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성(倭城)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센고쿠시대 일본 성곽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략하기 쉬운 조선 성곽을 빠르게 점령하면서 북진한다. 그러나 각지에서 의병이 들끓게 되고 전란으로 백성들이 산성으로 숨어버리면서 현지 보급이 어렵게 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상진격 마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게 막히면서 공세가 쉽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조선의 풍토병까지 덮쳤고, 결국 명나라 군대가 참전하면서 일본군은 수세로 전환하면서 퇴각과 수성전을 치르게 된다.
일본군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치르면서 조선의 읍성과 산성들을 주 거점으로 삼기도 했는데, 조선과 일본의 축성 방식이 너무나 달라 거점 방어에 어려움을 겪었다. 16세기경 중세 일본의 성곽은 도시가 크게 발달하지 않고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거대한 석축을 갖춘 근세 성곽이 출현하기 이전이라 구조적으로, 기능적으로 말 그대로 '거점'의 역할만을 했다. 따라서 성에 들어가 농성하는 인원은 병력뿐이었으며, 일반 주민들을 보호하는 것은 성의 기능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의 평민들은 산속으로 들어가 숨거나 농성하는 방식으로 연명해야 했다고 한다. 이런 잔당들을 소탕하는 작업을 센고쿠 시대를 거치며 수도 없이 한 일본군이 동굴에 숨은 조선 주민들을 쉽게 색출해 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선의 성곽은 어폭보민(禦暴保民)을 기본으로 하기에 주민 보호 역시 성곽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였고, 이러한 차이로 인해 일본군이 조선의 성곽을 활용하여 농성전을 벌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군은 당장은 조선군과 명군의 공세를 버티되, 언제든지 공세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한반도 주요 거점에다가 자기네들 축성법으로 성을 축조하여 농성하는데 이것이 왜성이다.
― 특징
왜성은 배를 접선하기 좋은 해안가와 강안에 위치하면서도 여차하면 서로를 돕고 서로를 조망하기 좋게 밀도 있게 배치되었다. 또한 근처의 조선식 성곽에서 성돌을 빼 와 재활용하여 왜성을 쌓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고성 왜성, 죽성리 왜성, 선진리 왜성, 영등포 왜성, 성북 왜성 등과 같은 경우는 아예 기존의 조선식 성곽에 이어붙이거나 개축하여 왜성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포로로 잡힌 조선인 중 상당히 많은 수가 왜성 축성에 동원되었다.
성벽 축조는 구루와(曲輪, くるわ), 고구치(虎口, こぐち), 이시가키(石垣, いしがき), 노보리 이시가키(登り石垣, のぼりいしがき), 우마다시(馬出, うまだし) 등을 통해 한국의 산성들과는 달리 다양한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타지에서 조달한 자재를 썼지만 센고쿠 시대의 오랜 전란에서 얻은 축성기술과 건축기술을 동원해 빠르게 올렸다. 기장의 죽성리 왜성은 일본의 축성기술사가 직접 파견되기도 했으며 이러한 왜성들은 적을 지연시키고 고립시키기 위한 특유의 구조로 상당한 방어력을 보여주었고, 울산성 전투에서는 조명연합군의 대군을 막았다. 규모가 있는 왜성은 고텐이나 천수각 등도 있었으나 목조물은 현재는 모두 부서지고 없다.
상당한 방어력을 보여준 것 치고는 현재 대부분 보존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 임진왜란 뒤에는 조선군이 돌을 쌓아 만든 석축을 기초해 조선식 읍성으로 고쳐 쓰기도 하였으며 근현대에 도시화가 진행되며 자연스럽게 소멸되었기 때문도 있지만, 왜성이 다른 성들보다 비교적 일찍 허물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왜란 당시에 석벽 틈새에 회반죽이나 흙을 집어넣지 않고 오로지 돌만으로 쌓아올리는 메쌓기(Dry stone/空積み,野面積み)가 주류였는데, 전시에 급히 쌓아 올리느라 몇 달 만에 공사를 마무리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메쌓기는 폭우가 내릴 시 따로 배수구를 개공할 필요 없이 돌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며, 재해나 공세에 의해 무너져도 어차피 돌만으로 쌓은 벽이기에 흩어진 자재를 다시 쌓아 올리면 되는 장점이 있지만, 돌 틈새로 해충이나 잡식성 동물(야생동물) 등이 침범하기 쉽고, 식물들이 자라면서 이음새를 침범하거나 기반을 무너뜨리며, 토압의 증가로 인해 석축의 모양이 변형되다가 한 번에 붕괴할 수 있는 단점 또한 존재하므로 유지보수가 꾸준히 요구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일본 본토의 성들만큼 공을 들여 지은 성도 아닌 데다 왜란 이후 몇몇 성을 제외하고는 방치되다시피 하여 자연스럽게 허물어지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 전후에 증축된 조선시대 성에서도 이러한 축성 경향이 나타난다. 비교적 정연하게 축조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성벽 기초 위에 다양한 크기의 석재를 부정연하게 쌓아 올린 성벽이 임진왜란 전후로 확인된다. 이는 조선군이 다급하게 기존 성벽을 증축했기 때문이다.
왜성을 쌓은 위치도 침략군인 일본군에게 유리한 위치에 쌓았기 때문에 역으로 조선군이 방어용으로 재활용하려 해도 입지가 애매한 경우가 많아, 이런 경우는 방치하거나 아예 돌을 빼서 다른 데다 쓰면서 형체를 잃어버렸다. 다만 서생포 왜성, 부산진성처럼 일부 적당한 성은 많이 개조하지도 않고 그대로 조선군 주둔용으로 재활용하기도 했다.
왜성의 방어능력을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몸소 경험한 조선 정부는 왜성의 장점을 읍성에 도입하기도 했는데, 남한산성과 경성읍성(鏡城邑城) 등 성벽에 왜성의 기울기를 적용하기도 했고, 기존 성곽 바깥에 2중 3중으로 성곽을 추가로 두르거나 내부에 중성(中城)을 쌓는 등 다중방어 체계를 갖추기도 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수원화성과 강화성(江華城)의 축성 논의에서도 왜성 성제의 도입이 거론되었다는 점이다. 수원화성의 경우 정약용의 설계에서 동쪽으로 길게 돌출된 부분을 외성으로 구분해 동곽(東郭)이라 칭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있으며, 실제로 왜성의 기울기가 적용되었는지 불명하다고는 하나 남포루(南砲樓) 등지에 남한산성과 유사한 모습이 남아 있고, 수원화성의 형태와 모종의 연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함흥읍성에도 왜성의 기울기는 물론 요코야와 같은 형태의 굴절이 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 가치
왜성은 성곽 편년에 있어서 그 축성 연대가 확실하고 후대에 개수되지 않았기 때문에 축성 당시 일본의 축성법을 명확히 알 수 있다는 점, 일본의 중세 성곽이 근세 성곽으로 발전하는 중간기에 쌓은 성으로서 과도기적 특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 같은 시기 일본 국내에서 축조되었던 성곽이 후대에 계속 사용됨으로서 계속된 개·보수로 인해 당시의 축성법을 명확히 보존하고 있는 곳이 거의 없는 점 등에서 보존 가치가 크다.
― 현황
일본 학자들이 연구를 위해 자주 찾는다. 그 이유는 현재 일본에는 센고쿠 및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의 특징을 보존한 성이 많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우선 오랜 전란으로 사라진 경우도 많고, 에도 막부(江戸幕府) 수립 이후 평화가 지속되다 보니 군사 기지로서의 역할이 필요성이 떨어지자 다이묘들이 자신들이 거할 대저택으로 개조하여 원형을 잃은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막부의 ‘일국일성령’,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폐성령’을 통해 허물어지거나 규모가 대폭 축소된 성들도 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太平洋戦争)으로 인한 공습으로 무너지거나 경제 발전기에 도시개발을 위해 스스로 허물어버리기도 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상당수가 소실되거나 변형되어 제대로 연구할 일본식 성이 극히 적어진반면, 오히려 한반도의 왜성들은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군이 잠시 주둔한 것 외엔 중요하게 쓰인 적이 별로 없어 방치되다시피 했다. 그 결과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성의 건축 양식이 잘 남아있어 일본 학자들에겐 귀한 연구 자료가 되었다.
왜성이 대한민국의 ‘문화재’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기존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했던 왜성 문화재들은 조선총독부 청사철거 등 일본 잔재 청산에 열심이던 문민정부(文民政府) 시대에 지방기념물로 일재히 격하시켰을 정도로 왜성에 대한 한국 사회의 시선은 곱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가끔 복원 논의가 제기되기도 하지만, 국민정서를 이유로 반대하는 목소리가 크다. 그 때문에 전반적으로 왜성의 보존 상태는 대부분 방치에 그칠 정도로 열악했지만, 21세기 들어서는 문민정부 때처럼 전부 지워버리자는 분위기에서 벗어나 기본적 정비는 해 두는 편이다.
2019년 <조선일본도설(朝鮮日本圖說)>이라는 왜성 현황 지도가 발견돼 화제가 되었다. 동시에 순천왜성 전투에 나오는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이 화제가 돼기도 했다.
진주 망진왜성과 영춘왜성, 사천 곤양왜성은 1598년 당시 불타서 없어졌고, 구례・한산・광양・목창・율포・탑포성은 일부 기록과 회화에서 확인될 뿐 실체가 확인된 적이 없기 때문에 왜성의 목록에서 제외했다.
왜성은 총 31개로 나열되어 있는데, 나열된 목록은 대부분 정식 문화재 등록된 명칭이며, 민간에서 부르는 이칭은 주석에 따로 달았다.
남해안 왜성 현황은 따로 붙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