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분데스리가가 전성기를 달리던 시절, 리그 최강을 노리던 프랑크푸르트는 선수 보강 차원에서 많은 선수를 영입했다. 독일 2부리그에서 프로로 데뷔했던 로테르만 강사는 1979년 프랑크푸르트로 영입됐다. 흥미로운 사실은 같은 해 '갈색 폭격기' 차범근 역시 프랑크푸르트로 이적했다는 것. 로테르만 강사는 이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차범근을 처음 본 것은 시즌이 시작하기 전 훈련할 때였다. 그는 분데스리가의 유일한 한국 선수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의 진가를 알아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단지 몇 번의 연습경기를 함께 해보고는 이 선수는 우리 팀의 다이아몬드라고 생각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에는 1974년 서독 월드컵 독일 우승의 주역이었던 그라보브스키, 휄첸바인 그리고 니켈, 노이베르거 등 유명한 선수들이 많았다. 그러나 차범근은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다는 것이 로테르만의 기억이다.
"우리 팀은 많은 숏패스와 원터치 패스를 주로 사용하며 경기를 펼쳤다. 따라서 모든 선수들이 많이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차범근이 공을 잡으면 다른 선수들이 많이 움직이지 않아도 됐다. 그가 공을 잡으면 수비수 3,4명을 혼자서 뚫어내며 경기를 펼쳤다."
프랑크푸르트 시절 포칼컵(독일 FA컵)을 들어 올리는 차범근 ⓒ 프랑크푸르트 구단
"다른 선수가 공을 잡고 공격을 하려고 하면 그 선수 주변으로 이동해서 패스를 받아줘야 했는데 차범근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좁은 공간에서 경기하는 것은 그라보브스키와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돌파력이나 스피드 등은 차범근이 훨씬 나았다. 차범근에게 패스를 할 때에는 단지 넓은 공간으로 공을 차주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됐기 때문이다."
차범근의 이러한 활약상은 경이적인 기록으로 남았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소속으로 뛴 첫 경기에서 독일 '키커'지로부터 베스트 11에 선정됐다. 세 번째 경기인 슈투트가르트전에서 데뷔골이자 결승골을 기록한 차범근은 '이번주의 골' 주인공으로 선정됐으며, 바이에른 뮌헨과의 네 번째 경기 그리고 보루시아 MG와의 다섯 번째 경기에서도 연속골을 기록했다. 이때부터 '키커'지는 '차붐(Cha Bum)'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갈색 폭격기(Brown Bomber)'라는 별명도 이때 알려지기 시작했다.
"차범근은 굉장히 좋은 선수였다. 그는 체격이 뛰어났고 힘도 매우 좋은 선수였다. 헤딩을 아주 잘했고 스피드도 단연 발군이었다. 기술 역시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있었다. 그는 좋은 팀을 더욱 좋게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축구에는 기록과 골밖에 남지 않는다. 기록만을 보더라도 차범근은 뛰어난 선수였지만 단지 그의 능력이 기록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의 기록은 그가 보여줬던 능력을 모두 반영하지 못한다. 그와 함께 뛰는 것은 우리 팀의 모든 선수들에게조차 큰 도전이었다."
또한 로테르만 강사는 차범근과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차범근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에게서 나는 마늘 냄새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웃음) 그의 방에라도 들어가면 마늘 냄새가 진동을 해서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의 마늘 냄새는 경기장에서조차 맡을 수 있었다. 그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 힘들 정도였다.(웃음)"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차범근과 친해지자 우리는 마늘 냄새에 대해서 직접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의 마늘 냄새는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차범근을 '미스터 갈릭'이라고 놀렸다. 결국 마늘 냄새는 시간이 많이 지난 다음에야 없어졌다.(웃음)"
로테르만 강사는 이를 설명하면서 아직도 그 냄새가 생생한지 코를 움켜잡거나 손바람을 일으키는 등 당시의 마늘 냄새를 웃음과 함께 몸으로 설명했다.
차범근과 관련된 화제가 다시 프랑크푸르트에 관한 이야기로 바뀌자 로테르만 강사는 당시의 어려움을 회상했다.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모아놓았던 프랑크푸르트에게도 큰 어려움이 있었던 것.
그것은 자국리그, UEFA컵 등의 주요 대회는 물론이고 자국 컵 대회나 친선경기가 연이어 잡혀있어 선수단 일정이 너무 빡빡했다는 것이다. 당시 프랑크푸르트는 일주일에 두 경기씩 치러야 했다.
"우리 팀에는 좋은 선수들이 많았다. 그 선수들과 함께 경기를 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흥미로운 일이었다. 우리는 1979~1980년 UEFA컵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최고의 팀이었고 분데스리가를 선도하는 팀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체력의 한계가 있었다. 주중에는 UEFA컵을 치러야 했고, 주말에는 분데스리가 경기를 치러야 했다. UEFA컵에서는 강한 팀을 상대로도 계속 이겼지만 분데스리가에서는 유명하지도 않은 팀과의 경기에서도 지곤 했다. 체력적인 부담으로 경기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결국 프랑크푸르트는 1979~1980시즌 UEFA컵에서 우승을 했지만 자국리그에서는 우승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여전히 UEFA컵에서는 뛰어난 성적을 거뒀으며 자국리그 부진의 원인으로 손꼽힌 것은 언제나 빡빡한 일정이었다.
로테르만 강사와 차범근은 1983년 각각 뉘른베르크와 바이엘 레버쿠젠으로 둥지를 옮기며 프랑크푸르트를 떠났다. 이후 로테르만 강사가 이적한 뉘른베르크는 이듬해 2부리그로 떨어졌고, 로테르만은 1985년 2부리그의 다름슈타트로 이적해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보냈다. 다름슈타트는 1978년 차범근 감독이 독일 축구에서 데뷔전을 치른 팀으로 선수 생활의 마지막까지 차범근 감독과 인연을 이어간 것이다.
첫댓글 차범근 트로피 사진에서 포스가ㅋㅋ 사진이 바랬어도 멋지군
트로피에서 불나는거 같다 ㅋ
선수로서는 다이아몬드..... 감독으로서는 OTL.....
제발 수원 감독좀 교체해주지 ㅠ.ㅠ ....또 슈퍼수비축구 재미없는 축구 보겠네 ㅠ.ㅠ
이 글에 맞지 않은 애기는 꺼내지 않는게 좋겠네요
여기는 축구 까페고 축구애 대해서 자기 의견을 얘기하는건데 이글에 맞지 않는거라곤=ㅁ=;;
그래도 이 글에서 나오는 건 감독 차범근이 아니라 선수 차범근 아니 잖습니까.. 위대한 한국의 축구영웅인데.. 여기서까지 이럴껀 ...
기분나뻐서 욕할뻔했네요 차범씨에대한 악플은 달지마시길 ^^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패스 대충해주면 알아서
아 황선홍선수도 독일시절 때 동료들이 마늘냄새 났다고 굉장히 싫어했다고 하던데 ㅠㅠ
약간의 립서비스도 있지 안을까
나이 어린거 티 내세요? ㅋㅋㅋㅋㅋ
지들 한테는 썩은 치즈냄새 나는거 모르는가보지ㅡㅡ
현재 축구에는 기록과 골밖에 남지 않는다. 기록만을 보더라도 차범근은 뛰어난 선수였지만 단지 그의 능력이 기록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의 기록은 그가 보여줬던 능력을 모두 반영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