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25~26)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놀라운 이적은 요한 복음의 일곱 표적 가운데 마지막 표적이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인되심을 보여줄 뿐 아니라 앞으로 있을 당신의 부활과
그리스도에 의해 얻게 될 모든 성도들의 부활과 영생을 미리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라자로의 부활 사건은 많은 유다인이 예수님을 믿게 한 사건이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유다 종교 지도자들의 위기감을 고조시켜 예수님의 체포와 죽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요한 복음 12장 11절 이후 라자로와 그의 누이 마르타와 마리아가 성경에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공관복음에 라자로의 부활에 대한 기사가 없는 것은 공관
복음이 기록된 시기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A.D.70년 이전으로서 여전히 유다
지도자들의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고, 그들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라자로 일행도 살아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라자로에 대한 기록을 생략했다고 본다.
'라자로'에 해당하는 '라자로스'(Lazaros)라는 이름의 뜻은 '하느님이 도우셨다'이며,
히브리어 '엘르아잘'(Ellazar)의 축소형으로서 그 당시 흔한 이름이다.
그는 현재 '라자로 동네'('엘 아자리예'; El Azarieh)로 불리는 곳, 예루살렘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촌이며 올리브산의 동쪽 경사면에 위치한 '베타니아'
(Bethanias) 출신이다.
그는 중병에 걸렸다가 죽었는데, 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났다고 말한다.
여기서 '나흘'('텟사라스 헤메라스'; tessaras hemeras; four days)이라는
숫자를 밝히는 요한 복음사가의 의도를 알아야 한다.
유다인들의 민간 신앙에 있어서 죽은 자의 영혼이 사흘간은 그 시체를 떠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고, 미쉬나에도 삼일 이내에 시신을 확인하고 그 기간 내에 장사를 지낼
것을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죽은 지 나흘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는 영혼이 완전히 그를 떠난 상태여서
회생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최종적인 죽음의 사실을 묘사한 것이다.
이렇게 라자로의 죽음이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하느님께서 당신 영광을
드러내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게 하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이 조성이 된 것이다.
생명을 주관하시고 생명에 대한 절대권을 가지신 예수님께는 한 인간의 죽음이 죽음이
아니고 수면, 즉 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요한 복음 11장 25절의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 나온다. 바로 모든
사람들이 갖는 부활과 생명의 원천이 어디 있는지를 밝히는 말씀이다.
요한 복음에서 자주 등장하는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 Ego eimi; I am) 양식의
진술은 예수님의 자기 선언을 위한 독특한 양식이다.
이 선언을 통해 '말씀의 계시'가 '행위의 계시'를 앞선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미래에 일어날 사건으로 나타내시기를 거부하시고 자신 속에
있는 현재의 사실로 나타내신 것이다.
부활은 예수님 안에서는 언제나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일이다. 그것이 바로 라자로의
소생 사건이며, 얼마 후에 있을 예수님 자신의 부활 사건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부활의 실체를 인류에게 보여 주신 계시이며, 죄의 결과요 사탄의
시기인 죽음의 권세를 완전히 패퇴시키고 정복하신 역사적 사건이었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에겐 죽음이 임금 노릇을 도무지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에고 에이미 헤 아나스타시스 카이 헤 조에';
ego eimi he anastasis kai he zoe;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라는
자기 선언은 예수님 당신 자신이 바로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이시라는 말이다.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본체이신 하느님으로서 모든 인간의 믿음과 예배의 대상이시며,
인간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그 부활의 생명을 부여받는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는 엄청난 일이 바로 요한 복음
11장 25절 후반절과 26절에 등장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에 해당하는 '호 피스튜온 에이스 에메'(ho pisteuon eis eme;
He who believes in me)인데, 직역하면 '나를 계속하여 믿는 사람은'이다.
여기서 '피스튜온'(pisteuon)은 '피스튜오'(pisteuo)의 현재분사로서 현재 진행
중에 있는 사실 및 과거에서 시작되어 현재까지 계속되는 사실을 묘사한다.
'죽더라도 살고'에 해당하는 '칸 아포타네 제세타이'(kan apothane zesetai; he will
live, even though he dies)이다.
'칸'(kan)은 '카이 에안'(kai ean)의 준말로 '비록~일지라도'(even though)라는 뜻이다.
'아포타네'(apothane)는 '아포트네스코'(apothnesko)의 부정(不定)과거
가정법으로 '비록 그가 죽을지라도'이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죽음은 '육체적 죽음'으로서 사람이면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것으로서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야 하는 물리적 죽음을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당신을 믿기만 하면, 비록 육체적으로는 죽는다
할지라도 '영적 생명'이 그 안에 살아 있다고 선언하신다.
'살고'에 해당하는 '제세타이'(zesetai; he will live)는 '살아 있다','산다' 등을 뜻하는
'자오'(zao)의 미래 중간태로 '영적 생명'이 지속됨을 가리킨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에 해당하는 '우 메 아포타네 에이스 톤 아이오나'
(u me apothane eis ton aiona; shall never die)에서 '우 메'(u me)는 이중
부정(否定)으로서 미래의 사건을 결정적으로 부정하는 역할을 하므로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혹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로 번역한다.
여기서 '아포타네'(apothane)가 나타내는 죽음은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어느 성현 군자가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라 했으며, '부활이요
생명'(요한11,25)이라고 했는가!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다.
어느 성현 군자가 죽어 빈 무덤을 가진 자가 누가 있는가! 예수님만이 부활하셔서
예루살렘에 빈무덤을 가지고 있으며, 성모님만이 몽소승천으로 육신이 무덤의 부패에
썩지 않고 영혼과 함께 부르심을 받아 피승천하셨다.
왜 그런가? 예수님만이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부활을 통하여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시다.
육신은 비록 십자가상에서 죽으셨다 하더라도, 그 영혼과 천주성은 없어지지 않는
분이시다.
인류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시기 위해 몸소 십자가상에서 제단이요,
제관이며 제물이 되시어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다 이루신
다음에는 더 이상 육신으로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사실 이유가 없으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세대, 모든 시간, 모든 장소의 사람들에게 주님이 되시려면 당신의 존재
양식을 새롭게 바꾸셔야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