 그 말씀이네! 지난 번 목 사님 설교 때 들었던 내용이야.'
전에 한 번 설교를 들었거나 배운 말씀이라고 해서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한다.
자꾸 그러다 보면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까지도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어느 날 아침에,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크게 꾸짖는 장면을 묵 상한 적이 있었다.
본문을 읽는데 자꾸만 '다 아는 구절인데, 재미없는데,별 것 없는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선입관이 내 묵상을 방해하고 있음을 깨달은 나는
즉시 그 말씀에 대해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을 내려놓고 기도했다.
"주님, 이 말씀으로 설교한 적도 있지만 이 시간에는 이 말 씀에 대한 제 모든 편견을 내려놓겠습니다
전부 다 안다고 생 각하는 교만을 회개합니다. 이 말씀에서 주님을 새롭게 만나고 싶습니다.
저에게 말씀하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한 뒤에 본문을 천천히 읽으면서 관찰하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때 '하나님 은 왜 세례 요한을 통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야단치셨나요?'
하는 질문이 떠올랐다.
그러자 갑자기 '그들을 사랑해서 그렇게 했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느껴졌다.
그것은 평소 내가 그 본문에 대해 가지고 있던 지식이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드는 와중에 하나님이 계속 말씀하셨다.
"독사의 자식이라는 꾸지람에는 너의 생각과 다른 의미가 들어 있다.
바로 '너희는 내 자식인데, 왜 자꾸만 독사(사탄)의 이야기만 듣고 있느냐?
혹시 독사를 너희 아버지라고 착각하 는 건 아니냐?'라는 내 안타까운 사랑이 담겨 있다.
나는 그들 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렇게 말한 것뿐이다. "
이 말씀은 하나님의 속상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담긴 것으로,
"너희 아버지는 나인데, 왜 못 알아보느냐"라는 뜻의 메시지 였다.
그날 아침, 나는 그 말씀을 통해 여태껏 알지 못했던 것,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마태복음 3장 9절을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은 능히 이 돌들도 그리스도인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말 그 말씀대로, 돌로 자손을 만드셨다는 기록은 없다.
돌은 돌로 놔두셨다. 왜 돌로 자손을 만들지 않으셨을까? 이스라엘 사람들 때문 이었다.
돌멩이로 새로운 자손을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기다리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기다리며 긍 흘과 은혜를 베푸셨다.
나는 내 성경 지식과 편견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그날 아침의 묵상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당신도 하나님의 음성을 온전히 듣고 싶다면, 자기것을 모두 내려놓아라!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라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을 알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에겐 성령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16:7)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행1:4-5)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보혜사 성령님은 떵원히 우리와 함께하고 가르치며 말씀을 생각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신다(요 14:If, If)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성령님, 저는 귀가 어두운 사람이라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도와주세요. 제가 주의 뜻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말씀해 주세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위한 외적요소
장소
하나님의 음성을 폰기 위한 특별한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는, 무소부재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도가 함께 모여 예배할 때에는, 예배 장소가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이다.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하나님의 음 성을 듣는다면,
철저하게 하나님과 단 둘이 있는 것처럼 집중하라, 그래야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거나 다른 것에 신경 쓰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만나서 교제하는 데 가장 좋은 장소는 홀로 조용히 머물 수 있는 곳이다.
예수님도 묵상하거나 기 도하실 때면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눅 4:42),
묵상을 하거나 하나님 앞에 홀로 앉아 있고 싶다면,
여러 사람이 모인 곳이나 해야 할 일이 널린 곳을 피하라.
그런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것들에
본능적으로 신경을 더 쓰게 되기 때문에 방해받을 소지가 높다.
시간
하나님은 어느 때든지 말씀하신다. 새벽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한밤숭에도 말씀하실 수 있다.
하지만 하나넝의 음성을 듣기에 가장 좋은 때는 말씀 묵상(QT)과 중보기도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묵상은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하는게 종다.
아침 묵상은 일어나자 마자 제일 먼저 하나님을 찾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세상의 소리와 다른 사람의 소리가 차단된 아침에
먼저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비롯한 많은 믿음의 선배들도 아침에 말씀을 묵상했다.
하지만 꼭 새벽에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침 시간에 하기가 어렵다면, 하루 일과를 마친 후에 해도 무방하다.
다만 상황에 따라 시간을 자주 바꾸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 자체를 포기하게 될 확률이 높다
따라서 가능한 한 시간을 정해 놓고 규칙적으로 꾸준히 훈련하는 게 좋다.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자투리 시간이나 쉬는 시간에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에 대해 하나님께 질문하고 들어보는 것도 좋다.
방법
다음 장에서도 설명하겠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방법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방법에 매이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느냐 보다 어떤 상태인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수전도단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열두 가지 원칙
1. 먼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는 분이심을 인정하며 고백하라
그리고 사탄이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을 방해 하지 못하도록 대적하며 기도한 뒤,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질문하고 잠잠히 기다려라.
2. 나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말씀하시도록, 순종하는 마음으로 귀 기울여라.
3. 떠오르는 죄나 허물이 있다면, 즉시 회개하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에서 정결한 마음은 필수다.
4. 방향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때는 '도끼머리 원칙'을 사용하라.
가장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생각 하는 지점으로 돌아가
거기서 다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왕하 6:1-7).
5. 하나님은 당신의 문제를 당신에게 직접 말씀하신다.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다른 사람을 전적으로 의지해서는 안 된다
6. 하나님이 허락하시거나 그 일을 이루시기 전에는,
가능하면 당신이 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다른 사람과 나누지 마라.
7. 동방박사들은 각자 별을 따라가다 아기 예수를 만났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당신 주변의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확인해 주실 수도 있다.
8. 사탄의 속임수를 조심하라.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성경의 정신과 원칙을 따르고 있는지 꼭 점검하라.
9. 하나님의 음성은 상식과는 정반대로 나타날 수도 있다.
사람들의 반대를 통해서 말씀하실 때도 있고, 현재의 직분과 권한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실 때도 있다.
10. 하나님의 음성은 그분의 부르심에 더 가까이 가도록 우리를 이끌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게 각자의 독특한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
11 하나님의 음성은 들으면 들을수록 더 잘 들린다. 친한 친구가 전화를 걸면,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기도 전에 목 소리만으로도 누구인지 알 수 있듯이 말이다.
12.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사모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구하라.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다 보면, 하 나님을 알아 가는 삶을 저절로 살게 될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성결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고, 머리가 아니라 심령으로 말씀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귀 기울인다.
그런 후에는 그날 해야 할 일들,
즉 사역이나 회의, 상담, 인터넷 등을 어떻제 해야 좋을지 하나님께 묻고 듣는다.
사무실에 출근하면, 동역자들과 함께 예배하면서 하나님이 예배 가운데 주시는 말씀을 듣는다.
특별히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자주 듣는다.
그래서 나는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깊이 들으려 귀 기울인다.
하나님은 부르던 찬양을 통해, 말씀이나 설교를 통해,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기도 네용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내가 예배 시간 다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은 중보기도 시간이다.
예수전도단은 중보기도 대상을 임의로 정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정할 때가 많다.
우리나라인 지 다른 나라인지, 어느 나라의 어느 민족인지,
어떤 문제인지 등 구체적인 기도 내용을 구하는 한편,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 의 마음을 묻기도 한다 그밖에도 신앙서적을 비롯한 책을 읽다가 우연히 그분의 음성을 듣기도 한다.
사역이 잘 안 풀리거나 까닭 모를 불안감과 두려움이 생기면,
하나님 앞에 나가서 듣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나의 죄에 원인이 있었다면 곧바로 회개하고, 싸워야할 시험이라면
하나님께 새 힘을 공급해 달라고 간구한다.
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한마디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셀 수 없을 만큼 자주 경험했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 실습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는 여섯 가지가 필요하다.
1. 믿음
2. 정결한 마음
3. 순종하는 마음
4. 사탄을 대적
5. 자기 것 내려놓기
6. 성령님의 도움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묵상 또는 중보기도를 시작할 때,
이 여섯 가지를 한 문장 혹은 여러 문장으로 나눠 기도하라 그러한 기도의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주님, 주님의 음성을 듣는 데 방해가 되는,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다면 가르쳐 주옵소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 하겠습니다. 주의 뜻대로 행하겠습니다.
주의 음성 듣기를 방해하는 사탄의 세력들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게서 떠나갈지어다.
주님, 제 모든 생각을 네려놓고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성령님, 제 안에 충만하게 임하셔서 말씀하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했으면,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질문하라.
"하나님, 이것을 통해 제가 무엇을 배우기 바라십니까?"
"하나님, 제가 이 일을 어떻게 하기 원하십니까?"
이제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다.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다.
그 =러면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기 시작하실 것이다.
태도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매우 사모한 나머지,사생결단의 태 도로 음성 듣기에 임하는 사람플을 종종 본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실망하고 낙심하여 '하나 님은 나의 목자가 되셔서 나를 사랑하시고 늘 함께하신다'는 근본 믿음까지 흔들리게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사모하는 마 음은 매우 귀하지만, 이런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내가 원 하는 때와 방법으로 하나님이 응답하시기를 고집해서는 절대 안 된다. 하나님이 내 주인이심을 철저히 인정하고 말씀하시 는 대로 듣겠다는 태도를 길러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 에 반드시 말씀하신다. 문제는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행 동하는 우리다. 예수전도단 간사들이 훈련과 사역을 통해 배운, 백만 불짜 리 질문은 이것이다. "하나님, 지금 이 상황을 통해 제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십 니까?" 이 질문의 답만 얻을 수 있다면, 아무리 오래 기다린다고 해 도 결코 조급하지 않다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준비물
HEAM의 DNAT. 불리는 DTS 과정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 는 삶'이 기초이자 핵심인 훈련이다.
묵상 시간에는 아무 자료 없이 성경책과 노트만 달랑 놓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고, 중보기도 시간에는 기도 대상과 구체적인 제목까지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대로 한다. 강의 시간에도 하나님의 음성 듣는 일 이 이루어진다. 잡지와 신문 등 다양한 자료를 자르고 오려 붙 이는 '저널' 활동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요악, 정리하여 창의적으로 표현하게 하는 것이다. 훈련 중에 읽어 야 할 필독서도 여러 권 있는데, 책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각각의 책마다 정리하여 보고서로 제출하게 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떤,깨달은 바가 무엇인지 기 록해 두는 것이 좋다. 묵상 노트나 중보기도 노트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반드시 성경을 곁에 놓아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언제든 펼쳐서 들은 내용을 확인해야 한다. 혹시 책상에 앉아서 하나김의 음성을 들으려 고 한다면, 주변을 잘 정리하라 주위가 어수선하지 않아야 하 나님께 더 잘 집중할 수 있다.
신뢰할 수 있는 멘토(조언자) YWAM의 모든 양육프로그램은 '열방대학'(Hni.·ersity of'the Nations)이라는 이릅의 대학교 체제로 짜이 있다. 그래서 모든 훈련 과정이 각각의 커리클럼에 따라 진행되며, 학점도 철저 하게 관리한다. YWAM은 밑천 없고 가방끈 짧은 간사가 수두 룩한, 자비량 선교단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f'AM이 어떻게 열방대학이라는 대학교를 세울 수 있었는지 궁금해 한다. 열방대학은 YWAM 설립자인 로렌 커닝햄 목사가 하나님께 들은 음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대학교를 세우게 될 것이다. " 그 후 하나님은 당시 미국의 가장 저명한 물리학자이자 대 학 교수였던 하워드 맘스타드 박사에게 동일한 말씀을 주셨다. "YWAM과 로렌 커닝햄을 도와서 대학교를 세워라." 결국 두 사람은 함께 만나게 되고, 자신이 들은 것이 하나님 의 음성이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함께 열방대학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함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수많은 위기를 헤쳐 나갔다. 열방대학의 모체인 하와이 코나 캠퍼스는 서로 하나 님의 음성을 듣고 분별하고 적용하도록 도왔던 두 사람에 의 해 탄생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자신을 가르쳐 주고 이끌어 줄 수 있는 멘토를 두는 것이 좋다. 멘토는 하나님의 음성을 함께 듣고, 들은 내용이 성경의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 았는지 점검해 주고 함께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자신 이 들어야 할 것을 멘토가 대신 듣게 한다든지, 하나님보다 멘 토에게 먼저 달려가서는 안 된다. 나는 멘토의 지나친 간섭과 집착 때문에 영적 성장에 방해 를 받고,범죄에까지 이른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멘토가선 교단체에 있는 경우에는 '영적 아비'로서 검증된 사람이어야 하며, 지역 교회인 경우에는 교회 안에 그가 맺은 열매가 있고 목회자가 추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멘티(조언을 받는 사람)는, 필요와 상황에 따라 멘토를 바꿀 수 있도록 영적 지도 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
들은 내용을 함께 분별하고 검증해 줄 공동체
초교파 선교단체에서 일하는 덕분에 나는 다양한 교단과 단 체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러면서 나는 모든 교단과 단체 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열려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을 알게 되었다. 신앙의 강조점이 다른 단체나 교단은 얼마든 지 있을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공동체 안에서 자신이 들은 내용을 검증받고 분별하기 원한 다면, 현재 출석하고 있거나 출석을 고려하고 있는 교회나 신 앙 공동체의 성향과 스타일을 먼저 잘 살펴보아야 한다.
DTS는 3개월의 강의 기간 이후에 국내외를 여행하며 복음 을 전하는 전도여행을 3개월 정도 갖는다.
이때 행선지와 사역 내용은 각 팀별로 하나님께 묻고 들은 후 결정하며,
하나님이 묵상과 사역 가운데 말씀하신 것들을 날마다 나눈다.
이런 시간을 통해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분별할 수 있으며,
개인이 주관적인 해석과 선입관에 빠지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어 준다.
나도 예수전도단 전체가 힘을 모아 선교에서 중요한 한나라를 방문하여 섬기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있 다. 당시 나는 대표로서 모든 지부장과 사역책임자가 모인 NLT(National Leade,ship Te4n)에서 함께 기도하고 주님의 음 성을 들은 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덕 분에 그 나라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받으신 찬양과 기도 는 지금까지 잊을 수 없는 감격으로 남아 있다. 이 부분은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