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판장 일을 끝내면 대충 오후 서너시 쯤 되는데, 그 시간이 마지막 입찰인 저인망 어선이 들어오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묵호항을 감싸고 언덕 위에 있는 내가 사는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나는 해맞이길을 빈둥빈둥 걸어나온다. 그 술집에 가기 위해서다. 해맞이길은 내가 몇 년전 묵호에 고기장사를 하러 왔을 때 차로 둘러보고는 감탄했었고 가슴 설랬던 길이었다. 나는 그 길을 걷는다.
망상해수욕장에서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나면 사문재라는 완만한 고개를 넘자면 양쪽에 경쟁관계에 있는 대기업이 운영하고 있는 주유소가 있는데, 덕분에 나는 동해에서 가장 싼 주유소를 이용하게 되었다. 주유소를 지나서 묵호여고 정문이 나타나고 바로 그곳에서 좌회전하면서 해맞이길이 시작된다. 해맞이길은 묵호항 산동네 정상을 가로지르며 한쪽으로는 묵호등대까지 이어지고, 다른 한 줄기는 어달리 해변으로 통하게 된다. 그 길 덕분에 나는 묵호시내의 야경과 묵호항 전경과 동해바다를 마음껏 감상하게 되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길을 걸으며 창호초등학교 교차로에서 왼쪽으로 들어서고 잠시 경사로를 오르면 드디어 묵호항이 나타난다. 망망한 동해바다 는 덤으로 말이다. 묵호항 정면은 어선들이 정박해 있는 어항이고, 오른쪽으로 석탁과 광물을 실어나르는 산업항이 있고 바로 옆에 울릉도로 드나드는 파란 썬플라워호가 세워져 있는 여객항이 있다.
묵호항 방파제는 왼쪽에 있는데, 거기에는 다른 항구와는 달리 등대가 없다. 대신 묵호항의 등대는 묵호항 뒷편의 언덕위 내가 사는 아파트 아래에 버티고 있다. 왕년에 영화나 드라마에도 가끔 등장해서 그런지 해맞이길을 통해 관광버스도 가끔 보이고, 묵호등대에서 묵호항을 내려가는 좁은 골목길이 있는데 논골담길이라 이름 붙이고 그곳 역시 꽤 이름이 알려진 모양이다.
과거 오징어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전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 들어 무허가 집을 짓고 살던 곳이 이제 제법 명소가 된 것이다.
그들의 삶의 애환들은 벽에 그려져 있는 벽화로 나타나 있고 관광객들은 그들의 아픈 삶 마저 즐기고 있는 것이다. 여행이란 남의 아픔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을 거라고 생간하니 쓴 웃음이 지어진다.
묵호항과 함께 보이는 것은 오징어를 말렸던 덕장이다. 지금은 오징어가 별로 나지 않아 텅 비어 있지만, 과거에는 그곳에 수 많은 오징어가 만국기 처럼 펄럭거렸을 것이다. 그 때는 전문적으로 오징어를 말리는 업자들도 따로 있었지만 묵호의 거의 모든 가정에서 오징어를 말려 업자들에게 납품을 하고 그 돈으로 겨울 날 연탄과 쌀을 샀고, 과거 배 고팠던 시절에는 겨울에 그 두 가자미나 있으면 든든했던 것이다.
오징어를 말렸던 덕장에 지금은 러시아 수입산 명태를 말린다. 겨울에 북평 공단에서 배를 갈른 명태를 말려서 겨우 체면치레를 하는 셈이다. 거기서 말린 명태를 황태라는 말 대신에 먹태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보통 태백산맥 고산지대에 말리는 황태는 겨울철 눈을 맞아서 얼고 녹는 짓을 반복해서 명태의 생선즙이 거의 빠져버려 말리고 나면 맛도 거의 없고 황색을 때는 반면에, 먹태는 눈을 맞히면 기온이 낮지 않아 상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눈을 피하게 된다. 그래서 눈이 오는 날이면 건조업자들은 밤 새도룩 포장을 치고 포장 위에 눈이 많이 싸이지 않도록 눈을 치우게 된다. 그래서 눈이 많이 오는 해는 어떤 건조업자들은 겨울내 번 돈으로 어깨 수술을 받는 경우도 있다. 하여간 그렇게 말린 먹태는 생선즙이 빠지지 않아 명태 고유의 맛을 내는데 껍질이 황태와는 달리 까맣게 보여 먹태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먹태는 황태보다 비싼 값에 팔리고 애호가들이 많이 찾는 다고 한다.
해맞이길을 걷다가 중앙시장 그 술집에 가기 위해 아래로 내려간다. 묵호항 산동네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세 갈래가 있는데, 논골담길과 마주치는 논골이 있고 창호초등학교로 올라가는 산제골이 있고 중앙시장 발한동으로 가기 위한 게구석길이 있다. 나는 게구석을 내려간다. 묵호항을 가슴에 품고 내려가다가 왼쪽을 틀어서 중앙시장 방향으로 돌아서면 드디어 묵호 시내가 보인다. 중앙시장 일대의 발한동과 주택가가 밀집해 있는 동호동 일대가 파노라마 처럼 펼처진다.
나는 묵호의 새로운 명칭 '동해'라는 말 보다 과거의 이름 '묵호'를 좋아한다. 일본인들이 이름 붙힌 것이지만 묵호는 젊은 시절의 기억과 함께 항상 나의 가슴 깊숙히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묵호에 나는 고기 장삿꾼으로 돌아 온 것이다.
묵호는 과거의 묵호와 비교해서 거의 변하지 않았다. 새로운 건물들이 거의 들어서지 않았다. 나의 젊은 시절의 묵호가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사람들 역시 그렇다. 다만 그들은 나이가 먹어 주름살이 생겼을 뿐이다. 아! 새로운 건물이 있다. 훤한 대낮에도 한복 입은 술집 아가씨들의 껌 씹는 소리가 요란 했던 보영극장 자리에 커다란 마트가 생겼고 그 옆에 농협 건물이 들어 선 것을 제외하고 말이다.
나는, 내 젊은 시절 묵호의 과거의 인간들을 만나러 그 술집에 가는 것이다.
묵호항은 일본인들이 강원도에 캐낸 석탄을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해 1930년대에 만든 항구인데, 석탄이 바닷물에 풀어져 마치 까만 먹물처럼 보인다고 해서 '묵호(墨湖)'라고 이름 붙힌 것이다. 지금은 석탄을 별로 실어나르지 않아 보이지 않는데 내가 젊었던 시절에는 묵호역 옆의 굴 다리를 빠져나가자면 석탄 실은 기차에서 까만 연탄가루가 뿜어져 나와서 바람에 흩날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해방이 되면서 고기를 잡는 어항이 생기고 오징어가 많이 잡히자 전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 오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이 만든 도시가 묵호인 셈이다. 그 사람들은 산동에에 무허가 집을 짓기도 하고 묵호항 옆에서 장사를 했고 그것이 중앙시장이 된 것이다. 실제로 중앙시장 내의 번듯한 건물도 무허가인 경우가 꽤 있다. 내가 드나드는 술집 건물도 2층인데 무허가다.
이렇듯 묵호는 역사와 전통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막되먹은 도시로 출발했다. 바로 옆의 전통과 문화의 도시인 강릉과는 전혀 딴 판이다.
그 술집에 들어가 과거의 인간들의 옆자리에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때로는 나 역시 참여하기 한다. 나의 이야기는, 내 철없던 시절의 객기로 인한 양아치 짓거리지만 말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이곳 묵호에 오게 된 이유를 닮아 있다. 고단하고 힘겹고 처참하고 살벌하고 천박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고기 잡이로 멀리 간 남편을 배신하고 바람난 여자들의 이야기며, 어선 뒷박에서 나온 고기를 팔아, 오랜만에 곱게 단장하고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를 무시하고, 묵호항 앞의 니나노 집 여자들에게 몽땅 바친 사내들의 이야기며, 도망 간 아내 대신에 사귄 술집여자들에게 홀려 돈을 잃고 그 여자가 운영하는 술집에 불을 지르고 영창에 갔던 사내 이이기며, 게구석 동네의 춤 선생이 유부녀 수십명과 놀아났다는 이야기며,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이 과거의 인간들과 그곳에 고기 장사를 하러 온 술에 쩔은 나 같은 인간들에게는 어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천박하고 더럽고 야비하고 비참하고 예의 조차도 모른다. 내가 살았던 강릉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인간들이 셈이다. 그러나 나는 강릉 보다 묵호가 좋다. 그들의 천박함과 야비함과 사나움은 솔직하고 경괘해서 마치 해 맑은 소년처럼 경이롭고 생동감 있어 보인다. 속을 들어내지 않는 예의와 이성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그런 점이 안쓰럽고 미소짓게 하고 가슴 먹먹해지고 괜히 미안해 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내가 다니는 그 술집은 글을 쓰기에는 제격인 셈이다. 난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십여년 전, 소설책 달랑 한 권을 내놓고 먹고 살기에 바빠 글 쓰는 일 마저 포기했던 과거의 삼류 소설가로서는 행운인 셈이다. 또는 그런 삼류로서는 이곳 묵호의 이야기는 적당한 주제이기도 하고. 하여간, 나로서는 제대로 만난 것이다.
묵호항에 나는 삶을 살고, 그 술집에서 나는 꿈을 꾸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