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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가이사랴 빌립의 집에 머물다
행 21:7-14
7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행 21:8-14 / 그리고 이튿날 그곳을 떠나 가이사랴로 가서 전도자 빌립의 집에 머물렀다.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인 9) 그에게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딸이 4명이나 있었는데 모두가 미혼이었다. 10) 우리가 그곳에 며칠 머물러 있는 동안에 역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아가보라는 사람이 유대에서 와서 11) 우리를 방문하였다. 아가보는 바울의 허리띠로 자기 손발을 묶더니 말하였다. `이 허리띠의 주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묶여 로마로 끌려갈 것이다'라고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12) 이 말을 들은 그 도시의 신도들이나 바울과 동행한 우리 모두는 예루살렘에 가지 말 것을 바울에게 울면서 간곡히 권하였다. 13) 그러나 바울이 말하였다. `왜 이렇게 모두들 울고 있습니까? 내 결심을 꺾지 마십시오. 주님 예수를 위해서라면 나는 투옥은 물론이고 죽을 각오도 이미 서 있습니다.' 14) 아무리 권해도 소용 없다는 걸 알고 우리는 단념하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하였다.
사도 바울 일행은 가이사랴의 전도자 빌립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여기서 예언자 아가보는 사도 바울의 수난을 예언합니다.
전도자 빌립(7-9) 사도 바울은 시리아 지역인 두로를 떠나 가나안 지역인 가이사랴에 도착합니다. 가이사랴는 로마인들이 욥바를 대신하여 세운 항구 도시이자, 로마시대에 종교적인 도시 예루살렘에 대항하여 유대지역을 통치하는 행정과 정치의 중심지였습니다. 전도자 빌립에 의하여 이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행 8:40). 전도자 빌립은 가이사랴 교회의 지도자이자 말씀 선포자로서 지역교회를 섬기며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빌립은 초대 교회 헬라파 일곱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고, 그의 딸들도 초대교회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자들이었습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그의 딸들 가운데 몇 명은 오랜 기간 동안 초대 교회의 사건이나 인물들에 대한 자료를 전하여 주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선지자 아가보(10-12) 사도 바울은 오순절 이전에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서둘렀습니다(행 20:16). 그런데 가이사랴에 이르러 여러 날 머무르게 되는데, 이는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의 여정을 서둘렀고, 배가 순항을 하여 생각보다 일찍 가이사랴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이사랴에 머물던 바울은 유대 지역 즉,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선지자 아가보를 만나게 됩니다. 선지자 아가보는 천하에 큰 흉년이 들 것을 예언한 선지자로서 글라우디오 때에 그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행 11:28-29). 아가보는 사도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손과 발을 잡아매고 예언을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유대인들이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준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관한 아가보의 예언은 마치 유월절 전날 유대 병정에게 잡혀서 빌라도에게 넘겨진 예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바울과 함께 많은 고난을 겪은 누가 및 그의 일행조차도 바울을 만류합니다. 사도 바울을 향한 이들의 깊은 애정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장면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결심(13-14) 이러한 성도들의 깊은 사랑에서 나온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오히려 더욱 그의 사명에 대한 결심을 확고히 합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할 것뿐만 아니라, 죽을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을 만류하던 사람들도 인간적인 애정에서 돌아와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들도 바울이 할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공동체는 마치 겟세마네 언덕에서의 예수님처럼 온전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이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적용: 당신에게 고난이 다가올 때 당신은 무엇을 구합니까? 주님의 뜻을 구하고 있는지 성경을 통하여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표면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항상 상황을 초월하십니다. 이 시기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에게, 교회에게 저울을 내미십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좋든 싫든 저마다의 기준으로 ‘선택’하고 있습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즉 ‘저울에 달아보아 부족함이 드러남’이 되는 순간, 그 후에 오는 것은 "우바르신(베레스)”, ‘다른 사람에게 넘겨준 바 됨’입니다.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현재의 사건은 다양한 의미로 다가가지만,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교회에게 이 일은 땅에 속한 자와 하늘에 속한 자의 알곡과 쭉정이의 구별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 설 교 >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양향모 목사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를 위해서 사는가,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가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냥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별 의미 없이 사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특별한 일을 좋아하거나 특별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일평생을 바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일에 장인이 되고 인간문화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고 사는 사람은 그 일에 대해서 큰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한 사람을 특별히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하고 싶고, 나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잘 되고 행복해지기를 바라면서 삽니다. 그런 사랑을 받는 사람도 행복하겠지만 사랑을 하는 사람도 행복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면서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가장 소중한 일이고 가장 가치가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일도 좋아하는 일이 있으면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도 사랑할 사람이 있으면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최고로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할 일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최고의 일이며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세우신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의 고백이 바로 그런 고백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라고 했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라고 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이 너무나 귀한 이름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당해도 좋고 죽어도 좋다는 각오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각오를 할 수 있을 만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은 너무나 고귀하고 그 이름을 위하여 사는 일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자 빌립의 집에 가서 머무르니라.
본문 7-9절에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라고 했습니다.
두로를 떠난 바울 일행이 역시 배를 타고 내려와서 돌레마이에 이르러 하루를 지내고 가이사랴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돌레마이나 가이사랴는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항구도시들입니다. 두로에서 육로로 올 수도 있는 곳이었지만 좀 더 편리한 배를 타고 가이사랴까지 온 것으로 보입니다. 돌레마이나 가이사랴에 어떻게 복음이 전해졌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 가운데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교회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이사랴에는 빌립이라는 사람과 그의 가족이 교회의 지도자로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빌립이라는 사람의 이름은 성경에 여러 명 등장하지만 특별히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 한 사람인 빌립과 예루살렘교회에서 집사로 안수를 받았던 빌립집사 이 두 사람을 들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빌립은 사도 빌립과 구별하기 위해서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고 이 빌립 집사가 지금은 전도자라고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빌립 집사가 예루살렘 교회에 있을 때는 집사로 임직을 받아서 집사로 봉사를 했지만 그 후에 전도자가 되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전도자라고 하니까 요즈음의 전도사로 생각하여서 목사를 도와서 교회에 봉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당시의 전도자는 오늘날 전도사와 다릅니다. 목사는 한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전도자는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를 말합니다. 오늘날의 선교사나 순회 목사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목사 보다 더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실제로 빌립은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인해서 예루살렘교회가 핍박을 당하자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다른 지방으로 흩어져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빌립은 사마리아 지방으로 가서 전도를 합니다. 사마리아 지방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이미 혼혈족이 되어서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곳이었지만 빌립은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은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곳에서 머무르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광야로 나아가서 저 이방인 이디오피아의 여왕 간디게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에 복음이 전해지게 하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가이샤라까지 와서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랴에서는 그의 네 딸과 같이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네 딸이 결혼도 하지 않고 교회에서 봉사를 하고 있었으며 특별히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다 완성되지 않은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런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복음을 더 효과적으로 전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가르침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 잘 알고 믿을 수 있게 하였을 것입니다.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본문 10-12절에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이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머물고 있는 가이사랴로 내려와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아가보 선지자의 행동입니다. 그냥 말로만 해도 될 것인데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손발을 묶고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면 유대인들이 바울을 이렇게 묶어서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에도 선지자들이 가끔은 이런 행동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아히야라는 선지자가 자기가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으로 찢어서 이스라엘 나라가 두 나라로 갈라질 것을 예언했습니다.(왕상 11:29-30 참조) 열두 지파 중에서 두 지파가 유다가 되고 나머지 열 지파가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아가보 선지자는 이런 자신의 행위와 예언을 성령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자꾸 반복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위험한 길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이런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놀라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막상 가서 그런 험한 일을 당하면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렇게 고생시키시는가? 라고 원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런 고난을 강요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충성스럽게 일을 하고 있는 바울에게 죽기까지 충성할 것을 강요하시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법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자원을 하여 이런 일을 감당하였을 때 그것이 바울에게 더 큰 충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자원해서 하는 것이 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일은 강제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우리가 구원받는 일에 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죽도록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 더 큰 상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본문 13-14절 말씀에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이런 사실을 다 알고 있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일을 감당하리라는 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자꾸 이렇게 만류를 하니까 마음이 상하였다고 했습니다.
바울을 만류하는 그들도 결국은 성령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이었고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고의 적임자로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만류를 하였습니다.
그런 사실을 아는 사도 바울은 그들의 충정어린 만류에 그 부탁을 들을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전달 할 때 가슴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자신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예루살렘에 가서 결박을 당할 것을 이미 각오하고 있고 그보다 더 나아가서 죽음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이미 다 각오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 고난의 길을 마다합니다. 심지어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들까지도 편안하고 행복하고 사람들에게 박수 받는 길을 가려고 하지 고난의 길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박을 당하거나 죽음의 길로 가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뜻 있는 사람들은 좁을 길로 가고 고난의 길로 가고 십자가의 길로 가야 한다고 외칩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목회자는 최저의 삶을 살면서 이 세상이 나그네 길이며 영원한 천국이 있음을 믿고 그 천국을 향하여 간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면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 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고난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 고난이 고난을 위한 고난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난은 그것이 아무리 엄청난 고난이라고 할지라도 고난 자체는 별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그 자체만 가지고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그보다 더 흉악한 벌을 받아야 만하는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죽을 사람이 죽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고난 자체를 평가절하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왜 고난을 당하느냐 무엇을 위해서 고난을 당해야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대답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라면 결박을 당해도 좋고 죽임을 당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 예수님의 이름이란 어떤 이름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이름이라고 말할 때 그 이름이 어떤 이름이기에 그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당해도 좋고 죽임을 당해도 좋다고 당당하게 말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요13:14)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다 행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좋아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통해서 배운 말씀 가운데 가장 신나는 예수님의 이름을 들라고 하면 사도행전 3장에 기록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하던 앉은뱅이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운 일일 것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외쳤더니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서서 걸으며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당하고 목숨을 버린다고 했을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서 응답을 받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일도 아주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목숨을 걸고자 했던 예수님의 이름은 그런 정도의 뜻을 가진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주시면서 그 이름을 직접 지어 주셨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예수’라는 뜻은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의 구체적인 뜻을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0장 31절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그 이름 즉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고 그 이름을 힘입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이름이 엄청난 이름이요 그 이름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4장 11-12절에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이 구원을 받게 하는 이름이요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 외에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사랑하고 그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후일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서를 기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던 모든 사람들이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잘못을 알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외치던 거짓선생들이 똑바로 살자고 외치던 교만한 사람들이 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선한 일을 하고 보람 있는 삶을 살자고 외치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외치던 어리석은 목회자들이 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다른 복음을 전하던 많은 목사들이 복음에다가 온갖 잡탕을 섞어서 그것을 설교라고 외치던 사람들이, 장사치 같이 잘못된 목회자들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의 이름의 뜻을 바르게 알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산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서 기뻐 춤을 추며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비로소 알게 될 것이며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고 기뻐 뛰며 춤을 추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위대한 이름이며 그 이름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믿음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당하여도 죽임을 당하여도 좋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우리도 예수님 그 이름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고 헌신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이름을 믿는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그 이름을 위해서 충성하고 헌신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이 되는 평신도
행 21:7-9 / 김광일 목사
주식회사 위맥스 비앤씨(WEMAX BNC) 대표 김청하 집사의 별명은 ‘오뚝이’입니다. 사업이 무너질 때마다 불굴의 의지로 일어났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재기했습니다. 경남 고성에서 자란 김 대표는 중학생 시절 아버지를 여읜 뒤 미국 유학의 꿈을 접었습니다. 홀로 계신 어머니와 여동생들의 생계와 공부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대기업에 취직해 품질관리 분야에서 성실하게 일했지만 직장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월급으로 꿈을 이루기엔 너무 미흡했기 때문입니다. 20대 초반 서울에 올라와 여의도순복음교회 세계선교센터를 바라보고 큰 감동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전도와 선교에 대한 열망이 일었던 겁니다. 그때 평신도 선교사 1,000명을 파송하겠다고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는 이 목표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대학에서 주경야독으로 경영학을 공부했습니다. 건강식품, 화장품 등 여러 사업을 벌였으나 세상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사업에 계속 실패했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초 한국기독교 부활절 연합단체에 120만장을 납품하는 전도용 CD카드 사업을 맡았습니다. 빈소년합창단이 부른 ‘헨델의 메시아’ 5곡, ‘마태복음’ 동영상을 7분으로 압축해 CD에 담았습니다. 그는 CD카드를 초신자와 불신자를 대상으로 교인 1명이 3명을 전도하면 4천만이 복음화되는 ‘1·3·4000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했습니다. 전도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카드는 몇몇 교회와 단체에 제공되고 더 이상 팔리지 않았습니다. 판매대금 회수도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제가 교계를 잘 몰랐어요. 그냥 폼만 재는 전도활동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러나 CD카드 사업은 잘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더 많은 지혜와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 후 사업은 번창하였습니다. 차량용 냉각수 첨가물 ‘위맥스’가 인기를 끌며 판매되었습니다. 김집사는 강조합니다. “위맥스는 다량의 음이온과 원적외선을 방출하는 광물질인 미네랄을 함유한 액상 물질입니다. 차 안으로 유입되는 공기를 정화하고 찌든 냄새가 제거되지요. 중국에 수출하고 있고 현지 공장도 세울 예정입니다. 판매 수익금으로 소외 장애인을 돕고 있습니다.” 회사명 위맥스(WEMAX)는 ‘우리가 최고다’라는 뜻입니다. 항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업으로 성장하기를 직원들과 함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성가대와 교회학교 교사로 섬깁니다. 백범 김구 기념관에서 대한민국 신문기자협회, 언론인 연합협의회가 수여하는 ‘위대한 한국인 100인 대상’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계획을 묻자 “바울 사도처럼 전도와 자비량 선교를 융합한 ‘비즈니스 선교’를 지향하고 수익금으로 국내외 평신도 선교사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겠습니다. 지금 심정은 주님만 의지하렵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순종하는 믿음의 자녀로 살겠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평생 주님과 동행하다가 주님 앞에 바로 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김청하 집사 그 분이야말로 본이 되는 평신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폴 스티븐스 (R. Paul Stevens)는 ‘평신도가 사라진 교회?’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컨대 보통 평신도는, 골프나 텔레비전 혹은 주식 시장에 더 관심이 있어서 못살게 굴어야만 예배에 참석하는 게으르고 다루기 힘든 교회 구성원은 아니다. 그러나 수세기에 걸친 잘못된 가르침과 반 해방적인 교회 환경으로 말미암아, 평신도들은 자신들의 역할이 목회자의 역할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평신도의 사역은 그것이 절실히 필요한 세상에서 더 중요하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제2의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목회자들의 손에만 있었던 사역을 평신도의 손에 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은 평신도 사역자의 대표적인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빌립 집사입니다. 빌립은 성령 충만을 받음으로 본이 되는 평신도가 되었습니다. 빌립의 모습을 통해 본이 되는 평신도의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본이 되는 평신도의 정체성은 과연 어떠합니까?
첫째로 사명자이어야
미국의 애즈베리 대학 채플 시간에 생긴 일입니다. 목사님이 열정적으로 설교하는데 학생들은 졸고 있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헌신하려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청했습니다. 그때 예수 믿고 헌신하기로 작정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를 위해 기도해주었습니다. 그가 바로 인도 선교에 평생을 바친 스탠리 존스(E. Stanley Jones)입니다. 스탠리 선교사는 1920년 간디와 함께 기독교 피정의 집 ‘애슈람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1938년에 타임지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선정되었고, 2회나 노벨평화상 후보자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스탠리는 철저한 복음주의자로 살면서 열린 마음으로 인도인들에게 다가 갔으며,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 그는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삶을 영위하는 방법을 알려주고자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바른 삶 그 자체가 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만약 그들이 진정한 삶속으로 깊이 들어가기만 하면 삶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스탠리는 기독교적인 삶을 살라고 하지 않고, 예수의 삶을 사는 사명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여기의 집사는 ‘디아코노스’인데 ‘먼지를 뚫고 일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빌립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중의 스데반 다음으로 기록된 집사였습니다. 빌립이 집사가 된 것은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명자로 셰움받았습니다. 교회에는 직분자보다 사명자가 더 필요합니다.
이 시대는 사람은 많으나 일군은 적고, 믿는 자는 많으나 제자는 적습니다. 대다수의 교인들은 '교회에 사람이 많으니 나는 일을 안 해도 되겠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일군이 적습니다. 평신도는 많으나 일을 맡길 사명이 있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대부분 사명자가 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빌립이 사명을 맡은 자가 된 것은 그의 삶이 누구에게나 본이 되었는지를 잘 알게 해 줍니다.
둘째로 전도자이어야
소돔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유황불이 떨어지는 날까지 성문에서 말씀을 외치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 노인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어르신,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은 변화되지 않는데 왜 날마다 외치고 계십니까?” 그 말을 들은 노인이 대답합니다. “나는 그들이 나를 변질시키지 못하도록 계속 외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악한 도성이었습니다. 의로운 사람도 변질되어가고 있습니다. 노인은 자기가 가만히 있다가는 소돔 사람들처럼 변질될 것 같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더 힘써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전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외치고 있는 이상, 나는 소돔 사람이 되지 않는다. 내가 복음을 전하고 있는 이상, 세상 사람들은 변화를 받지 않을지라도 나는 결코 그들을 닮지 않을 것이다. 복음을 외치고 있는 이상 나는 건재하다.” 잠잠한 신자는 세상에 물들기 쉽고, 잠잠한 교회는 세속화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어디서든지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8절입니다.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여기의 ‘전도자’는 원어로 ‘유앙겔리스투’인데 ‘복음전파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선포하는 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이는 사도와 구별되었습니다. 당시 전도자들의 임무는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것과 더불어 새로운 지역을 개척하여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빌립도 가이샤라 지역을 개척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빌립은 오직 그리스도를 전파한 사람입니다. 사마리아에서 전도는 능력 전도가 되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떠나가고 중풍 병자와 앉은뱅이가 낫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능력을 행하는 전도일지라도 주님의 음성에 순종할 때 생명이 있는 전도자가 될 것입니다. 빌립은 주님이 이끄는 대로 순종하면서 동에서, 서에서 오로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본이 되는 평신도의 모습입니다.
셋째로 전수자이어야
김재헌 목사의 저서 ‘신앙 명문가의 자녀교육’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에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의 가문이 나옵니다. 백정 출신이면서 우리나라 최초 의사가 된 박서양의 가문, 철저한 십일조 생활로 부자가 된 록펠러의 가문, 목사, 장로, 교수, 대법관 등 신앙 명문가를 이룬 이경직 목사의 가문, 4대째 장로 집안이 되어 한 교회를 섬기는 이철상 장로의 가문, 8명의 목사와 30명의 장로를 배출한 김덕호 장로의 가문, 매년 자손들이 단기 선교 여행을 떠나는 박용묵 목사의 가문 등 여러 가문이 나옵니다. 신앙 명문가란 자녀교육에 헌신한 신앙 1세대를 통해 믿음을 낳는 가정이 되면서 2세대, 3세대, 4세대에 걸쳐 신앙을 전승하고 축복받는 가문을 말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신앙 전승이 15%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부모 세대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자식, 손자대로 이어지면서 신앙의 전승이 안 됩니다. 수평 문화는 발달되었지만 수직 문화가 발달되지 않았습니다. 노벨상과 세계의 부와 권력을 쥐고 있는 유대인들은 수직 문화가 잘 발달 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3대, 4대가 같이 교회에 나가는 집안이 많지 않습니다. 교회학교마다 감소하여 거의 반 정도의 교회가 교회학교가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주일에도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는 것이 자녀가 잘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교회에 나와 신앙 교육, 인성 교육, 말씀 교육, 기도 훈련하는 것보다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다니는 부모가 진정한 그리스도인 부모가 되지 않는 겁니다. 빌립처럼 신앙을 자녀들에게 전수하는 자가 되어야 비로소 바른 그리스도인입니다.
본문 9절입니다.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빌립은 자녀에게 신앙을 전수한 사람입니다. 네 딸이 예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영성의 전수입니까?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은사입니다. 이런 은사가 자녀에게 있다는 것은 빌립의 신앙이 바르다는 증거입니다. “어떻게 하면 신앙의 모범이 될것인가” 의식하며 살기보다 하나님의 사람답게 사는 신앙의 삶이 딸들에게 그대로 전수된 것입니다. 빌립은 신앙을 차세대에 전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부모들은 신앙의 전수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을 유산으로 넘기는 것을 위해 기도하여야 합니다. 신앙의 가치가 최고인 것을 외면하고 물질적인 것만 전수하려는 어리석은 부모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삶의 진정한 복이 되는 신앙을 전수하여야 합니다. 빌립처럼 신앙의 전수자가 되기 위하여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네 딸에게 믿음을 전수한 빌립이야말로 본이 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요, 바른 평신도의 신앙입니다.
위그노(Huguenot)는 프랑스 개신교인들 즉 평신도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400년 동안 왕정과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끔찍한 박해를 받았지만 감사함으로 고난을 받아들었습니다. 위그노는 예배드리는 것에 목숨 바칠 정도로 예배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라는 성경적 명령을 따랐으며 직업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여기고 근면한 삶을 살았습니다. 종교걔혁을 통해 왕과 가톨릭 사제를 위해 존재하는 일꾼이자 노예로만 자신들을 알았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위그노운동은 지도자 몇 사람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민중의 자각으로 이뤄진 평신도운동이었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평신도를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일어났던 위그노의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부흥은 점점 어려워지고 외부의 공격은 거세져 고난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이때 위그노 신앙 즉 평신도 신앙을 회복하여 어려움을 극복하는 동력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지우개만은 주시지 않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우개가 있으면 인생을 살아가며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지우고 다시 그리거나 쓰면 됩니다. 그러나 한 번뿐인 인생이기에 다시 쓰거나 그릴 수 없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을 적당하게 살다가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바꾸는 일에 헌신하겠습니까?
부디 세상을 변화시키는 귀한 일에 쓰임 받는 평신도가되시기 바랍니다. 삶의 자리에서 ‘사명자요, 전도자요, 전수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본이 되는 평신도의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김영규 목사
두로에서 가이사랴까지
두로에 상륙한 바울은 잠간 머물면서 성도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었습니다.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7) 두로는 고대 페니키아의 중요 항구로, BC 65년경까지 자유도시 국가로 번성하다가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된 곳입니다. 두로를 떠난 바울 일행은 배로 돌레마이까지 이르러 하루를 머물렀습니다. 돌레마이는 두로와 가이사랴 중간에 위치한 항구입니다. 돌레마이란 이름은 알렉산더 제국이 넷으로 나뉜 후에 그 한 후계자였던 프톨레미를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악고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현대에는 아크레라고 하는데, 하이파 항 근처에 있는 인구 만 명 정도의 도시입니다.
바울은 해로의 마지막인 가이사랴에 상륙했습니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8) 가이사랴에 대해서는 앞서 자세히 설명했기 때문에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가이사랴는 로마 군이 주둔하고, 총독이 머물던 당대에는 유대 땅에서 가장 발전 된 대도시였습니다. 가이사랴에서 바울은 전도자 빌립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빌립은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일찍부터 전도자로 활동했습니다.(행8장)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당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빌립은 늦게까지 활동했습니다. 빌립이 어떤 경로로 가이사랴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아마 예루살렘의 박해를 피하여 여러 곳으로 다니며 전도를 하다가 가이사랴에 정착한 것 같습니다.
빌립에게는 네 딸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9) 빌립이 전도자로 헌신한 것처럼 네 딸들도 주님께 헌신했습니다. 아마 결혼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위해 결혼하지 않고 교회를 섬긴 것 같습니다. 빌립의 네 딸들은 예언의 은사를 받은 예언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의 미래에 대한 예언
본문에서 특기할 사건은 바울의 신상에 관한 아가보의 예언과 바울의 반응입니다.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10-11)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붙잡혀서 이방인에게 넘겨지리라!
이 예언을 얘기하기 전에 먼저 신약 교회 안에 있었던 선지자, 혹은 예언자에 대해서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3장, 14장의 은사 설명에 보면 신약 교회 안에 몇 가지 특이한 직책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입니다. 이 두 직책은 항상 교회 직분의 첫 머리에 언급됩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전12:28)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4:11) 사도와 선지자는 오직 초대 교회 안에만 있었던 특별한 직책입니다. 그러면 선지자는 어떤 직책인가요?
신약 교회 안에서 선지자 직책은 구약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는 장차 나타나실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을 했습니다. 때로는 왕이나 백성들의 불신앙과 타락을 책망하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했습니다.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우상과 대결을 하고, 큰 기적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교회의 직책은 그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신약 교회에서 선지자는 드러난 활동이 거의 없습니다. 직분에 대해서는 분명히 거론하면서도 어떤 일을 했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추측은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선지자 직책은 사도직 다음으로 두 번째로 중요한 직책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공식적인 직책임은 분명합니다. 둘째로, 사도시대 이후로 선지자 직책은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처럼 선지자는 최초 창설 교회에만 있었던 단회적인 직책으로 생각됩니다. 셋째로, 선지자가 사도와 함께 언급된 것을 보면 사도를 돕는 직책으로 생각됩니다. 예를 들면, 사도의 진정성을 증명한다든지, 혹은 사도가 전한 말씀의 진정성을 변호하는 역할입니다. 왜 이런 직칙이 필요했을까? 당시에는 신약 성경이 다 완성되기 전이기 때문에 누가 진정한 사도인지, 혹은 참 하나님 말씀인지 분별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구약의 선지자와 같은 정도의 예언은 아니지만, 미래사에 대한 예언을 하기도 했습니다.(롬12:6,고전13:2, 14:1,3,22-32)
그러면 이제 본문으로 돌아와서 아가보의 활동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아가보는 예루살렘 교회 출신의 선지자입니다. 그는 안디옥에 최초의 이방인 교회가 세워졌을 때에, 사도들과 함께 내려왔습니다. 그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언을 했습니다.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행11:25-28) 아가보의 예언은 적중했습니다. 클라우디우스(AD41-54) 황제 때(AD46)에 성취되었습니다. 이 아가보가 어떤 연유로 사도 바울의 귀로에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내려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성령께서 주신 예언 때문에 바울에게 온 것 같습니다. 성령께서 분명하게 바울이 체포당하여 로마 정부에 넘겨지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고,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적개심도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미리 바울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었을 겁니다. 그는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갈 때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아 바울에게 왔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아가보의 예언은 바울 일행을 크게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누가를 비롯한 측근들은 앞 다투어 바울의 앞길을 막았습니다.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12) 어쩌면 바울의 안전을 위하는 것은 동료들의 입장에서 본다는 최대의 책임이었을 겁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바울처럼 중요한 일군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영접한 이후로, 남은 생애 전부를 전도에 바쳤습니다. 세 차례에 걸친 세계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 27권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3권을 썼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같이 교리적으로나 목회적으로, 그리스도인의 가치관, 혹은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동안 이런 바울을 모든 위험에서 항상 피하도록 돌봐 주셨습니다. 그런 바울에게 이제 위험이 예고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피해야지요. 바울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예언도 있으니,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결정을 내렸나요? 오늘 말씀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예언과 주변 사람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로 결심합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13) 바울은 예언자와 동료들의 충고를 듣고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마음을 굳게 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14상) 아가보가 한 예언이 사실이라 해도, 동료들의 충고가 진심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말씀에는 그리스도인들의 판단과 결심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결정 원리들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로, 조언자, 혹은 충고자로서의 역할입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은 아가보가 바울에게 권고했습니다. 그 이전에도 예언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바울에게 다가올 위험을 예언한 바 있습니다.(21:4) 그러나 바울은 끝내 거절했습니다. 이럴 때에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했나요? 강제로 막았나요? 아닙니다. 본문에 보세요.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14하)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에게 카운슬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카운슬링은 사실을 알려주는 선에서 끝내야 합니다. 비록 初信者라 해도 그 삶을 이래라저래라 결정해 줄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런 저런 사유로 심방도 많이 하고, 상담도 많이 합니다. 때로는 사업상의 문제 때문에 상담합니다. 때로는 부부관계나, 가정사 때문에 상담합니다. 자녀 문제, 대인관계, 진로 문제 등등. 여러 가지 일로 대화를 나눕니다. 그러나 제가 하는 일은 무엇을 결정해 주는 일이 아닙니다. 다만 사실을 알려주고, 성경의 원리를 알려주는 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심리가 이상해서 무엇을 확실하게 말해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이상하게 족집게 식의 조언을 좋아합니다. 과에 공부를 해도 “족집게 과외”를 합니다. 지구상의 어느 나라에도 없는 이상한 학습법입니다. 점쟁이에게 갈 때도 “족집게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정초에 토정비결 보면 어떤 내용이 나옵니까? “7월에는 동쪽으로 가지 마라!” 아니, 사람이 동쪽으로 가지 않고 어떻게 삽니까? “1월에는 불을 가까이 말라!” 아니, 겨울에 불을 가까이 않고 어떻게 삽니다. 아무튼 그 내용이 두루뭉실 합니다. 그러나 족집게 점쟁이는 맞든지 틀리든지 확실하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좋아합니다. 목회자도 그렇습니다. 족집게처럼 이래라 저래라 말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건 하라, 저건 하지 말라!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좋은 권고가 아닙니다. 인간은 자유의지와 양심, 그리고 인격을 가진 결정권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고, 구원 받고 거듭 난 인간의 참 모습입니다. 자유의지야말로 인간을 가장 고상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왜 스스로 노예를 만들려 하고, 다시 노예가 되려고 합니까? 서로 얽매려고 하지 말고, 자유 의지를 존중하는 좋은 상담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의사 결정의 최종 결정권입니다. 모든 사안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이런 저런 좋은 충고를 한다 해도 결정은 본인이 합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13) 바로 이점입니다. 결정과 결심은 바울이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직후부터 예수님을 위해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독신으로 살 것도 결심했습니다. 그것은 바울을 부르신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9:15-16)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주님을 위해 결박당할 각오를 했습니다. 죽을 것까지, 순교까지 결심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고, 로마까지 가는 것은 일찍이 하나님이 주신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의 충고는 다만 참고 사항일 뿐입니다.
오늘 내 인생에 다가오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누구에게든지 상담도 할 수 있고, 자문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됩니다. 결정은 내가 합니다. 결정을 내가 한다는 것은 책임도 내가 진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사람은 결정을 남에게 맡기고 책임을 떠넘기는 사람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뜻이 최종 판단의 기준입니다.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14하)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정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왜 예루살렘에 가면 붙잡히고 이방인에게 넘겨진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셨을까요? 성령의 예언은 사실이긴 합니다. 예언대로 바울은 붙잡히고 넘겨졌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게 될지라도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과연 위험한 일을 당할지라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면 신상의 위험 때문에 올라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올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판단의 기준입니다. 내 신상의 이해상관이 판단의 기준이 아닙니다. 바로 이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내 신상의 이해상관에 따라서 모든 일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게 손해나는 일이라면 죽어도 안 합니다. 돈 손해나면 안 합니다. 육체가 고단하면 안 합니다. 싫증나면 안 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편하게 믿자! 이래저래 내가 얼마나 편할 수 있는지가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이런 점 때문에 오늘의 교회가 타락하고, 물질주의, 물량주의로 변질되어가고 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청년들이, 목사님 아들딸까지 전부 대교회로 몰립니다. 힘든 개척교회에 가서 이런 저런 일을 하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내가 충성 안한다고 누가 뭐래지도 않습니다. 대교회에 가면 좋은 점이 많아요. 프로그램 잘 돼 있습니다. 어울릴 남녀가 많습니다. 임도 보고 뽕도 따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일석 이조입니다. 편하게 믿는 세대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내 신상 위주로 판단하고 결정하지 마세요! 저는 지금도 생각합니다. 내가 만일 편한 길 때문에 교회 개척을 마다했다면, 일곱 식구 때문에 교회 개척을 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을 통한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매일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 하늘에서는 천사들이나 성도들이 하나님 뜻에 백 퍼센트 순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땅에 있는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의 따르지 않습니다. 내 뜻대로 결정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겠습니까? 세상 불신자들 얘기는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습니다. 내 신상의 이해상관에 따라 모든 일을 결정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겠습니까? 내가 내 편의 대로 결정하는데, 내가 내 생각대로 결정하는데, 어떻게 내 가정을 통해서, 어떻게 내 자녀들을 통해서, 내 사업을 통해서, 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오늘 내 인생사를 결정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세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내게 결박이 다가오고, 죽음이 다가온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 뜻이라면 단호하게 택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세요. 그래야 내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야 복음이 전파됩니다. 그래야 교회가 제대로 세워집니다. 그래야 영적 부흥이 있고, 성숙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