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의 한국 기독교, 바뀌어야 산다! (6)
②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열린 기독교>로 (2)
정강길 minjung21@paran.com
1. 21세기 기독교와 한국 기독교의 위기 2. 21세기 기독교 변혁을 위한 12가지 패러다임 대전환 ※ 관념적 이원론에서 <현실적 관계론>으로 ①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에서 <깨달음의 기독교>로 ②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열린 기독교>로 ③ 가부장적 기독교에서 <모성애적 기독교>로 ④ 초월신론에서 <범재신론>으로 ⑤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⑥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⑦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⑧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한국식 목회문화>로 ⑨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⑩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⑪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인간구원의 강조>로 ⑫ 저 세상이 아닌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3. 오늘날의 선교 대상은 기독교 그 자신부터 4. 나오며 |
복음화에 대한 두 가지 시각, 신자화와 인간화
그렇다면 오늘날의 종교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 선교의 문제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적어도 한국 기독교가 '배타주의'만큼은 극복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배타주의는 오히려 기독교 복음에 반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선교나 전도란 근본적으로는 제 각기의 '종교 영역 땅따먹기'가 아니다.
선교나 전도가 '복음화'와 관련된다고 할 때 그렇다면 과연 '복음화'란 무엇인지를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 복음화에 대한 시각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뉜다. 보수진영의 기독교인들은 복음화라는 것을 곧 <신자화>라는 맥락과 동일시한다. 반면에 진보진영에서 말하는 복음화의 의미는 대체로 <인간화>에 가깝다.
예를 들어 '수원지역의 복음화'라고 했을 때, 이 구호를 들은 보수 진영의 기독교인들에게 딱 떠오르는 선교 그림은 수원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는 일이 먼저 떠오른다. 반면 수원지역의 복음화에 대한 진보진영의 입장은 수원지역을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곳, 다시 말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복음화를 보는 시각은 수원이라는 시공간 전체를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그분의 나라로 만드는 일과 직결된다.
물론 이 점에서 몇몇 현명한 기독교인들은 어느 하나로 얘기될 수 없고 둘 다 필요할 것이라고 얘기할 것이지만, 복음화에 대해 보수와 진보가 적어도 제각기 먼저 딱 떠오르는 그림을 생각해본다면 이렇게 나눠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한국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보수진영에 속해서인지, 복음화를 보는 진보진영의 시각에 대해선 잘 모르거나 별로 그쪽으론 잘 고려되지 않고 있는 점은 진보진영에겐 매우 유감스러운 일일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인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억울한 넋을 달래고 역사를 바로 잡기위한 '5·18 특별법 제정 시위 및 집회'를 하나님나라 운동의 복음화 활동과 연관 짓는 기독교인들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진보진영 기독교인들의 인식에서는 이러한 연결이 매우 자연스럽다. 즉 복음화를 보는 입장 차이가 ―그것이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서로 간에 분명하게 있는 것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면에서 사탄이나 마귀하면 우리는 흔히 예배 시간이나 기도 중에 잡념을 일으키게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초심령적 존재를 떠올린다. 물론 그 역시 사탄이나 마귀에 해당하는 존재일 수 있겠지만, 그같은 사탄의 가장 큰 활동은 실제적으로 사람을 피 흘리게 하고 죽인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하나님나라 운동을 위한 선교는 생명을 죽이고 억압하는 그러한 사탄의 세력들과의 싸움 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사람을 죽이는 독재체제나 이를 비호하고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죽였던 국가보안법이나 잘못된 노동악법 혹은 불의한 사회제도들 등 바로 이러한 것들 역시 사탄이 세계 권세를 잡기 위한 중요한 기제들로 작동된다는 점에서 하나님나라를 위한 철저한 투쟁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사탄이나 귀신은 무슨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만 머물고 있는 게 아니라 실제 세계에서는 모든 정치 경제 체제 안의 권세들로 나타나기도 하며, 그것은 진짜로 인간을 억압하고 평화를 유린하며 생명을 죽인다 는 사실이다.
만일 복음화를 '신자화'라고만 생각한다면 오히려 복음화의 본질을 놓칠 수 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나라로의 전인적인 변화이자 더불어 그와 관련된 모든 시공간의 변화를 함께 수반하는 것이다. 굳이 말한다면 복음화는 '신자화'라기보다 '보편적 일반인에 대한 그리스도적 신성화'다. 즉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하는 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적인 가치를 지향하며 사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종교가 제시하는 삶의 원리라고 하겠다.
나는 내가 믿는 예수를 사랑하고 죽기까지 따를 것이며, 남들에게도 가능한 내가 믿는 예수를 자랑할 것이다. 진정한 선교나 전도는 수원역이나 지하철에서 볼 수 있는 개종의 강요가 아니라 일상의 삶에 뿌리박은 사랑의 실천이기에. 고로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닮아 그대로 산다는 것이며, 이 자체가 선교요 전도가 되기도 한다. 놀랍게도 선교가 교회의 부수적 기능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적 기능인 점도 근본적으로는 바로 이 때문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교란 개념을 처음부터 달리 인식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선교개념은 주로 기독교라는 종파가 있는 영역에서 타종교와 무신론이 팽배한 비기독교적 영역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바뀌어야 한다. 즉선교란 그리스도교에서 그리스도교가 부재한 외부진영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적인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적이지 않은 삶의 영역'으로 뻗어나가야 한다. 분명한 것은 선교란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라는 사실이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義)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서로 다른 종교와 타문화에 대한 열린 자세와 오직 예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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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에 있어서 먼저 알아둘 것은 이웃종교를 인정한다고 해서 이것이 곧바로 기독교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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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지구상의 많은 종교들 가운데서 유대교, 이슬람교뿐만 아니라 여기서 한 가지에서 나온 기독교 또한 그 고유의 배타성을 가지고 있어서 종종 세계사에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었다. 앞서 말한 훼불사건 같은 보수 기독교인들의 만행들은 우리 사회 안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이슈들이다. 무엇보다 이를 저지른 자들은 자신들의 그러한 행위를 '죄'라고 생각하기보다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거사라고 생각한다는 점에 그 심각성이 놓여 있다. 그러한 점 때문에 나 자신은 적어도 포용주의 입장만큼이라도 견지하길 바란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진보적인 신앙인들의 경우는 이웃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딜레마가 있다. 이른바 '기독교의 아이덴티티'에 관한 부분이다. 기독교의 정체성을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약점을 두고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그렇다면 굳이 부처나 한울님을 믿지, 뭣 하러 예수를 믿느냐?"며 따지려 든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에 있어서 먼저 알아둘 것은 이웃종교를 인정한다고 해서 이것이 곧바로 기독교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점은 앞서도 잠시 설명했지만 오히려 기독교의 심원한 자리가 타종교의 지평과도 만날 경우 시공간적 맥락의 언어를 넘어선, 그 궁극적 지평에선 기독교적 영성의 확대를 이뤄놓는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자, 그런데도 우리가 선뜻 내키지 않는 거부반응을 하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물론 교리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일단 그것은 비기독교 문화에 익숙하지 않는 정서적 요인도 무시할 순 없다고 본다. 사실상 정서적 경험은 논리적ㆍ이성적인 차원보다 더 근본적인 경험의 차원이다. 법정스님의 말씀이 반기독교적이었던가? 무소유(無所有)에 대한 가르침도 충분히 성서적으로 볼 수 있잖은가. 그럼에도 만약에 법정스님이 스님 옷을 입고 교회에서 말씀을 전한다고 상상해보라. 그 대면에서부터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즉 그것은 바로 낯선 문화에 대한 느낌이 이성적 고찰을 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정서적 반감으로 이어지는데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보수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불교는 물론일뿐더러 심지어 가톨릭 신자들까지 이단시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그 열매로 그 나무를 판단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문화란 것은 사람들의 삶을 결속하는 정신적 원리들이 시·공간적 특질의 영향을 덧입고서 나타나는 저마다의 삶의 양식을 의미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관건은 바로 정신적 지평의 개혁인 인식의 전환이다. 우리가 타종교 혹은 타문화에 대해서도 열린 인식에 서 있다면 다양한 문화에 대해서도 충분히 정서적 낯섦도 극복하고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종교 간의 대화와 친목을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쯤에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굳이 부처나 한울님을 믿지, 뭣 하러 예수를 믿느냐?"고 말이다. 이에 대해서 답해보자. 즉, 나는 다시 부처를 믿을 것인가? 물론 이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아니요"다.
나는 이미 예수님 한 분으로도 족하다. 나의 그릇은 '오직 예수' 한 분을 통해서도 충분히 채워지고도 남는다. 그럴 경우 굳이 멀리 있는 병원에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가까이 있는 병원에서도 충분히 병을 치료할 수 있는데 왜 일부러 멀리 있는 병원을 찾아간단 말인가? 이미 예수는 나의 삶에 있어서 뗄레야 뗄 수가 없는 익숙한 분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굳이 그것을 바꿀 필요가 있단 말인가.
단지 기독교와 불교는 그 고유의 특질을 저마다 강조함으로써 진정한 종교 간의 대화와 소통이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기에,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불교는 불교대로 각자의 고유의 정체성을 살리면서 제대로 믿기만 하면 그 뿐이라는 것이다. 그럴 경우 결국엔 그 심오한 지평에서 진리의 넓은 바다에까지 도달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종교다원주의가 신경 쓰이든 말든 오직 예수 한 분만 믿더라도 상관없다. 그렇지만 대신에 제발 좀 깊게 믿어 달라"는 것뿐이다.
부시족 마을과 선교에 대한 입장
이때 보수적인 기독교인은 또다시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비기독교 국가나 지역에 대해 그리스도교의 예수를 알려야 할 필요가 전혀 없잖은가?"라고. 이른바 선교에 대한 명분을 어디서 찾을 수 있냐는 항변인 셈이다. 나는 앞서 선교란 '그리스도적인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적이지 않은 삶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밝혔다. 이를 일단 상기하면서 예를 하나 들어보려 한다.
혹시 '부시맨'이라는 영화를 본 적 있는가? 부시맨이 콜라병 하나로 한때 전 세계 영화팬들을 웃겼던 코믹 영화다. 그 영화에 보면 부시맨이 사는 아프리카 고향 마을은 어떤 면에서 원시적인 문명의 마을이지만 불만과 다툼이 없는 평화스런 삶을 지내고 있는 곳으로 나온다. 즉, 부시맨이 살았던 아프리카 마을은 분명하게 평화공동체였다는 사실이다.
이때 보수 기독교 측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저들은 예수를 모르니 부시족 마을엔 예수가 없다, 가서 예배당을 짓고 예수를 믿게 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일 것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인해 지금까지 기독교 국가들은 아무리 험하고 먼 나라일지라도 깊은 오지에까지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기독교 제국주의'와 '크리스트교 문명우월주의'라는 시각이 쉽게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다고 하겠다.
실제로 르네상스 이후의 지리상의 발견과 더불어 근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확장은 프로테스탄트라는 개신교 세력의 확장의 역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겠다. 우리는 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이 크리스트교의 보급과 불가분의 관련임을 잘 알 것이다. 이때의 개신교 선교 입장은 당연히 기독교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보는 배타적ㆍ보수적 입장으로 전래되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바람직한 선교 정책은 일단 여기서 부시족 마을을 유지하고 있는 그 화목함과 평화스러움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 때문에 연유하고 있는지를 우선은 진지하게 고찰해보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바로 이 점에서 선교의 기본적 자세는 적어도 타문화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선행되는 자세가 먼저 요구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부시족에겐 그들 나름의 하나님 혹은 예수가 이미 내재해 있다고 볼 수 있는 그러한 가능성 또한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해 보라. 이들의 다툼 없음과 선한 본성이 궁극적으로는 어디로부터 연유된 것인지를. 하나님은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선한 열매들의 진원이 아닌가. 즉, 부시족 공동체의 삶의 결속 원리들을 일단은 한 번쯤은 먼저 이해해보자는 것이다.
이같은 이유로 진보적인 선교정책은 보수적 기독교와는 달리 부시족들의 평화스러움과 선함이 나오게 된 이들 나름의 종교적 원리와 문화적 양태를 먼저 주의 깊게 파악하고 인지하려는 쪽으로 나아간다. 여기에는 타종교와 문화에 대한 폄하와 배타적 시각보다 타문화권을 이해하는 자세에 더 큰 무게가 실려 있다고 하겠다. 바로 이러한 작업이 선행된 이후에야 비로소 그 자신의 기독교가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여지를 모색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잖은가. 상대를 먼저 이해해 보고서 내가 가진 것을 전해보자는 것이다.
그럴 경우 저들이 이미 생활에서 선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믿는 우리가 채울 수 있는 측면이 있고 동시에 저들에게서 우리가 채움을 받을 측면 또한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필자로선 가장 좋은 자세라고 본다.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주는 입장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매우 거만한 문화적 자세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시 부족이라고 여겨왔던 그들을 통해서도 우리들에게 무언가 깨우침을 전해주실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종교간의 대화의 목적은 서로를 살찌우는 <상호변혁>에
적어도 저들에게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임할 그 가능성마저 우리가 빼앗아버린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 보시기에도 매우 어리석은 독단과 교만일 수 있다. 그렇기에 저들의 부족함과 우리의 부족함 모두의 가능성을 고려하여 서로가 서로를 풍요롭게 살찌우는 기독교 선교 정책이야말로 풍요로운 인류 문명의 역사와 전망을 위해서도 가장 효과적이고 적절한 선교 정책 이라고 생각된다. 만일 저들의 신실함이 기독교의 신실함과 만나서 결국은 저들도 예수의 진면목을 알게 된다면 필시 저들 역시 예수의 가르침을 거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두 문명은 조화롭게 소통되고 서로가 서로를 풍요롭게 키워줄 수 있다. 부시족의 삶을 지배하는 종교적 원리와 기독교의 종교 원리가 서로 같다고도 보진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별개의 변별적인 차원의 것으로도 보지 않는다. 간디의 삶이 예수의 사상에 위배된다고 보는가. 단지 그들은 야훼나 예수라는 그 표상적 언명을 몰랐을 뿐, 그 너머에 있는 종교적 신념의 풍부한 정신사적 재산들은 충분히 그들 나름의 언명으로 숙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때 간디는 예수를 믿고자 결심하여 교회에 들어가려 한 적 있었는데, 당시 영국인들만 교회에 들여보내는 바람에 그냥 예수 믿는 것을 관뒀다고 한다. 만약에 간디가 예수를 정말 제대로 알았다면 그가 예수를 아예 믿지 않았을 리 만무한 것이다. 이 점은 그의 삶의 열매를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잖을까 싶다. 이처럼 부시족 마을이 예수를 제대로만 알게 될 경우 그들이 예수교를 거부할 리가 만무하다. 그럴 경우에 기독교 선교는 참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면서 전파된다고 하겠다.
서로 똑같지 않아도 가능한 하나님나라를 위한 소통과 연대
그렇다면 정작 오늘 예수의 도를 전하는 자각인들에게 맡겨진 선교의 오지는 어디일까? 내가 보기에 오늘날 정작 파고 들어가야 할 선교 영역은 놀랍게도 기존 기독교 그 자신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일 것은 기독교 안에도 보수와 진보가 있듯이 타종교에도 역시 보수와 진보가 있다고 할 때, 나는 에큐메니칼의 진정한 의미도 예수의 삶을 따를 수 있는 전세계 진보 세력들의 일치와 연대라고 생각한다(그런 점에서 소위 근래 회자되기도 하는 한기총과 NCC의 통합 논의는 이에서 좀 벗어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진보가 꼭 옳다거나 무조건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하나의 종교적 범주 안에 있어서도 진정한 종교인, 즉 자각인은 늘 그랬듯이 소수자였다는 점이며, 합리적 종교인이라면 기독교라는 종파마저 넘어선 더 큰 차원의 전(全)지구적 지평에서 '도(道)는 하나(一)로 통함'을 통찰하리라 본다. 이것은 종교가 ‘똑같이 하나로 획일적이어야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닮지 않았어도 충분히 소통과 연대를 할 수 있다’ 의 차원에 속한다.
결국 타종교에 대한 나의 입장을 정리한다면, 나는 진리를 향한 모든 종교의 가르침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내가 믿는 예수의 가르침을 널리 설파하며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나는 나의 구주 되신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도 자랑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법정스님 같은 선한 삶을 사는 타종교인들마저 경계하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경계해야 할 것은 타문화나 이웃 종교의 가르침이 아니라 세계 안에 비인간화를 양산하는 모든 억압의 기재들이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생명을 죽이고 평화를 좀먹는 사탄의 체제요, 사탄으로부터 비롯된 것들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땅에서 끊임없이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실천하며 생명 살림을 지향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향한 구원의 길과도 맞닿아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이란, 참으로 인류의 삶을 바르게 증진시키며 모든 우주적 생명들을 살리는 것일 게다. 그것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하나도 남김없이 실질적이고도 전인적으로 구원받는 통로이자 살 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맹목적 충동들이 난무하는, 불완전하고 삭막한 이 세계에 진리인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혹은 구원의 길을 제시한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눈먼 자의 눈이 뜨이고, 듣지 못하던 귀가 열리며, 말하지 못했던 입이 소리쳐 하나님나라를 증거하는 역사가 있어야 하지 않은가. 만일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진리 안에 있다고 확신할 것이다. 진실로 그것이 참진리일 경우, 그것은 언제나 나와 관계된 모든 삶의 영역을 변화시키는 열매로도 이어진다는 점을 우린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예수의 삶이 내 삶의 중심에 있다고 했을 때, 실제적인 나의 삶은 진짜 어디에 있는가? 실로 선교의 문제도 깊이 따져보면, 이 역시 나의 중심에서부터 하나님나라가 시작되어 결국은 나를 넘어선 비그리스도적 삶의 영역인 세계에로 설득적이고도 풍요롭게 뻗쳐나갈 뿐이다. 여기서 그 전도 방법이 바로 ‘무조건 믿어라’고 주입시키는 것이 아닌 ‘설득적 합리성에 따른 너와 나의 성장’으로, 또한 무조건 배타시하는 것이 아닌 ‘관심과 이해에 기반한 더 큰 사랑’으로서 나타날 때, 우리는 비로소 지금 여기에서부터 이뤄지는 하나님나라의 현재적 확장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