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천장
조선시대에 들어 온천을 이용한 건강 요법과 온천이 지닌 치병 효능이 알려지면서 온천 활용이 일반화되기 시작했고, 온천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온천 이용의 제도화도 시행되었다.
삼국 시대부터 온정(溫井)으로 유명했던 금산 마을[동래 온천]은 이수광(李睟光)[1563~1628]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도 좋은 온천으로 손꼽혔다. 이곳이 본격적인 근대 관광지 온천장으로 개발된 것은 일제 강점기 전차가 들어서면서였다. 동래 온천과 금강원은 일제에 의해 조성된 식민지 관광의 환락 공간으로 변모했다.
동래 별장과 금강 공원을 옆에끼고 있는 온천장은 해방 후 영욕의 세월을 거친 다음에야
시민들이 노천 족욕을 즐기는 문화 공간
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온천장을 노래하거나 배경으로 삼은 문학 작품 수는 적지 않은 편이다. 이경수의 민요시 「동래온천(東萊溫川)」[1924], 조순규(趙淳奎)[1908~1997]의 「봉래유가(蓬萊遊歌 ) 등에서 일제 강점기 온천장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경수의 「동래온천」 중
“삼남(三南)의 베파튼/ 죽이 돈은/ 온천장(溫泉場) 독탕(獨湯)에/ 다 녹아난다/ 아서라 기생(妓生)아/ 곤댓질 말어라/ 네 얼굴 그립어/ 예 온 줄 아늬.”
조순규의 「봉래유가」 중
“무궁화 삼천리(三千里) 좁지 않흔 벌에/ 동래(東來)야 온천(溫泉)만치 고은 곳 잇스랴.”
이경수의 시는 왜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한량과 토호, 기녀들의 흥청거리는 온천장의 풍속을 안타까움과 조소의 시선으로 묘사하는 데 반하여, 조순규의 시는 풍속은 배제한 채 공간의 예찬에 집중하고 있다.
위 두 시가 온천장의 지배적인 공간성·장소성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면, 새로운 장소성의 배태를 예언하고 있다.
소설에서 동래 온천이란 지명이 처음 나오는 작품은 최서해(崔曙海)[1901~1932]의 「누이동생을 따라」[1930]이지만 본격적으로 이곳을 그린 작가는 부산을 대표하는 두 소설가 김정한(金廷漢)[1908~1996]과 이주홍(李周洪)[1906~1987]이다. 김정한의 「그러한 남편」[1939]은 동래읍에 대한 묘사는 별로 없지만 토박이의 눈으로 동래를 바라보는 최초의 소설
이다.
이주홍의 「지저깨비들」[1966]은 정미소를 일터 삼아 삶을 영위했던 지게꾼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 보이는데, 동래 일대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주홍의 「동래금강원」[1969]은 온천장의 한 풍속 토끼탕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토끼는 1960년대 초까지 사용되었던 은어로 온천장에서 매매춘에 종사하는 아가씨를 일컫는 말이다.
이 외에도, 지금의 동래경찰서 맞은편에 해당하는 옛 온천장 전차 종점의 풍경을 배경으로 한 손창섭의 「비오는 날」[1953], 세병교 넘어 동래역 가기 전 연밭에서 연뿌리를 캐는 광경을 담고 있는 윤후명의 「모든 별들은 음악 소리를 낸다」[1982] 등을 꼽을 수 있다.
1940년대 온천장 전경
1910년대 초 온천장입구 경편철도 종점
온정기념비
1966년 온정을 크게 고치면서 기록한 기념비
확장 전 온천욕장
1923년 6월 확장한 동래면 운영
온천욕장과 내부
일본인 전욜 대중욕장 내외부
대중욕장 거리
봉래관 주변 전경
온천장 전차종점 앞 거리풍경
1920년대 호화여관 봉래관 정원이었던 인공호수
현 농심호텔 주차장과 허심청 자리
1940년대 금산마을 전경
동래 온천장은 한일합방이 된 1910년 말 부산진과 동래 사이를 잇는 경편철도(輕便鐵道 : 궤도가 좁고 몇 대의 객차가 딸린 일본형 기차) 부설과 더불어 일본인들의 본격적인 진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20년 경편철도 대신 전차가 운행되고 전기가 가설되면서 대규모 일본자본에 의해 이미 오늘의 형태에 가까운 근대적 온천지로서 골격이 짜여져 갔다.
전차 개설, 요정 겸한 여관 등장
광복 전까지 명성을 날렸던 일본인의 나루토여관(鳴戶旅館·신일호텔) 아라이여관(荒井旅館·금호장)이 생긴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일본인의 상술에 눈뜬 우리나라 사람들도 뒤이어 온천장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침전관 김천관 계산관 명월관 산해관 등의 여관이었다. 물론 이 때의 여관이란 모두가 목욕탕과 요정을 겸한 곳이었다.
동래 온천장의 발전과 함께 동래 기생들의 활동도 자연 활기를 더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래권번에서는 조선 기생들의 품위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절대로 몸가짐과 행동을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교육시켰다.
일제 공창제도 시행·무너진 성윤리
일본인들은 1916년에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령으로 공창제도(公娼制度)를 시행하여
매춘제도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는 우리의 엄격했던 성윤리를 무너뜨리며 사회 전반에 악영향을 미쳤다. 부산에도 미도리마치(綠町·충무동 속칭 완월동)와 마키시노마(牧島·영도 봉래동 해안 부근) 공창이 설립되어 일본인들은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도 출입이 늘어나고 있었다.
동래권번은 이러한 일본인들의 공공연한 매춘제도에 대한 일종의 반발로 더욱 철저하게
가무음곡(歌舞吟曲)의 기예(技藝)만 보여주는 예기(藝妓)로서의 품위와 긍지를 지키려 노력했다. 동래기생들은 손님들이라고 아무나 접대하지는 않았다. 양반집 자제들이나 신분이 확실한 손님이 아니면 자리를 함께 하거나 손님으로 받지 않았다.
동래부에서 관리하던 교방청 예기
하지만 그들의 활동무대가 요정으로 한정되는 1920년대를 넘어서면서 이러한 선별은 차츰 무의미해졌다. 음주의 풍속이 서서히 변하면서 기생집을 직접 찾는 사람은 없어져버리고, 오직 요정의 부름에 따라 주연(酒宴)에 나가서 손님을 접대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절대로 드러내어 매춘을 하지는 않았다.
엄격한 몸가짐, 기생사회 서열화
기생들 가운데 행실이 좋지 못하다던가 손님들 앞에서 몸가짐을 소홀히 하여 실수를 범하거나 몸을 함부로 굴리는 일이 발견되면 당장 행수기생(行首妓生)들이나 호장(戶長 : 권번의 기생을 관리하고 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에게 엄한 벌을 받아야 했다. 심한 경우는 아예 권번의 명단에서 이름을 삭제해 내쫓기기도 했다.
한편 학생들 가운데서도 우등생이 있고 열등생이 있듯이 기생사회에도 그들이 가진 기예의 정도나 자질에 따라 알게 모르게 등급이 형성되기도 했다. 특히 조선조 말기에 들어서면서 기생 사이에도 확연하게 등급이 구분되어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나누어 불렀다.
일패 기생이란 가무와 음률의 실력을 제대로 갖추어 주로 상류층들의 연회에 참석하여
흥을 돋우어 주는 예기들이었다. 관기(官妓)의 전통을 가장 잘 계승한 기생들로서 일제
강점 하에서도 우리 가락과 춤사위를 보존하고 발전시켜온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작고한
근대 명창 명무들이며 오늘날 생존해 있는
국악계의 원로 거성들 가운데 여자들은 거의 모두가 지난날 일패 기생출신들이다. 남자들의 경우는 권번의 악사 출신들이 많다.
이패 기생이란 얼굴이나 몸매는 웬만큼 빼어나 술시중은 들만하나 가무나 음률의 재기는 신통치 못한 기생들이었다. 흔히 ‘꽃기생’이나 ‘화초기생’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들은 특별한 예기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몰래 몸을 팔아 생활해야 했다. 그래서 은근하게 매춘을 한다고 하여 ‘은근자(慇懃者)’라 부르기도 했다. 이패 기생들은 대부분 미모였기 때문에 토호들이나 거상들의 애첩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덕분에 두둑하게 살림을 얻어내거나 젊어서 알뜰하게 재산을 모아 만년을 편안하게 보내는 기생들도 적지 않았다.
삼패 기생이란 ‘다방모리’라고도 불렀는데 매춘을 아예 직업적으로 삼는 기생들을 일렀다. 특별한 재주도 없고 인물도 변변하지 못하여 몸이라도 팔지 않고는 생계가 어려운 기생들이었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품행이 좋지 않아 권번에서 쫓겨났거나 스스로 물러난 기생들이었다. 권번에서는 이들을 기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기생 출신이란 것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기생으로 불릴 뿐이었다.
원래 기생들은 머리를 밀기름으로 바르고 앞가리마를 곱게 타서 빨간 댕기를 물리고 옥비녀를 꽂아 얌전하게 쪽을 지게 했다. 그러나 삼패 기생들은 머리를 풀기 쉽고 만지기 쉽게 그냥 ‘다발지어서’ 틀어 올렸다. ‘다방모리’라는 호칭도 ‘다발지어 쪽진 머리’라는 뜻에서 생겼다. 한자도 다만 음을 빌려 왔을 뿐 아무 의미도 없다.
서울의 경우 삼패 기생들은 가무음률을 위주로 하는 전통적인 기생의 자격이 없다 하여,
손님을 받을 때는 기생처럼 함부로 가무를
못하게 규제하고 잡가(雜歌)만 부르게 했다. 특히 남부의 시동(詩洞·을지로 2, 3가 부근)을 삼패 기생들의 거주지역으로 정하여 사방에 흩어져 술집을 열고 있는 이들을 모아 집단
거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삼패가 사는 집을 ‘상화실(賞花室)’이라 부르게 했다. 일종의 적선지구를 만든 셈이었다. 지금의 서울 중구 쌍림동 근처에는 신정유곽(新町遊廓)이라는 것을 만들어 떠돌이 매음녀들을 모아 집단 매춘업을 하도록 공창을 만들기도 했다.
기예대회 통해 철저한 관리
동래에서도 삼패 기생들은 부산에 공창이 생기자 그곳으로 흡수되었다. 이로써 삼패 기생이란 명칭도 자연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일패 이패의 구분도 차츰 흐려져 갔으나 ‘꽃기생’이란 이름은 후일에까지 남아서 예기와는 엄격히 구분했다.
권번에서는 매월 한번씩 소속된 모든 기생들을 대상으로 기예대회를 열었다. 대회라고
불렀으나 요즘 학교의 월말고사 같은 성격의 각종 예능 실기시험이었다. 이 대회에서 각자의 예능 기량을 평가하여 부족해 보이는 부분은 지적해 별도로 교육을 받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