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속담이 있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상대방을 조금 건드렸다가
오히려 크게 앙갚음을 당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요즘 말로 하면 역관광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다.
비슷한 의미의 속담으로 가는 방망이 오는 홍두깨가 있다.
되로 주고 말로 받기 전에 애초에 되를 주지 않는 것이다.
되는 현대 도량형으로 약 1.8리터에 해당하고
말은 그보다 10배인 18리터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남에게 조금의 손해를 끼친 것이
역으로 자신에게 더 큰 손해로 돌아올 때 이 속담을 쓰는 것이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긍정적 의미를 실험했다.
실험은 두 가지 조건의 상황에서 실시됐다.
참여한 두 명은 같은 그림을 감상하고 평가하도록 요청받는다.
처음 그림을 감상하러 온 피실험자에게는
따뜻한 원두커피를 주면서 그림을 감상하게 했고
두 번째 피실험자에게는 아무런 호의를 베풀지 않은 채 그림을 감상하게 했다.
실험이 끝나기 전 원두커피를 준 사람이
두 명의 사람에게 각각 다음과 같은 부탁을 했다.
자선 모금을 위하여 자선 티켓을 팔고 있는데
가장 많이 자선 티켓을 산 사람에게 100만 원의 상금을 준다.
자선 티켓 가격이 5000원인데 몇 장 사주지 않겠습니까?
이 실험은 제시된 두 가지 상황에 따라
피실험자가 몇 장의 자선 티켓을 구입할 것인가에 관심이 집중됐다.
실험 결과 원두커피를 주며 작은 호의를 베풀었던 피실험자가
그렇지 않은 피실험자 보다 무려 2배나 많은 티켓을 구입했다.
상대를 빚지게 하면 더 많은 대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결과였다.
이러한 마케팅 방식을 상호성의 법칙이라 한다.
상대방을 일종의 빚진 상태로 만들어 놓아
정상적인 상태에서도 도저히 거절할 수 없게 만든다.
주는 작용은 받는 반작용을 만들어 내
상대가 준 것과 똑같거나 더 이상을 베풀어 준다는 의미다.
가장 힘든 경우는 사람과의 관계에 금이 갔을 때다.
사람과의 트러블은 그야말로 사람을 지치게 한다.
한번 틀어진 관계는 쉽사리 호전되지 않는다.
하지만 화를 내면 그 이후 더 심한 화가 찾아온다.
화를 내다보면 상대의 인성까지 들먹일 때가 있는데
그것은 상대의 마음에 비수를 꽂기도 하고
돌이킬 수 없는 파경을 맞는 원인이 된다.
스트레스를 받으니 상대에 대한 얄미움이
치밀어 오를라치면 참는 것도 한두 번이지
결국 마침표를 찍고 싶을 때가 있다.
과감히 마침표를 찍어야 관계가 끝난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고
메아리도 산이 있어야 되돌아오는 법인데
내게 전혀 문제가 없다면 그것은 내가 없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가끔은 존재 그 자체가 이유인 경우도 있지 않던가!
이처럼 누군가와의 불협화음이 있을 때
어찌해야 다시 평온을 찾을 수 있을까?
어떤 이는 상대의 같잖은 행동에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이자까지 쳐 되돌려주는 악수를 택한다.
무시란 사물의 존재 의의나 가치를
알아주지 아니하거나 깔보거나 업신여김이다.
어떤 사안에 대해 화는 나는데 뭐라 응대할라치면
그와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서
욕을 먹는 것보다 더 치욕적인 것이 무시라는 말도 있듯이
너도 느껴보고, 나도 느껴봤듯 그 모욕감은 대단하다.
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상대의 무시하는 태도에
어떻게 맞서 화를 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화를 내자니 무시당하는 것 같고 안 내자니
무시한 사람의 이유 모를 입꼬리 올라감이 영 눈꼴사나워 못 봐주겠다.
무시라는 것은 실로 위력적이다.
그럼에도 어떠한 무시도 정당화될 순 없다.
무시하면 무시가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랑하면 사랑이 되돌아오고
미워하면 미움이 되돌아오듯 무시도
인간관계에 기인하여 되돌아오는 것은 당연하다.
무시는 자기 내면에 별다른 대안이 없는
막다른 낭떠러지에서만 쓰길 권고한다.
무시는 이처럼 깊은 생각을 한 연후에야 내릴 수 있는 태도이지
단순 감정에 대한 즉흥적인 태도가 될 수 없다.
무시할 자신이 있을 때 비로소 무시의 쓸모는 존재한다.
살면서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과오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걸 아직도 모르니 오늘도 괴롭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