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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송광사(順天 松廣寺)
시대 고대/삼국/신라
문화재 지정 사적 제506호
건립시기 신라말기
성격 사찰
유형 유적
면적 44,297㎡
소재지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안길 100 등 (신평리)
요약 :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조계산(曹溪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혜린 관련 사찰. 사적.
목차접기
개설
역사적 변천
내용
개설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이다. 대길상사(大吉祥寺)·수선사(修禪社)라고도 하며,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우리 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의 하나로 승보사찰(僧寶寺刹:훌륭한 스님을 가장 많이 배출함으로서 얻어진 이름)로서 매우 유서깊은 절이다.
역사적 변천
1. 명칭유래
‘송광(松廣)’이라는 절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松廣山)에서 비롯된 것으로, 송광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이 있다.
먼저, 구전(口傳)해 내려오는 전설에는 이 산이 장차 ‘십팔공(十八公)이 배출되어 불법(佛法)을 널리[廣] 펼 훌륭한 장소’이기 때문에 송광이라 하였다고 한다. 소나무 ‘송(松)’자를 ‘십팔공(十八(木)+公)’이라고 파자(破字)하고 ‘광(廣)’자를 불법광포(佛法廣布)의 뜻으로 해석한 데서 유래한다.
또다른 전설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이 절터를 잡을 때 나복산(羅逗山:현재의 母后山)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木鴟]를 날렸더니 국사전(國師殿)의 뒷등에 떨어져 앉았으므로 이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鴟落臺)라고 불렀다 한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 하여 최남선(崔南善)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鴟의 방언)라고 풀었다.
끝으로, 김영수(金映遂)는 이 산에 ‘솔갱이(松의 방언)’가 가득 차 있었으므로 지방사람들이 이 산을 예로부터 ‘솔메’라고 해 왔으며, 그래서 송광산이란 이름이 생긴 것으로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송광의 ‘광(廣)’은 원래 언덕을 의미하는 ‘강(崗)’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승려 임석진(林錫珍)도 『송광사사지』를 저술하면서, 김영수의 해석을 가장 타당하다고 보았다. 산에 소나무를 많이 심어 바위가 드러나지 않게 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2. 창건과 변천
송광사의 창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송광사사적비(松廣寺事蹟碑)」와 「보조국사비명(普照國師碑銘)」 및 『승평속지(昇平續誌)』 등을 보면, 신라 말기에 체징(體澄)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며, 그 당시에는 길상사(吉祥寺)라고 불렀고, 승려 수는 30명 내지 40명을 넘지 못하는 규모의 절이었다.
그 뒤 고려 인종 때의 석조(釋照)가 중창하려는 원(願)을 세우고 역부(役夫)를 소집하고 임목(林木)을 준비하였으나, 완공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얼마 동안 길상사는 거의 폐허화되었다.
50여 년을 지난 뒤 보조국사가 이곳으로 정혜사(定慧社)를 옮겨와 새 규모의 사찰로 발전하였다. 보조국사가 송광사를 대수도도량으로 만들 수 있었던 연원은 1182년(명종 12) 개성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하여 수행결사(修行結社)를 약속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법회에 참석하였던 승려들에게 도를 닦을 것을 간곡히 권유하여,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맹문(盟文)을 지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맺을 것을 기약하였다.
그 뒤 10년이 지나, 정혜결사를 약속하였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인 득재(得才)가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 머물면서 1188년 봄에 결사를 기약하였던 지기(知己)들을 모은 뒤 보조국사를 청하였다. 그 뒤 1197년에 보조국사는 결사의 동지들과 함께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 들어가 3년 동안을 정진하다가 송광산 길상사로 옮겨와 자리를 잡았다.
이때부터 조선 초기까지를 조계산 수선사시대(修禪社時代)라 부르는데, 이는 즉위하기 전부터 보조국사를 존경하였던 희종(熙宗)이 송광산 길상사의 이름을 고쳐 조계산 수선사로 하도록 친히 글을 써서 제방(題榜)을 내렸기 때문이다. 1210년 보조국사가 입적하자 그의 고제자 혜심(慧諶)은 왕명에 의하여 조계산 수선사의 제2세주가 되었다.
그때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180여년 동안 15명의 국사가 이곳을 중심으로 수선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나라 선종을 이끌어왔으며, 이와 같은 탁월한 후계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송광사는 승보사찰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된 직후, 송광사 16번째의 국사에 해당하는 고봉화상(高峰和尙)이 이곳에 왔을 때에는 상당히 황폐한 상황에 있었다. 고봉은 1395년(태조 4) 불(佛)·법(法)·승(僧)의 전당(殿堂)을 중건하였고, 1399년(정종 1) 왕은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도록 윤지(綸旨)를 내렸다. 1420년(세종 2)에는 고봉의 뒤를 이어 중인(中印)이 당우도 증축하였고, 절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정종 때에 설립되었던 수륙사를 철폐하고 선종(禪宗)으로 복귀시키는 행정적인 절차도 밟았다.
그 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수각(水閣)·임경당(臨鏡堂)·보조암(普照庵)·천자암(天子庵) 등이 소실되었을 뿐 아니라, 왜군의 노략질을 견디다 못한 승려들이 다른 사찰로 옮겨가거나 속가로 되돌아감에 따라 한때 폐사가 되다시피하였다. 이에 응선(應善)은 1601년(선조 34) 수각을 1604년과 1606년·1608년에 천자암과 보조암·임경당을 차례로 중건한 뒤 당시 지리산에 있던 부휴(浮休)를 모셨다.
부휴는 1609년 제자 400여 명을 거느리고 이곳으로 옮겨와 조전(祖殿)과 동행랑(東行廊), 천왕문 등을 새로 짓고 기타 건물을 보수하였다. 그 뒤 600여 명의 송광사 승려들이 부휴를 모시고 동안거(冬安居)를 성대히 보냄으로써 근세에 이르는 송광사의 명맥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1842년(헌종 8) 3월 2일 낙하당(落霞堂)에서 일어난 화재로 대웅전을 비롯하여 불우(佛宇) 5개 소, 승료(僧寮) 8옥(屋), 공사(公舍) 12곳 등 2,152칸이 소실되었으며, 유물로는 대웅전의 삼존상(三尊像)·경판 및 외향각(外香閣)의 유조(柚槽:감탕나무로 만든 구유), 창고에 있던 모든 소장품이 소실되었다. 이듬해 기봉(奇峰)과 용운(龍雲)은 대웅전·명부전·응향각(凝香閣)·법왕문(法王門) 등을 차례로 중건하였다. 그런데 1856년(철종 7)까지 중창에 소요된 기간은 14년이었으며, 경비와 총액은 1만 1,290냥(兩)에 달하였다.
그 뒤 율암(栗庵)은 관의 협력을 얻어 1923년에서 1928년 사이에 용화당(龍華堂) 등 9채를 중수하였고 명성각(明星閣) 등 7채를 중건하였으며, 사감고(寺監庫)·장탄문(墻坦門)을 신축, 종각을 증축하였다.
1948년 1월 여수반란사건과 6·25전쟁으로 조계산 일대에 무장공비들이 잠입하자, 공비 토벌을 위하여 국군은 작전상 절 주변의 나무를 벌채하였다. 이에 공비들은 절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키다가 1951년 5월 대웅전 등 절의 중심부를 불태웠다.
1955년에서 1963년 사이에 취봉(翠峯)과 금당(錦堂)은 불탄 건물을 다시 창건 또는 중창하였다.
1970년대에는 조실인 구산(九山)이 설법전·수선사·화엄전 등을 보수하였고 조계총림(曹溪叢林)으로 부활하여 수선사의 전통을 되살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983년부터 1990년에 이르기까지 주지 현호(玄虎)가 대웅보전·지장전·승보전(僧寶殿) 등 크고 작은 건물 20여 동을 새로 세우거나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용
1. 가람배치 및 당우
『사적기』에 의하면 고려 명종 때 이미 80여 동의 건물을 가진 대사찰이었고, 1951년 공비들에 의하여 소실되기 전만 하여도 건물 총수가 80여 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현재는 약 50여 동의 대사찰로 그 사격(寺格)을 유지하고 있다. 중요한 건물은 대개가 서향하여 있다.
6·25전쟁 전만 하여도 가람배치가 법계도(法界圖)의 도표처럼 배치되어 비를 맞지 않고 경내를 다닐 수 있었으며, 대방(大房)만도 6방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었다. 6방은 남쪽의 법성료(法性寮)·해청당(海淸堂)·행해당(行解堂)과 서쪽의 문수전(文殊殿)·임경당·도성당(道成堂)을 이른다. 동구(洞口)에서부터 현존하는 건물을 중심으로 배치된 가람의 모습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 청량각(淸凉閣)·일주문
청량각은 송광사가 자리잡은 조계산의 계곡물이 동구에서 굽이치는 지점의 깊숙한 계곡에 홍교(虹橋)를 쌓아올려 그 다리 위에 조성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21년에 중건하였고, 1972년 승주군의 보조에 의하여 중수하였다. 청량각에서 500m 오르면 일주문이 있고, 일주문 앞에는 송광사의 역대 고승 및 공덕주의 비석들이 있다. 다포(多包)로 형성된 일주문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이 문의 현액이 보통 옆으로 한 줄로 쓰이는 데 대하여 종서로 씌어 있어 특이하다.
② 척주각(滌珠閣)·세월각(洗月閣)·우화각(羽化閣)
일주문 뒤쪽에 4방 1칸씩의 몹시 작은 건물이 두 채 있는데, 현판에 척주각·세월각이라 하였다.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건물이다. 죽은 이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재식시(齋式時) 영가(靈駕)의 관욕처(灌浴處)가 된다고 한다. 즉, 망령도 남녀를 갈라서 척주각은 남자 영가를 위한 관욕소이고, 세월각은 여자 영가의 관욕소가 된다. 영가가 절에 들어오기 전에 이 관욕소에서 목욕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관욕소 왼쪽에는 보조국사가 스스로의 불멸을 입증하기 위하여 심었다는 고향수(枯香樹)가 있다. 높이 15m의 이 고목나무는 보조국사가 다시 송광사를 예방할 때 소생한다는 전설이 얽혀 있다. 고향수를 지나면 계곡을 지나는 곳에 능허교(凌虛橋)가 있고, 이 위에 우화각이라는 일종의 문루가 4칸 길이로 서 있다. 이곳에는 예로부터 송광사를 거쳐간 시인·묵객들이 지은 한시가 걸려 있다. 건립연대는 1700∼1711년 사이이며, 1774년(영조 50)에 중수하였다.
③ 천왕문·해탈문(解脫門)·대장전(大藏殿)·종고루(鐘鼓樓)·법왕문
이 건물들은 모두 대웅전을 향하여 일직선상에 나란히 위치하였다. 이들 가운데 천왕문을 제외하고는 1951년 공비들에 의하여 불타 버렸고, 현재 종고루만이 재건되었다. 천왕문은 1609년(광해군 1)에 초창하여 1718년(숙종 44)에 중수하였고 이듬해 봄에 내부의 천왕상을 중수하였으며, 또 100여년이 지난 1806년(순조 6)에 다시 사천왕상을 중수하고 채색하였다. 현 건물의 크기는 4방 3칸으로서 23평이며, 목조 사천왕상이 있다.
해탈문은 화재 전에 정면 3칸으로 지붕의 중앙에 낮은 규모로 1칸을 다시 올려 건물이 독특한 양상을 띠었다고 한다. 대장전 안에는 화재를 입기 전까지만 해도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었고, 사찰의 도서실로 사용되었다. 당시의 신문·잡지·도서 일체는 물론 작은 불상들이 봉안되어 있었으며, 현 박물관의 유물들은 화재 때 이곳에서 꺼내왔다고 한다. 당시 보조국사의 장삼은 유리장 속에 걸어 두었고, 가사(袈裟)는 비단으로 되어 있었으나 많이 낡아서 함 속에 펴두었는데 불타 버렸다.
종고루는 화재 이전에는 7칸 2면의 큰 건물이었고 지금처럼 아래쪽 중앙을 바로 통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1962년에 중건되었다. 현재 2층에는 범종·운판·목어·홍고(弘鼓) 등 사물(四物:네 가지의 불교의식 도구)이 있다. 법왕문은 정면과 측면 각 3칸이었으나 역시 소실되고 아직 복구되지 않았다. 이 문을 통과하면 법왕인 부처님을 봉안한 대웅전에 바로 도달할 수 있다는 뜻에서 이 문을 법왕문이라고 한다.
④ 대웅보전·설법전·수선사
대웅보전은 송광사의 중심건물이다. 1951년의 화재로 불탄 뒤 1961년에 주지 금당(金堂)이 중창하였다. 그 당시에는 내부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1구(軀) 봉안하였고, 건물은 전면과 측면 각 3칸이었다. 그 뒤 1988년의 중창 때, 평면 넓이 108평의 ‘아(亞)’자 형의 건물을 다시 세웠으며,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연등불·미륵불 등의 삼존불을 봉안하였다.
대웅전의 뒤쪽에는 대상(臺上)의 건물들로 설법전·수선사 등이 있다. 대웅전 뒤쪽으로 설법전이나 선방 등이 있는 예는 요즘의 다른 사찰에서 보기 어려운 독특한 가람배치이다.
대웅전 뒤 계단을 올라 진여문(眞如門)을 통과하면 설법전에 이른다. 설법전은 본래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두던 곳으로, 1899년 봄, 조정에서 인출한 해인사의 대장경 4부 가운데 1부를 봉안하였으나, 1951년 화재 때 설법전과 함께 소실되었다. 현 건물은 1968년 4월 30일에 재건되어 법회 등을 위한 대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수선사는 최초에 조계총림의 방장(方丈)인 보조국사의 거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는 조사당(祖師堂)으로 이용되었다. 현 건물은 1968년 여름에 착공하여 1969년에 낙성된 정면 6칸·측면 4칸의 건물이며 내부에는 커다란 둥근 거울만 있다. 이 건물은 수행하는 선객들이 이용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외국인 승려 여러 명이 함께 정진하고 있고, 일체 외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는 분위기가 차분한 선실이다.
⑤ 상사당(上舍堂)·하사당(下舍堂)·응진전
송광사의 건물은 대웅전 뒤의 높은 축대를 기준으로 대상과 대하로 대별된다. 대상의 건물로는 상사당·하사당·향적전(香積殿)·응진전·성수전(聖壽殿)·산신각·진여문·청운당·백운당·설법전·차안당(遮眼堂)·조사당·국사전·진영당(眞影堂) 등이 있다.
상사당은 하사당과 함께 남향으로 병립해 있는데 제9대 국사 담당(湛堂)이 이곳의 물을 마시고 3일 만에 오도하였으므로 일명 삼일암(三日庵)이라고 부른다. 지금의 수선사 건물을 짓기 전에는 이곳이 선방으로 사용되었다. 보물 제263호로 지정되어 있는 순천 송광사 하사당은 특수한 건물로 건축양식이 국사전과 같으며 조선 초기형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응진전은 1951년의 대화재를 모면한 1623년(인조 1)의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4칸이며, 지붕은 역시 맞배지붕이다. 내부에는 석가여래와 그의 제자 16나한을 봉안하였으며, 중앙 동쪽 벽 후불탱화(後佛幀畵)는 1724년(경종 4) 화승 의겸(義謙)이 그린 것이며, 오른쪽의 탱화는 1725년, 왼쪽의 탱화는 같은 시기에 회안(回眼) 등에 의하여 조성되었다. 응진전 바로 옆에는 노전(爐殿)의 화목을 적재하여 두는 향적전이 있다.
⑥ 국사전·진영각
국보 제56호로 지정되어 있는 순천 송광사 국사전은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상징적 건물이다. 송광사와 더불어 나라를 빛낸 국사들의 영정을 봉안하고 그들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일종의 법당이다. 이곳은 일명 자음당(慈蔭堂)이라고도 하며, 옛날에는 참선을 하는 수선장으로 이용되었다. 이곳에 봉안된 16국사는 조계종의 가풍을 선양하고 불교의 진면목을 드러낸 한국불교의 증인들이다.
진영각은 그 편액을 풍암영각(楓巖影閣)이라고 하였는데 그 까닭은 조선시대의 송광사 대덕들은 거의 다 풍암의 법손이었으므로 그와 같은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1852년에 건립되었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이 건물 안에는 주로 풍암의 문하대덕들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⑦ 약사전·영산전
보물 제302호로 지정되어 있는 순천 송광사 약사전은 송광사 안에서 규모가 가장 작은 법당이다. 건물 양식이 독특하며 내부에는 약사여래상과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순천 송광사 영산전은 보물 제30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석가여래의 소조상을 비롯하여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석가여래의 일생을 묘사한 팔상탱화(八相幀畵)가 봉안되어 있다. 중앙의 영산회상도는 1725년에 만들어졌고, 화승(怜僧)은 의겸(義謙) 등이다. 팔상탱화 역시 같은 시대에 이룩되었으나, 각기 다른 15명의 화승에 의해서 이룩되었다.
⑧ 관음전·지장전·화엄전
관음전은 1903년에 건립되었으며, 관음전의 뒤쪽 언덕에는 보조국사의 부도탑이 있다. 높이 250㎝의 탑은 고려 말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고, 4각 기단 등은 대체로 딱딱한 감을 주고 있다. 그 옆에는 ‘佛日普照國師甘露之塔(불일보조국사감로지탑)’이라고 쓴 오세창(吳世昌)의 글씨가 있다.
전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인 지장전은 유명계(幽冥界)의 시왕(十王)을 봉안하였으므로 일명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화엄전은 대웅전 서남방 약 300m 지점에 위치한다. 1641년(인조 19) 건립된 화엄전에는 송광사의 장경판본들이 봉안되어 있다. 화엄전 주위에는 53불(佛)의 석불을 봉안한 불조전이 있고, 삼성각·월조헌(月照軒)이 있다. 이 불조전은 1684년(숙종 10)에 건립되었고 1905년과 1946년에 중수하였다.
2. 유물 및 사간장경
이 절에 소장된 유물 가운데 국가지정문화재로는 국보 제42호인 순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順天 松廣寺 木造三尊佛龕)을 비롯하여 국보 제43호인 혜심고신제서(慧諶告身制書), 보물 제134호인 순천 송광사 경질(順天 松廣寺 經帙)과 보물 제175호인 순천 송광사 경패(順天 松廣寺 經牌), 보물 제176호인 순천 송광사 금동 요령(順天 松廣寺 金銅 搖鈴), 보물 제572호인 순천 송광사 고려고문서(順天 松廣寺 高麗古文書) 2점, 보물 제1376호 순천 송광사 티베트문 법지 등이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는 제18호인 자정국사 사리함(慈靜國師 舍利函), 제19호인 능견난사(能見難思), 제22호인 송광사 금강저(松廣寺 金剛杵), 제28호인 고봉국사 주자원불(高峰國師 廚子願佛) 등이 있다. 이 중 능견난사는 바루로서 풀리지 않는 신비성이 있다.
3. 산내암자
기록에 의하면, 조계산에는 모두 16개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암자들은 폐허가 된 채 유지만 남아 있거나 아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상태에 있다. 수행승이 거처하고 있는 암자는 천자암·부도암·감로암·불일암·광원암·인월암·오도암뿐이다.
이 밖에도 유지만 밝혀진 암자로는 청진암·목우암(牧牛庵)·실상암(實相庵)·판와암(板瓦庵)·상선암(上禪庵)·자정암(慈淨庵) 등이 있고, 보조암·은적암(隱寂庵)·조계암·묘적암(妙寂庵) 등은 이름만이 전할 뿐,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절 일원이 선암사 일원과 더불어 명승 제65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즈넉한 풍광, 최대 사찰 순천 송광사 [일상스케치㉟]
시사오늘(시사ON) 기사 승인일 : 2022.04.10.
글 : 정명화 자유기고가
16 국사 배출한 승보 사찰
'목조삼존불감' 등 국보 보유
법정스님 다비식이 열린 곳
이제 봄의 전령사 매화, 산수유는 떠나고 연분홍 벚꽃이 만개해 꽃비를 휘날리고 있다. 시골집 마당엔 부쩍 자라 무성해진 쑥, 보랏빛 제비꽃, 흰꽃 민들레가 봐달라는 듯 반기며 손짓한다. 바야흐로 산천이 기지개를 켜며 푸릇푸릇 초목들이 존재감을 뽐내니 어디로든 가고 싶은 계절이다.
그동안 코로나 팬데믹으로 갇혀있던 심신을 해방이라도 시킬 듯 활기찬 곳으로 달려 나가는 대신 고즈넉함을 선택했다. 잊고 있던 산사의 봄은 어떤 모양새일지, 또 '무소유'를 일갈했던 법정 스님도 떠올라 천년 고찰 순천 송강사로 봄나들이 떠났다.
혜린 선사와 보조 국사 지눌
대한민국 삼보사찰 중 하나인 송광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조계산 서쪽에 자리 잡은 참선 도량으로,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해 16 국사를 배출한 유서 깊은 절이다. 불의 통도사, 법의 해인사, 승의 송광사를 우리나라 삼보 사찰이라 하는데, 송광사는 '승보사찰'(僧寶寺刹:훌륭한 스님을 가장 많이 배출함으로써 얻어진 이름)로 일컫는다.
통일신라 말기에 혜린 선사 체징이 작은 암자를 짓고 길상사라고 한 것에서 비롯된 후 고려 명종 때 보조 국사 지눌이 크게 고쳐 지었다. '송광'이라는 이름은 조선 초기 소나무가 많아 ‘솔뫼’라고도 불리던 송광산의 이름에서 따왔는데, 그 후 절 이름의 실마리를 제공했던 송광산은 도리어 조계산으로 바뀌었다.
송광사 진입을 위해 처음 만나는 '청량각'을 통과하면 계곡을 끼고 측백나무와 잡목숲이 길게 이어진다. 그렇게 숲길에 취해 무념무상 걷다 보면 송광사 입구인 일주문에 이른다.
대승 선종 조계산 송광사
일주문의 '대승 선종 조계산 송광사'라는 편액이 눈에 띈다. 일주문을 들어서는 것은 세속의 번뇌와 흐트러진 마음을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니 가능한 행동과 마음가짐을 경건히 해야 한다.
송광사는 크게 청량각에서 천왕문까지의 진입 공간, 종고로에서 대웅보전에 이르는 중심 공간, 대웅보전 뒤의 수선 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계류에 걸쳐 있는 임경당은 그 이름처럼 거울에 비추어볼 만큼 아름다운 건물로 기둥 두 개가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어 선경을 자아낸다.
송광사 유명처 삼청교와 우화각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에 진입하기 전 먼저 만나는, 송광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네모난 돌 19개로 만든 홍교(무지개다리)인 삼청교다. 삼청교, 능허교라고도 불린다. 내를 건너는 다리 구실도 하고, 다리 위에 우화각이라는 건물을 세워 건물 구실도 하는 특이한 다리이다.
송광사 경내로 들어가려면 능허교(凌虛橋)라는 무지개다리 위에 놓인 우화각(羽化閣)을 통과해 계류를 건너야 한다. 계류와 능허교, 우화각이 삼박자를 이루는 풍광은 경치 좋은 송광사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절경이다.
스님들의 학습공간 사자루
계류가 흘러내려가는 쪽으로 임경당(臨鏡堂)이, 계류가 흘러오는 우화각 우측으로는 침계루(枕溪樓)가 자리한다.
우화각 우측 사자루, 일명 침계루라 불린다. 침계루는 정면 7칸, 측면 3칸의 2층 누각으로 스님들의 학습공간이다. 20세기 초에는 스님들이 중심이 되어 연극을 공연한 무대였다고 한다. 그 화려하고 독특한 외관에 나의 시선을 강하게 붙들었다.
그리고 삼청교를 지나면 바로 천왕문이 등장한다. 천왕문은 정면, 측면 각 3칸으로 광해군 원년(1609)에 초창되었다고 전해지며 숙종 44년(1718)에 중수되었다.
영산전과 약사전과 지장전
송광사 경내에 들어서면 사방이 전각들로 빼곡하다. 대웅보전 앞마당은 종고루를 기준하여 시계 반대 방향으로 약사전, 영산전, 지장전, 대웅보전, 승보전, 성보각으로 둘러싸여 있다.
경내 첫번째로 만난 영산전과 약사전. 대웅보전 앞마당 한 귀퉁이에 자리한 자그마한 건축물들이지만, 건축적인 가치가 커 각각 보물 제302호, 제303호로 지정돼 있다. 약사전은 송광사 경내에서 가장 작은 법당으로, 영산전과 더불어 제일 오래된 불전이라고 한다.
지장전은 지장보살을 주불로 세운 전각으로, 송광사 지장전은 한국 4대 지장 성지 중 한 곳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유명하다.
위풍당당 대웅보전
송광사는 고려 명종 때 80여 동의 건물이 꽉 들어찬 전국 제일 가는 절의 규모를 갖추었으나, 난리를 거치면서 30여 동이 불타 없어져 지금은 50여 동의 건물이 남아 있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제일 큰 절이다.
보조국사 이후 2대 국사인 진각국사와 조선 왕조가 성립된 직후의 16대 고봉 국사에 의해 각각 크게 중창되었으나 정유재란으로 절이 크게 불타고 승려들이 쫓겨나는 수난을 겪었다. 이후 인적이 끊겨 폐사 지경에 이르렀는데 임진왜란 전후에 서산대사와 쌍벽을 이룰 만큼 법명이 높았던 부휴 대사(浮休大師, 1543~1615)가 들어와 송광사의 명맥을 다시 이었다.
이후 헌종 8년(1842)에 큰 불을 만났으며 그 이듬해부터 철종 7년(1856)까지 다시 크게 중창되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파손되었다가 조금씩 복구·중창되었으며, 근래에는 대웅보전을 새로 짓는 등 대규모 불사가 있었다.
대웅보전은 정면도 웅장하지만 측면에서 봐도 장엄함에 장엄함을 더한다. 지금의 대웅보전은 1951년 소실 후 1988년도에 다시 지어졌다는데, 108평 규모의 대웅보전은 독특한 건축형태와 단청으로 현대 한국 전통건축의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승보전과 비사리 구시
승보사찰인 송광사를 상징하는 승보전에는 부처님 당시에 영축산에서 설법하던 장엄한 모습을 재현하여 부처님과 10대 제자, 16나한을 비롯한 1250명의 스님을 모신 전각이다.
이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대웅전을 송광사 7차 중창 당시에 복원하면서 지어졌으나 송광사 8차 중창때 현재의 대웅보전을 지으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승보전에 있는 비사리 구시는 느티나무 고목으로 만들었다는데 용량이 2,600리터나 되니 쌀 7 가마, 약 4천 명 분의 밥이 들어간다고 한다. 흔히 송광사의 3대 명물로 이 비사리 구시와 능견난사, 천자암 쌍향수를 들기도 한다.
이처럼 전각이 많았기에 송광사에는 비가 오는 날에도 비를 맞지 않고 자유롭게 경내를 오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렇게 사격(寺格)이나 규모 면에서 우리 불교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지금까지 소개한 대표적인 전각 외에 나라를 빛낸 16국사의 덕을 기리어 세운 국사전,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두었던 설법전 등이 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여느 사찰에서나 볼 수 있는 석탑이 송광사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 특별한 연유가 있을까.
문화재 보고 송광사
유서깊은 승보사찰이란 송광사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소장 중인 문화재가 많다는 점이다. 국가지정문화재 36건과 시도지정문화재 10건 등 지정문화재 46건을 보유하고 있다. 국가지정문화재 중에서도 국보가 4건, 보물이 27건에 이른다.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목조 삼존 불감'은 나무로 만든 불감(佛龕)인데, 불감은 작은 불상을 모신 집을 뜻한다. 이 불감은 높이가 13㎝, 문을 열었을 때 너비가 17㎝에 불과하다.
송광사의 문화재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것은 국사전(국보 제56호)과 목조 삼존 불감(木彫三尊佛龕, 국보 제42호)과 고종 제서(高宗制書, 국보 제43호)와 그리고 순천 송광사 화엄경 변상도(국보 제314호)이다.
건물 가운데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는 앞서 살펴본 약사전·영산전이 있다. 그 외 능허교 및 우화각, 보조국사 비, 자정 국사 사리함, 능견난사(能見難思), 금강저(金剛杵), 고봉국 사주 자원 불(高峰國師廚子原佛), 팔 사파 문자(八思巴文字) 등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5불도의 귀환
50년 만에 미국에서 돌아온 송광사 오불도(五佛圖)는 도난당했다가 미국에서 발견됐다. 기증자 로버트 마티엘리(左 둘째), 도난당했던 18세기 불화 '송광사 오불도'를 1970년대 초반 인사동 골동품점에서 구입해 소장해오다 2016년 12월 송광사에 기증했다.
송광사 불조전(佛祖殿) 〈53불도〉는 조선시대 후기 화승(畵僧) 의겸(義謙)이 1725년 제작한 작품으로 〈7불도 1폭, 9불도 2폭, 13불도 2폭, 5불도 2폭〉 등 7폭으로 구성돼 있다.
그중 <오불도〉 2폭은 1969∼1970년 진행된 송광사 불조전 보수공사 과정에서 다른 전각(殿閣)으로 옮겨졌다가 1970년대 초반에 사라졌다. 이 가운데 1폭을 미국인 로버트 마티엘리가 서울 종로구 인사동 골동품점에서 구입해 1985년 미국으로 가져갔던 것이다.
관음전과 백목련
수많은 다양한 전각을 돌다 지칠 즈음에 만난 관음전. 관음전 마당에서 속절없이 지고 있는 백목련 가는 모습에 슬픔이 묻어난다. 그래도 어김없이 다음 해에 꽃을 맺으리라. 자연은 피고 지고 환생할 수 있어서 부럽다. 그들은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데 한번 간 인생은 돌아올 길 없다. 자연보다 못한 인생인가.
송광사와 법정스님
지난 3월 11일이 12주기였던 법정(1932~2010) 스님은 송광사 뒷산 불일암(佛日庵)에서 1975년부터 1992년 봄까지 17년간 머물렀다. 불일암은 원래 송광사 16 국사 중 제7대 자정 국사가 창건한 자정암 폐사 터에 법정스님이 1975년에 중건하여 편액을 걸었다.
스님은 이곳에서 '무소유' 등 주옥같은 서적들을 집필했고 2010년 3월 11일 서울 길상사에서 열반해 이곳에 잠들었다. 불일암 앞에는 스님이 가장 아꼈다는 후박나무가 서있는데 이곳에 스님의 사리를 안치했다. 생전 스님이 걷던 대나무 숲을 2016년 재정비한 ‘무소유 길’을 따라 오르면 암자에 닿는다.
법정 스님은 송광사 뒤 작은 암자 불일암에서 오랜 수행을 했기에, 많은 불자들이 지켜보는 가은데 송광사에서 다비식이 거행됐다.
'매화는 반만 피었을 때가 보기 좋고, 벚꽃은 활짝 피었을 때가 볼만하다. 또 복사꽃은 멀리서 바라볼 때가 환상적이고, 배꽃은 가까이서 보아야 그 꽃의 자태를 자세히 알 수가 있다.'는 생전 법정스님의 꽃에 대한 묘사가 떠오른다.
경내를 한 바퀴 둘러보고 돌아나오는 발길은 가벼웠다. 마음은 비워져 하늘을 날듯했다. 누구나 떠날 때는 말이 없지만 살아온 발자취의 영향력에 따라 이름을 남기도 하고 그저 한 줌 흙으로 잊힐 수 있다. 우리 모두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거늘, 무어래 사연도 많고 탈도 많을까. 공수거 공수래인 인생이지 않나.
그래도 봄이 되니 꽃이 핀다. 산야에는 초록이 줄을 이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이 좋다.
맑은 편백나무 숲을 걸어나오며 이날 시간상 직접 가보지는 못해 다음엔 '무소유' 법정스님의 흔적을 찾아 불일암에 들려 봐야겠다 다짐했다. 가을 송광사와 불일암을 기대하며….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 법정 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송광사 암자
송광사 산내 암자는 현재 8곳으로 광원암, 불일암[자정암지], 감로암, 부도암, 천자암, 인월암[판와암지], 탑전, 오도암이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암자로는 보조암지, 청진암지, 묘적암지, 은적암지, 상암지, 하암지, 북암지, 상선암지, 상염불암지, 하염불암지, 실상암지, 조계암지, 목우암지, 인월정사, 신평리의 암자 터 등이 있다.
보조암은 제1세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이 창건한 곳이고, 광원암은 제2세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1178~1234]이 머물렀던 곳, 청진암은 제3세 청진국사(淸眞國師) 몽여(夢如)[?~1252]가 창건한 곳, 묘적암은 제6세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沖止)[1226~1292]와 인연이 깊은 곳, 감로암은 제6세 원감국사 충지, 제8세 자각국사(慈覺國師) 도영(道英), 제16세 고봉국사(高峰國師) 법장(法藏)[1350~1428]이 머물렀던 곳, 자정암은 제7세 자정국사(慈靜國師) 일인(一印)이 창건한 곳, 은적암은 제13세 각진국사(覺眞國師) 복구(復丘)[1270~1355]가 창건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건립 경위와 변천]
1) 광원암
광원암은 백제의 가규대사(可規大師)가 514년(무령왕 14)에 창건했다는 설과 제2세 진각국사 혜심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1578년(선조 11)과 1893년(고종 30)에 중수했으며, 일제강점기 이후 쇠퇴하다가 1958년에 폐사되었다. 1993년 송광사 주지였던 승려 현봉(玄鋒)이 중창하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법당과 요사채가 있으며, 법당 뒤편에 진각국사 혜심의 승탑이 있다.
2) 불임암[자정암지]
불일암[자정암지]은 13세기 말 제7세 자정국사 일인이 창건하였다. 1765년(영조 41) 공루(空樓)를 지었고, 1866년(고종 3) 칠성각을 지었으며, 1891년 정문을 중수하였다. 1921년 서익실(西翼室)을 중건했고, 1929년 공루를 헐어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는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의 도량으로 널리 알려졌다. 해방 이후에도 승려들이 거주하며 수행했으나 여수 순천10.19사건, 6.25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다. 1975년 이후 승려 법정(法頂)이 중창하여 ‘불일암(佛日庵)’으로 개칭하고 머물렀다. 법당 동쪽에 자정국사 일인의 부도가 놓여 있다. 현재 법당과 요사채가 있다.
3) 감로암
감로암은 13세기 말 제6세 원감국사 충지가 창건했으며, ‘감람’ 혹은 ‘자인암(慈忍庵)’이라고도 부른다. 1842년 공루를 지었고, 1879년과 1893년에 중수하였으며, 1891년 정문을 중수하였다. 1920년 동별당을 지었다가 1935년 파옥(破屋)해서 현 송광사 법성료 별당으로 이건하였다. 1936년 공루를 훼철하여 현 송광사 문수전을 증축하였다. 한국전쟁으로 폐사되었으나 1971년과 1976년 2차에 걸쳐 진일(陳一) 심화(心華) 보살이 재건하였다. 2014년 승려 일화가 목조 건축으로 중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순천 송광사 감로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복장유물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암자 앞쪽에는 제6세 원감국사 충지의 탑비가 있으며, 뒤쪽에는 제8세 자각국사 도영의 승탑이 있다. 현재 감로암에는 송광사의 염불원(念佛院)이 있다.
4) 부도암
부도암은 조선시대 송광사 고승의 부도[승탑]가 모여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1616년(광해군 8) 부휴(浮休) 선수(善修)의 승탑을 이곳에 세운 것이 시초이다. 그 이후 1650년(효종 원년) 송계(松溪) 영각(靈覺), 1660년(현종 원년) 벽암(碧巖) 원조(圓照), 1669년(현종 10) 취미(翠微) 수초(守初)의 승탑이 세워졌다. 1678년(숙종 4) 부휴 선수의 승탑 위쪽 좌우에 송광사 사적비와 보조국사비를 세웠으며, 1766년 백암대사비, 1895년 용윤대사비, 1897년 묵암대사비를 세웠다. 그리고 1689년(숙종 15) 설명(雪明)이 그 옆에 암자를 짓고 ‘부도암’이라 이름 붙였다. 현재 부도암은 법당과 요사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1969년 송광사가 조계총림이 되면서 부도암에 율원(律院)을 설치하였다.
5) 부도전
부도암 옆에 있는 부도전에는 17세기 뇌정, 1700년(숙종 26) 유영과 백암, 1719년(숙종 45) 혜공과 휴암과 무용, 1754년(영조 30) 우계와 벽오와 영해, 1766년 완화, 1767년(영조 43) 풍암, 1790년(정조 14) 일주와 묵암, 1799년 벽담, 1806년(순조 6) 회계, 1820년(순조 20) 환해, 1895년 자암, 1897년 묵암, 1902년 제운과 화운, 1916년 두월의 승탑이 차례로 들어섰다. 1917년 설월이 부도전의 담장을 둘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80년대에 취봉(翠峰), 금당(金堂), 광훈(廣薰), 인암(忍庵), 계룡(溪龍), 성공(性空) 등의 부도가 세워지면서 부도전은 모두 5기의 탑비와 30기의 승탑으로 구성되었다. 부도전의 모양과 담장의 규모는 가로 18m, 세로 39m인 직사각형이며, 흙돌담의 높이는 1.5m 정도이다. 내부는 4단으로 나누어 제일 위쪽 중앙에 송광사보조국사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1호]가 있고, 그 오른쪽으로 송광사사적비가 있다. 승탑의 주인공은 모두 부휴계의 고승이므로 처음부터 부휴계의 부도전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6) 천자암
천자암은 14세기 초 제9세 담당국사가 창건하였다. 순천 송광사에서 순천 선암사로 넘어가는 등산로를 따라 약 3.4km 정도 떨어진 산등성이에 있다.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4년(선조 37) 응선(應禪)과 청운(靑雲)이 제2창, 1633년(인조 11) 영묵(靈黙)과 태운(太雲)이 제3창, 1730년(영조 6) 자원(自願)이 제4창, 1797년(정조 21) 제운(霽雲)과 두월(斗月)이 제5창하였다. 현대에는 1995년 승려 활안이 중창하였다. 천자암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로 손꼽히기도 했던 곱향나무인 쌍향수[순천 송광사 천자암 쌍향수(곱향나무), 천연기념물 제88호]가 유명하다. 수령이 800년으로 추정되며 용트림하듯 감아 올라가는 모양으로 신비스러움을 자아내고 있다.
7) 인월암[판와암지]
인월암[판와암지]은 순천 송광사 건너편 조계봉 동북쪽으로 형성된 골짜기 아래에 있다. ‘판자암(板子庵)’이라고도 부르는데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1924년에 “판와암은 송광사 17암자 중의 하나이지만 그 명칭과 터만 남아 있다.”고 한 기록이 전부이다. 옛 스님들의 증언에 의하면 순천 송광사의 기와를 굽는 가마가 있던 암자였다고 한다. 1920년 경 불사에 필요한 기와를 외부에서 구입해 왔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19세기 후반까지는 가마가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5년 송광사 [구]명부전을 헐고 지장전을 새로 짓게 되자 그 해체한 명부전 목재로 판와암 자리에 암자를 짓고, ‘인월암’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8) 탑전
탑전은 적광전(寂光殿)을 의미하는데, 1991년 송광사 초대 방장이었던 구산(九山) 수련(秀蓮)[1909~1983]을 다비했던 곳에 구산 수련의 제자인 승려 현호(玄虎)가 송광사 제8차 중창불사를 마치면서 건립하였다. 암자로 들어가는 입구의 문각에 중앙을 ‘U’자 형으로 파낸 통나무를 세워 사람이 통과할 수 있도록 하였다. 건물로는 적광전과 요사채가 ‘ㄴ’자로 배치되어 있으며, 요사채 맞은편에 구산 수련의 승탑과 탑비가 세워져 있다. 그 뒤쪽 언덕은 ‘서부도’라고 하며, 19세기에 세운 계월·동월·오주·이주·보월·화담의 승탑과 현대에 추가한 향봉·화봉·계봉·구암 등의 승탑이 있다.
9) 오도암
오도암은 순천 송광사 북쪽 산 넘어 있는 자그만 암자이다. 현대에 건립된 암자로서 1980년대에는 외국 비구니가 거처하며 수행하기도 했다.
[현황]
송광사 산내 암자는 대부분 16국사와 관련이 있다. 16국사의 승탑으로서 조계산에 현존하는 것은 7기인데, 모두 순천 송광사 혹은 암자[터]에 있다. 제1세 보조국사 감로탑(甘露塔)은 순천 송광사 관음전 뒤편 언덕, 제2세 진각국사 원조지탑(圓照之塔)은 광원암에, 제3세 청진적조탑(淸眞寂照塔)은 청진암지에, 제6세 원감보명탑(圓鑑寶明塔)은 묘적암지 주변에, 제7세 자정묘광탑(慈靜妙光塔)은 자정암지[현재 불일암]에, 제8세 자각징영탑(慈覺澄靈塔)은 감로암 뒤편 능선에, 제16세 고봉지탑(高峰之塔)은 감로암 뒤편 왼쪽 능선에 있다.
조계산 [송광사&선암사] 탐방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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