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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0. 묵상글 ( 2024년 12월 20일. - 믿음에게 마음을, 승락에게 입술을 창조주께 태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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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0. 2024년 12월 20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2.20 03:40
- 믿음에게 마음을, 승락에게 입술을 창조주께 태를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주님 성탄을 앞두고 천사가 아주 바쁩니다.
그리고 천사는 어제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즈카르야에게 얘기하고,
오늘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동정녀 마리아께 얘기합니다.
그런데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천사의 등장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일까요?
낯선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는 우리는 천사도 두려울 수도 있는데
동정녀 마리아도 그런 것이고 그런 두려움을 갖지 말라는 걸까요?
아니면 처녀가 아들을 낳을 거라는 말에 그대로 승낙하면,
엄청난 일들이 당신에게 닥칠 텐데 그것을 미리 생각하며
두려워하지 말라는 걸까요?
제 생각에 둘 다일 것입니다.
천사의 등장도 처음 경험하는 낯선 것이요,
아들을 잉태하는 것도 처음 경험하는 낯선 것이며,
하느님의 아들을 낳는 것은 더더욱 낯선 것이며 두려운 것일 겁니다.
그래서 대답이 쉽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어떤 대답을 할지 천사는 마리아의 입을 주시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대답에 우리의 구원이 달린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을 오늘 독서의 기도에서 베르나르도 아빠스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동정녀여, 당신은 잉태하여 아기를 낳으시리라는 전갈을 받으셨습니다.
이제 천사는 당신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를 보내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비참에 눌려 있는 우리마저 그 자비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승낙하시기만 한다면 우리는 즉시 해방될 것입니다.
당신의 짧은 응답으로 인해 회복되고 다시금 생명으로 부름받을 것입니다.
동정녀여, 속히 응답하소서. ‘말’을 하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하소서.
일시적인 ‘말’을 하시고 영원한 ‘말씀’을 받으소서.
믿음에게 마음을,
승락에게 입술을,
창조주께 당신의 모태를 열어주소서.”
아무튼 마리아의 승낙을 노심초사하며 기다리는 천사에게
동정녀 마리아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응당하신 마리아께서
우리도 당신을 본받아 응답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고,
베르나르도 아빠스도 오늘 우리에게 똑같이 재촉할 것입니다.
믿음에게 마음을,
승락에게 입술을
창조주께 우리의 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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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0. 2024년 12월 20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저의 스마트폰은 늘 무음입니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미사를 비롯한 각종 성사를 집전해야 하므로 스마트폰은 늘 무음으로 맞춰놓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연락되지 않습니다. SNS 문자 메시지도 그날 저녁이 돼서야 확인하게 됩니다. 누구는 제발 빨리 좀 봐달라 하고, 또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무음으로 해 놓는 것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음이 아닐 때, 모든 신경이 바뀌게 되기 때문입니다.
노동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주5일, 하루 여덟 시간 근무’는 1926년, 미국 자동차 포드의 창시자 헨리 포드가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스마트폰으로 인해, ‘365일 대기’ 중이 되는 것 같습니다. 미사 때 가끔 스마트폰이 울립니다. 그때 제대를 향하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바뀝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데 갑자기 SNS 메시지 알림 소리가 들리면 역시 대화가 끊어지고 맙니다. 정말로 급한 연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급한 연락이 그렇게 매 순간 올까요? 어쩌면 ‘급한 연락이 와라.’라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주 급한 연락보다 지금 자기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여전히 제 스마트폰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합니다. 새로운 소식은 제가 찾아봐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바로 앞의 사람에게 충실할 수 있고, 무엇보다 주님께 집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커다란 장점이 많은데 과연 스마트폰의 무음을 바꿔야 할까요?
어디에 집중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주님께 집중하고, 또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것들로 인해 집중할 수 없다면, 집중할 수 있도록 나의 방법들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세상의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도 알 수 없고, 주님께 대한 체험도 거의 없습니다. 당연히 주님도 알지 못하게 됩니다.
어제 복음에서 사제 즈카르야는 천사의 메시지를 믿지 않아서 벙어리가 되고 맙니다. 주님께 집중해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떤 메시지를 들어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이의 많고 적음을 따지는 세상에 집중하고 있어서 믿지 못했습니다. 그에 반해, 성모님께서는 굳은 믿음을 보여주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주님께 집중하고 있으니, 처녀가 아기를 가질 수 없다는 세상의 기준은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굳은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일이 자기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집중하고 있을까요? 세상이 아닌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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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한 사람의 발에 맞는 신이 다른 사람의 발에는 꽉 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모든 경우에 들어맞는 삶의 비결 같은 것은 없다(칼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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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0. 2024년 12월 20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예고합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이사야의 예고대로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서 잉태하게 된 경위를 말해줍니다. 이를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와 비교해 보면, ‘주님의 탄생예고’는 성전 안 ‘성소’에서 전해진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와는 달리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던 “이방인의 갈릴래아"(마태 4,15)에 있는 작은 동네 나자렛의 시골 처녀의 ‘집’에서 전해집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처를 성전 안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두시게 됩니다.
그런데 천사의 인사말은 마리아가 이미 “은총이 가득한 이”(루카 1,28)였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기 전에, 믿음으로 충만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즈카르야는 ‘의심’하여 자신의 목소리까지 잃어버리고 벙어리가 되었지만, 마리아는 ‘믿음’으로 응답하여 구원의 말씀을 품으셨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마리아는 몸으로 우리 주님을 잉태하시기 전에 마음으로 먼저 잉태하셨다."
또 즈카르야에게는 아기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루카 1,17)이라는 ‘사명’이 예고되지만, 마리아에게는 아기가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외아드님”(루카 1,35)이라 불리게 될 것이라는 ‘신원’이 예고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루카 1,35)으로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드러납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나이다.”(루카 1,38)
오늘은 여기에서 드러나는 ‘마리아의 희망’에 대해서만 보고자 합니다. 이는 마리아 자신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 그것을 저도 바랍니다.’라는 뜻입니다, 곧 ‘그분의 희망을 희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리아의 희망과 하느님의 희망이 같아진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시도록 그분의 뜻에 승복하는 일이요, 그분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품고 자신의 희망이 아니라 그분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이요, 당신의 사랑을 이루시도록 자신을 그분께 허용하고 수락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고, 그분의 은총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분이 하시는 일에 함께 일하는 협조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집으로 삼으십니다. 저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시고, 저희 안에서 사십니다. 바로 이것이 저희가 마리아와 함께 진정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희망이 있다는 이 사실이 말입니다. 우리를 희망하는 분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이 사실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큰 기쁨인지요! 내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놀이터요 일터라니! 이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야곱의 탄성(Eureka!), 그 깨달음의 외침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창세 28,17)
오늘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바야흐로 성탄의 기쁨이 몰려옵니다. 희망이 이미 수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주님의 희망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희망이 진정,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그 사랑을 퍼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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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0. 2024년 12월 20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곰곰이 생각하고 맡겨라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확인한 후 그에 대해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보지 않고도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알기 위해 믿는 것은 신성에 가깝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요한 20, 29).
성경을 보면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메시지를 들은 즈카르야는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루카1,18) 의심하고, 그 메시지가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메시지가 이루어지는 날까지 벙어리로 지내야 하였고, 비로소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먼저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무턱대고 하느님의 섭리를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곰곰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런 다음에야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 하였습니다. 일단 받아들이고,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1,34). 라는 마리아의 질문은 곧’ 어떻게 해서 처녀가 어머니가 될 수 있단 말인가?’하는 우리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그에 대한 천사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
사실 이 대답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친히 하셨던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사라는 웃으면서, 내가 이미 늙었는데, 정말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랴? 하느냐?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 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내가 내년 이맘때에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창세18,13-14). 그리고 마리아의 그에 대한 대답도 확실합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이는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든 일은 진정으로 당신께 온전히 봉헌하는 이들 안에서 이루어집니다“(우리야). ‘제가 무엇을 해 보겠습니다’ 하는 대답이 아니라, ‘당신이 알아서 저를 연장으로 쓰십시오’하는 겸손의 내어 맡김입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곰곰이 생각하고 되새긴 후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맡기면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먼저 믿으면 애당초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시련과 고통 안에서 더욱 빛나게 됩니다. 마리아의 대답은 바로 목숨을 내놓는 기도였습니다. 당시 시대 상황으로써는 ‘처녀가 임신을 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지만 당신의 일을 인간과 더불어, 인간을 도구 삼아 하십니다. 인간의 자발적인 협력 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의 은총과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열매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의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통하여 예수님을 낳아드려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만큼 우리의 믿음이 더해지길 희망하며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저를 당신의 도구로 쓰십시오.’하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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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0. 2024년 12월 20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달라스 교구 시노드에 참석했습니다. 3박 4일 동안, 3년 동안 준비한 시노드 결의 사항에 대한 투표가 있었습니다. 투표는 아주 중요한 것, 중요한 것, 덜 중요한 것으로 나누어서 투표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본당 행사에서 간식을 주는 것에 대한 투표가 있었습니다. 아주 중요하다는 의견, 중요하다는 의견, 덜 중요하다는 의견으로 투표했습니다. 교리 교육에 시대의 상황에 관한 것들을 반영하는 것에 대한 투표도 있었습니다. 낙태, 인종차별, 이민자, 환경 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필요한가에 대한 투표였습니다. 교구장님은 시노드의 투표를 참조해서 달라스 교구의 사목에 반영하겠다고 했습니다. 매일 아침 미사가 있었고, 미사 중에 주교님은 ‘희망’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희망은 절망 중에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했던 희망입니다. 메시아는 3번에 걸쳐 우리에게 오신다고 했습니다. 2,000년 전에 오셨고, 지금 우리의 마음에 오시고, 마지막 때에 오실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희망을 품고, 깨어 기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성서 말씀은 구약과 신약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하즈 왕은 유다 왕국의 위기에 직면했으나, 하느님께서 주신 징조를 거부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라는 표징(임마누엘)을 주셨지만, 아하즈는 이를 믿지 못하고 자신의 정치적 계산과 외교적 전략(앗시리아와 동맹)에 의존했습니다. 아하즈의 의심은 하느님보다 세상의 힘을 더 신뢰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 역시 하느님의 약속 대신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에 기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계획을 듣고 놀라움을 표현하지만(“어떻게 그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곧바로 순명하며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상황(혼인 전 임신으로 인한 사회적 위험)과 이해를 넘어,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지하며 자신의 삶을 내어드렸습니다. 마리아의 순명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과 계획을 신뢰할 때 어떤 열매가 맺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야구 경기는 투수와 포수가 공을 던지고 받는 경기입니다. 그러기에 투수와 포수는 서로 호흡이 잘 맞아야 합니다. 포수는 투수가 던지는 방향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투수는 포수가 잘 받을 수 있도록 미리 던질 곳을 약속합니다. 던지는 공의 유형도 직구인지, 변화구인지 사전에 약속합니다. 이것이 투수와 포수가 함께 공유하는 사인입니다. 사인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유능한 포수도 공을 잘 받을 수 없습니다. 사인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투수도 정확한 곳으로 공을 던질 수 없습니다. 야구 선수들은 훈련을 통해서 서로 사인을 숙지합니다. 그래야만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서 상식과 양식이라는 사인을 공유해야 합니다. 관용과 인내라는 사인을 나누어야 합니다. 용서와 사랑이라는 사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징표를 보여주시는 하느님과 그 징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하느님께서는 내 가족들을 통해서, 내가 만나는 이웃을 통해서, 흘러가는 구름과 부는 바람을 통해서 표징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내 믿음의 눈에 이물질이 묻어 있으면 성탄의 기쁨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내 사랑의 눈에 먼지가 잔뜩 묻어 있으면 주님 성탄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내 희망의 눈에 고통의 비가 내리면 주님의 성탄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해마다 계절이 오고 가듯이, 매일 태양이 뜨고 지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순환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눈을 뜨고 있어도 내 마음에 욕망의 먼지가 묻어 있다면, 내 마음에 분노의 이물질이 쌓여 있다면, 내 마음에 열등감의 비가 내린다면 우리는 늘 새롭게 다가오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대림 시기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제대로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하즈처럼 의심의 눈으로 하느님의 표징을 보지 말고, 성모 마리아처럼 순명의 눈으로 하느님의 표징을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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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0. 2024년 12월 20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 말씀의 정수는 바로 이 부분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늘 간직해야 하는 믿음의 정수입니다. 또한 몇백 번을 이야기해도 입이 아프지 않을 신앙인의 참모습입니다.
이 한마디가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위의 한마디가 지금 우리를 하늘나라로 이끌었습니다.
순종의 마리아, 성모님께서는 한평생을 주님 앞에 자신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말로 그리고 삶으로 말입니다.
첫 사람 아담과 예수님께서 대조된다면 첫 사람이었던 하와와 대조를 보이는 분은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인 것이 아니라 유혹과 탐욕에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하와는 주님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하와의 모습을 온전히 대치하신 분. 순종의 삶을 사신 분이 바로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우리도 처음에는 “주님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고백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순종적인 모습에 유혹이 찾아듭니다. 유혹은 주님의 계획보다 나를 우선하게 만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님께서 들어주시기를 바라도록 만듭니다. 그 순간 주님은 중심이 아닌 변방이 되고 우리가 중심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오늘 하루를 지내며 되뇔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의 뜻이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때가 되면….
나는 나이 들기를 기대해 왔습니다.
그때가 되면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보다,
어떤 사람인지가 훨씬 더 중요해질 테니까요.
-수잔 서랜던-
우리 시대를 물질만능주의 시대 혹은 외모 지상주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한때라는 것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물질은 사라질 것이고 외모도 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간 앞에서 말입니다.
하늘로 돌아갈 때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게 될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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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0. 2024년 12월 20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정주의 모범: 마리아 성모님
“관상, 환대, 순종”
요즘 날마다 계속되는 ‘오 후렴’이 참 장엄하고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오늘 대림 제2부 12월20일 네 번째 ‘오 후렴’ 역시 참 좋습니다.
“오 다윗의 열쇠여,
이스라엘 집안의 홀이시여,
주께서 여시면 아무도 닫지 못하고,
닫으시면 아무도 열지 못하오니,
오시어 죽음의 땅과 어둠속에 앉아 있는 우리를,
결박에서 풀어 주소서.”(2000.9.11)
매후렴 마다 반드시 들어있는 “오시어”입니다. 인류가 존속하는한 계속될 대림시기입니다. 예나 이제나 앞으로도 오시어 죽음의 땅과 어둠속에 앉아 있는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애절한 탄원의 기도는 계속될 것입니다. 한결같이,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 오시는 겸손한 사랑의 주님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동정 성모 마리아입니다. 참으로 눈밝으시고 겸손하신 주님은 당신 천사를 통해 나자렛 시골의 마리아 처녀를 찾아 나섭니다. 마리아 성모님이야 말로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따라야 할 정주의 모범입니다. 오래전 써놨던 ‘정주’란 글이 생각납니다.
“마음의 중심
늘 고요히 깨어 있어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
곧 집중 몰두하되 휘말리지 않는다
언제나 새벽의 고요와 평온을 산다.”
그대로 정주영성을 사셨던 마리아처럼 생각됩니다. 역사의 획기점 전환점이 된, 역사의 중심이 된 오늘 하느님의 나자렛 방문 사건입니다. 깨어 침묵중에 환대하는 마리아에 대한 주님 천사의 찬사의 축복입니다. 이 두 구절은 제가 참 많이 고백성사중 보속시 말씀처방전으로 써드리는 성구입니다. 마리아 대신 당사자의 이름을 넣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이 말씀을 받았을 때, ‘보속이 아니라 보석입니다!’ 환호하던 수녀의 모습도 생각납니다. 어느 선배 노사제에게 “신부님은 보물입니다.” 했을 때 “아닙니다. 고물입니다.”라 대답하던 노사제의 겸손한 유머도 더불어 생각납니다. 새삼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보석이요 보물같은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거듭되는 말씀도 마리아에게 큰 격려와 힘이 됐을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제자리의 정주의 침묵과 관상에 충실할 때 주시는 주님의 축복입니다. 제자리, 제정신을 잃고 제대로 살지 못하는 극단으로 치닫는 이들을 보면 정말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많은 학식에도 불구하고 이념에, 종교에 중독되어 맹신이, 광신이 될 때 백약이 무효임을 깨닫습니다. 이에 대한 최고의 처방이 바로 정주의 관상과 환대입니다.
주님 천사의 축복의 전갈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지만 침착을 회복하여,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했으니 관상가로서의 마리아의 진면목이 잘 드러납니다. 엊그제 주님의 천사를 맞이하던 요셉과 흡사한 마리아의 응답입니다. 요셉의 태몽에 이은 오늘 마리아의 태몽처럼 생각됩니다. 마리아를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했는지 주님은 당신 천사를 통해 속내를 다 밝히시며 대화의 소통이 시작됩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불릴 것이다...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 아들을 잉태하였다...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놀라운 사명의 축복들 줄줄이 주어집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참으로 마리아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벅찬 사명의 축복들입니다. 마리아를 설득하기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하느님의 겸손과 인내의 사랑이 감동적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파트너인 마리아의 자발적 협조없이는 절대로 일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삼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여 경청하고 순종하는 환대의 관상이 얼마나 본질적이자 절대적인지 바로, 마리아가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주님의 천사의 말에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은 늘 들어도 새로운 감동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역사의 전환점이 된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입니다. 이 응답이 나오기전 산천초목이 조마조마한 모습으로 적막에 잠겨 있었다는 성 아우구스티누의 주석말씀도 생각납니다. 마리아의 순종으로 이사야의 예언도 실현될 수 있었으니, 정말 한없이 기뻐하셨을 하느님의 모습도 눈에 선합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 신탁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적용시켰습니다. 놀랍고 감사한 것은 우리 마리아 성모님께서는 시종여일, 아드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까지도 “예스맨(Yes-man)”으로 “순종의 비움(케노시스)의 삶”에 충실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리아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마리아 성모님의 순종의 믿음을 닮게 하시며 다음 말씀대로 또 하나의 임마누엘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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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0. 2024년 12월 20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도>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당신께 다가갑니다
나에게 오시는
당신께 다가갑니다
나에게 다가갑니다
당신께 가는
나에게 다가갑니다
당신을 만납니다
나를 만나시는
당신을 만납니다
나를 만납니다
당신을 만나는
나를 만납니다
당신을 봅니다
나를 보시는
당신을 봅니다
나를 봅니다
당신을 보는
나를 봅니다
당신과 함께합니다
나와 함께하시는
당신과 함께합니다
나와 함께합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나와 함께합니다
당신께 드립니다
나에게 주시는
당신께 드립니다
나에게 줍니다
당신께 드리는
나에게 줍니다
당신이 됩니다
내가 되신
당신이 됩니다
내가 됩니다
당신이 되는
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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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0. 2024년 12월 20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8-29)
천사의 특별한 인사말
천사가 마리아에게 건넨 인사말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입니다. 이 표현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지요. 천사는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저는 성경 다른 곳에서 이런 문장을 읽은 기억이 없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이 말을 듣는 것은 남자가 아닙니다. 이 인사는 오직 마리아를 위한 것이었습나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하느님은 피조물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하십니다. 여러분의 존재는 피조물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느님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게서 벗어나서,하느님을 여러분 안에 모셔 들이기만을 바라십니다. 여러분 안에서 형성된 것이 아무리 작은 피조물의 이미지라 해도, 그것은 하느님만큼이나 큽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그것이 여러분의 앞길을 가로막아, 통짜이신 하느님과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에서 이러한 이미지가 생성되는 순간, 하느님과 그분의 신성은 사라지고 맙니다. 이와 반대로, 그 이미지가 빠져 나가는 순간, 하느님은 안으로 들어가십니다.
여러분의 존재는 피조물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느님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십니다. 마치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데에 하느님의 기쁨이 달려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여러분이 하느님으로 하여금 여러분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할진대, 무엇이 여러분을 해치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느님을 위하여 여러분 자신에게서 벗어난다면, 하느님도 여러분을 위하여 스스로에게서 벗어나실 것입니다. 이 두 존재가 빠져 나오면, 단일한 하나만이 남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아버지는 자신의 가장 영적인 근원에서 아들을 낳으십니다. 성령이 거기에서 꽃을 피우고, 영혼의 의지도 거기 하느님 안에서 싹틉니다. 모든 피조물과 창조계의 방해를 받지 않는 한, 이 의지는 자유롭습니다. 그리스도쩨서는 이렇게 말씀하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말고는 아무도 하늘로 올라간 적이 없습니니다“(요한 3,13). 만물은 무에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들의 근원은 무입니다. 때문에 이 고귀한 의지가 피조물에게로 쏠릴 경우, 그것은 피조물과 함께 무로 흘러들고 말 것입니다.(300)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
성체성사에 대하여(강론 272)
강론 60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악으로부터 시달리고 고통을 받으면서 불평을 하고 호소를 합니다. 이들은 불평과 반항으로 자신의 심판자를 모욕하고 동시에 구원자를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은 이 세상에서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악은 영원히 지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한시적인 악은 오직 이 세상 안에서의 삶에만 관여할 뿐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거치면서 이 악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매우 짧은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는 매우 큰 고통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내일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어제의 일들에 대해서는 잊어버립니다. 모래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내일의 일들에 대해서 잊어버립니다. 이렇게 시간속에서 지나가고마는 고통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렇게 많은 생각과 노력을 한다면, 영원히 지속될 고통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생각과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까?
죽어 가는 사람의 삶은 매우 힘들고 비참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 자체가 힘들고 고달픈 삶을 지고 가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 소리를 내며 우는 것은 바로 그가 앞으로 지고 가야 할 무거운 짐에 대한 표시입니다. 이러한 고달픈 인생살이를 해야 하는 것은 누구도 면제될 수 없습니다. 아담이 우리에게 넘겨준 잔을 우리는 마셔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긴 했습니다만 죄의 결과로 허영에 빠져 들어 있습니다.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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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0. 2024년 12월 20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부름에 순명한 마리아 /
박윤식 [big-llight] 241219. 18:05 ㅣNo.178607
여섯째 달,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나자렛으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 요셉과 약혼한 처녀를 찾게 하셨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란 뜻이 ‘마리아’라나. 그녀가 살던 나자렛은 구약의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 보잘것없는 마을이다. 그곳에서 마리아는 친척 엘리사벳이 기적 같이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심심찮게 들었다. 그리고 임신 그 자체가 너무나 황당해서 숨어 지낸다는 이야기마저 돌고 있다나. 그게 반년이 지날 때 천사가 마리아를 찾았다.
이는 ‘꿈이 아닌 실제’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하고 인사한다. 사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에 매우 놀랐다. 그래서 그녀는 그 인사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이 생각하였다. 즈카르야는 두려움에 압도되어 불신의 늪에 빠졌지만, 마리아는 성령께 의탁하며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을 되새겼다.
우리도 성모님이 하느님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셨듯이, 성령께 우리 정성을 ‘온전히 의탁’하자. 오늘 마리아는 아기를 가지리라는 천사의 말을 순명으로 받아들인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녀의 이런 대답은 얼마나 깊게 고심한 결과일까? 만일 아기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앞날에 미치는 영향을 곰곰이 생각했더라면, 도저히 승낙할 수 없는 것인데도. 그런데도 그녀가 받아들인 이유는 하느님의 일이기에.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마리아의 몸 안에 주님께서 잉태되시는 그 순간, 임마누엘의 예언은 완성된다. 마리아의 순명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잉태가 구원의 은총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마리아의 순명으로 온 인류는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우리 현실은 만만치 않다.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도 너무나 많다. 물론 나자렛 처녀 마리아도 천사의 말에 무척이나 난처했으리라.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천사가 마리아에게 일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래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했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이렇게 마리아는 주님의 뜻이라면서 결국은 순명으로 순종하였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이 슬픈 순명이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한 참 구원으로, 정녕 창조주께서도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했던 바램이리라. 그래서 지금도 많은 이가 묵묵히 하느님 뜻이라며 받아들이고 극복해 간다. 세상이 그래도 활동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든다. 그러니 끝까지 그분께 매달리자. 그럴 때 성모님처럼 하느님과 일치되는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될 게다.
하느님의 아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는, 어제는 즈카르야에게 아들이 생길 것이라는 전갈, 오늘은 마리아에게도 생길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즈카르야에게는 참으로 기쁜 소식인 반면에, 그녀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그건 약혼자 요셉에게 배신의 단칼을 안기는 거고, 죽음의 길인 사면초가로 몰아가는 거다. 그동안 꿈꿔 온 꿈같은 앞날에 대한 포기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기쁜 소식에 즈카르야는 어찌 그러겠느냐고 반문한 반면, 마리아는 주님의 뜻이라면서 순종했다. 하느님 초대에 겸손으로 응답한 마리아의 순명을 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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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0. 2024년 12월 20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성모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스스로 ‘주님의 종’이라고 고백하며,
지금 당장은 하느님의 뜻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지만,
하느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며 ‘순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순명과 함께, 우리를 구원하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태중에 잉태되셨습니다.
성모님처럼 하느님을 신뢰하는 신앙인이 되십시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8).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이기 쉬운 방법으로만 주어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분의 말씀이 우리를 아프게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실천하기 어렵고, 현실과 맞지 않는 말씀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순명하는 믿음으로 당신 말씀을 대할 때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신비를 믿고 있는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성모님의 믿음을 본받아 우리도 하느님 말씀에 순명하는 믿음,
그분의 말씀이 우리에게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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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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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0. 2024년 12월 20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며칠 전 우리는 마태오복음에서
요셉의 협력을 들었다면
오늘 우리는 루카복음에서
마리아의 협력을 들었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도
하느님을 통해 아기를 잉태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마리아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천사가 엘리사벳을 이야기하면서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말했을 때
마리아는 비로소 천사에게 응답하게 됩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인사할 때
마리아는 천사의 인사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갑작스럽게 천사가 나타나고
알 수 없는 말로 인사를 하는 것이
언뜻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천사는 대화를 이어갑니다.
지금 당장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는 곰곰이 생각합니다.
천사도 마리아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대화가 이어지면서
결국 마리아는 천사의 말에 동의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의 이야기는
마리아가 하느님을 알아가는 과정을 묘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니 끝까지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마리아는 이해되지 않는다고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것에 또한 천사도 함께하면서
마리아의 이해를 도와줍니다.
마리아의 이 모습은
우리의 신앙 여정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신앙의 출발점은
하느님을 온전히 아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 여정은
잘 모르는 하느님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그 하느님을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 있다는 것
모르기에, 이해되지 않기에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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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0. 2024년 12월 20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 37)
그저 받은
은총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서로의 삶에
진정한 감사를
드립니다.
부족함도
선물이 됩니다.
그러기에
서로를
인정합니다.
최고의 선물은
언제나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외적인 상황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가능성을
믿고
따릅니다.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작아지시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시며
구원의
가능성을
활짝
여십니다.
은총으로
지나온 길이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입니다.
고마워해야 할
은총이 사람들이
우리의 길에
그리스도의
향기로
가득합니다.
마음을
겸손하게 하는
수많은 가능성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내시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놓으시는
이 은총을
믿고 따르는
은총의
오늘입니다.
우리의 삶이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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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0. 2024년 12월 20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카카오스토리 – 그라시아 0624 >
우리 역시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순명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을 통한 하느님의 초대가 나자렛의 소녀 마리아에게 전해지는데, 그 초대의 말씀들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초대 말씀의 표현 하나 하나가 모두 소중하지만, 오늘따라 특별히 제 마음에 크게 와닿는 구절들이
몇개 있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복음 1장 28절)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복음 1장 30절)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복음 1장 37절)
놀라운 하느님의 초대는 마리아에게 있어 너무나 엄청난 초대인 동시에 부담스러운 초대였습니다.
막막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동시에 가슴 뛰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그랬을 것입니다.
고작 12~13세 어린 소녀에게 가혹하고 과중한 초대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느님께서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 확증의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마리아에게 용기를 지니게 만드십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격려와 지지의 말씀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마리아는 깊은 감사의 마음과 함께 불안했던 마음이 눈녹듯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총애(寵愛)받다는 것은 그냥 사랑받다는 것이 아니라 유난히, 그리고 각별히 사랑받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총애를 받는다는 마음에 마리아는 용기백배해서, 그 귀한 사랑의 증인으로 살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때로 사랑의 힘은 엄청납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지요.
당신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말씀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아직 마리아에게 남아있는 작은 의혹이나 의구심 마저 걷어가게 만드십니다.
당혹스럽고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고 용기백배한 마리아의 음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남아있는 대림시기 우리 모두 순간순간 되풀이해야할 신앙 고백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복음 1장 38절)
이토록 장엄하고 아름다운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이제 하느님께서 그녀의 태중에 거처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녀와 항상 함께 하실 것입니다.
임마누엘 하느님이 되실 것입니다.
이제 그녀는 새로운 성전, 새로운 성도(聖都),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마리아의 갸륵하고 용감한 피앗(Fiat)으로 인해, 하느님께서 그녀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 당신 백성에게 자신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제 마리아는 그녀 안에 메시아가 끊임없이 살아계시는 계약의 궤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부르실때 절대로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마리아는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자유 의지로 응답했습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메시지를 통해서 하느님의 의도를 충분히 알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 하느님의 뜻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마리아는 그분의 여종을 자처하며 기쁘게 예라고 순명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 안에서 순명의 덕은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도 순명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분께서 세상을 떠나신 것도 순명에 의해서였습니다.
우리 역시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순명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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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카오 스토리 – 황 다미 05:07, 프란 나눔- 늘 감사>
마리아는 부단히 성찰했고 또한 순종했습니다!
수태고지 복음을 천천히 묵상하다 보니, 주님께서 나자렛의 마리아를 선택하시고 총애하신 이유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보낸 메시지 앞에 그녀가 보인 반응을 한번 보십시오.
몹시 놀라워하면서도 천사의 인사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마리아는 아무 생각도 개념도 없는 철부지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어렸지만,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 앞에 나름 고민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신비 앞에서 나름 이해하려고 애를 쓴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마리아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던 의구심을 솔직히 표현했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는 절대로 어수룩하거나 어리버리하지 않았습니다.
의심스런 부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따지는 당차고 야무진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적 의심이 아니라 하느님의 초대를 향해 활짝 열려있는 건전한 의심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의구심에 참으로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마리아는 아무런 인간적 고민이나 갈등도 없이, 본인의 의지적 결단도 없이, 그저 힘 있는 존재가 시키는대로 응답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로 거듭나기까지 만만치 않은 과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마리아의 고민은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동안에도 계속되었습니다.
하루는 아들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셨던 마리아께서 예수님 거처로 찾아갔습니다.
뜻밖에도 예수님은 밖에 한번 나와보지도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의 말씀 앞에 또 다시 마리아는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기도하고 묵상하기 시작합니다.
또 다른 영적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한 단계 한 단계 그녀의 신앙이 성장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마리아의 의문과 고민으로 인해, 다음과 같은 위대한 성경 말씀이 우리 손에 쥐어졌습니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비록 나약하고 무력하지만,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할 때, 하느님 권능 안에 머무를 때,
우리는 강건해집니다.
그분과 함께 할 때 불가능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어리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던 나자렛 산골 소녀 마리아가 위대해진 것은, 그분이 찾아오셨을 때 가장 진지하게, 가장 겸손하게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했습니다.
부단히 성찰했고 또한 순종했습니다.
틈만 나면 마음에 새기고 묵상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가 하느님의 어머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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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빠다킹 신부 카페 – 스텔라 강>
마리아는 부단히 성찰했고 또한 순종했습니다!
수태고지 복음을 천천히 묵상하다 보니, 주님께서 나자렛의 마리아를 선택하시고 총애하신 이유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보낸 메시지 앞에 그녀가 보인 반응을 한번 보십시오. 몹시 놀라워하면서도 천사의 인사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마리아는 아무 생각도 개념도 없는 철부지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어렸지만,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 앞에 나름 고민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신비 앞에서 나름 이해하려고 애를 쓴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마리아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던 의구심을 솔직히 표현했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마리아는 절대로 어수룩하거나 어리버리하지 않았습니다.
의심스런 부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따지는 당차고 야무진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적 의심이 아니라 하느님의 초대를 향해 활짝 열려있는 건전한 의심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의구심에 참으로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마리아는 아무런 인간적 고민이나 갈등도 없이, 본인의 의지적 결단도 없이, 그저 힘 있는 존재가 시키는대로 응답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로 거듭나기까지 만만치 않은 과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마리아의 고민은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동안에도 계속되었습니다. 하루는 아들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셨던 마리아께서 예수님 거처로 찾아갔습니다. 뜻밖에도 예수님은 밖에 한번 나와보지도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의 말씀 앞에 또 다시 마리아는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기도하고 묵상하기 시작합니다. 또 다른 영적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한 단계 한 단계 그녀의 신앙이 성장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마리아의 의문과 고민으로 인해, 다음과 같은 위대한 성경 말씀이 우리 손에 쥐어졌습니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비록 나약하고 무력하지만,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할 때, 하느님 권능 안에 머무를 때, 우리는 강건해집니다. 그분과 함께 할 때 불가능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어리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던 나자렛 산골 소녀 마리아가 위대해진 것은, 그분이 찾아오셨을 때 가장 진지하게, 가장 겸손하게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했습니다. 부단히 성찰했고 또한 순종했습니다. 틈만 나면 마음에 새기고 묵상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가 하느님의 어머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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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0. 2024년 12월 20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가 이어지고 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28절) 이런 인사는 마리아에게만 주어진 인사였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28절) 주님께서는 마리아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의 신비를 통해 마리아에게로 내려오신다. 마리아는 천사를 바라보던 그 자리에서 하늘의 심판관을 몸에 받아 모시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느님께서는 한 처녀를 당신의 어머니로 만드셨고, 당신 여종을 어머니로 삼으셨다. 온 세상도 하느님을 품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온전히 그 품에 오시어 사람이 되셨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31절) 천사는 마리아에게 거룩한 신비를 드러내 줄 아기에 대하여 말한다. 마리아는 처녀로서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 아기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 되실 분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세상을 다시 창조하실 분이시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이 물음은 동정 잉태라는 신비에 대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천사는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내려오시어 잉태하리라고 한다. 마리아가 열매를 맺게 하신 분은 성령이시다.
마리아에게 내려와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신 성령께서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의 양식인 빵과 포도주에 내리시어,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거룩한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믿는 이들의 몸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마리아의 잉태는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요한 1,13) 성령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마리아는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하와의 불복종을 되돌려 놓는다. 그리하여 한 천사였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첫 번째 처녀의 타락이 다른 천사의 말을 받아들인 처녀 마리아의 믿음으로 극복되고 있다. 마리아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평범한 한 시골 처녀였다.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이고 평범한 삶을 사는 인간이었다. 그 마리아가 그렇게 하느님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고백하고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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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0. 2024년 12월 20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믿음의 사람은 속세 사람들과 이렇게 구분된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주님 탄생 예고의 깊은 순간을 듣게 됩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시리라는 놀라운 메시지를 전합니다.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응답하셨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도 인간적으로 “이게 가능할까?”라고 의문을 품으셨을 것입니다.
천사는 그녀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그녀의 친척 엘리사벳의 기적적인 이야기를 전하며,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나이가 많아 아들을 배었으니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 불리던 이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6-37)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사벳의 믿음과 하느님의 능력의 증거는 마리아가 구원의 역사 속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이는 데 힘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여신 마리아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는 진리의 살아 있는 증인이 되십니다.
이 순간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과 세상의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보게 됩니다.
세상은 “이게 과연 가능할까?”라고 묻지만, 믿음의 사람은 “아멘,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합니다.
이 점을 보여주는 예로 조니 에릭슨 타다(Joni Eareckson Tada)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
1967년, 젊은 시절 조니는 다이빙 사고로 목 아래가 마비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절망에 빠진 그녀는 생을 포기하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라는 선교사의 권고를 통해 조니는 고통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깊은 기도의 순간, 그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환상을 보았고, 그분의 고통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조니는 나중에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약할수록 더 많이 하느님께 의지해야 하며, 그분께 의지할수록 그분의 강함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이 경험은 그녀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그녀는 원망 대신 감사로 고통을 받아들이며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희망과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음을 통해 조니는 세상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일을 이루었습니다.
깊은 고통을 기쁨과 용기의 원천으로 바꾼 것입니다.
또 다른 놀라운 예는 말랄라 유사프자이(Malala Yousafzai)의 이야기입니다.
1997년 파키스탄에서 태어난 말랄라는 마이완드의 말랄라(Malalai of Maiwand)처럼
용감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믿음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여자로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삶을 살았습니다.
이 이름은 탈레반의 억압 속에서도 교육과 정의에 대한 믿음은 말랄라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2012년, 그녀는 학교 버스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는 끔찍한 암살 시도를 겪었습니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6세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그녀를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로 이끌었고, 높은 이상에 대한 믿음을 통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제 일생의 목표는 전 세계의 모든 여자아이가 12년 동안 안전하고 질 높은 교육을 받도록 돕는 것입니다.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한 여자아이들은 전 세계에 1억 3천만 명이나 있습니다.”
“어린 여자아이가 저런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해?” 믿음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이처럼 성녀 잔다르크(Joan of Arc)의 이야기도 믿음의 변혁적인 힘을 보여줍니다.
1425년, 어린 소녀였던 잔은 천사와 성인들의 환시를 경험하며 프랑스를 구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단지 농부의 딸에 불과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믿고 따랐습니다.
1429년, 잔은 군대를 이끌며 그 시대 여성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나는 이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흔들림 없는 믿음은 그녀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세대를 초월하여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믿음이 세상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마지막으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초기 삶에서 부와 세속적인 즐거움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러나 1205년, 그는 산 다미아노(San Damiano)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던 중
“내 교회를 다시 세워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다미아노 성당을 물리적으로 재건하는 일에 집중했지만, 점차 예수님께서 가톨릭교회의
영적인 기반을 새롭게 하라는 부르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필요한 일부터 시작하라.
그다음에 가능한 일을 하라.
그러면 갑자기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가난을 받아들이고 복음을 철저히 실천하며 교회를 쇄신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을 이루게 했고, 세상에 가난과 사랑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심지어 개신교에서도 프란치스코 성인은 존경합니다.
놀랍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단순한 경배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세상의 기대를 초월한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세상에 희망과 영감을 줍니다.
믿음의 사람은 결코 세상 속에 숨겨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사람들에게
“아!” 하는 탄성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그리고 성모 마리아에게 영감을 준 엘리사벳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아멘”으로 응답하며, 믿음의 힘을 세상에 놀라움으로 증거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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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0. 2024년 12월 20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답게 사는 것이 곧 응답과 순종입니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카 1,28-38).”
1) 여기서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라는 말을 겉으로만 보면, 즈카르야가 한 말,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 라는 말과 비슷하게 보이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라는 말로 보이는데, 그런 뜻은 아닙니다.
즈카르야가 한 말은, “제가 그것을 알 수 있도록(믿을 수 있도록) 표징을 보여 주십시오.” 라고 요청하는 말입니다.
마리아가 한 말은, “그런 일이 일어나려면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지금 바로 요셉과 결혼해야 합니까?” 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천사의 대답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천사는 즈카르야가 믿지 못하고 표징을 요구하는 것을 꾸짖는 말을 했습니다(루카 1,19-20).
그러나 마리아에게는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실 것인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라는 말은, “네가 따로 무엇인가를 할 필요는 없다.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다.”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잉태 과정은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니 마리아 쪽에서 무엇인가를 할 필요는 없는데, 잉태 후 출산 때까지, 그리고 아기가 태어난 뒤에, 어머니로서 해야 할 일들은 온전히 마리아의 몫이 됩니다.
2)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라는 말은, 여기서는 동정녀인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는 일은 전적으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말입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말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매우 슬퍼하는 것을 보고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라도 하느님께는 가능하다.’(루카 18,24-27)”
인간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원래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일은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일이기 때문에, 그곳으로 다시 들어가려면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셔야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구원 사업 자체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메시아의 육화 강생, 그리고 십자가를 통한 대속 등 인류 구원 사업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직접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그 일에서 첫 번째 협력자이고, 가장 중요한 협력자입니다.
3) ‘불가능’이라는 말에서, 다음 말씀도 연상됩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이 말씀은, 믿음만 있으면 누구든지 초능력과 같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첫 번째로 믿어야 할 것은 “나도 구원받을 수 있다.”입니다.
내가 나의 힘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구원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일은 오직 하느님의 자비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비는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원하고, 노력하면 그 자비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원하지도 않고, 노력하지도 않으면,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헛일로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마리아의 응답과 순종을 본받아야 한다는 말을
흔히 하는데, 그 응답과 순종을 본받는 방법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즉 신앙인답게 충실하게 사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하느님의 뜻’ 가운데 첫 번째는 바로 ‘나의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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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0. 2024년 12월 20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26-38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어제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즈카르야의 모습이, 오늘 복음에서는 같은 상황에 처한 성모님의 모습이 연속으로 나오다보니 자연스럽게 두분의 서로 다른 점들이 더 부각되어 드러나게 됩니다. 어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얻게 되리라는 메시지를 들은 즈카르야는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자신도 엘리사벳도 이미 너무 늙어버렸는데, 게다가 엘리사벳은 원래부터가 아이를 못 낳는 몸인데 어떻게 갑자기 아이를 잉태하겠느냐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뜻을 자기 머리로 이해하고 납득해야만 받아들이겠다는 완고하고 교만한 태도입니다. 그런 돌밭 같은 마음에는 하느님 말씀이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기에, 그는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벙어리로 지내는 ‘보속’을 해야만 했고, 그토록 바라던 아이를 얻게 된 기쁨을 맘껏 누리지 못했습니다.
반면 성모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잉태하게 되리라는 메시지를 듣고 먼저 곰곰이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부족한 자신을 왜 선택하셨는지, 그분께서 자신에게 바라시는 게 무엇인지를 충분히 심사숙고 한 뒤에,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겠는지 그 구체적인 방법을 묻지요.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당신 뜻을 이루실 거라는 구원의 진리를 듣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모님은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계시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지요. 자발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협력함으로써 그분 뜻이 자신 안에서 열매 맺도록 노력해야 하는 겁니다. 하늘에서 햇볕을 비춰주고 비를 내려주면 농부가 씨를 심고 가꾸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이 그런 적극성이 보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굳이 그렇게 하시겠다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겠다는 태도가 아닙니다. 자기가 원해서 먼저 하느님을 부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비천한 종에 불과한 자신에게 넘치도록 큰 은총을 베풀어 주셨으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그분 뜻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심지어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내어맡겼기에 불가능을 모르시는 하느님께서 일으키시는 놀라운 일들을 알아보게 됩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해야 합니다. 믿기 위해 기적을 바라지 말고, 순명에 대가를 요구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나를 도구로 삼아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시도록 나 자신을 그분께 온전히 의탁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 능력과 예상을 무한히 뛰어넘는 하느님의 위대한 섭리를 알아보고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지만, 그분은 우리와 더불어 우리와 함께 당신 뜻을 이루십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느님의 은총이 성모님의 믿음 안에 심어져 맺어진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각자 삶의 자리에서 그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야 종말의 때가 오기 전에 구원받기에 합당한 존재로 변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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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0. 2024년 12월 20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
구약의 세계에서 왜 이사야가 아하즈 왕에게 표징을 하느님께 청하라고 하면서 ‘젊은 여인이
잉태를 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이마누엘이라 할 것’(이사 7,14)이라고 했는지에 대해서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많은 표징 중에 하필이며 왜 ‘젊은 여인’이 나오고 또 ‘임마누엘’이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습니다. 물론 신약의 교회에 와서야 그 뜻을 완전하게 풀을 수가 있습니다.
성모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에게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성모님께서 아이를 낳아 그 이름을 예수’라고 했는지에 대해 의미를 갖지 못할
수는 있습니다. ‘예수’라는 말 자체가 구원자이시라는 의미이고 구약의 세계와 신약의 세계를
이어주는 이름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 턱이 없습니다.
그런데 루카는 분명히 그 예수님에게서 메시아의 의미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1,32-33)
성모님은 갑자기 가브리엘 천사의 말의 뜻을 받아들이기가 벅찹니다.
왜냐하면 준비가 미처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천사에게 질문하십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주님의 천사는 나자렛 아가씨의 눈높이에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35절)
그리고 천사는 친척 엘리사벳의 임신을 들어 하느님의 놀라우신 일을 설명합니다.
천사는 결론으로 말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37절)
마리아 아가씨는 그 말을 받아들일 신앙의 그릇이 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이 대답은 두고두고 곱씹어 보아도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어떻게 이해될 수 없는 일을
하느님의 일이라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야 어련 하시려고.” 그런데 여기서는 우리의 예상을 뒤엎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한 아가씨의 전적인 자유에서의 대답을 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강제로 찔러서 당신의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없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전적으로 구하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 아가씨는 대단한 것입니다.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대답을 하셨고 하느님께서는 자유의 조금이라도 손상 없이 순명의 대답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유로운 신뢰의 대답으로 그동안 잠겨 있던 인류 구원의 열쇠를 돌리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도구가 아닙니다. 성모님은 구원의 협조자이며 참여자이신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사람이 이렇게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대답할 수 있었을까요?
구약의 아하즈에게 내렸던 이사야 예언자의 말이 동정녀이신 성모님께 이르러 성취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성모님의 역할은 참으로 심오합니다.
인간의 역사 안에서 진정한 임마누엘의 현재의 장을 여신 것입니다. 몇 백년 전의 예언이 나자렛
마을의 한 아가씨의 대답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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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0. 2024년 12월 20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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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0. 2024년 12월 20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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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0. 2024년 12월 20일.
고통속에서도 기도하는 삶
<2024.12.20> 아침을 여는 묵상 (시 109:1~15절)
❝고통속에서도 기도하는 삶❞
❚ 세상에서 비난당하고 공격받을 때 세상의 방법이 아니라 기도로 문제 해결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 어떤 형태로 기도해야 합니까?
➲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야 합니다(1~5절).
다윗은 지금까지 의로운 통치를 해 오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실 것을 믿으며 악인들에게 침묵하지 말도록 간구하고 있습니다(1절). 하나님께서 더 이상 침묵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다윗 주변에 거짓된 입과 혀로 자신을 모함하고, 미워하는 말과 까닭 없이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 때문(2~3절)이라고 고백합니다. 무엇보다 다윗을 힘들게 하는 것은 그들이 다윗의 사랑과 선을 미움과 악으로 갚았기 때문입니다(4~5절). 그러나 다윗은 기도만이 자신이 살길임을 깨닫고 모든 생각과 행동을 멈추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울러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판단해 주시기를 또한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윗처럼 무고한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힘과 지식과 판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답답하고, 괴로운 심정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악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지만 정직한 자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잠 15:8)입니다. 요나 역시 그의 영혼이 피곤할 때에 하나님을 생각하며 기도하였더니 그의 기도가 주의 성전에 이르렀습니다(욘 2:7). 그러므로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문제 해결의 길을 열어 주시고, 도와 주실 것입니다. 밤이 깊을수록 날의 밝음이 가까이 있음을 믿고, 절망과 고통의 밤을 소망과 희망의 날로 승화시키는 삶이어야 합니다. 인생에서 겪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로 문제를 풀어가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판결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야 합니다(6~7절).
다윗은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그들에게 법적으로 정당한 보응을 해주실 것을 구체적으로 호소합니다. 악인에게 자신의 대적들을 부탁한다는 것은 그들이 영원한 파멸에 이르기를 염원하다는 것이고, ‘오른쪽에...’서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고소자의 입장에 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6절). 즉, 악인이 다른 악인(사탄)의 고발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재판을 받을 때 즉, 사랑을 미움으로 대신하고 선을 악으로 대신한 자들에게 유죄 판결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7절).
다윗의 이러한 기도는 개인적인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도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죄를 짓고 악을 행한 자들이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으로부터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 대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로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선과 악에 대해서는 그 행위대로 판단하시며 갚으시는 분이십니다. 무엇보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으나(시 32:1), 악한 자의 기도는 그가 심판을 받을 때 죄가 되어 형벌의 심판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확신하며 세상의 핍박과 답답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과 환경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답답한 시간의 연속일지라도 모든 판결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로 문제를 풀어가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죄인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야 합니다(8~15절).
다윗은 계속해서 악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완악한 죄인들이 저주를 받아 수명이 다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그들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8절). 악인에 대한 저주는 그들의 자녀와 아내에 대한 저주로 이어집니다(9~10절). 또한 악인들의 철저한 멸망을 기도합니다(11절). 사람들은 그의 남은 자녀들이 사람들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후대에는 자손까지 끊어져 그의 가문이 완전히 없어지게 해 달라고까지 기도합니다(12~13절). 그리고 악인이 재판을 받을 때 그의 부모를 포함한 조상들이 지은 죄까지도 온전히 심판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사람들이 악인을 영원히 기억하지 못하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14~15절).
다윗의 이러한 기도는 악인에 대한 복수심에서 나오는 기도가 아니라 죄악이 대를 잇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였습니다. 또한 다윗은 악한 자의 죄악이 항상 하나님 앞에 있기를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악을 심판하시고 심판을 통해 세상에 공의와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기도였습니다. 죄악이 만연한 세상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힘 있는 권력자들은 죄를 지어도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똑같은 잣대로 죄를 판결하는데도 어쩌면 그렇게 법의 그물을 피해가는지 답답합니다. 전 국민이 내란을 일으킨 자들의 소행을 똑똑히 보았는데도 어쩌면 그들은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옹호하는 집권 여당의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의 악을 제거해 주시고, 악인들이 죄에서 돌이키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심판과 비방과 정죄는 우리의 몫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몫은 사랑과 축복과 기도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로 답답한 현실의 문제를 풀어가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비록 세상에서 공격을 받을지라도 세상적인 방법으로 대처하지 말고,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문제와 심판과 비방과 정죄는 우리의 몫이 아님을 기억하고 사랑과 축복과 기도로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시 109:1~15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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