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55
8월20일[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연중 제20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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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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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bEka20DVwqU
[서울대교구 유상준 베르나르도(중계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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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베르나르도야? 너 여기 무엇 하러 왔느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은 12세기를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당시 그의 역할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12세기를 자신의 두 어깨에 짊어졌다.”라는 말까지 돌 정도였습니다.
베르나르도의 지혜와 경륜은 하늘을 찔렀는데 당대 교황님들을 비롯해 많은 왕들이 그에게 조언과 상담을 청했습니다. 단 한번이라도 그를 만나 본 사람들은 ‘사람의 모습을 한 천사’라며 우러러 보았습니다.
동시에 베르나르도는 가톨릭 신앙의 옹호자, 수도생활 쇄신의 선구자, 교회 분열을 저지하는 든든한 보루, 탁월한 성서학자, 위대한 명 설교자, 그러면서도 겸손한 수도자로서 삶을 동시에 살아갔습니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마지막 교부’ 또는 ‘꿀과 같은 혀를 가진 박사’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090년 프랑스 귀족 가문의 촉망받는 자녀로 태어난 베르나르도는 다정다감하고 신앙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22살의 나이에 시토회에 입회해서 수도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출중한 인품과 지도력, 그리고 놀라운 언변과 감수성의 소유자였습니다. 입회하기 전 그는 여러 형제들과 친구들을 영적으로 잘 지도하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30명이나 되는 동료들을 하나로 모았고 의기투합한 그들은 당시 개혁파 수도원으로 ‘뜨고 있던’ 시토회에 동반 입회를 하게 됩니다.
초기 양성 기간을 마친 베르나르도는 장상의 지시에 따라 동료 수도자 12명과 함께 그 유명한 클레르보 계곡으로 내려갑니다. 척박한 황무지였던 클레르보에 작고 소박한 수도원을 건립한 베르나르도는 오랜 기간 동안 철저한 고행과 단식, 집필과 일에 전념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았고, 숨을 쉬었으며, 또 그 결실을 형제들과 나누었습니다. 점차 클레르보는 수도생활 개혁의 원천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메마른 골짜기였던 클레르보는 점차 빛과 생명의 계곡, 기쁨과 구원의 골짜기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베르나르도의 성덕에 감화를 받고 클레르보로 몰려왔습니다.
베르나르도는 가톨릭교회 쇄신에 대한 강한 열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병약한 몸을 이끌고 교회의 개혁을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했습니다. 교황청의 폐단과 고위성직자들의 세속화를 신랄하게 경고했습니다.
교회 당국으로 부터 공인받은 순회 설교자로서 수많은 지역을 다니며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했습니다.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베르나르도는 스스로에게 그 유명한 질문 한 가지를 던졌습니다.
“베르나르도야? 너 여기 무엇 하러 왔느냐?”
그가 남겨준 수도자로서의 모범을 바라보며 같은 수도자로서 큰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는 교도권으로부터 부탁받은 중요한 임무를 완수하는 즉시 고향 집으로 달려가듯이 부지런히 클레르보로 돌아와 평범한 수도자로서의 삶을 계속했습니다.
그가 수도원으로 돌아올 때는 절대 혼자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누군가를 데리고 왔는데 그의 삶에 매료된 나머지 수도 생활을 선택한 젊은이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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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JyxnftxnX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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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배가 주어진다고 믿는 곳이 천국>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 나라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십니다. 즉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반면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하늘나라는 행복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신학생 때 2주간 행려자들을 위한 서울에 있는 한 무료 급식소에서 봉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무료 급식소라고는 하지만 돈을 200원씩 받았습니다. 없는 사람은 안 내도 되지만 아예 받지 않으면 행려자들의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가끔 식사 후에 그들끼리 밖에 나가 싸웁니다. 제가 있을 때의 싸움은 신문지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겐 이불 역할을 하는 그런 신문지가 전 재산입니다. 한 노숙자는 신문지를 많이 가지고 있었고 한 사람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 없는 사람이 많은 사람 것을 하나 슬쩍 한 것입니다. 저는 ‘과연 그들이 가난한 사람인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답은 ‘아니다’였습니다. 그들은 부자였습니다. 욕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왜 욕심이 많을까요? 자신이 내어주는 것이 100배로 돌아옴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는 내가 어느 환경에 있는지에 대한 믿음으로 결정됩니다. 같은 아이라도 고아가 있고 부모가 있는 자녀가 있습니다. 고아는 이 세상에서 자기 것을 내어놓아도 100배로 돌아온다고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는 부모에게 조금만 효도해도 100배로 돌아온다고 믿습니다. 부모가 있어도 가난할 수 있지만 그 아이는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고, 좋은 고아원에 있어도 100배의 보상을 믿지 않는 아이는 그 집착 때문에 지옥에 삽니다. 사실 그런 아이는 가진 것마저 빼앗깁니다.
우리는 이솝 우화의 ‘개와 그림자’를 잘 압니다. 한 마리의 개가 고기를 물고 가다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물에 비친 고기가 더 크다고 착각합니다. 욕심을 부린 개는 물속의 고기를 차지하려다 결국 자신이 물고 있던 고기를 떨어뜨려 잃어버리고 맙니다. 만약 100배로 돌려주는 세상이라고 믿으면 ‘불쌍하면 내가 주려고 했는데 이미 먹을 것이 있으니 줄 필요가 없겠네!’라고 하며 자신의 것을 잃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하늘 나라로 사는 사람의 마음을 살펴봅시다. 워런 버핏은 2011년 포춘지 9월호에 ‘나의 기부 서약’을 실었습니다. 여기에 그가 내어놓는 무엇이든 100배로 돌려받는다는 믿음이 숨어있습니다.
“저는 재산의 99%를 자선단체에 기부하겠습니다. 규모로 보면 큰 액수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매일 같이 저보다 많은 기부를 하고 있습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교회나 기타 기관에 기부금을 내고 있습니다. 제 주식의 1% 이상을 저희를 위해 사용한다 해도 저희는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지도 더 편안해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부한 나머지 99%는 다른 이들의 건강과 복지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제 가족이 걸어갈 길은 명확합니다. 저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만 취하고 나머지는 사회의 필요를 위해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보상을 믿는 사람들이 나눌 줄도 압니다. 그런데 정말 저렇게 많은 복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워런 버핏이 가진 돈의 1%를 가진 사람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1%도 조 단위의 액수이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많게 되는 이유는 이미 지옥에 살기 때문입니다. 제가 유학 가서 말도 못 할 때 그 상황이 지옥 같으니 계속 내 것만 찾고 있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일부러라도 빼앗으려고 하십니다. 그리고 정말 100배가 주어지는지 보게 될 때 그 사람은 앞으로도 천국에 살 수 있습니다.
‘약속’이란 영화에서 박신양이 술에 취하여 노숙자의 가방을 빼앗으려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노숙자는 자신의 전 재산인 가방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지만 결국 빼앗기고 맙니다. 가방을 털어보니 신문지와 더러운 옷 몇 벌만 들어있습니다. 주인공은 웃으며 가방과 나머지 것들을 그의 앞에서 엎어버리고 대신 행려자에게 수표를 한 장 줍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 보따리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아? 먹다 남은 사과, 가자 부스러기, 곰팡이 쓴 떡, 순 못 먹는 것들만 잔뜩 싸가지고 맨날 얻어먹으면서 지 것 빼길까봐 보따리 꼭 끌어안고 사는…. 내가 거지야. 희주는 어떤지 알아? 나한테 주기만 해. 나만 쳐다봐. 절벽 꼭대기에서 눈 꼭 감고 그냥 자기를 내던지는 거야! 이런 사랑 받아봤어?”
주님을 이렇게 억지로라도 빼앗으려고 하십니다. 그래야 당신께서 더 큰 것을 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신학생이 되거나 수녀원에 들어가면 바로 100배로 받는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많은 부모님이 생기고 많은 자녀가 생기며 많은 집이 생기고 죽기까지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단지 내가 별거 아닌 것을 바쳤다는 이유 하나로. 그리고 그분은 대신 “모든 것”을 내어주십니다. 이것을 느끼며 사는 동안은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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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입니다. 한 어르신이 면담을 원했습니다. 86세인 어르신은 신앙 체험을 들려주었습니다. ‘성체’ 체험입니다. 어르신은 미국 성당에서 미사에 참례하였다고 합니다. 마음도 불편하고, 다툼이 있었기에 그날은 성체를 모시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영성체 시간에 마지막으로 성체를 영하는 할아버지가 그만 성체를 땅에 떨어트렸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도 성체를 찾고, 신부님도 성체를 찾았는데 도저히 찾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어르신의 눈에는 성체가 땅에서 조금 떠올라 있는 것이 보였다고 합니다. 모두가 포기하고, 미사를 마치려고 할 때입니다. 어르신은 성체가 있는 곳에 엎드려 혀로 성체를 모셨다고 합니다. 교우들이 박수 치면서 기뻐하였고, 신부님도 고마워했다고 합니다. 어르신은 그렇게 성체를 모신 후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정한 여인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용서하셨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어르신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한 몸과 마음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불경이 왜곡되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와 스님들에 의해서 왜곡됩니다. 부처님은 자비와 보시를 이야기하는데 불자들과 스님들은 그 가르침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코란이 왜곡되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코란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슬람의 신자들과 이맘들에 의해서 왜곡됩니다. 마호메트는 평화와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이슬람의 신자들과 이맘들이 그 가르침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왜곡되는 것도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우들과 성직자들에 의해서 왜곡됩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으로 올라갔을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론은 그 시간을 참지 못하고, 금을 모아 황금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은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서 왜곡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희생을 말씀하셨습니다. 겸손과 가난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교우들과 성직자들은 그 가르침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드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렇다면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모두 부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같은 물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부유함이 주는 편리함이 많기 때문입니다. 부유하면 좋은 집을 가질 수 있고, 부유하면 좋은 차를 가질 수 있고, 부유하면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했을까요? 재물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아서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심 때문에 남을 속이기도 하고, 남의 것을 빼앗기도 하고, 하느님과 멀어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였던 세리 자캐오를 만났습니다. 부자였지만 세리였던 자캐오는 사람들에게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그런 자캐오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동네에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제가 빚진 것이 있다면 4갑절로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받았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부자라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부자일지라도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자신의 재물을 기쁜 마음으로 이웃에게 나눌 수 있다면 하늘나라의 문은 언제든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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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9,23-30: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24절) 예수께서는 재물 자체를 나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재물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비판하신 것이다. 바늘귀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다. 도시는 성곽으로 둘려 있고 성문이 있는데, 성문에는 짐을 실은 낙타라든가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큰 문이 있고, 그 옆에는 작고 낮은 좁은 문이 있어서 밤에 큰문을 잠그고 수위 병이 지키면서 이 문으로 사람들을 통과시켰다. 이 작은 문을 흔히 “바늘귀 문”이라고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치 거대한 낙타가 사람도 겨우 지나가는 이 작은 문을 들어가기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이렇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놀랐다고 한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25절) 한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해 주셔야만 가능하다고 하신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6절)
“보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27절) 베드로가 그렇게 물은 것은 우리가 모두 사도들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물었다.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은 어떤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완전히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렇게 큰 사랑으로 완전히 버린 분들이다.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28절)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는 뜻이다. 그분을 따르는 것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백 배는 하늘나라에서 누릴 상급을 의미한다. 현재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한 것이다. 즉 주님을 위해 육적인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영적인 것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30절) 하신다. 재물이나, 생각이나 이념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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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에제키엘서 25─32장은 여러 민족들에 대한 심판을 담고 있고, 오늘 독서는 그 가운데 티로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예언서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민족들에 대한 심판은, 각 민족이 저지른 일이나 특정한 시대를 언급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보다는 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통치권이 주제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말하는 티로 임금에 대한 심판은 매우 전형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그 심판의 대상이 티로 임금이 아니라 누구라도 다르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사야서 10장에서는 아시리아에 대해서, 그리고 나중에는 바빌론에 대해서 비슷한 내용이 선포되고, 다니엘서 4장에서는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를 대상으로 하여 같은 주제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문제는 인간의 교만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계획에 따라 어느 나라 또는 어떤 임금에게 힘과 지혜를 주시는데, 인간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강하고 지혜롭다고 여길 때, 오늘 독서의 표현으로 “나는 신이다.”(에제 28,2)라고 할 때 하느님께서 그것을 잃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너무 전형적인 주제여서, “나는 신이다.”라는 말을 보면 바로 멸망을 예상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내’ 힘, ‘내’ 능력, ‘내’ 지혜, ‘내’ 재산이라는 바로 그 생각이 어리석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보는 이들은 그것이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를 알아봅니다. 알아보지 못하고 착각 속에 사는 그 자신만 불행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이들의 것이고,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운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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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하면, 낙타도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23-30)
1) 여기서 ‘부자’는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섬기면서도 재물에 대한 애착심이 너무 커서 마음이 재물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사람들을 모두 가리킵니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는 말씀은,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라는 뜻입니다. <‘어렵다.’가 아니라 ‘불가능하다.’입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란 것은 그들도 그때까지는 당시의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부유함’을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복’으로 생각했는데,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복을 많이 내려 주신 사람들도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면, 누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뜻입니다.
2)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라는 말씀은,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간에 사람의 힘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원래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그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다.”라는 뜻입니다. 들어오라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들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면서, 하느님께 자비를 간청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는데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셔서 못 들어가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라고 걱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지극히 공정하신 분이기 때문에, 억울하다고 하소연할 일도 없을 것이고, 부당하다고 항의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각자 뿌린 대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3)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라는 말씀은, 부자인 채로는 못 들어간다는 뜻이고,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곧 ‘회개’입니다. 부자들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재물을 섬기던 생활을 버리고 하느님만 섬기면, 그렇게 해서 하느님께서 그 회개와 변화를 인정해 주시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4)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라는 말을 ‘낙타와 바늘구멍’에 관한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저희는 바늘구멍을 빠져나갈 수 있습니까?”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의 말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버렸음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이는 말인데, 예수님의 답변은 당신을 따른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나를 따른 너희도” 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모든 것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신앙인이(제자가)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버림’보다 ‘따름’이 먼저입니다. 만일에 버리기만 하고 따르지 않는다면, 반대로, 따르면서도 버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두 헛일이 될 뿐입니다.>
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열두 옥좌’는, 군림하고 세도를 부리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입니다.(마태 20,26)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재림하신 예수님의 통치권에 참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사도들도 심판관이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또는 사도들에게 어떤 특별한 지위나 권한이 생긴다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통치권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사도들’로만 한정하지 않고 ‘성도들’로(신앙인들로) 확대해서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은 성도들이 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1코린 6,2ㄱ)>
‘백 배’라는 말은, 풍성하고 충만한 은총을 상징합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지상에서의 처지와 하느님 나라에서의 처지가 역전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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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어제의 복음과 바로 이어지는 오늘 복음의 내용도 ‘부’에 관한 것입니다. 젊은이가 떠난 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라는 비유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십니다.
사실 마태오 복음에서 ‘부자와 하늘 나라’에 대하여 알아들으려면 산상 설교의 시작인 행복 선언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오 5,3). 그러나 마태오와 달리 루카는 같은 행복 선언에서 ‘마음이 가난하다.’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루카 6,20 참조).
그리고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오 5,6)라고 말하는 마태오와 다르게 루카는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루카 6,21)이라고 언급합니다. 곧 루카는 실재적으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행복을 선언합니다.
이렇게 차이를 보이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마태오가 복음을 전하려던 교회는 루카가 속하였던 교회와는 달리, 비교적 부유한 신자들이 주류였습니다. 그렇다면 부유한 신자들에게 하느님 보시기에 참된 부자가 무엇인지를 강조하여 가르치려 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마태오가 이처럼 윤리적으로 각색한 이유는 교회 안의 부유한 신자들이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제 복음의 젊은이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마태오는 많이 가진 이가 부자가 아니라 많이 주는 이가 부자라는 사실을 교회 공동체 신자들에게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많이 가졌어도 스스로를 부족하다 생각하면서 항상 노력하는 겸손한 사람이 부자이면서 동시에 예수님 말씀처럼 “완전한 사람”(마태오 19,21) 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가진 ‘부’를 나누고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으로 자신의 빈 곳을 채우는 ‘마음이 가난한 이’가 바늘구멍을 온전히 통과할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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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강종석 베드로 신부님]
<우리가 부자입니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말씀이 오늘 복음입니다. 자칫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재물이 많은 부자는 숨도 못 쉬게 만드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을 거부하게 만드는 요소들은 다 부자들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돈이 많아서일 수도 있고, 인간적인 능력이 뛰어나서일 수도 직장이 탄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안 아프고 아주 건강이 넘쳐서일 수도 지식과 인간적 지혜가 자신만만할 정도로 남들보다 뛰어난 이유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용모가 화려하고 빼어나서 자신감이 지나치게 넘쳐서일 수도 있습니다. 일이 많고 바빠서일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갖가지 다양한 이유들 때문에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게 됩니다. 흠도 티도 없는 도덕적 인간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그 자체로 부자가 아니라 그것들에 사람들이 마음을 뺏겨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지 못하고 거부하거나 주님의 초대를 대수롭게 않게 여기게 될 때 사람들은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자의 상징적 의미를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부자의 마음이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고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를 쉽게 뿌리치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돈이 그 자체로 악이 아니고 건강이 그 자체로 악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입니다.
그러나 그 건강, 명예, 지식, 돈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즉 선을 가지고서 움직이는 사람의 마음이 그것을 하느님보다 더 가치있고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세상을 살아갈 때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물질적으로 보면 상대적으로 남들보다 풍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외제차를 타는 사람, 아파트 평수가 아주 넓은 사람, 남부럽지 않은 직장과 지식과 건강이 좋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연히 남들보다 많은 노력을 해서 이룩한 사람들도 많겠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부자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주님께 나아가는 데에 방해가 되고 걸림돌이 된다면 그것은 독이 되고 불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이기에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우리의 능력이란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주님께 믿음으로 매달려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세상 것에 코를 박고 매일 수밖에 없는 존재, 철저하게 지상적인 인간, 그래서 하느님의 구원과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는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기쁘고 이 세상의 어떤 행복보다도 값진 것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남이 알아주지도 않고 또 부족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닌 불쌍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초대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을 보게됩니다.
잘 나가던 사람들이 어느 날 벽에 부딪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깨달음을 얻고 주님의 초대에 응합니다. 어찌 보면 넉넉해서 주님의 필요성을 깨닫는 것보다는 모자라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 하다고 여겨지는 힘든 상황 때문에 주님을 찾게되고 주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이 신앙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 나아가고 주님을 따르는 데 현재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방해가 되지 않고 순조롭게 움직일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많이 가지든 적게 가지든 하느님보다 세상 것에 빠지게 되면 이미 부자 반열에 들기 시작한다는 표지입니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조건들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인, 즉 자기를 자유로이 통제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와 반대로 오히려 자신의 조건에 끌려가는 사람은 그것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노예의 비참함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드는 것을 거부하게 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이처럼 자칫 영적으로 위기에 빠지고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는 부자가 될 것을 욕심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어려워 주님께 의지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못 견딜 정도가 되는 것을 부러워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행복한 것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 주님께 교만할 정도가 되기보다는 가진 것이 없어 주님께 겸손한 것이 백 번 낫습니다.
죄가 없어 주님 앞에 당당한 것보다는 죄 때문에 주님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이 백 번 낫습니다. 능력이 많아 주님 없이 홀로 서있는 것보다 무능력해 주님께 철저히 의존하는 것이 백 번 낫습니다.
주님께로 들어가는 문은 마치 바늘구멍처럼 가늘어서 교만과 자기 자신감으로 크게 부풀려져버린 정신의 소유자는 들어가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납작 엎드린 겸손한 자들이 너무나 쉽게 가느다란 그 관문을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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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많은 이가 예수님의 오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합니다. 어떤 성서학자는 “바늘구멍”이 아니라 ‘바늘 문’으로 알아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바늘 문의 원어인 ‘라피스’는 낙타가 등을 구부리고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골짜기나 작은 출입문을 뜻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낙타”(카멜론)가 아니라 ‘밧줄’(카밀론)로 알아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낙타가 바늘구멍이 아니라 작은 문을 빠져나가는 것이 되고, 낙타가 아닌 밧줄이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하여 부자의 하늘 나라 입성을 조금이나마 수월하게 만들어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성경의 원문을 변형시켜 해석한다고 하여 듣는 이의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이 구절이 ‘불가능성’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부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 심지어 가난한 사람도 스스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지상의 생명을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통하여 하느님께 받았듯이, 영원한 생명도 선물로 받는 것이지 내 손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부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구약 성경을 보면, 부자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욥 이야기의 배경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왜 부자는 하늘 나라에 가지 못할까요? 그의 생각이 하느님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자는 많이 가짐으로써 만족하며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에 하느님께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마음으로 느끼지 않는 사람입니다.
내가 가진 것, 내가 이룬 것에 더하여 그분께서 좀 더 도와주시면 좋겠지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는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그것을 위안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부가 자신이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가져다준다고 굳게 믿으며 재물을 놓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우리가 꼭 붙들고서 삶에서 절대로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봅시다. 하늘 나라는 부를 믿고 의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마음과 태도를 요구합니다. 많은 좋은 것들을 붙들고 누리며 살다가 유일하게 좋은 것,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불행을 자초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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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19,25)
예전 자주 들었던 광고,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 라는 표현 기억하시지요. 아마도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어떤 누구도 부자 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자가 되면 정말 좋은 이유를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고 봅니다. 여러분 생각에, 부자가 되면 좋은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셨나요. 어느 투자가의 글에 부자가 되면 좋은 이유를, 첫째로 똑똑한 사람을 부릴 수 있는 특권이 생기며, 둘째 쓸모 있는 유능한 사람들이 모이고, 셋째 남들보다 많은 정보를 통해 자신감을 얻게 되며, 넷째 노후생활이 안정되고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표현했더라고요. 그러면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부자가 되면 좋은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면 좋겠네요.
우리는 어제 복음에서 일찍부터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하며 살아 온 어떤 부자인 젊은이가 이미 영원한 생명의 문턱 가까이 왔었으나,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19,21)라는 예수님의 권고를 듣고 슬퍼하며 떠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국 그 젊은이는 영생의 문턱에 도달하였지만, 그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 걸림돌은 하느님보다 재물을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실존이며, 영원한 생명과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가장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관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이냐, 재물인가”(6,24)라는 선택과 결단의 문제는 결코 생각만큼 쉬운 선택과 결정이 아닌 자신의 온 존재를 다 걸고 해야 하는 절박한 선택이며, 이는 단지 그 젊은이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런 내용을 전제하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19,24)하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대목은 자칫 잘못 이해하면 많은 오해와 갈등을 빚을 수 있는 미묘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훨씬 더 쉽다, 고 표현하십니다. 알아듣기 쉬운 표현이지만 상상이 잘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잘 아시는 것처럼 바늘귀에 실을 통과하는 것도 여간해서 힘든 일인데, 덩치가 제법 큰 낙타를 바늘귀로 통과시킨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과장된 표현의 밑바닥에는 그러니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한마디로 가능성 제로 상황으로 즉 거의 불가능하다는 강조이겠지요. 이런 예수님의 극단적인 표현에 제자들이 경악하며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19,25)라고 당연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어쩌면 부자인 젊은이의 실망한 모습을 보면서 그에 대해 스승이신 예수님의 민감한 반응이 아닐까, 라는 의구심이 들 만큼 강한 표현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의문처럼 정녕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일어납니다. 이런 제자들의 놀란 표정과 태도를 눈여겨보시면서 예수께서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19,26)라는 해법을 제시합니다. 어쩌면 이 과격한 비유 이면의 초점은 바로 구원이란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한 예수님의 의도된 표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갈 수 있는 실낱과 같은 가능성의 해답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만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곧 어떤 인간도 자신의 힘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구원 곧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노력(=자력 구원), 곧 세상의 재물이든, 권력이든, 선행이든 자선이든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4,12)라는 베드로 사도의 재판정에서 증언은 그 자신의 삶을 통해 체험되고 터득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존재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그 젊은이는 그가 그토록 원하는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이 자기 앞에, 자기 가까이 와 있었는데도, 그 구원의 문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소유한 세상적인 재산에 대한 애착과 미련 때문에 구원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하느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5,45) 분이시기에 원하시면 누구든지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도 부자들을 단죄하신 것도 아니고 구원에서 배제하신 것이 아니라, 고 봅니다. 그들 또한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당연히 구원될 것이며 구원하실 것입니다. 다만 젊은 부자를 바라보면서, 부자들이 흔히 겪는 문제 곧 세상의 재물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행복을 위한 수단일 뿐인데 마치 재물이 구원해 주는 것인 양, 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경고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부자가 상대적으로 구원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인간 내면에 뿌리 깊은 소유욕과 재물의 노예가 될 수 있는 소지가 많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많이 소유하였으면서도 그 재물에 대한 집착과 욕심에 빠지지 않고,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섬김과 자신의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는 삶을 살아간다면야 이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 없다, 고 봅니다. 물론 이처럼 자신의 소유로부터 자유롭고 재물을 통해서 올바른 곳에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전연 불가능하다고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실례가 성서 가운데 예리코의 자케오입니다. (루19,9) 그는 자신이 소유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부당하게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횡령한 것에 네 곱절로 갚아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이 미덕도 아니며, 부요함이 그 자체로 죄악도 아닙니다. 또한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부자는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저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하늘나라는 들어가는 곳, 장소가 아니라 누리는 것,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양적인 물질이나 재물의 소유 여부에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소유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얼마만큼이나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을 누리느냐,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참된 섬김과 나눔을 누리며 사느냐에 관심을 두고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주어진 삶에서 비록 많은 재물을 소유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이 행복한 까닭이 무엇인지 그렇게 느끼지 못한 사람은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또한 남들보다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왜 그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진 듯싶은데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볼 일입니다. 가지고 있음에도 누리지 못하면 아니 가짐만 못합니다.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주어진 삶 가운데서 하느님을 누리며 산다면 그게 참 행복이겠지요. 아마도 그런 영혼들은 주어진 모든 것을 감사하면서 남과 비교하지 않고, 주어진 작은 것에도 자족하며 살아가리라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2코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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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나라의 한센병(나병) 환자를 위해 잠깐의 머뭇거림도 없이 이들을 위해 기꺼이 손을 내밀고 앞장섰던 사람이 있습니다. 1912년 미국에서 온 선교사 서서평(본명: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입니다. 그녀는 32세에 간호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특별히 한센병 환자의 처우 개선을 위해 온몸을 바쳤고, 그 결과 현재의 소록도에 한센병 환자들이 머물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선교, 교육, 구제에 온 힘을 쏟습니다. 하지만 쉴 새 없이 일해서일까요? 광주, 제주도까지 돌면서 봉사에 매진한 그녀는 1934년 여름에 주님 곁으로 가고 맙니다.
장례식날에 많은 여성이 운구 행렬을 따랐고, 특별히 그녀가 남긴 유품에 모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담요 반 장, 쌀 두 홉, 현금 27전이 전부였던 것입니다. 한 장이었던 담요도 어려운 사람에게 찢어주었기에 반 장만이 그녀의 유품으로 남은 것입니다. 심지어 죽기 직전에는 자기 시신까지 세브란스 병원에 기증했습니다. 그녀의 머리맡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 있었습니다.
“Not success, But service”(성공이 아닌 섬김으로)
그녀는 이 문구를 매일 보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평생 성공을 바라보기보다는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 기도를 받으신 주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평생을 사랑으로 사셨고 또 그렇게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는 과연 어떤가요? 우리의 기도가 과연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의 기도는 너무나 세속적인 기준에 맞춰 있습니다. 욕심이 담겨 있고, 이기적인 마음도 담겨 있습니다. 물론 스스로 큰 욕심이 없다고 말하지만, 과연 자기를 낮추는 겸손과 사랑의 기도를 바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깜짝 놀라지요. 부자는 절대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이니까 말입니다. 더군다나 그 시대에는 그래도 넉넉한 사람이 많은 봉헌을 했고, 이런 봉헌에 대한 평가도 높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니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힘이라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습니다. 결국 부자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데 집중할 때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Not success, But service”(성공이 아닌 섬김으로) 이 말씀을 우리 마음에 담을 수 있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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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부자는 죄인인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19,23).는 말씀을 들은 한 부자가 “하느님, 낙타를 아주아주 작게 만들어 주시든지, 바늘귀를 아주아주 크게 만들어 주십시오. 그리하면 저의 재산 반을 당신께 아낌없이 바치겠습니다.” 하고 간절히 기도하였답니다. 그렇다면 그가 재산을 바친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가 있을까요? 재물이 아니라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각자는 자기가 소유한 것을 포기하되 무엇을 버렸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버렸느냐가 중요합니다. 자기의 인간적인 유익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버렸을 때 가치가 있습니다. 상을 백배로 받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버린다면, 결코 진정한 열매는 맺을 수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상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그분의 이름 때문에”(루카18,29. 마태19,29) 바쳤을 때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입니다.
부자가 가진 재물이 나쁜 것이 아니라 재물에 눈이 가려 보아야 할 참가치를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재물은 인간을 노예화하는 유혹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은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상’만을 생각하면 부정을 해서라도 일등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정신, 의미, 알맹이, 즉 내용을 보면 부정한 생각을 한순간 이미 자격을 잃은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부자는 죄인인가요? 사실 재물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잘 써야 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더 많은 재물을 소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그 축복을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 높이는 일에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재물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무쪼록 많이 벌되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 높이는 일들을 하나하나 늘려가길 바랍니다.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십시오. 버리고 또 버려도 버릴 것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은 누구이겠습니까? “돈이 많다고 우쭐대다가는 쓰러지지만 착하게 살면 나뭇잎처럼 피어난다”(잠언 11,28).고 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일 지라도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지 않으면 결국은 하느님 나라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모든 것을 얻게 되고, 모든 것을 누리려 한 사람은 그것을 잃게 됩니다. 부디 모든 것을 얻는 기쁨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 30,8-9).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세상의 물질에 매여 있다면 사랑한다는 말은 그야말로 헛소리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저의 모두는 주님의 것입니다. 저의 모두를 당신의 뜻대로 써주십시오.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삶의 변화를 이루게 해 주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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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구원>
마태오 19,23-30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구원>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태 19,25)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
어느 누구로부터
구원받지 않으시나
모든 이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과
스스로를 비롯하여 누구도
구원할 수 없으나
구원하시는 분께
구원받으려는
사람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오롯이 하나 되는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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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모두가 은총이요 선물이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오늘은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입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성인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한 성인안에 무궁한 능력이 담겨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마 교회 역사상 최고의 성인이라 해도 좋을 듯 합니다. 정말 신화적이고 전설적 인물입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은총의 선물이요,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함을 보여준 성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모두가 은총이요 선물이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로 정했습니다. 이제부터 성인의 감동적인 일화를 소개합니다.
1.스콜라학파 이전의 신학자이며, 때로는 “마지막 교부”로 불리는 베르나르도 성인은 알레타 복녀의 아들로 프랑스 퐁텐에서 일곱 아들 가운데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1107년 어머니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수도생활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는 어머니를 떠나 보냈어도 그 존귀한 여러 말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며 잠시도 잊은 때가 없었습니다.
2.그는 1111년 그의 나이 20세에 집을 떠나 다섯 형제와 두명의 삼촌과 30명의 친구들을 데리고 시토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들 일행이 집을 떠날 때, 아버지의 슬하에 남게 된 막내동생 니발도를 보고 “우리는 모두 수도원에 들어가므로, 이 성이나 영토와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모두 너의 것이 되는 거야.” 말하니까, 니발도는 “형님들은 천국의 재산의 상속자가 되는데, 나는 다만 이 세상 재산의 상속자 밖에 못되니 생각할수록 분한 노릇입니다.” 대답했다 합니다.
3.수도원에 들어온 베르나르도는 매일 아침 “베르나르도야, 너 무엇하러 여기 왔느냐(Ac quid venisti)?”는 글씨를 앞에 놓고 자신을 격려하며 자신의 의무를 상기했다 합니다.
4.이 열성적인 젊은이는 타인에게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많은 요구를 했고, 쇠약해진 몸이 그를 더욱 끈기있고 이해심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 골짜기는 얼마후 클레르보, 즉 빛의 골짜기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주교의 선거나 여러 교리 및 사목논쟁에 대한 화해 조정등 중대한 교회의 문제등 그가 관계치 않은 것은 거의 없을 정도로 유럽의 가장 영향력있는 인사가 되어 통치자와 교황의 자문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5.베르나르도는 초청을 받고 이에 응할수 없는 경우는 종종 그 교회에 서한을 보내어 훈계나 충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와같은 서한중 지금까지 보존해 내려온 것이 500여통에 달하며, 어느것을 봐도 그의 경건과 신심, 교회를 염려하는 마음에 누구나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명령받은 임무를 완성하면 늘 마치 그리운 고향에 가는 것처럼, 클레르보에 부지런히 돌와와서 수도생활에 골몰했습니다.
6.그가 수도원에 돌아올 때는 반드시 새로운 지원자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리하여 클레르보의 수도자 수는 점차 증가되어 그의 임종시에는 약 7백 명에 이르렀습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추상같이 엄격하던 그도, 제자들에 대해서는 봄날처럼 온순히 대하며. 자신의 깊은 신비적 체험에서 베풀어지는 건강한 영적지도는 누구나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밤에도 기도했는데 동료수사들도 밤에 깨어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수도원을 지혜롭게 잘 다스렸으며, 특히 수도규칙을 엄중히 보전해 나가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7.그의 일생은 성모님께 대한 깊은 신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에 대한 그의 설교와 저서들은 마리아 신학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성인의 감동적인 권고 말씀입니다.
“위험과 의심과 어려움에서 성모님을 생각하고 성모님을 부르십시오. 그분의 이름을 계속 부르시오.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마시오. 성모님의 안내를 받으면, 당신은 결코 길을 잃지 않을 것이오. 그분이 당신 마음 속에 계신 한, 당신은 현혹되지 않으며, 그분이 당신 손을 잡아 주시는 한, 당신은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의 보호를 받는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그분이 당신에게로 걸어오신다면, 당신은 권태롭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분이 당신에게 호의를 보이신다면 당신은 목표에 도달할 것입니다.”
8.로마교황청은 베르나르도에게 전유럽의 제2십자군들에게 설교하도록 설득했습다. 그의 설교는 너무도 열광적이어서 대부대가 모였고, 마치 십자군의 승리가 확실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군인과 지도자들의 이상은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이상과는 달랐고, 십자군 계획은 완전한 군사적 파멸과 윤리적 타락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는 여러면에서 책임을 느꼈고 이 무거운 부담이 그의 죽음을 재촉하여 그는 1153년 8월20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8.그는 세기의 위인, 세기의 골키퍼, 세기의 화해자, 세기의 정당한 공격수, 교황의 조언자, 신앙의 옹호자, 분열의 치료자, 수도원의 개혁자, 성서학자, 신학자, 웅변적인 설교자등 너무 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12세기의 위대한 인물,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은둔하는 수도생활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살았습니다.
9.감미로운 학자, 성 베르나르도는 “꿀처럼 단 박사”(Doctor Melifluus)란 칭호와 더불어 교황 비오 8세에 의하여 교회박사로 선언되었고, 그의 문장은 꿀벌통이고, 양봉업자의 수호성인입니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위대한 생애를 대략 살펴 봤습니다. 정말 하느님이 아니곤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은총이자 선물인 성인이요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성인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부자의 추종 거부에 계속 이어집니다. 바로 부자의 구원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요약하면 부자의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너무나 자연스런 반응이, “그렇다면 누가 구원 받을 수 있는가?”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다음 말씀이 우리에게는 희망이 원천이 됩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있어도 내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 주시는 회개의 은총으로 마음이 너그럽고 자비롭고 열려있어 재물을 아낌없이 나눌수 있는 부자라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고 우리는 가끔 이런 부자들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은총이요 선물임을 깨닫는다면,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함을 깨닫는다면, 저절로 나누고 겸손할 수 뿐이 없을 것입니다. 저절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응답뿐이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제1독서의 티로 임금은 참 교만합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의 교만에는 답이 없습니다. 하느님 없이는 회개도 겸손도, 찬미도 감사도 없습니다. 티로 임금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입니다.
“너는 마음이 교만하여, ‘나는 신이다. 신의 자리에, 바다 한가운데 앉아있다.’하고 말한다.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너는 무참한 죽음을 맞이하리라. 너는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져 죽음을 맞이하리라. 주 하느님의 말이다.”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 무지의 탐욕, 무지의 교만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이기보다는 자신의 무지로 인해 스스로 자초한 심판이라 함이 맞습니다. 주님은 '첫째가 꼴찌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에 한결같이 찬미와 감사로 응답하는 겸손한 삶이라면 그 삶 자체가 이미 구원의 축복이요 늘 첫째의 삶일 것입니다. 미래는 전혀 걱정 안해도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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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순례자와 나그네의 가난>
어제 복음에서 부자가 주님 추종에 실패하자 주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답하시는데 이 말씀을 들으면서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지금 가난한가?’ 성찰케 되었습니다.
저의 가난에 대해 성찰할 때 지금은 많이 무디어졌지만 옛날에는 집착 수준이었다고 할 정도로 무척 가난하려고 했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무척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난은 물질의 가난보다 아버지가 없는 가난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없으니 기가 꺾인, 아니, 기가 아예 죽은 가난이었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안 계시니 물질적으로도 가난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하루 세 끼를 먹은 것이 드물 정도로 늘 배가 고팠고, 시내 아이들은 도시락을 싸 와 밥을 먹을 때 슬쩍 나와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돈이 없어 등록금을 못 내는 것은 물론 미술 시간에 스케치북을 사 가지 못해 미술 시간마다 손바닥 열대를 맞고 때우는 서러운 가난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학생의 서러움을 이해하지 못하고 매를 대신 부잣집 딸 미술 선생님이 너무 원망스러웠고 지금도 그 선생님 이름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수도원에 들어와 프란치스칸 가난을 배운 다음에는 한편으로는 너무 행복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것은 고귀한 가난을 제가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가난은 내몰린 가난이었다면 이때의 가난은 제가 선택한 가난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보물을 나만 소유한 듯 제가 오히려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렇기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저는 가난에 너무도 집착했고 가난치 않은 사람을 무시하였으며, 저의 형제들에게는 왜 가난하지 않냐고 질책하고 더 가난해지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니 괴로워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저로 인해 괴로웠고 관계는 최악이 되어 괴로웠습니다.
그러다가 가난에 대한 집착과 영적인 교만이 그 원인임을 깨닫고 수련에 들어가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가난이 아니고 사랑임을 또한 깨달았습니다.
이후 저의 가난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랑의 가난이었으며 그래서 수련 마치고 올라오자마자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녔고, 그것은 선교 열망과 결합되면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의 가난 여정을 정리하면 내몰린 가난, 선택한 가난, 집착과 교만의 가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지금 그리고 앞으로 저의 가난은 어떤 것이어야 하고 어떤 것이 될까요?
제 생각에 순례자와 나그네의 가난이 되어야 하고 그런 가난이 될 것입니다. 어제 주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을 따라 하느님 나라로 가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도 순례자와 나그네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저세상 곧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도 순례자와 나그네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순례자와 나그네로서 이제 하나하나 다 내려놓아야 하고 내가 스스로 내려놓지 않아도 잃게 되고 내려놓게 될 것입니다.
건강부터 잃게 되고, 욕심은 말할 것도 없고 자그만 집착이나 애착도 하나하나 내려놓게 되고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순례자와 나그네의 이 가난이 우리가 마지못해 선택하는 가난이 되지 않고, 하느님 나라로 가는 즐거운 길에 기꺼이 선택하는 가난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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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마태 19,23)
<나눔의 사랑!>
오늘 복음(마태19,23-30)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인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에 대한 말씀과 '따름과 보상'에 대한 말씀입니다.
가진 것이 많은 부자에게 예수님께서,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난 다음에 와서 나를 따라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자,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소유하고 있는 많은 재물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3.24)
그리고 이어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는 이렇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태19,25)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무엇을 받겠습니까?"(마태 19,27)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9)
"그런데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30)
단순하게 '재산이 많은 사람들은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고 묵상됩니다. 왜냐하면 '재물 자체는 선이고 하느님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문제는 이 선과 하느님의 축복(은총)을 너와 나누지 않고 내 것으로만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칠죄종의 하나인 '탐욕(욕심)의 죄'입니다. 탐욕의 죄는 하느님의 자리에 재물이나 그 어떠한 것이 자리잡고 있는 '우상의 죄'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나눔의 사랑'을 실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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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 24)
내려놓아야
하느님께 다시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내려놓음이
구원의 시작이며
빛의 시작입니다.
우리 힘만으로
무엇인가를
하려 했던 교만을
내려놓을 때입니다.
내려놓아야
빠져나가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내려놓는 것이
주님께
맡기는 것이며
빠져나가는 진정한
출구가 됩니다.
내려놓아야 할
대상은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우리자신이 만든
감옥에서 빠져나와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욕심과 집착을
포기 못하는
우리들보다
순명하는
낙타가 오히려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려놓음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내려놓음이
가장 겸손된
소통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굴레와
사슬에서
벗어나는 길은
주님을 믿고
주님 앞에 이 모든 것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하느님께 내려놓는
사람입니다.
욕심과 걱정
미움과 아픔을 모두
하느님께 맡겨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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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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