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주의 좋은 글 나누기>
대동문화0807 산사에서 띄우는 엽서
참회록들 쓰십시다
얼마 전, 저자에서 아는 노장을 오랜만에 뵈었습니다.
저명한 시인이자 영문학자인데 교직 은퇴 후 수염을 멋지게 기르고 산행에 열심이십니다. 바로 전남대 범대순교수이시죠.
예의 온유한 웃음으로 문안을 받으시더니 어찌 지내느냐고 안부를 되물으셨어요.
“요즘, 참회록 쓰고 있습니다.”
“참회록? 자서전 말인가?”
“어이쿠, 제 처지 제 나이에 무슨 자서전은요, 반성문 말입니다, 반성문.”
“반성문?”
“예, 막행으로 사느라 주변에 폐 끼친 게 많아 이것 저것 뉘우치는 반성문을 좀 끄적이고 있어요.”
“그럼, 아직도 절에 머물고 계시는가?”
“머문다기보다 三非로 지내고 있지요.”
“삼비?”
“非山非野에서 非僧非俗으로 非理非利하게 놀고 있나이다.”
“허허, 하여튼 자네는... 그나저나 술 좀 경계하게.”
“Yes, sir! I'll make it. Anyway, You're growing a pretty good beard!”
“Really? I appriciate it.”
이렇게 사제간에 유쾌하고 우애넘치는 한바탕 거량을 했더랍니다.
건 그렇고, 요즘 ‘참회’가 화두로 떠돌아다닙니다.
지난해 불교계의 봉암사 결사 기념법회 때부터 부쩍 쓰임새가 많아진 참회라는 말은 요즘에는 웬만한 사회적 사안에도 걸핏하면 등장하는 유행어가 되어 버린 느낌이에요.
불교계에서는 한반도운하 반대에도 참회가 전제되고, 미국쇠고기 파동 비판에도 국민적 참회를 앞세웁니다.
중국의 대지진, 미얀마의 해일 참사에도 동시대 세계인의 참회를 먼저 촉구하구요.
조계종에서는 교계 안팎의 정화를 다지기 위해 포살(布薩:참회)과 결계에 관한 준칙을 만들어 이번 하안거부터 실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분위기는 수년 전 천주교계에서 벌였던 ‘내탓이오’ 운동을 연상시킵니다.
세상이 혼란에 빠졌을 때 남을 탓하기 앞서 스스로의 잘못을 돌아보는 것은 종교인은 물론이요 일반인에게도 바람직한 마음가짐 아니겠습니까.
참회나 회개는 많을수록 좋겠지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인간은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르는 인간이라고 했던가요.
일흔 번을 일흔 번 할 만큼 거듭 죄를 지어도 한 번 회개하면 용서를 받는다 고 가르치고, 일어서면서 다시 업을 지을망정 늘 엎드려 참회하라고 가르칩니다.
언뜻 ‘악마의 유혹’이라는 기독교 우화가 떠오르는군요.
한 번 죄지은 자를 영원히 죄에 빠뜨리는 말 한 마디를 해보세요, 하는 악마들의 대회가 있었대요.
악마1 왈, “지옥은 없어, 네 멋대로 살아버려.”
악마2 왈, “걱정마, 네 죄 아무도 안 봤어.”
악마3 왈, “내일부터 새롭게 시작하지, 뭐”
악마4 왈, “네 죄는 너무 커서 용서받을 수 없어.”
일등은 물론 악마4가 차지했지요.
종교는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죄란 없다고 우리 죄인들을 위무하고 절망과 좌절로부터 다시 일어설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저는 불교 구조를 두 가지 얼개로 이해합니다.
철학적인 면은 연기론(緣起論)이요, 실천적인 면은 중도(中道)라고 봅니다.
연기론이란 아시다시피 세상의 모든 현상은 서로 연관있게 시현된다는 이론이지요. 저 홀로 존재하는 물건이나 현상은 없다는 것. 상호의존, 인과론, 생태순환, 업, 윤회 같은 단어들이 여기에서 파생된다고 볼 수 있지요.
실천적인 면에서 불교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정립(正立)을 이상으로 삼습니다. 중도는 유교에서의 중용(中庸)의 개념과 유사하다고 이해합니다. 흔히 너무 조이지도 느슨하지도 않게 조율된 거문고 줄이라야 제 소리를 낸다는 ‘조현지도(調絃之道)’를 수행의 이상으로 삼습니다. 지나친 고행도 지나친 쾌락도 거부한 석가모니가 그 전범이지요.
그렇게 볼 때, 참회는 연기론에서 당연한 실천행입니다.
저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행이나 죄악은 저들의 잘못만이 아닌 여기 내 업이라는 얘기인 것이지요.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데 네 잘못 내 잘못이 따로 있을 수 없지요.
그러니 한반도 운하가 시도되면 내가 먼저 참회하고 이를 바로잡아가려고 힘쓸 일이요, 중국에서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자연을 소홀히 한 우리 인류의 잘못이니 내가 먼저 엎드려 참회해야 마땅한 것 아니겠습니까.
공든 탑 무너지지 않고 업은 삼천대천세계에 숨을 곳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짓는대로 간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세상사 꼭 그렇지만은 않더라고 역전의 용사들은 입맛 다십니다.
죄지은 놈만 떵떵거리고 잘 살고, 착하고 정 많은 사람들은 늘 헐벗고 못살더라.
그건 뭐, 전생에 지은 업보대로 받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자연재해나 교통사고로 참변을 당한 이들은 도대체 무슨 죄가 있느냐... 흔히 가져볼 만한 의문입니다.
불가에서는 이런 경우를 두고 ‘공업(共業)’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개인이 지은 ‘개업(個業)’이 아니라 공동체가 지은 공공의 업이라는 뜻이지요.
업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짓는 주체에 따라서 몸으로 짓는 신업(身業), 입으로 짓는 구업(口業), 마음으로 짓는 의업(意業)이 있는가 하면, 받는 시기에 따라서 금생에 지은 업을 당장 받는 순현업(順現業), 전생에 지은 업을 금생에 받는 순생업(順生業), 금생에 지은 업을 내생에 받는 순후업(順後業)이 있습니다.
또 밖으로 나타나는 표업(表業), 티나지 않게 상속되는 무표업(無表業)이 있으며, 선한 마음이 일으키는 선업(善業), 악한 마음이 일으키는 악업(惡業),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짓는 무기업(無記業) 등 업의 갈래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 거 다 지우고, 우리가 알아 두어야 할 한 가지는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보이는 자연재해나 사고도 공동체 사회가 지어서 나타난 업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편의만을 생각하고 자연을 함부로 대한 업보로 여러 가지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자기편만 옳다고 떼쓰며 싸움질한 업보로 전쟁의 피흘림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전번 중국의 지진을 업보라고 했다가 얼른 말을 주워담은 여배우 샤론스톤의 언급은 불가의 입장에서는 타당한 풀이이지요.
참회를 하면 세 가지 공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오랜 쌓인 업장이 녹고, 둘째는 마음이 맑아지며, 셋째는 몸이 건강해진다고 합니다.
요즘 절이 운동이 된다고 해서 백팔배 수행을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지요.
몸도 몸이지만 세상의 업보를 나부터 참회하자는 마음으로 백팔배를 하면 마음까지 맑아져 금상첨화가 아닐까 여깁니다.
여름철 내내 송광사에서 마련하는 단기출가 수련회에 참가하여 시원하고 조용한 산사에서 시대의 공업(共業)을 묵묵히 참회해보는 것도 좋구요.
한송주 송광사보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