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온 인생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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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산속에 외딴집하나가 있다.
그집은 오갈때가없는 어느한가족이 산지기로 들어와 살고있는데.
그가족들은 무엇보다 한끼의 끼니와 처절한 생존의 전쟁을 치러야만하는
아주많이 가난한 대가족이였다.
학교....배움....맛있는것...좋은이쁜옷...생각조차할수없고 상상조차도할수없는
처지에 오로지 한끼의 식사가 가장 현안이였고 걱정이였다.
남들이 농사짓어서 수확을 하고나면 온가족은 이삭줍기에 목숨의사활을 걸어야했고
온동네의 고구마밭과 감자밭을 다뒤지며 한겨울을 대비하기위해 이삭줍기에
온가족의 생명을걸고 밤낮없이 이삭줍기에 온통 매달려야만했다.
그집과 그가족이 내어릴쩍의 나의집이였고 내부모형제였다.
국민학교를 온형제.자매가 다니긴했으나 등교하지못하는날이 더많았고
오나가나 앉으나서나 배고픔에 시달려야했던 나는 어린시절에 가난이란것에
한이되었고 배우지못한것이 가슴에 못이돼서
어린나이에 흘린 눈물에강은 저하늘에
은하수만큼이나 깊고넒은 눈물의강이되었다.
어린시절!
한참먹어야할 때에 배가고파 허기진배를 움켜지고 산과들로나가
머루...다래..깨금..버들강아지...나물...칡뿌리...아카시아꽃...
진달래꽃...찔레순...솔잎...소나무껍질...등등
그것들이 어린시절에 주식이였고 배고픔을 달랠수있었던 끼니였다.
아침에 고구마나 감자가 식사였고 그것도 한사람당 3개씩의 배당받아서
먹어야했다.
점심이란것은 알지도 못했고 점심이란것을 알게된건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게되었고 남들은 하루에 2끼가 아니라
3끼를 먹는다는것도 그때서야 알게되었다.
내가 국민학교5학년때였다.
나는 소년체전에 육상선수로 출전했으나
전전날부터 아무것도 먹지못한 나는 3000미터경주에서 완주하지못하고
경기도중에 육상그라운드에서 졸도하고말았다.
나의 학력은 국졸이 전부이다.
어린시절! 꿈도많고 이슬도많았던 나의꿈은
유명한 시인이되는것이 꿈이였고 그꿈을 아직도 버리지못하고 이젠...취미삼아
시를짓고 틈틈이 간직만하고있다
난. 국민학교를 졸업한 다음날 단돈.2030원을 가지고 가출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사회는 그리 호락호락 하지않했고
상상할수도없는 고통은 끝날줄 몰랐고 인간의 인내를
시험하는듯했고 늘 언제나 따라다니는 배고픔 내곁을 떠날줄 몰랐다.
농공장에 취업한 나는 스승으로부터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하루의눈을뜨면 걱정부터해야했다.
가장먼저 떠오르는것이 오늘은 무슨일로 무엇으로 얼마나
얻어 맞아야 하루를 무사히 보내나하는것이 걱정이였다.
스승은 내가 오갈곳이없다는 이유하나로 말끝마다 흉기로...주먹으로...
발로 무차별 때렸다.그래도 나는 도망칠수가 없었다.
기술은 최고였던 스승이였기에 그스승아래에서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최고의 기술자가 되고싶었다,그렇게 어린시절을 보내던나는
우연하게 어느한 신문을 보게됐다.
그신문에는 공무원채용공고의 안내문이 있었고 자격란에는 학력제한없음 이란것에
자신감을 갖고 나홀로 독학을 하기시작했다.
낮에는 공장에서 얻어 맞지며 기술을배우고 밤에는 홀로 공부를 시작했다.
내이름 석자도 한문으로 알지못하는나는 그추운한겨울의 엄동설안에서도
반바지와반티만을입고서 농속에서 웅크리고 공부했다.
그렇게 노력한지 5년이 흘러 내나이가 공무원시험에 응시할수있는 나이가됐다.
나는 기대하지않고 공무원시험이 어느정도의 수준인가하고
경험삼아 공무원의시험이 난이도가 어느정도인지를 알기위해서
시험에 원서를내고 시험을 보았다.그런데 단한번에 응시로 당당하게도
국가공무원이 되었고 9급기능직이지만 긍지와보람을갖고서 근무를했다.
그것도 기쁨소식.슬픔소식를 전해주는 집배원이였다.
우체부아저씨가 아니라 우체부총각으로 산넘어 외딴집도가고 물건너 두집매도가고
논뚜렁 밭뚜렁길따라 산속오솔길도가고 구석구석를 소식을들고 다니던중에
어느한 겨울이 시작됐다.그해겨울은 참으로 눈이 참많이왔다.
시골산길을 내려오던중에 그만 절벽아래로 떨어져 사경을 헤매이는
크나큰 사고로 병원에서 6개월이란 시간을 보내고서야 퇴원했지만 형편이 너무도
어려운 처지인지라 쉴수가없어 곧바로다시 우체국에 복귀하여 근무를하던중에 담당하던
시골동네에서 아름다운 한아가씨와 사랑에 빠졌다.
지금에 내사랑하는 아내가된 그아가씨!
천년묵은 내사랑 독한 여우다.내게 참많은 힘이돼주는 아내이다.
물론 지금도 내가 유일하게 의지하고 기대고 쉴수있는 포근한 아내이다.
아내를 고생시킨 지난날을 생각하면 애리한 비수가되어 아픔이
밀물처럼 밀려와 한밤중에 남몰래 많이운다
나이는 나와같이 동갑인데 때론 친구처럼 대해주기도한다.
우리부부는 아들과 딸을두고서 가족계획을했다.
아들녀석은 완전히 나를 꼭 닮았다.아주 멋지고 귀엽고 훗날에 한가닥은 할놈이였다
그러나 아마도 나는 전생에 많은 죄가있나보다.
내행복의전부였던 내자식하나가 내곁을 먼저 떠나갔다.
아들녀석이 뺑소니교통사고로 그만 우리곁을 떠나가고말았다.
아내와나는 기나긴세월을 고통속에 헤어날수가없었다.
잠을잘수가없었고 어떤것도 먹을수가 없었다.
범인을 찿아나선지 몇개월이 흘렀지만 도무지 찿을길이없었다.
직장도 그만두고 밤낮없이 범인만 잡기위해 나는 미쳐있었다.
있는돈 없는돈모두 탕진했다.그러는동안에 우리가정은 거의 파탄에 이르었고 또다시
끼니걱정에 집세도 못내는 거지가됐고 결국엔 거리로 내몰렸다.
우린 굶기를 밥먹다시피했다.거리로 내몰린 우리가족은
이친구집으로 저친구집으로 전전하며 인생을 포기할 생각도 없지는않았다.
그러나 우리에겐 남아있는 딸아이가있어 슬픔에만 잠겨있을수가없었다.
할수없이 나는 다시 우체국에 복귀를하여 이를 악물고 낮에는 편지를 배달하며
우체국에서 열심히 근무를하고 저녁과밤으로 장사를했다,
아줌마~~엑스포공식과일!!!
이쁜 아줌씨는 하나더~~~~목이 터져라 외치고 상인들과도
살벌한 싸움도하며 가난이란 울타리를
벗어나고싶은 마음엔 아무것도 없었다.길바닥에서 과일장사도하고
아르바이트도 아무거나하며 오로지 가난에서 벗어나고싶은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비온뒤에 땅이 더욱 굳어진다고했던가?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격은나는 모진비바람속에서도 두눈을 똑바로뜨고서 앞만보며 뛰고뛰었다.
남들은 배불리먹고 집에서 가족들과함께 행복한 웃음소리내며
행복이란것을 맛볼때 나는 물집잡힌 발바닥의고통에 쓰라린 쓴맛으로 훗날을 기약하며
한겨울에도 땀으로 뒤범벅되어 새벽에 겨우 집에
들어와 허리를 필수가있었다.우체국보험 이란것이있다.
나는무려 우체국보험을 15년연속으로 1등을했다.
우체국에 근무를하면서 우체국보험을 모집하는것인데 모집하면 수당이 나온다.
나는 그수당을 벌기위해 휴일도없이 근무했다.
편지배달하면서 보험모집하며.수금도하며 고객관리도하면서 과일도팔며 근무하는것이였다.
내가속한 직원들의수는 무려2800명중에서15년연속으로 보험모집왕을 차지하며
고객관리대상을 역시 15년연속으로 1위을했다.
이렇게 노력한결과로 우체국생활 20여년만에 작은땅도사고 내집마련도했고
크지는않지만 아파트에서 행복함을 맛보며 지금에 늦둥이 딸아이를
다시 복원수술로낳아서 행복를 누리고있었다.
그러나 이제것 지금까지의 내가 살아온 인생의길은 평탄한것이고
지극히 행복한 삶이였다.바로 다쳐온 나의 삶은 참담하기가
이를때가없고 황당하고 견딜수없는 고통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같은 삶을 파란만장한 삶이라했던가?
인생! 삶!.....
그누구도 한치의앞을 장담해서는 아니될것이다.
함부로 인생에대하여 논하지말라고 나는 말하고싶다.
아무리 자신에 인생이고 삶이지만 인생의팔자!!
자신인생!!.. 어떻게 진행될지 상상이나 예측하지말라고 나는 분명히 말하고싶다.
1998년부터 2002년8월까지는 나에겐 너무나도 힘든 세월이였고
이세월의 4년이란 가혹하다못해 인간의한계를 정말 시험하는것이였다.
나는 예전에 사고로 다친곳이 재발되어 우체국을 그만두고
연금을 사업의자금으로 쓰기위해 일시불로 신청하여 퇴직금으로받아
가든을 시작하게된다.그땐. 가족과함께 먹고살기만하면 된다는생각밖엔
큰돈을 벌을려고 욕심낸건 아니였다.그동안 피땀흘려서 모은전재산을
투자하여 대전유성에다가 땅을사고 건물을짓고 야외시설도 멋지게 꾸미고
화려하게 가든을 차려서 사업에 뛰어들어 종업원을 23명이나두고 사업에 몰두했다.
내땅에 내건물에 모든것이 내것이니 아낌없이 투자를하여 화려한가든을
만들었고 하루매출도 엄청났다.순수익만해도 하루에 200백만원이
넘었고 주말은 순수익이 500백만원이나 되는 큰기업의가든이였다.
나는 이제는 성공했다고 생각했고 매월 순수익에 절반은 내어릴쩍
가난에 시달린게 한이되어 가난한이웃들과 함께 나누어 섰다.
학교에도 학용품을 매월 전달했고 소년.소녀가장들과 할머니.할아버지만
생활하시는분들과 함께 나누고 정도키워가 더없는 행복함으로 성공했었다.
나머지 절반은 내가든의 시설에 계속해서 분위기시설에 투자를했고 그동안
내가힘들고 어려웠을때 신세를졌던 친구들한테도 보답을 나름데로했다.
그러면서도 돈을 욕심 부리지는않했고 돈이란 앞으로 열심히
장사해서 벌면된다고 생각했고 종업원들에게도 월급외에 성과금을매달 지급을했다.
월급외에 기분최고수당이란 명목으로 월급외에 별도로 매월 지급했다.
그러던 97년가을.......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내친한친구가
공장을 늘린다고 금융보증을 서달라고 하기에 이세상에 독불장군이 어디있는가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보증을 썼다.4억6천만원짜리 담보보증을.........
이게 잘못된것이다.1998년에 아무도 몰랐던 아엠에프사태가 터진것이다.
남들은 버티지못하고 모두 쓰러지고 부도를내고 하지만.
나는 그럭저럭 유지하는정도의 장사가 되는데. 친구는 하루아침에 몰락하고만것이다,
이친구는 끝까지 나에게 말하지않고서 자신이 해결하려한게 잘못된
결정적계기가 된것이다.최고장 한통 받지못한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해결할수가
도저히없는 상황까지 몰린 친구의 울음앞에서 하늘이 무너지는걸
나는 보았고 느꼈고......참담했다.해결할 시간조차 여유가없을때까지
진행시킨 친구가 그땐 죽이고싶을정도로 미웠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내가 알고난 이후 곧바로 경매에 넘어갔다 내땅..내가든...내아파트..모두다...
하루아침에 또다시 거리로 내몰린 우리가족은 도저히 챙피해서
대전에서는 살수가없었고 그곳이 죽기보다도 싫었다.
아는사람들을 보기도싫었고 만나기도 싫었다.우리가족은 야밤도주를했다.
개인적인빛은 한푼도없었으나 챙피하고 왠지모르게 그곳이 싫었다.
하루아침에 몰락! 격어보지못한 사람들은 상상할수도 없을것이다.
야밤도주를 하긴했는데 어디로가야하나? 어떻게해야하나?
가진돈이라곤 잔돈까지해야 64만원이 전부이다.
딸아이의 학교는 어떻게하고 정말 미칠것같았다.
이곳저곳 아무데로 바람따라 구름따라 온가족이 노숙생활4개월!
노숙자로 온가족이 전락하고 가진돈도 다떨어지고 오갈곳이 없다..
나는 아내와 합의했다.온가족이 동반자살하기로.....
그때 큰딸아이가 눈치를채고 울먹이며 살고싶다고 애원하며
피덩이동생을 끌어안고 한없이 눈물만 흘리는데 도저히 그렇게할수는 없었다.
나는 죽을정신으로 다시한번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가족을 여인숙방에다 놓고서 농수산물시장으로 무조건갔다.
농수산물시장에서 배추시레기와 먹을만한것인데 버리는건 모조리
주워모아 탕집식당으로 가지고 다니며 팔았다.
몇칠을 그렇게했더니만 농수산물시장에 장사하는 상인들을
몇명은 사귈수도 있었고 그중에 한명으로부터 야채장사를 같이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자신이 차와물건을 댈테니
나보고 단골식당거래처를 만들수가 있겠느냐고 했다.
나는 기회인데 거절할 이유가없고 얼마든지 자신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사람과나는 차를타고서 야채장사를 시작하여
월셋방을 얻어서 다시일어날수있는 계기를 마련했으나
큰딸아이의 학교문제가 가장 큰문제였다.큰아이만 퇴거를하여 학교를
보내기로하고 퇴거를했는데 그것이 추적이되어 내가있는곳이
금융채권해결단에게 발각이됐다.모든재산이 몽땅다 날라가고도 금융에 빛이 남았있었다.
기회를 달라고 애원하고 통사정하여 매달 얼마씩 갚아나가기로하고 한숨돌렸다.
그러나 내입장에서는 장사할수있는 자금부터 모아야만했다.
우리부부에겐 밤낮이없다.그렇게 98년과99년을 보내고나니
조그만한 식당을 얻을수가있어서 다시 월세식당을 시작했다.
아내와 단둘이서 새벽6시부터 새벽2시까지 무조건 영업을했다.
아내는 하루가 멀다고 쓰러지고 코피를 매일매일 쏟았다.
2000년을 그렇게 정신없이 장사하여 재기할수있나보다 했더니만
장사가 좀 잘되니깐. 주인이 나가란다.자신이 하겠다고 비우라하니
또다시 어디로 가야한단말인가?사정하고 애원했지만 소용이없어
청주로 내려왔다.그러나. 청주로 내려와서
아무리 노력해도 청주의경기가 워낙에 바닥이라서 너무도 힘든나머지
그만 갖고있던 몇푼마져 다까먹고 버틸수있는힘이 이젠없다.
다시 꺼꾸러지는 느낌에 몇개월동안을 잠못이루고
먹지도못하였더니 내가 불치의병에 걸리고만것이다.
신경성 급성 당뇨라는 아주 무서운 병이다.걸린지 불과 28일만에 치아가무려
17개나 자연적으로 빠지고 눈시력이 떨어져서 아내도 거리가
조금만있어도 알아볼수없고 혈액순환이 안되다보니 온몸에 쥐가자주나고
빈혈로인하여 기절졸도를 수십번을하고 배고픔과 갈증으로 인하여서
잠을 이룰수가없어 고통스러웠다.왜그렇게도 온몸이 가려운지...
너무가려워서 손으로 글거버리면 글은곳에서 단물이나와 온통온몸에는
솔개미와해충들이 내살이보이지 않을만큼 달라붙었고 아내는 울면서 모기약인
홈키파로 뿌려죽이곤했다 밥을먹을려고할땐 손이떨려 국물같은건
아내가 먹여줘야했고 건데기는 이가없어 먹을수없으니 참괴로운 나날에 차라리
아무도몰래 죽고싶은 심정밖엔 없었다
한많은 인생....서럽고 원통하여 남몰래 울기도
참많이 울었고 너무도 견딜수없어 인생을 포기하려한 순간도 수십번
그순간마다 눈에 발히는 내새끼 내자식들...
살아가자니 희망도...여력도...의지도...건강도없다
그때 희망이란 작고 희미한불빛이 내곁으로 찿아왔다
희망이란것이 그토록 소중하고 귀중하다는것을 새삼 일깨워주는 순간이였다.
희망!!!
희망이없는 삶!...인생은 참으로 가혹하며
참으로 불쌍하다는걸 난 안다.
난 사후세계도 6번이나 갔다왔고
마음이 약해서인지 매일 악몽에 시달렸다
그러는 나에게 운명에 장난인가?...아니면 내가 이렇게 살아가야할 삶인가?
희망이 전혀 보이지않던 나에게 이른아침 붉은 해가 힘차게 떠오르듯이
희망이 생기고 행복이란맛을 참오래만에 맛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있다.
당뇨병도 1년여만에 완치되었고 눈시력도 되찿아 정상이되고
너무나 행복하다 희망도 그어느때보다 크고 확실하게
생겨서 생기가 돈다 내가 이런 말들을 왜 하고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하고싶고 이젠 내가슴속에서 하나하나 꺼내어 세상밖으로 버리고싶다
이젠 나에게도 행복이 있겠지......
이젠 나에게도 희망은 있겠지.....
이젠 나에게도 웃음은 있겠지...
이젠 나도 아프지는 않겠지....
이젠 밤마다 사후세계를 가지않해도 편안하게 밤을 보낼수있겠지......
이젠 진정한 성공자가 되겠지.....
카페 게시글
*06*커피향기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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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어떤분의 인생보고서............
장미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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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2.16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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