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론
몇 년 전에 만화가 이현세는 1백 권에 달하는
'장편그림소설'을 내겠다면, 그 작업을 시작하였고 현재, 6권이 나왔다. 이현세가 펼치고 있는 그 방대한 규모의 만화 내용은 바로 우리 역사의
창세기와 상고사를 다루고 있다. 이현세는 그 작업을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상고사에 대한 역사학계의 연구성과가 미미한 실정을 감안해 기록에 의존하기보다는 상상력으로 역사의 진실을
찾아보겠다." 그가 이렇게 자신 있게 '상상력'을 소리치며, 그 방대한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뒤에는 우리의 상고사를
자세하게 기록한 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TV인터뷰에서 김지하씨는 자신의 아들이 에니매이션에 관심이 많아 일본의
만화영화에 파묻혀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지하씨는
왜 우리 것을 찾지 않느냐고 아들에게 물었고, 그 아들은 우리 것은 재미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재미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것인데, 일본은 우리에 비해 소재가 무척이나 다양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지하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기초적인 상고사, 고조선사를 열어야
그 안에 들어있는 문화적인 자산, 신시, 화백, 풍류, 유목문화의 첫 고대국가, 상고사에 대한 비젼, 꿈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초입에 단군조선을 막아버리니까 상상력을 자극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것을 열어야 한다." 김지하씨가 아들의 이야기를 하면서까지 말하고자 하였던 것은 바로 '상고사회복'에 대한 것이다. 김지하씨가
상고사회복운동에 적극적일 수 있는 매개체는 바로 그 역사를 기록한 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책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주장하기란 상당히 까다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책들은 우리의 상고사에 대해 너무도 자세히 기록하고 있기에 그러한 생각과 주장은 훨
수월했으리라 본다.
우리의 상고사를 기록한 책이 몇 있지만, 그래도 그 중에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환단고기'이다. 이 책이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책 '환단고기'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그리고, 이 책과 기존의 단군신화와 비교를 해 볼
것이며, 왜 사료로 인정이 되지 않고 있는 지에 대해서도 살펴보겠다. 마지막으로는 과연 이 책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지 나름대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 본 론
'환단고기'를 내가 처음 접하게 된 때는
작년이었다. 동양철학에 관련된 책을 골라 읽다가 도서관에서 책제목이 눈에 들어왔었다. 그때는 여느 책과 다름없는 단지 오래된 고서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다른 책을 어느 정도 읽은 다음 읽어야겠다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러다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언론에서 '환단고기'에 관한
여러 내용들이 발표되면서 그 실상을 알게 되었다. 그 뒤, 한 번 읽어보아야겠다 생각은 하였지만, 게으른 관계로 미루다 이 번 국어사 레포트를
핑계로 그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 보게되었다.
'환단고기'가 그렇게 언론의 집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먼저는, 상고사를 실제 역사처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과 두 째는 그 책이 사료로서 인정이 되느냐, 안되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이 중에서도 주로 후자 쪽에 관한 논거들이 많이 제시되고 있었다. 우리가 여기서 그 진상을 밝힌다는 것은 무리인 듯 싶고, 우리는 '환단고기'가
어떤 책이며, 논쟁을 하고 있는 주장들을 살펴보고, 그 주장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이야기 할 것이다. 그리고, '환단고기'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미를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1. 「환단고기」란 어떤 책인가?
○ 「환단고기」의
내용
책에 실려 있는 내용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환단고 기'책의 모양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옆에 있는 그림은
'환 단고기'이다. 여느 고서와 다름없이 한자만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그저 옛날 책이겠거니 하면서 지나치겠지만, 이 책
속에는 어마어마한 내용이
들어있다.
환단고기는 삼성기와 단군세기, 북부여기 그리고 태백일사의 4종
사서를 하나로 묶어 놓은 것이다. 삼성기는 신라의 승려인 안함로와 행적이 확실치 않은 원동중이 쓴 것을 각각 상하권으로 나누어 합친
것으로, 한인 .한웅시대의 이야기를 담고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시발인 환국시대의 환인으로부터 7세 단인까지 3301년의 역사와 신시시대의
한웅으로부터 18세 단웅까지 1565년의 역사를 압축한 것이다. 하권엔 신시역기가 덧붙여 있다.
단군세기는 고려시대에
살았던 행촌선생 이암 문정공이 전한 책으로, 아사달에 도읍하여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을 사용한
단군님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1세 단군 왕검으로부터 47세 단군고열까지 2096년 동안 각 단군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북부여기는 고려말의
학자인 범장이 전한 책으로, 국사책에서의 고구려 건국 연대는 B.C. 37년으로 되어 있으나, 실상 고구려의 건국 연대는 이보다 120년 내지는
180년이 앞선 것으로, 몇 가지 기록상의 공통점 등으로 보아 이 북부여기는 바로 고구려의 전신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권. 하권. 가섭원 부여기로 구성되는데, 시조 해모수로부터 6세 고무서까지의 204년과 가섭원부여
108년의 역사이다.
태백일사는 연산군과 중종 떼의 학자인 이맥이 전한 책으로, 이
한단고기의 압권을 이루는 부분이니, 한국(桓國).신시시대(神市時代)로부터 고려에 이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여기엔
신오제본기.한국본기.신시본기.삼한관경본기.소도경전본훈.고구려국본기.대진국본기.고려본기가 포함되어 있는데, 삼한 관경본기엔 마한세기 상.하와
번한세기 상.하가 담겨있다.
특히 소도경전본훈은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실어, 우리 민족의 전통적 종교와 철학
및 문자를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을 근거로 한다면, 우리 민족의 시작은 고조선부터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약 일 만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영토는 한반도가 아닌 아시아 대륙 전역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보다 알기 쉽게 각 시대를 나열해보자. 환국시대 -
신시 배달국 시대 - 단군조선 - 북부여 - 고구려, 대진국 - 고려라 할 수
있겠다.
이들 시대의 특징과 각 시대를 시작하였던 대표적인 이들 곧, 환인, 환웅, 단군들의 대해서 살펴보겠다.
환국시대의 환국은 천산 동방으로 '동서가 2만리, 남북이 5만리'의 방대한 문명의 대국으로 파내류국이라고도 하였다. 환국을 통치한 분은
안파견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만인이 아버지'란 뜻의 안파견 환인은 초대 환인으로서 환국을 다스렸다. 여기서 환인이란 통치자와 제사장의
관직명이다. 당시 환국은 12환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안파견 환인은 자신의 형제 9인으로 하여금 각 환국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으며 이를
통칭하여 '광명의 제국'이라 불렀다. 환국시대의 지도를 상상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다음은 배달국 시대이다. 환국의
정신을 계승한 분은 후기 환국 말경에 당시 '자식들의 마을 (서자부)'의 수장이었던 환웅으로, 환웅은 야만 생활을 하던 인간을 널리 구제하고
싶은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에 환인께서 중국의 감숙성에 있는 삼위산과 동방의 태백산을 살려보고 태백산으로 가고 싶다는 환웅의
뜻을 허락하여 태백산으로 파견하였다. 이 때 환인천제께서는 제세 핵랑군이라 불린 문명 개척단 3천명과 천부인 3개를 주고 개천입교, 홍익인간, 제세이화를 만세 자손의 흥법으로 하라는
명을 내렸다. 환웅께서는 이를 배달국을 여는 개국의 창시 이념으로 하였다. 당시 환웅의 동방 백두산 문명 개창시에 송화강, 백두산 일대에는 토착민인 웅족과 호족이
살고 있었는데, 원주민은 호족이었고, 이주민은 웅족이었다. 호족은 사납고 약탈에 능했으나 점차 이들은 웅씨족에 의해 융합되었다. 웅의 음은
검이며 검은 신으로 불리었다. 또한 호는 불로, 불은 시로 변하였다. 그래서 두 민족의 협력 건국으로 인하여 환웅께서 수도를 신시라 하고 나라
이름을 배달이라 하였다. 신시 배달국 시대의 통치자인 환웅은 '큰 스승'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을 모신 법당을 대웅전이라 하는데 이는 거룩한
스승을 모신 성전이라는 뜻이다. 환웅이란 당시 광명 민족을 이끌어 주던 거룩한 스승이라는 뜻이다. 배달국 시대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배달국의 말기 단웅께서 웅씨 왕녀와 결혼하여 낳은 분이 초대 단국 성조이다. 단군 성조는 신묘년(BC
2370) 5월 2일에 탄생하였다. 신인의 덕으로 원근에서 외경하여 14세 되는 갑진년에 웅씨왕으로부터 비왕으로 임명받아 24년간 대읍국의
국사를 섭정하였다. 38세 되는 무진년에 단군으로부터 돌아와 마지막 환웅천황께서 돌아가시자 아사달에서 천제로 추대되어 제위에 올랐다. 단군왕검은
제사장과 통치자를 겸임한다는 의미의 관명이다. 단군 성조께서는 환인과 환웅 천황의 정통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옛 신교정신을 부흥시키고, 동방
문명의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황아/양자강 유역, 만주 등의 동아시아 대부분을 통치하였다. 전 영토를 삼한으로
나누어 부단군 격인 왕을 두어 다스렸다. 만주와 중국 북부를 관할하던 진한은 단군의 직접 통치를 받았으며, 중국 동부는 번한, 한반도와 일본은
마한이 통치하였다. 이렇게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그 당시 조선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환단고기'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왔던 역사 지식을 완전히 뒤엎는 사실들을 담고 있다. 그곳에는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를 통한 위대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과거에
우리가 중국 대륙과 시베리아까지 다스렸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그곳에는 새롭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 놀라우면서, 믿기 어려운 몇 가지 기록을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먼저
환단고기에는 우리의 역사 시작을 일 만년 전으로 잡고 있다. 우리가 단군 조선을 기점으로 반만년이라 이야기를 하는데, 환단고기에서는 단군 이전에
'환웅천황'의 역사 시대가 18대 1565년 동안 있었고, 또 그 이전에 '환인천제'시대가 7대 3301년이 있기에 우리의 역사는 9천년을 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영토를 이야기 할 수 있겠다.
'환단고기-삼성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파내류산 아래 환인의 나라가 있는데 천해 동쪽 땅이다. 그 땅의 넓이가 남북 5만리 동서
2만 여리에 이른다." 이 문구를 근거로 그 당시 우리민족의 영토를 짐작해 본다면, 파내류산은 지금의 시베리아 중앙고원에 해당하고, 천해는 바이칼 호수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아시아 대륙을 넘어 지금의
러시아에까지 미치고 있다. 말 그대로 남북 5만리와 동서 2만리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환국은 열 두 개의 나라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중에 수밀이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 수밀이국을 일부에서는 고대
수메르로 해석을 하는데, 수메르족은 세계의 4대 문명 중에 하나인 메소포다미아 문명을 일으켰던 민족이다. 어느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수메르족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자생한 민족이 아니고
동방에서 이동해 왔다는 것이다. 그것도 문자를 가지고 왔는데 바로 태호복희가 쓰던 팔괘부호와 흡사한 문자를 가지고 서쪽으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 민족은 바로 우리라는 소리다. 다음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서 중국에게 문명의
대부분을 받아 왔다고 배워왔다. 그런데, 환단고기에는 그 중국의 역사가 우리 민족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환단고기-태백일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5대 환웅의 막내아들은 태호복희라고 한다. 태호복희는 삼황오제 중 첫 번째 인물로 우사라는
관직에 있다가 진으로 갔다." 태호복희는 중국의 역사에서 중국의 시조로 전해지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바로 그 사람이 환웅의 아들이었다는 기록이
환단고기에 있는 것이다. 이렇듯 '환단고기'에는 놀라운 기록들이 많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살펴보겠다. 먼저, 다음 그림을 주목해
보자.
우리 현대인들에게도 상당히 낯익은 모양새다. 언뜻 보면 지금의 한글과 비슷하다. 이 것은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는 '가림토 문자'이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은 조선시대에 만들어 진 것으로 보통 사람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 만들었나를 놓고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 국어사 시간에 보게된 'KBS-역사스페설'에서는 한글을 만들었던 사람은 바로 세종대왕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집현전 학자들은 세종이 이야기하기 전까지 몰랐으며,
그들은 새 글이 만들어진 이후에 그것을 검토하는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종은 어떻게 혼자서, 그렇게 완벽한 문자를 단시간에 만들 수
있었을까.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취재진들은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여러 기원설을 쫓고 있었다. 각 기원설을 증명한 듯 우리의 한글과
비슷한 문자들이 많이 눈에 띠었다. 하지만, 그들이 최종적으로 도달한 곳은 바로 '환단고기'의 가림토 문자였다. 이 가림토 문자는 이미 4천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가림토 문자를 쓰기 이전에는 태고의 문자인 녹도문자도 있었다는 것이다. 즉, 환단고기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문자를 만든 최초의 민족인 것이다. 환단고기의 가림토 문자를 유념한다면,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은 충분한 가능성이 있는 역사적
사실이 된다.
○ 「환단고기」의 작자에 관하여
환단고기는 네 권의 책을 단행본으로 묶이어 전하고 있다.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각 4권의 저자 이름은 다르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도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다르다. 그리고 이들 저자 중에는
이암, 이맥, 범장처럼 다른 사료에서도 그 행적이 확인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단군세기와 북부여기, 태백일사를 썼는 가에 대한
기록은 다른 사료에는 나타나 있지 않고 있다. 또한, 저자들 중에는 다른 사료에서 그 사람의 행적을 찾을 수도 없는 사람도 있다. 아마도 다른
사료에 이들의 확실한 행적이나 환단고기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면 환단고기를 다루는 정도가 훨 달라질 것이다.
이 책은
1911년 네 권의 책이 한 권으로 묶여서 '환단고기'라는 단행본으로 나왔다. 책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신시개천 5808년
곧 광무 15년 신해 5월 광개절날에 태백 유도 선천 인경 계연수가 묘향산 단굴암에서 쓰다."이 내용을 살펴본다면,
1911년 네 권의 책을 묶은 사람은 계연수 이고, 환단고기를 필사한 장소는 묘향산 단굴암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계연수가 펴냈다는
환단고기의 원본은 전하고 있지 않고 있다. 계연수의 행적을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고, 다만 짐작하는 것은 대종교 지도자이며, 독립운동가였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이후 7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 이유립이라는 인물에 의해 세상에 공개된다. 이유립은 단군사상을 연구하는 단단학회의 회장을 지낸
재야사학자였다. 1979년 발표된 환단고기는 우리 나라에서는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일본인 손에 넘어가서 새로이 번역되면서, 그것이 역수입되어
관심을 받게 되었다. 환단고기에 대해 나름대로 속시원하게 말해 줄 수 있는 이 책의 공개자인 이유립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2. 「환단고기」에서의 상고사와 기존의 단군신화의 비교
환단고기에서 가장 논거의
대상이 되는 부분은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었던 단군신화와는 완전히 그 방향을 달리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과연, 단군에 대한 내용을 신화로써 인정할 것이냐, 아니면 실제 역사로써 인정을 할 것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지금까지는 우리는 몇몇 역사 기록을
토대로 신화 쪽에 무게를 두어왔다. 하지만, 환단고기에서는 실제 역사로써 광범위하고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구체적인 비교를 하기 이전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존의 단군신화의 내용을 정리해 보겠다. 단군신화는 크게
3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첫째는 환웅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신시를 열게 된 연원을 밝힌 내용이고, 둘째는 환웅이 곰과 결혼함으로써
단군왕검을 낳게 되는 과정을 밝힌 내용이다. 셋째는 단군왕검이 조선을 개국하였다는 내용이다.
기존의 단군신화에서
'환인과 환웅'을 인간이 아닌 단지 그 이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로 신화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써 상징성과 설화성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환단고기에서는 이 단어들의 명칭을 보다 구체적으로 관직이나 제사장의 명으로 보고 있다. 물론 '단군'도 마찬가지이다. 다음으로는, 환웅이 곰과
결혼하여 단군을 나았다고 했는데, 이 것은 '곰'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당시 토착종족인 웅족으로 환웅이 그 웅족의 딸과 결혼하였다고
환단고기에서는 보고 있다. 기존의 단군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처음 실려 있는데, 그곳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단군이 고조선을 통치한 기간이 1500년이며 수명은 1908세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반해, 환단고기에서는 2천년이
넘게 지속된 고조선을 한 사람이 통치한 것이 아니라 47명의 단군이 통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객관적으로 놓고 봤을 때, 기존의 단군에 대한
기록보다는 환단고기에 실린 내용이 훨 자연스럽다. 한 사람이 그렇게 긴 시간을 통치한다는 것과 더구나 천년이 넘게 살았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기에 단군에 대한 기록을 신화로 받아 들였던 것 같다. 하지만, 환단고기가 정확한 사료로서 인정이 된다면, 단군신화는 구체적인
자료를 근거로 역사적 사실로 남게된다. 그렇다 문제는 그것이다. '환단고기'란 책이 역사적 사료로서 인정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
3.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에 대한 논쟁
○ 「환단고기」는 사료로서
무가치하다는 주장
사료로서 무가치를 주장하는 쪽은 대부분 학계이다. 그들은 먼저 환단고기의 출처가 명확하지 않음을
들고 있다. 환단고기 저자들의 행적이 확실치 않으며, 그들에 대한 기록이 다른 사료에 자세히 나와 있지도 않고, 어느 곳에도 그들이 환단고기를
지었다는 기록이 나타나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환단고기를 단행본으로 만든 계연수의 행적도 알 수 없으며, 70년 후에 이유립이 책을
발간하였는지도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책의 출처가 정확하지 않기에 학계에서는 사료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것이
가장 큰 부정이유인 듯 하다.
다음은 환단고기의 책에서 발견되는 근거들이다. 환단고기에는 이런 문장이 기록되어있다.
"백성들과 더불어 산업을 다스리니 한 사람도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이가 없었다." "학교를 세워
학문을 일으키니 문화가 크게 진보하여 명성이 날로 드러났다." 이 문장은 단군세기에 나오는 부분이다. 단군세기는 고려시대 이암이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쓰인 '산업, 문화'같은 용어는 근대에 등장한 단어로 고려시대에 쓰였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단어'국가,
인류, 전세계, 남녀평등'이란 말이 환단고기 곳곳에 등장하는데,
이런 단어들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단어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환단고기는 사료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이
밖에도 환단고기를 인정하지 못하는 근거는 또 있다. 그것은 다른 책을 베낀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환단고기의 기록 중에는 많은 부분이
다른 사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환단고기에 기록된
단군조선시대 호구가 1억 8천만 구로써, 인구로는 9억이 넘은 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인구통계표가 천만을 넘지 못하는데, 너무 무리가 아니냐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들로 인하여 환단고기는 학계에서는 찬밥신세다. 아무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는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는 주장
사료로서 가치를 주장하는 쪽은 주로
재야사학계이다. 주장의 근거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조선의 영역에 나타나는 비파형 동검의 출토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 있다. 마지막으로는 환단고기에
나타난 자연현상에 대한 기록들이 과학적으로 사실로 판명이
된 것이다.
먼저, 환단고기를 토대로 고조선의 영역을 추정해보면, 지금의 북경에서부터 만주의 전지역과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한 시대의 영토를 추정하는 방법 중에는 문헌에 나타난 기록과 그 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는 지역을 참고로 추정하는 방법이 있다.
청동무기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의 대표적인 무기로, 당시 지배층의 독점물로써 중앙에서 만들어 지방에 공급하였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같은 청동기가
사용된 지역은 한 통치집단에 의해서 지배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비파형 동검이 지금의 북경지역, 만주, 한반도 전지역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한다면, 고조선의 영토는 북경지역, 만주, 한반도 전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환단고기에서 이야기하는 고조선의 영토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수서령'이란 부분이다. 수서령은 조선시대 세조와 예종, 성종 때 팔도 관찰사에게 명령해서 옛부터 전해져온 희귀서적을
전국에서 거두어들인 일이다. 지금은 전하지 않으나, 이 수서령이 내려진 책 중에서 환단고기에 실려있는 책과 제묙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삼성기'이다. 수서령의 대상이 되었던 책이 환단고기의 제목으로 나타나는 것은 계연수가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책들을 참고하였다는 근거를 낳게
된다.
마지막으로, 천문학을 통해 환단고기의 역사적 사실을 증명한 것을
자세하게 이야기하겠다. 천문 현상은 물리 법칙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전개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특정 시점의 행성들 위치를 알면 슈퍼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행성들의 과거와 미래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천문 현상 기록은 대단히 과학적이 다는 것이다. 그러한 작업을 서울대 박창범교수가 하였다는 것이다. 박교수는
단군조선시대에 나타나는 천문 현상 기록을 주목하고 그것을 근거로 실험에 착수하였다.
cf) 단군세기에 나타난 천문
기록
BC 2183 2세 단군 부루 58년 - 일식
BC 1733 13세 단군 홀달 50년 -
오성취루
BC 935 29세 단군 마휴 9년 - 큰 썰물
BC 837 32세 단군 추밀 13년 -
일식
이들 기록 중에 박교수 팀은 오성취루에 집중을 하였다. 박교수팀은 기록에 나타난 BC1733년을 기점으로 전후
약 5백50년 사이에 오행성의 결집이 일어난 시점을 샅샅이 조사했다. 그 결과, 기록에 나타난 BC 1733년으로부터 바로 1년 전인 BC
1734년에 매우 뚜렷한 형태로 오행성이 서로 아주 가까워져 있는 현상이 발견되었다. 박교수는 '기록 연수보다 1년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은
당시의 시간 계산법과 약 3천년이 지난 지금의 시간 계산법 차이를 고려하면 무시해도 좋은 수치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만약 후대의 누군가가
이 현상을 작위적으로 기술해 넣었을 경우, 이것이 서로 맞아떨어질 확률은 0.007%로 매우 희박한 것이라 하였다. 박교수는 천문현상을 윤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근거들을 보았을 때 환단고기는 상당부분 진실하다고 할 수 있겠다.
■ 결
론
기나긴 여행이 끝났다. 기분이 끝없는 우주를 여행하고 돌아온 느낌이다. '환단고기'를 통해 나는 우리 상고사의
넓은 벌판을 여행하고 왔다. 비록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환단고기에 대한 진위문제는 지금도 계속되어지고 있다. 막무가내 사료로 인정하기
않으려던 학계에서도 박창범교수의 발표는 수긍을 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환단고기에 대한 사료로서의 가치가 조금은 열린 셈인가?. 환단고기가
사료로서 인정이 된다면, 우리 사학계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엄청난 작업을 하여야할 것이다. 비단, 사학계 뿐만이 아닐 것이다. 일이
많아지고, 복잡스럽더라도 인정만 된다면 실로 엄청남 일이다. 일만 년의 역사와 광활했던 영토, 그리고 세계문화의 시발. 생각만 하여도 흥분이
된다.
우리의 상고사는 너무도 빈약하다. 가깝게는 백제의 문화적 기록도 부족하다. 물론, 일제시대 일본의 상고사 말살정책에 의해서 우리의
역사가 많이 축소되었다. 하지만, 해방이후에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단군조선은 그저 하나의 신화로서 동화책 <
북한의 단군릉> 같은 이야기만을 놓아둔 체 손을 데지 않았다. 이에 비해, 중국과 일본은 억지스럽게 자기네들의 상고사를 찾고 있으며,
더구나 일본은 그것을 소재로 만화영화까지 만들어 수출하고 있다. 북한에서도 1994년부터 평양 동쪽 강동군에 단군릉을 복원하고 있다. 환단고기를 인정하는
재야사학계에서는 북한의 단군릉을 단군 조선시대 5번째 통치자인 구을 단군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토록 메말라 있던 상고사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는 책들이 나왔음에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으니 한심하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환단고기 등과 같은 책이 아니다. 우리의 상고사를 찾으려는 노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학자들의 집요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든
역사적 기록을 중국에 맞추어 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듯 싶다.
환단고기는 우리 전부는 아니더라도, 나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상상력을 제공해 주었다. 처음에는 기존의 생각들과 무척 혼동이 되었다. 하지만,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너무도 확실하고, 자유로웠다.
답답하지가 않았다. 우리의 '홍익인간' 이념이 함무라이 법전에 이어지고, 모세 5경에 이어진다는 기록 분석은 너무도 놀라웠다. 만화가 이현세가
방대한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상상력이고, 그 이전의 작은 불씨는 환단고기와 같은 상고사를 기록한 책들이었다. 우리의 상고사를 열어
펼쳐 본다면, 참으로 엄청난 상상력의 보고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혹, 환단고기가 사료로서 인정이 되지 않더라도 그 책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좋은 교과서가 되어줄 것이다. '환단고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참고
자료】
○ 참고 사이트
http://my.netian.com/~cho357
http://user.chollian.net/~pleiad7s/
http://user.chollian.net/~acudr/handan/han7.htm
http://hanbada.kmaritime.ac.kr/~k9627503/han/han9_3.htm
http://munsu.ulsan.ac.kr/~history/report/korgodae/05-1.htm
http://www.kbs.or.kr/history/
http://hanbada.kmaritime.ac.kr/~k9627503/han/han8.htm
http://ferarri.snu.ac.kr/~maldduk/jsd/forum/5.htm
http://www.dongailbo.co.kr
http://www.munhwa.co.kr/
http://my.netian.com/~chiu/
○
참고 문헌
『환단고기』, 계연수. 코리아북스
『환단고기』, 임승국, 정신세계사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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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출처
: [기타]
http://www.chosun.ac.kr/cgi-bin/crbbs/upload/ongmi18/%B0%AD%B8%ED%BF%F8.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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