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지 줍는 노인
엄상익
한 모임에서 고위직 법관을 지낸 팔십대 노인이 이런 말을 했다.
“며칠 전 동네 과일가게 앞에 무심히 서 있었어. 가게 주인이 갑자기 나를 보면서 ‘할아버지 여기 박스 없어요’라고 하더라구. 무슨 소린지 몰라 한참을 멍하게 있었어. 그러다가 알아차렸지. 그 가게 주인은 나를 폐지 줍는 노인으로 알고 말한 거야.”
나이를 먹으면 내남없이 다 초라해 보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들 브랜드있는 옷을 입고 고급시계를 차기도 하나 보다. 그 분이 재판장을 할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근엄해 보이는 법복을 입고 등 높은 법대의자에 앉아서 소송을 지휘할 때 그의 모습은 왕이나 제사장 같아 보였었다고 할까. 세월은 모든 게 서서히 붕괴 되어 가는 과정이다.
내가 알던 혜화동에 살던 부자 노인이 있었다. 보통 부자가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이름있는 재벌 회장중에서 그에게 돈을 꾸어가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 노인은 수많은 문화재급 보물을 가지고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회사와 함께 학교, 박물관, 증권회사등의 실질적 소유자였다. 그 이웃에 사는 금융그룹의 회장 부인으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었다.
“우리 동네 사는 그 회장님 말이죠. 카트를 끌고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폐지를 줍는데 왜 부자 노인이 그렇게 궁상을 떠는지 몰라.”
부자 노인이 폐지를 줍는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다. 궁상이 아니라 보통사람들 인식의 벽을 넘는 부자의 사회적 겸손으로까지 봐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폐지를 줍는 부자 노인의 마음은 걸리는 게 없이 당당할 것이다.
나와 같은 대학 출신의 목사로부터 들은 얘기다. 그는 목사가 된지 십 년이 지나도 교인이 열 명도 안되더라고 했다. 그는 목회의 방향을 노숙자 쪽으로 바꾸기로 했다. 그는 폐지를 줍는 목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고물상에 가서 그 일을 알아보았다. 리어커를 하루 빌리는데 오천원이고 폐지는 키로그램당 백 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폐지 줍는 일을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그 일이 익숙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가 리어커를 끌고 가는데 저 멀리 빌딩 앞에 두툼하게 쌓인 신문지 뭉치가 보였다. 그에게는 보물같이 보이는 폐지덩어리였다. 그는 리어커의 손잡이를 꽉 잡고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가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찔떡 거리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옆으로 돌아보니 왠 할머니가 다리를 절면서 카트를 끌고 그 신문지 더미 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 목사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그는 다리를 절룩거리는 할머니에게 폐지 덩이를 양보하고 다른 골목길로 방향을 돌렸다고 했다.
남해쪽 지방 도시에서 법률사무소를 하는 팔십대 노인 변호사가 있다. 그는 청년시절 등에 커다란 광주리를 메고 양철 집게를 들고 다니면서 폐지를 줍고 다녔다. 우리가 어렸던 시절 그런 사람들을 ‘넝마주이’라고 불렀고 ‘양아치’라고도 불렀다. 그는 소년 시절 넝마주이로 폐지를 줏으러 다니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본 시장 과일가게 주인이 그에게 국밥집에서 이년간 공짜로 밥을 먹게 했다. 그 청년은 몇 년후 고시에 합격하고 검사가 됐다. 그는 결혼 후 아내와 함께 밥을 먹게 해 줬던 과일가게 주인을 찾아와 큰 절을 하고 봉투에 든 돈을 주었다. 은혜에 대한 보답이었다. 그는 위대한 넝마주이였다.
나는 몇 년 전 서울역과 탑골공원 뒷골목에 나가 ‘거리의 변호사’노릇을 한 적이 있다. 그 골목에는 커다란 고물상이 있고 그곳으로 폐지가 가득한 리어커나 카트를 끌고 노인들이 들어가는 모습을 봤다. 먹고 살기 위해서 늙어서도 허리가 굽고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힘에 부치는 노동을 하는 그들을 보면서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절대적 가난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내 주위에도 널려 있었다. 넝마주이 출신 변호사같이 우리는 그 개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목숨을 걸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성경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예수에게 비싼 향유를 바친 여인을 보고 제자가 비난했다. 그 향유를 팔면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데 왜 그러냐고. 예수는 여인을 놔두라고 했다. 그러면서 가난한 사람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했다. 영원한 가난에 대한 예수의 말이 목의 가시같이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제자의 말도 위선같이 들린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의 것이다라고 했다. 안목이 얕은 나는 깊은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출처] 폐지 줍는 노인|작성자 엄상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