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을 위한 해체론 - ② 죽음이 없다면 살아 있을 수조차 없다/ 철학박사 강신주
“나는 살아 있다!”라는 강렬한 의식은 과연 어느 때 생기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분명 죽을 상황인데도 죽지 않고 살아난 경우일 것입니다. 조금은 난해하고, 조금은 역설적인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난해함을 해소해 줄 또 다른 철학자가 우리 곁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해체주의자로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입니다. 그는 ‘차이(difference)’가 모든 것의 의미를 구성한다고 통찰했던 철학자였지요.
예를 들어 남자라는 개념을 생각해 보지요. 과연 여자라는 개념이 없다면 남자라는 개념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남자라는 개념에는 이미 ‘여자’라는 의미가 동시에 전제되어 있으니까 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 대해 누군가 “남자답다”라고 이야기한다면 이것은 그 사람이 “여자답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될 수 있지요.
남자 혹은 여자와 관련된 이런 논리를 데리다는 죽음과 삶에도 그대로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죽음과 삶은 서로 구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가 서로에 의존해 있다는 겁니다. 이제 직접 그의 말을 들어 보도록 하지요.
나의 죽음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발언하는 데 구조적으로 필수적이다. (……) “나는 살아 있다”라는 언표는 나의 죽어 있음을 수반하며, 그것의 가능성은 내가 죽어 있을 가능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거꾸로도 그렇다. 이것은 포E. A. Poe의 기이한 이야기가 아니라 언어의 평범한 이야기이다. 위에서 우리는 “나는 존재한다”에서 출발해서 “나는 죽을 자로 존재한다”에 이르렀던 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나는 죽어 있다”로부터 “나는 존재한다”를 이해하게 된다.
―《목소리와 현상(La voix et le Phénoméne)
데리다의 이야기가 어렵다면 ‘나는 살아 있다’는 말이나 생각이 어느 경우에 생기는지,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 그렇게 느끼는지 생각해 보세요. 우선 지진 같은 무서운 자연재해가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발생했다고 가정해 보지요. 대다수의 건물들이 붕괴되었으며, 그에 따라 화재가 도처에서 발생합니다.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이 죽겠지요. 이 상황에서, 한 사람이 운 좋게도 생존했습니다. 페허가 된 광경을 보면서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하겠지요. “나는 살아 있다!” 이럴 때 “나는 살아 있다”라는 표현에는 죽음이 글자 그대로 하나의 흔적처럼 새겨져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죽을 수도 있는 가능성, 혹은 자신이 용케도 벗어난 죽음에 대한 생각이 미리 전제되어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렇게 외칠 수도 없었을 테니까요.
우리는 사실 무의식적으로나마 이 같은 의미들을 이미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친구가 만약 전화로 “나는 살았어!”라고 말한다고 해 보세요. 이 말을 듣고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무슨 일이니? 도대체 너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아마 십중팔구 다급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응할 겁니다. 이런 다급한 반응의 이면에는 무엇이 전제되어 있는 걸까요? 우리는 이미 친구가 한때는 죽음과 삶의 기로에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다행히도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생존을 유지했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직감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 “나는 살았어!”라는 친구의 목소리를 듣고 누군가가 “넌 당연히 살아 있잖아. 그러니까 지금 나에게 전화를 걸 수 있는 거 아니야. 도대체 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 하고 대답한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떤 생각이 들 것 같나요? 아마도 대개의 경우 이 상대방 친구가 제정신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지 모릅니다.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강신주, 동녘, 201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