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미 데들리
원제 : Kiss Me Deadly
1955년 미국영화
감독 : 로버트 알드리치
원작 : 미키 스필레인
주제곡 : 냇 킹 콜
출연 : 랄프 미커, 맥신 쿠퍼, 개비 로저스
웨슬리 에디, 클로리스 리치먼, 폴 스튜어트
후아노 헤르난데스, 미리암 카
'키스 미 데들리'는 1955년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이 만든 하드보이드 필름느와르 입니다. 스타배우들의 즐비했던 50년대였지만 유명한 배우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작품입니다. 그래서인지 할리우드 영화가 꽤 많이 수입되던 50년대였음에도 국내에 개봉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배우 외에 다른 요소들을 살펴보면 놓칠 수 없는 흑백 고전입니다.
우선 감독 로버트 알드리치가 범상치 않은 인물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아파치' '베라크루즈' '텍사스의 4인' '특공대작전' '공격' 등 선이 굵고 마초적인 영화위주로 개봉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정도 특징만으로 평가받을 감독은 아닙니다. 굉장히 난폭하고 불안정하고 혼돈스런 심리나 공황을 묘사하는데 꽤 일가견이 있는 감독으로 그런 성향을 거칠고 강한 마초적 남성이 등장하는 서부극이나 전쟁영화에도 많이 활용했지만 혼돈스런 범죄나 미스테리 영화에서도 기막히게 활용했습니다.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허쉬 허쉬 스위트 샬롯' 같은 혼란스런 여주인공을 내세운 섬세한 폭력 범죄물, '낙엽' 같은 심리 멜러물 등의 영화에서 그런 연출이 돋보인 부분이지요. 즉 마초적 성향을 가졌지만 여성적 섬세함을 바탕으로 한 폭력성과 히스테릭도 잘 활용했습니다.
'키스 미 데들리'는 로버트 알드리치의 초기 수작인데 하드보일드 추리작가인 미키 스필레인의 원작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미키 스필레인의 작품속에 등장하는 속물 탐정 마이크 해머 캐릭터가 등장하는 몇 편의 영화중 하나지요. (우리나라에 개봉되었던 '아이, 더 주리'라는 영화가 바로 마이크 해머 캐릭터가 등장한 작품입니다.) 마이크 해머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우와 비교되는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비슷한 시대에 인기를 끌었던 하드보일드 탐정물의 주인공이었고 정의구현 탐정이 아니라 이혼전문 탐정으로 세속적이고 폭력적인 인물이지요. 실력파 감독, 유명 소설 작가 원작의 필름느와르인 '키스 미 데들리'는 마로니에 북스의 '죽기전에 꼭 봐야 할 1001편의 영화'에도 선정된 작품입니다. 오프닝 타이틀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방식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거꾸로 등장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뭔가 뒤틀린 영화라는 것을 오프닝부터 암시해 줍니다. 이때 흐르는 타이틀곡이 냇 킹 콜이 부르는 감미로운 주제곡입니다. 그 감미로운 냇 킹 콜의 목소리와 함께 두려움에 떠는 여인의 신음소리가 겹쳐집니다. (이 오프닝 만으로 이미 게임 끝 이네요)
한밤중의 도로
뭔가에 쫓기는 의문의 여인
보통 이렇게 시작하는 영화라면 우연히 만난
두 남녀가 함께 생사고락을 갖이 하며 사랑에
빠지는 내용을 예상하는데 보기 좋게 빗나간다.
고문당하는 여성의 하체와 비명소리로 표현한
잔혹한 폭력의 묘사
시작부터 흥미진진 합니다. 밤 깊은 도로, 맨발에 트렌치코트만 걸친 여성이 뭔가 겁에 질린듯 도로에 서서 지나가는 차를 세웁니다. 여인을 보고 급정거간 자동차, 운전자는 겁에 질린 여인을 태워주고 달리는데 중간에 정비소에 들린 사이 여인은 정비소 직원에게 뭔가 편지를 전해줍니다. 자기 이름이 크리스티나 라고 밝힌 여인, 그녀는 버스 정류장에 내려달라고 부탁하고 만약 버스 정류장까지 도달하지 못한다면 자기를 기억해달라는 미스테리한 말을 남깁니다.(Remember me) 그 말이 끝나자 갑자기 괴한들이 등장하여 차를 멈추게 하고 운전자는 정신을 잃고 쓰러집니다. 이후 희미하게 정신을 차려보니 옷이 벗겨진 채 고문을 당하는 크리스티나의 비명 소리가 들립니다. 몽롱한 상태에서 크리스티나와 운전자가 탄 자동차는 가파른 길로 떠밀려집니다.
우연히 도로에서 한 여인을 태웠다가 죽을 뻔한 남자, 보통 이런 경우를 당하면 당황하고 겁에 질리기 마련이고, 경찰의 도움을 받거나 할텐데 그 차의 운전자가 바로 탐정인 마이크 해머(랄프 미커) 였습니다. 마이크는 이혼관련 전문 탐정으로 도덕적인 인물이 아니라 비서이자 정부인 벨라를 이용하여 남자측에 접근시키고 자신은 여자측에 접근하여 앙쪽에서 두둑한 실리를 취하는 속물적 인물입니다. 또한 싸움을 잘하고 제법 폭력적인 인물입니다. 그런 캐릭터이다 보니 마이크는 오히려 경찰을 따돌리고 자신이 스스로 이 미스테리한 사건의 배후와 원인을 조사합니다. 영화의 주요 내용은 죽을 뻔 했다가 겨우 살아난 마이크가 자신이 태워주었던 크리스티나라는 여인과 관련된 사건을 면밀히 추적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러 다니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실마리가 실타래가 되고 노끈이 되고 밧줄이 되어가듯이 그는 사소한 단서와 주변 인물을 찾아서 쑤시고 다닙니다. 그런 와중에 협박 전화가 걸려오기도 하고 수상한 사람들이 어슬렁거리고 킬러의 습격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주변인물이 피해를 당합니다. 그런데 마이크는 마치 007 제임스 본드라도 된 듯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것을 즐기는 듯 하고 악당의 소굴에도 들어가서 처음 만난 여인과 감미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사람을 때려눕히기도 하고 자신도 위기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 와중에 이미 죽은 크리스티나 외에도 관련 인물들 상당수가 하나 하나 죽어 나갑니다.
50년대의 자동 응답 전화기
벽면의 거대한 녹음기가 흥미롭다.
은근 여성편력이 있는 주인공 마이크 해머
50년대라는 검열이 강한 시대적 상황에서
묘사할 수 있는 폭력이 자주 등장함.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로 관객의 궁금증을 자아낸 영화는 이후 대체 크리스티나가 남긴 '날 기억해줘요'라는 말의 의미가 뭘까로 흘러가다가 다시 크리스티나가 알고 있는 물건의 정체는 무엇일까로 흐르고, 결국 비밀의 상자로까지 이어집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관객에게 크리스티나의 탈출과 죽음과 관련된 사건에서 뭔가 시원한 이유와 결말을 기대하게 만드는 건 일종의 맥거핀 입니다. 영화의 주된 목적은 마이크 라는 탐정이 벌이는 매우 위험한, 그리고 매우 미스테리한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의 벌어지는 모험에 대한 재미입니다. 경찰도 쫓고, 악당도 쫓고, 마이크도 쫓는 그 비밀에 대한 각축전, 그건 결국 비밀의 상자였는데 그 비밀의 상자가 대체 뭔지는 상세히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그게 세상의 종말을 고할 수 있는 '핵무기' 같는 암시를 주고 있지요. 상자의 실체는 그래서 비현실적입니다. 그냥 열어서는 안되는 굉장히 위험하고 두려운 존재인거죠. 그럼 뭐가 생각나나요? 바로 신화속의 '판도라의 상자' 입니다. 후반부에 판도라가 실제로 언급이 되기도 하고 뭔가 냉전시대의 동구권 스파이처럼 은유되는 소베린 박사의 존재 등, 사실상 은유와 암시로 가득한 내용을 미스테리한 필름 느와르의 형식을 빌어서 하드보일드 범죄물처럼 전개한 것입니다. 그래서 열린 결말처럼 끝납니다.
이 장면에서 제임스 본드가 연상됨
악당의 소굴에 방문한 주인공이 처음 만난
여성과 키스하고 친해지는 장면
해안가에서의 폭력 장면이 제법
박진감이 있다.
구체적이고 시원한 해답을 원한 관객이라면 맥이 빠질 수도 있지만 수수께끼 풀기가 목적이 아닌 그 풀어가는 과정속에서 벌어지는 음모, 살인, 위기, 탐욕 등의 묘미를 위한 영화입니다. 쫓기는 피해자가 되어야 할 주인공이 오히려 사건을 쫓는 추적자로 설정되는 부분도 꽤 특이한 구성입니다. 관객에게는 끝까지 맥거핀을 쫓게 만드는 셈인데 지나친 탐욕이 부를 화에 대한 경고와 재앙이 암시되는 결말이지요.
주인공이 제임스 본드 흉내를 낸다고 언급했는데 제목처럼 마이크는 이곳저곳 들쑤시는 과정에서 몇 명의 여성을 만나고 그들과 감미로운 키스를 나눕니다. 비서인 벨라와도 마찬가지지만 크리스티나의 룸메이트라는 릴리 카버라는 여성, 악당의 본거지 역할을 하는 호화로운 장소에서 만난 프라이데이라는 여성과 뜨금없이 키스를 탐닉하는 장면도 독특합니다. 영화의 결말만 보면 마치 오손 웰즈 감독의 '심판'이 연상되는데 사실 엔딩장면뿐만 아니라 영화의 전개방식 자체가 '심판'과 많이 유사합니다.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미스테리하지만 명확한 결말을 목적으로 한 내용이 아니라는 점. '심판'에서의 안소니 퍼킨즈는 아리송한 상황에 직면한 피해자 역할이었지만 마이크 해머는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고 자신이 비밀을 독차지하려는 듯한 추적자라는 점이 다르죠.
필름 느와르 장르는 1941년 '말타의 매'에서 1958년 '악의 손길'까지가 전성기였는데 그 시대에 가장 활성화되었고 인기가 있었던 장르입니다. 수준높은 작품도 많고. 흑백 4:3 비율 화면이 더 분위기가 사는 장르인데 '키스 미 데들리'는 1955년 작품이라는 영향때문에 1.85 : 1 인 비스타비전 비율입니다. 그럼에도 흑백화면속에서 벌어지는 기묘하고 폭려적인 분위기, 세트보다는 로케촬영이 많고 저예산 분위기의 미스테리한 내용 등 필름 느와르 영화의 전형적 특징이 물씬합니다. 직전 두 작품에서 버트 랭커스터, 게리 쿠퍼 등 유명배우들을 캐스팅했던 로버트 알드리치는 이번에는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 위주로 구성했고, 마이크 해머 외에는 두드러지게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없고 그 대신에 적당히 비중이 있는 조연들이 대거 등장하는 복잡한 내용입니다.
실마리로 밧줄을 찾듯이 돌고 돌아 결국
비밀의 상자까지 오게 된 결말.
결론은 '판도라의 상자'?
로버트 알드리치의 이 작품이 워낙 여러가지 은유와 상징으로 구성된 독특한 작품이어서 그런지 오히려 후대에 리메이크하기 좋은 소재임에도 다시 만들어지지 않았습입니다. 시대적인 한계 때문에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부분을 80-90년대라면 더 용이하게 표현했을텐데. 평단에서 필름 느와르 수작으로 꽤 평가받는 작품이고, 비교적 단순한 필름 느와르 영화들과 비교할 때 매우 아리송하고 복잡한 듯한 내용이지만 그게 맥거핀이라는 걸 인식하고 보면 장면 장면을 즐겁고 긴박하게 볼 수 있는 흥미진진한 작품입니다.
ps1 : 50년대에도 자동응답 무선전화기가 있었네요. 벽면에 지금 TV 만큼이나 큰 녹음 테잎이 부착되어 있는 방식입니다.
ps2 : 주인공 마이크 해머의 속물적이고 세속적인 부분은 그가 몰고다니는 고급 차를 통해서 표현되기도 합니다.
ps3: 마이크가 위기에 빠졌을때 바다로 가려는 장면이 두 번 나오는데 마치 바다 라는 곳이 위험에서 대피할 수 있는, 혹은 혼란스러움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장 넓은 장소라는 상징이 묘사된 느낌입니다.
ps4 : 지나친 탐욕과 죄악으로 인한 멸망에 대한 은유를 이야기했는데 로버트 알드리치가 1962년 '소돔과 고모라' 를 연출한게 우연이 아닌 셈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상자를 열면서 판도라를 언급한 부분은 마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예고적 경고처럼 느껴지지요.
ps5 : 뭔가 알 수 없는 위험을 겪은 탐정 주인공이 경찰에서 자신이 당한 사건에 대한 취조를 받는 초반부를 보면 필립 말로우 캐릭터를 사용한 영화 '살인, 내 사랑'과 많이 유사해 보입니다.
ps6 : 비밀을 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살리려는게 아니라 죽이려고 하는 설정은 좀 앞뒤가 안맞는 느낌입니다.
ps7 : 마지막 장면의 설정과 구성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레이더스'의 후반부에서 많이 참고를 한 것이 아닐까 싶네요. 상자를 열면 큰일난다... 라는 구성의 원조를 가져온 셈이죠. 사실 '레이더스'는 이곳저곳에 은근 고전영화에 대한 장면 베끼기가 있는 작품입니다. 복싱영화 '육체와 영혼'에서 상처난 부위 이곳저곳에 키스하는 장면도 가져왔고, 오프닝에 거대한 바위에 쫓겨 도망가는 장면은 50년대 SF영화 '지저탐험'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출처] 키스 미 데들리(Kiss Me Deadly, 55년) 하드보일드 필름 느와르 수작|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