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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1. 묵상글 ( 2024년 12월 21일. - 성자를 모시기 전에 성령을 모시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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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1. 2024년 12월 21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2.21 03:02
- 성자를 모시기 전에 성령을 모시는
기별이 없는 만남이나
기약이 없는 헤어짐은 우리가 인간적으로는 그리 탐탁지 않은 것입니다.
특히 기별이 없이 들이닥치면 매우 당황하게 되기에 탐탁지 않습니다.
오늘 엘리사벳의 경우 마리아가 기별 없이 들이닥쳐 놀랐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엘리사벳의 임신 사실을 들어 알고 축하하러 갔지만
엘리사벳은 지금처럼 전화할 수 없던 그때
기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마리아로 인해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엘리사벳은 탐탁지 않은 것이 아니라 기뻐 뜁니다.
놀라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는 것입니다.
혹 놀랐을지라도 기쁜 놀라움일 겁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던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성령 때문일 겁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성령으로 가득한 상태이고,
성령으로 알아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여인은 이제 성령으로 가득 찬 여인들이고,
성령에 이끌리는 여인들로서 만난 것입니다.
먼저 성령의 여인 마리아를 보겠습니다.
마리아는 누구보다 성령의 여인이고 성령의 정배입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주님을 잉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주님께는 어머니요 성령께는 정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도 주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성령의 정배가 되면 우리도 주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성탄절을 코앞에 둔 지금 우리의 대림절 성탄 준비는
엘리사벳처럼 성령으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자를 모시기 전에
성령을 모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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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1. 2024년 12월 21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작가의 체험이 담긴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작가는 매일 가는 카페에서 작업하는데, 그날따라 글이 써지지 않았습니다. 창의력이 부족한 자기 자신을 꾸짖으며 ‘망했다’를 외치고 있는데, 그 카페 구석에 덩치 큰 어떤 남자가 울상을 하며 머리를 쥐어뜯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남자는 다시 노트북 자판을 원수 두들기듯 치고 또 잠시 뒤에 괴로워하며 머리를 쥐어뜯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그 유명한 ‘봉준호 감독’이었습니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이라는 새 역사를 쓴 천재 감독이라 할 수 있는 봉준호 감독도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기의 재능 없음을 한탄하는데, 이름도 없는 자기가 괴로워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봉준호 감독을 비롯한, 다른 성공한 사람 역시 ‘나’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어떤 고통과 시련도 없이 편안히 모든 것을 누리고 있다며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봉준호 감독도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제주도로 지구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제주도의 돌담을 보다가 언젠가 읽은 책의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이 돌담에는 빈틈이 참 많은데, 그 이유는 그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야 바람에 돌담이 넘어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빈틈도 넘어지지 않고 꿋꿋하게 서있기 위한 하느님의 배려는 아닐까요?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성모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찾아가십니다. 이 둘에게는 커다란 걱정과 불안이 있었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했다는 사실이고, 엘리사벳은 산모로 너무 나이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세상 안에서 힘들 수밖에 없는 조건 안에 계신 두 분이 만나신 것입니다.
이 만남은 두 분은 커다란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요? ‘나만 힘든 것이 아니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을 비천한 당신 종을 통해 이루시는구나.’라면서 다시금 큰 힘을 얻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 성녀는 성모님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우리 모두 빈틈이 많습니다. 이 빈틈 때문에 모두가 힘든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빈틈 때문에 못 살겠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이 빈틈 때문에 살 수 있음을 주님 안에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서로 위로하면서 힘을 얻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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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행복을 수중에 넣는 유일한 방법은 행복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말고 행복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일이다(존 스튜어트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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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1. 2024년 12월 21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말씀전례>는 ‘오시는 분’에 대한 고대와 기다림과 간절함으로 마음 설레어 있고, ‘오신 분’에 대한 기쁨과 반가움으로 벅차올라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아가는 노래합니다.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아가 2,8)
또 <복음 환호송>에서는 “어서 오소서. 주 하느님”하고 환호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카 1,44) 하고, ‘이미 오신 그분’을 맞이하여 뱃속에서 즐거워 뛰는 아기와 함께 기쁨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큰 소리로 마리아의 “행복”을 선언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이는 “말씀” 안에 행복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 안에 행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이 ‘이룰 수 있는 능력’임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말씀을 믿는 것’ 안에 행복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말씀”이 ‘행복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그런데 ‘말씀이 왜 행복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말씀이 구원을 이루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이 구원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곧 행복을 가져다주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복된 일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복됨을 노래합니다. “당신의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왜냐하면, 아기가 ‘구원’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복된 것은 그녀의 태중의 아기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 아기가 구세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이 모두를 믿으셨으니 ‘행복’합니다. 그래서 그 믿음 안에서 이미 ‘행복’이 충만했습니다. 이를 두고 성 암브오시오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엘리사벳은 잉태한 후에 성령으로 충만했고, 마리아는 잉태하기 전에 충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말씀을 믿고 품으면, 진정 ‘복’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어머니”(루카 1,43)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것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요! 얼마나 벅찬 일인지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먼저 찾아오신 ‘말씀의 방문’으로부터 말미암은 일입니다. 마리아 태중의 ‘아기의 방문’으로부터 발생한 일입니다. ‘먼저 건너오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이 잉태되면, 뱃속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오히려 품고 있는 우리를 양육할 것입니다. 우리를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산골을 찾아가는 ‘노고’가 되고, ‘섬김’이 되고, ‘사랑’이 되어 피어오를 것입니다. 우리의 노래가 되고, 기도가 되고, 삶이 되어 탄생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십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
행복하십니다. 어머니!
경청만 하신 것이 아니라, 믿고 영접하셨으니 행복하십니다.
믿고 영접한 것만이 아니라, 순명하셨으니 행복하십니다.
순명한 것만이 아니라, 이루어지기를 희망하셨으니 행복하십니다.
오늘 제가 당신의 희망을 품고, 행복의 찬미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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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1. 2024년 12월 21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행복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추구하는 방법과 구체적으로 느끼는 형태가 다양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만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유하는 것에서, 어떤 이는 지배하는 것에서, 어떤 사람은 베푸는 사랑에서 만족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데서 행복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줍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말하였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5).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루카 복음11장 27-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결국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그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차지해서 행복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세상에서 행복을 찾지만,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행복이요,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실행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세상 것은 모두 사라지지만 하느님의 뜻을 행한 공로는 영원히 남습니다.
사업에 성공하고 재물도, 명예도 얻었고 좋은 집에 좋은 차를 가지고 있으며 귀한 자녀를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학생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해도 거기에서 행복이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대통령이 되어도, 대통령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고 할지라도 때가 되면, 내려놓아야 합니다. 더더욱 중간에 밀려나는 것은 불행합니다. 혼자만 불행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물질로는 갚을 수 없는 무형의 재산에 손해를 입히게 됩니다. 명예를 얻었을 때는 행복했지만 그 행복을 이어가는 것은, 각자에게 달려있고, 한 생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차지 하면 끝까지 행복합니다.
인생 여정에 있어서 예기치 않는 많은 일들을 접하게 되고 그 안에서 이유도 모르는 가운데 포기하고 버려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래서 또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사람은 성공과 실패 안에서도 그분이 역사하시고 섭리해 주심을 알기에 행복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알맞은 종류의 행복을 주십니다. 시련과 고난을 겪기 전이나 겪는 중이나 혹은 겪고 난 뒤에 반드시 주십니다”(성 알로이시오 슈월츠).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실패는 늦추어진 성공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천상의 것을 추구하고,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가운데 행복한 날 되시길 바랍니다. 잠시 스쳐 지나갈 세상 것에, 매이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드릴 수 있길 소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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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1. 2024년 12월 21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17년, 교구청에서 성소 국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신학생들의 연수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과테말라에 있는 사제를 방문했습니다. 저는 신부님이 신학생일 때, 30일 피정을 함께 했습니다. 30일 동안 피정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사제가 된 후, 신부님은 과테말라의 원주민을 위한 사목을 신청했고, 10년 가까이 있었습니다. 저는 신학생들이 어학을 배우고, 선교 체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습니다. 신부님은 과테말라 교구에 협조를 구하였고, 신학생들이 머물 수 있는 숙소도 마련해 주었습니다. 신학생들은 매년 선교 체험을 하였고, 사제가 된 후에는 선교 사제를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만남이 인연이 되어 과테말라 교구의 사무처장 신부님이 서울의 신학교를 방문해서 신학생들을 위해 강의를 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과테말라에서 사목을 잘 마치고, 지금은 콜롬비아에서 사목 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해외 선교를 지원하는 사제들이 언어를 배우고, 현지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작년에 저는 뉴욕에 있었습니다. 달라스에 있는 신부님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뉴욕에 오면 방문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자유의 여신상, 타임스퀘어, 센트럴 파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브루클린 브리지,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브로드웨이 뮤지컬 관람 등이 있습니다. 손님이 오면 주로 가는 곳들이라, 신부님들을 위해서도 그런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신부님들이 방문하고 싶은 곳은 제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제가 주일미사를 도와주고 있는 브루클린 한인 성당엘 가고 싶어 했습니다. 뉴저지에 있는 뉴튼 수도원엘 가고 싶어 했습니다. 뉴욕 맨해튼 관광보다는 제가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고, 한국의 베네딕토 수사님들이 운영하는 수도원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저는 브루클린 성당을 도와주게 된 사연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뉴튼 수도원과 한국의 인연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인연이 되었는지, 저는 뉴욕 생활을 마치고 지난 2월 달라스 한인 성당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보았습니다. 두 여인의 만남은 구약과 신약,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만남을 상징합니다. 마리아의 즉각적인 응답은 신앙의 본보기를 보여줍니다. 그녀의 행동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요한 세례자와 예수님의 첫 만남이자, 구세주의 도래를 세상에 알리는 순간입니다. 마리아의 여정은 하느님 뜻에 대한 완전한 신뢰와 순종을 상징하며, 신앙인이 하느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제시합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마리아를 축복합니다. 이는 성령께서 하느님 구원 계획을 드러내심을 의미합니다. 엘리사벳의 모태에 있던, 요한 세례자의 기쁨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신분을 첫 번째로 증언하는 행위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믿음 안에서 연대와 나눔의 본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는 오늘날 신앙 공동체가 서로를 지지하고 함께 기뻐할 것을 요청합니다.
사제 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제가 결정하기에는 어려운 일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몇몇 친구에게 전화하거나 만나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친구들은 언제나 따뜻하게 저를 대해주고, 제가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그런 친구가 있기에 저는 힘을 내서 사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가까운 이웃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대하면 우리는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고민과 갈등을 들어 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나의 모습을 따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의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나의 길을 따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곧 성탄이 다가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시니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어둠을 밝게 비추었습니다. 그 사랑은 가난한 이, 외로운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 사랑은 절망하고 있는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행복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주님,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도록 용기와 힘을 주소서. 주님의 그 사랑을 저 또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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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1. 2024년 12월 21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친척 엘리사벳에게 방문하십니다. 우리는 방문의 주체가 어머니 마리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가만히 복음 안에 머물러 보면 오늘 엘리사벳 방문의 주체는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벳의 모든 말은 주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태중의 아기 주님을 언급하는 모습에서도 알 수 있고, 주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에서도 말의 중심이 주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엘리사벳 모두 주님을 찬미하며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은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중요한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습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모습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길을 걷다 보면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말은 주님! 주님! 하면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만을 갈구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입으로는 고백하지만 사실 우리 뜻이 세상에 드높여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끝에 ‘아멘’ 즉, ‘저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지만 내 뜻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단순히 두 산모의 만남이 아닙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신앙인 간의 만남이며 동시에 주님께서 하느님의 사람들을 만난 사건입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랬던 두 여인의 신앙이 우리 안에서도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가끔은 나와 내 주변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우리이지만 늘 주님을 우리 중심에 두고 주님의 뜻을 생각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플라스틱
플라스틱은 참으로 고마운 존재입니다.
나무를 깎아 집기를 만들던 시절이나 토기로 만든 집기들이 비쌌던 시기에는 그릇 하나 장만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등장한 것이 플라스틱입니다.
무게도 가볍고 토기보다 잘 깨지지 않습니다. 열에는 약하지만, 가격이 저렴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플라스틱의 도움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플라스틱이 이제 우리 삶의 터전을 망치고 있다고 합니다.
너무 많은 곳에 사용되며 썩지도 않는 플라스틱은 우리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고 합니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국가의 아이들은 플라스틱 쓰레기 더미 위에서 살고 동물들은 플라스틱을 먹고 죽어가는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모든 것은 장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이 우리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생명을 훼손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선택은 한가지 뿐입니다. 과감히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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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1. 2024년 12월 21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주님과 우정의 여정, 그리고 형제들과 우정의 여정”
“오 샛별이여 찬란한 광채이시요,
정의의 태양이시요.
오시어 죽음의 땅과 어둠속에 앉아있는
우리를 비추어 주소서.”
오늘 12월21일의 오후렴도 참 아름답고 황홀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자 연인이시고 도반이자 주님인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입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고 혼자서는 구원도 없습니다. 반드시 더불어의 삶이요 구원입니다. 더불어와 홀로이지 더불어 없는 홀로는 불가능합니다. 10년전 2014년 삶의 여정의 압축과도 같았던 산티아고 순례 여정을 통해 절감했던 진리입니다.
삶의 여정은 목적지, 이정표, 도반, 기도라는 네 요소로 압축되었고, 함께 하는 도반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참 깊이 깨달았습니다. 삶의 중심이신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 우정의 여정과 더불어 보이는 형제 도반들과 우정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우선적인 것이 공동체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 우정의 여정입니다. 이와 더불어 떠오르는 그동안 참 많이도 나눴던 “하늘과 산”이라는 대표적 자작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하늘이 주님이라면 우리 각자는 산이고, 네가 하늘이라면 나는 산일수도 있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는 물론 서로간에도 상호보완 관계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모두가 삶의 중심이신 영원한 연인이자 도반인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형제들 서로간의 우정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그 좋은 본보기가 오늘 복음의 주인공 마리아와 엘리사벳입니다. 이 두 분의 우정에 앞서 각자 주님과의 우정 관계는 얼마나 깊었던 지요! 두분의 만남이 참 감동적이고 아름답습니다. 두분의 만남과 동시에 태중의 아들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만남이기도 합니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님 답게, 성모님을 통해 엘리사벳 태중의 세례자 요한을 찾아 겸손히 찾아 나선 태중의 예수님입니다. 아마도 곤경에 처한 마리아가 즉시 떠올렸던 참 좋은 도반이 엘리사벳 사촌 언니였을 것입니다.
두 자매간 역시 주님을 중심으로 서로간의 우정도 참으로 깊었음을 봅니다. 엘리사벳의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었을 때 엘리사벳 태 안의 아기가 반갑고 기쁨에 뛰놀았고,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은 기뻐 외칩니다. 루가복음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백에 속할 것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단숨에 읽혀지는 엘리사벳의 고백입니다. 주님 안에서 두분의 우정은 더욱 깊어졌을 것이고 서로의 내적상처도 완전히 치유되었을 것이며, 무엇보다 두분의 태교에 결정적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태중에 모신 마리아가 흡사 살아있는 “주님의 감실”같고, 그 앞에서 기뻐 뛰노는 엘리사벳 태중의 아기는 흡사 주님의 계약궤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던 다윗을 연상케 합니다.
참으로 영원한 연인이자 도반인 주님을 중심에 둔 두 어머니들의 우정이요, 태중의 예수님과 요한의 우정임을 깨닫습니다. 형제자매들 상호간의 우정에 앞서 공동체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의 우정이 절대적입니다. 이런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 신비적 사랑의 체험을 제1독서 아가서가 잘 보여줍니다. 교회의 신비가들이 참 좋아했던 아가서요, 아가서가 있음으로 성서는 더욱 풍요로워졌습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연인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이의 감미로운 고백이자 대화입니다. 흡사 엘리사벳은 물론 그 태중의 아기 요한의 고백같기도 하고, 미사에 참석해 연인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고백같기도 합니다. 평생 “진리의 연인”이 되어 살았던 성 아우구스티노, 또 주님과 깊은 연정을 나눴던 신비가 십자가의 요한, 아빌라의 데레사. 이냐시오 로욜라도 생각납니다. 교회의 신비가들에게 삶의 중심인 주님은 모두의 연인이었고 도반이였고 그들과 주님과의 연정과 우정도 함께 갔음을 봅니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신비가들은 물론 우리 영혼들 역시 주님의 애인들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인이 되고 우리는 주님의 애인들이 됩니다. 참으로 우리 공동체 삶의 중심인 주님과의 깊어지는 연정, 우정과 더불어 깊어지는 형제자매들 상호간의 연정과 우정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모두의 공통적 연인이자 도반이신 주님께서 우리 형제들 상호간의 연정도 우정도 보호해 주십니다.
참으로 깊은 우정은 연정과 애정을 뛰어넘습니다. 그 좋은 본보기의 우정이 성서의 다윗과 요나단, 마리아와 엘리사벳이요, 우리 조상들중에는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그리고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를 꼽고 싶습니다. 삶의 중심이신 진리안에서 영혼들이 깊은 일치를 이뤘던 분들입니다. 이분들의 공통점은 자기보다 상대방 도반의 영혼을 더 사랑했습니다.
“주님과 우정의 여정”과 함께 가는 “도반 형제들과의 우정”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해 주고, 더불어 주님을 중심으로 형제들 상호간의 우정도 깊이해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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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1. 2024년 12월 21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 무렵... 서둘러...>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루카 1,39-40)
하느님께서
내게 오시는
그 무렵
서둘러
하느님이
간절한 벗에게
하느님사람으로 가네
사랑이
내게 스미는
그 무렵
서둘러
사랑에
마른 벗에게
사랑으로 스미네
기쁨이
내게 깃드는
그 무렵
서둘러
기쁨에
주린 벗에게
기쁨으로 안기네
희망이
내게 피어나는
그 무렵
서둘러
희망에
무딘 벗에게
희망으로 돋우네
하느님께서
내게 오시는
그 무렵
서둘러
하느님이
간절한 벗에게
하느님사람으로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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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1. 2024년 12월 21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3-45)
믿음의 열매인 그리스도
보다시피 마리아는 의심하지 않고 믿었기에 믿음의 열매를 얻었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그러나 귀로 듣고 믿는 여러분도 복된 사람들입니다. 믿는 영혼들은 하느님 말씀을 잉태했고 그것을 모시며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영혼이 여러분 각자 안에 들어와 주님을 찬양하게 합시다. 마리아의 영이 여러분 각자 안에 들어와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게(루카 1,46-47 참조) 합시다. 육으로는 그분께서 그리스도의 유일한 어머니시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믿음의 열매십니다. 악행으로 더러워지지 않고 때묻지 않은 영혼이 하느님 말씀을 모시면, 말씀께서 당신의 정숙함으로 그 영혼의 모든 순결함을 지켜주십니다.
-암브로시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이 고귀한 의지가 다시 돌아올 수 없을 만큼 멀리 흘러 나가면 어떻게 될까요? 일반적으로 영성의 대가들은 그것이 시간과 더불어 흘러 나가면 되돌아올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 의지가 잠시라도 자신과 모든 피조물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려고만 한다면 다시 자신의 참된 근원으로 돌아가서 자유로워질 것이며, 이와 동시에 잃어버렸던 시간도 되찾을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하곤 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게서 떠나려 합니까? 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 안에 머물지 못하고, 여러분 자신의 복을 거머쥐지 못하는 겁니까? 본디 여러분 안에 모든 진리가 들어 있는데 말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주셔서,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 머무를 수 있게 되기를. 우리가 모든 진리를 곧바로 거침없이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느님이 도와주시기를. 아멘.(300)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한국 고대사에 나타난 하느님 신앙과 풍류도
하느님 신앙과 불교와의 지평 융합
인용한 문장이 불교 사상을 처음 접하는 일반 독자에게는 다소 낯설고 어려워 보이겠지만 알고 보면 전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삼신불이란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을 말한다. 대승 불교 사상이 발달함에 따라 궁극적 실재 그 자체로서의 부처를 법신불이라 부르고, 일체의 개념이나 속성을 넘어서 있는 부처라고 생각히께 되었다. 법신(法身, dha.ma-kaya)은 가시적인 형체를 초월하여 모든 부처의 근거가 되는 진여의 깨달음 그 자체를 뜻한다. 보신(報身, sambhoga kaya)은 불교의 구도가 보살이 서원을 세우고 오랜 수행을 통해 그 과보(果報)로서 얻은 초자연적인 불신이다. 불교에 역시적인 인물로서 부처가 된 석가모니불 이외에 아미타불 등 많은 부처가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 보신불은 중생의 간절한 기원과 수행을 돕고 깨딜음과 초자연적 . 영적 능력을 체험하게도 한다. 응신(應身, nirmana-kaya)은 화신(化身)이라고도하는데, 중생 교화와 제도를 위해 역사 속에 몸을 취하여 나타난 부처를 말한다. 석가모니 부처는 바로 대표적 응신불인 셈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불교의 교리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민족에게 전해진 후 1 ,600여 년 동안 한민족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불교의 진여일심으로서의 삼신불 사상이 한민족의 종교적 심성의 원형과 공명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온 누리에 진리의 빛과 은혜를 비추며 중생의 애환을 그 미세한 소리까지 다 듣고 보고 계신다는 관세음보살과 아미타불 신앙이나 비로자나불에 대한 불자들의 귀의심이 석가모니불 못지 않게 성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일반 중생은 심원하고 현학적이기끼지 한불교 교학엔 별 관심이 없다. 다만 한민족의 하느님 신앙이 대승 불교의 ‘혼 마음’ 신앙과 지평 융합을 이룬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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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1. 2024년 12월 21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자신만의 차분한 기다림의 시간을 /
박윤식 [big-llight] 241220. 19:24 ㅣNo.178634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다림이다. 부랑자 두 사람은 나무 밑에서 하염없이 ‘고도(Godot)’를 기다린다. 누구인지, 또 언제 올지 모르면서. 구원자일 거라는 추측만 할뿐. 그가 오지 않자, 그들은 나무에 목매려 했다. 하지만 그마저 끈이 끊어져 실패다. 그때 누가 내일 목을 매자기에, 다른 이가 "만일 온다면?"하고 묻는다. 그러면 그때는 "구원되지."라고 답한다. 그들은 간절히, 더 오랜 기간 구원해 줄 ‘고도’같은 이를 기다렸단다.
이처럼 인간은 나약하고 불안한 존재이다. 그러기에 때로는 그 어려움이나 고통을 되도록 겉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조바심으로 서두르는 것 같다. 이는 자신의 고통을 다른 이에게 드러내는 것을 약한 모습이라고 여기기에. 그래서 가끔 있는 고통도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힘든 일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고 혼자 감당할 경우, 때로는 자신에게 더 큰 상처를 안기리라.
천사가 다녀간 후 마리아는 길을 떠나 유다 산골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그때 엘리사벳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그녀는 성령이 넘쳐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이 들리자 저의 태 안의 아기마저 즐거워 뛰놉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이렇게 마리아는 임신 육 개월이 훨씬 지난 엘리사벳을 찾았다. 늦둥이를 잉태한 그녀와는 달리, 남자도 모르고 아기를 잉태한 처지이다. 아마도 마리아는 기쁨은커녕 불안과 초조함으로 숨도 크게 쉬지 못했으리라. 그런 마리아를 그녀는 따뜻하게 위로한다. 두 여인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이해하기 힘든 일을 서로 위로하며 시간을 보냈을 게다. 서로를 버텨 주고 용기를 주는 새로운 삶의 ‘버팀목’을 찾으려는 우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얼마나 다정한 위로인가?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에 찬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은 정말 큰 힘이 되었을 게다. 사실 내가 어려울 때, 누군가 내 곁에 마냥 있어 주면 얼마나 큰 힘이 될까? 우리도 공동체 안에서 때로는 서로를 배려하고 격려해 주어야만 할게다. 이처럼 고통과 슬픔, 병이나 연약함은 혼자만이 짊어져야 할 ‘짐’이 아니다. 다른 이에게 힘을 주는 존재라면, 나는 더 큰 힘을 받으리라.
이처럼 하느님께서도 죄 많은 우리를 구원하시러 이 땅에 오실 때에 정말 치밀했다. 먼저 남자를 모르는 수줍은 마리아의 동의를 구하고자 가브리엘 천사를 나자렛으로 보내 설득했다. 그녀와 약혼한 요셉을 면담으로 다독이기는 거북해, 꿈에서 양해를 구했다. 또 길잡이 요한을 앞서 보내고자 사제 즈카르야에게도 통보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를 유다 산골 엘리사벳에게 보내, 태중의 두 아이 만남을 사전에 성사해 메시아 탄생 예고를 최종 ‘리허설’로 확인까지 한다. 그렇게 하느님의 ‘예수’라는 이름으로 지상 순례의 여정을 계획하실 때 참으로 치밀했다.
우리도 때로는 지친 몸 이끌고 조용한 곳에서 묵상하며 자신만의 시간을 갖자. 누군가가 그리워 질 때, 만날 수 있는 여유를 만들자. 이렇게 오늘을 사는 우리는 가끔 자신을 되돌아보도록 하자. 지난 일들을 묵상하며 다가올 일들을 차분히 준비하는 시간 만들자.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려고 인간의 몸을 취하시어, 우리에게 오실 ‘기쁜 성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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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1. 2024년 12월 21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성모님께서는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던 엘리사벳에게 ‘서둘러’ 찾아가십니다.
그러자 놀라운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태중에 계시는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에 ‘성령’께서도 함께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엘리사벳의 입을 통하여 성모님께 ‘행복 선언’을 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과 만나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성부 하느님께서는 성모님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에 성령을 가득히 부어 주시며,
우리도 엘리사벳이 체험하였던 것처럼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을 바라보며,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1,43)라는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몽포르의 루도비코 성인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우리가 하느님께 올라가기 위해서는 세 계단이 있다.
그 첫 계단은 우리에게 가장 가깝고 우리의 능력에 알맞은 마리아이시다.
둘째 계단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셋째 계단은 하느님 아버지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기도의 중개자이신 마리아를 거쳐야 하고
영원하신 하느님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구원의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 한다”(『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 86항).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고, 성모님을 삶 가운데로 초대하십시오.
여러분도 엘리사벳처럼 성령으로 가득 차 성모님을 통하여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을 반드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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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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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1. 2024년 12월 21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천사의 말에 응답했던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먼 길을 마다않고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천사가 말한 것,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마리아 자신도
불가능한 일의 가능성을 체험했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의 인사를 보면
마리아의 임신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 태중의 아기를 알아봅니다.
마리아가 석 달 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낸 후
엘리사벳이 출산을 한 것을 보면
마리아는 천사의 방문을 받은 후
거의 바로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 같습니다.
그 말은
마리아가 신체적인 변화를 느끼기에는
아직 시간이 충분히 흐르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기 전에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몰랐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아직 불가능한 일의 가능성을 체험하지 못했고
그래서 더 엘리사벳의 모습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서둘러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일어난 기적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도 보게 됩니다.
임신 사실을 확인했을 때
마리아의 기분은 어떠했을까요?
엘리사벳은 오늘 복음에서
그것을 행복이라고 표현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면서 임신할 것이라는 말을
믿기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나와 가까운 엘리사벳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천사의 말에 응답했지만
자신의 임신을 확신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붙잡고 있었고
오늘 드디어 엘리사벳을 통해
임신 사실을 확인합니다.
정말 그렇게 될까?
마리아는 수없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걱정과 고민이 이제 끝났습니다.
마리아처럼 우리도 삶 속에서
수많은 걱정과 고민을 합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더 확신이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걱정과 고민을 해결해 주신 것처럼
우리의 걱정과 고민도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끊임없이 생각하고
할 수 있다면 눈으로 확인하려는 마음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다만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의 다른 이름은
오늘 복음에 따르면 행복입니다.
우리가 꿈꿀 때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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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1. 2024년 12월 21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카 1, 43)
날씨 같은
삶이며
삶 같은
날씨입니다.
주님의 어머니를
만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삶의
놀라움은
믿음과 함께
우리를
찾아옵니다.
복음을
가득 안고
찾아가는
방문과
만남이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믿음을
더 큰
믿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믿음도
기뻐야 합니다.
기쁨도 믿음이
바탕입니다.
더 좋은
믿음은
언제나
가장 복된
선택이며
가장 좋은
부르심이며
가장 기쁜
화답입니다.
믿음의 삶이란
성령으로 잉태되고
성령으로 가득 찬
놀라운 여정입니다.
길을 묻는
사람에겐
길을
알려주시고
선택이 필요한
이에겐
가장 좋은
선택을 주십니다.
마리아의 여정
안에서는
엘리사벳도
있습니다.
엘리사벳의
여정 안에는
마리아와의
만남이
있습니다.
오래도록
서로의 삶을
잡아주는
소중한
만남이 있습니다.
만남으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성탄은
하느님의
기쁨을
온 마음으로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먼 길을
기쁘게 떠날 수
있는 것도
하느님의 이끄심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기쁨의 여정으로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성탄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우리들에게
놓치고
빠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쁨입니다.
기쁨으로
기도드리는
오늘의 특별한
믿음이며
마음입니다.
마음 안에
있어야 할
기쁨을 다시
만나는 오늘
되십시오.
기쁨이신
만남의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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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1. 2024년 12월 21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인생의 부정적인 경험조차도
아기 예수를 잉태한 소녀 마리아가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여인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한편 거룩하게, 다른 한편 장엄하게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은 아직 스물도 안 된 처녀 마리아입니다.
더구나 정식 결혼도 하지 않은 마리아였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뱃속에는 아기가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혼모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쪽의 여인은 더 황당했습니다.
너무나 쑥스럽고 머쓱해서 어떻게 설명할 도리가 없는 황당한 상황이었습니다.
산모인 엘리사벳의 나이는 가임연령을 넘어도 훨씬 넘어 이제 인생을 마무리지어야할 그런 나이였는데 아기를 가졌습니다.
두 분의 만남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어이없고, 정말로 이해할 수 없고, 정녕 황당한 대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맞이하며 교회 역사 안에 길이 남을 찬미의 송가, 마리아의 노래를 부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분의 만남 안에는 분명 특별한 누군가의 도우심이 있었습니다.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시는 분, 울음을 춤으로 바꾸시는 분, 역경을 순경으로, 고통과 십자가를 축제와 환희로 바꾸시는 분, 성령의 활동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생애 안에, 그리고 엘리사벳의 인생 안에 크게 돋보이는 장면이 한 컷 있습니다.
아무리 큰 인생의 부정적인 경험이라 할지라도 더 성장하고 더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도구로 삼는 지속적인 노력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바처럼 삶이란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인생이란 우리에게 언제나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삶이란 끝도 없는 우여곡절과 산전수전, 그 한가운데를 항해해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관건은 수시로 우리네 인생 앞으로 다가오는 삶의 부정적인 경험과 깊은 상처들을 어떻게 다스려나가고 슬기롭게 극복해나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노력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다양한 인생의 풍파, 끝도 없는 휘몰아치는 삶의 폭풍, 전혀 예기치도 않았으며 조금도 원치 않았던 인생의 모험 앞에서도 성모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혹독하리만치 극심한 시련 한 가운데를 걸어 가시면서도 마음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그녀의 내면에 하느님을 향한 강한 신뢰심과 단순하고 확고한 믿음, 그 어디도 물들지 않은 순수성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잠시 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예!’하고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도 또 다시 다양한 초대가 이루어집니다. 때로 성공과 안정, 평화에로의 초대도 있지만, 많은 경우 쓰디쓴 실패, 좌절, 모험에로의 초대도 부지기수입니다.
때로 좋은 것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만,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라는 표시로, 좀 더 성장하라는 표시로 우리가 원치 않는 고통과 십자가도 허락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삶의 모든 국면들, 다양한 초대 앞에서 성모님처럼 기쁘게, 기꺼이 ‘예!’라고 응답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매일 매 순간 하느님의 초대에 설레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예!’라고 응답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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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1. 2024년 12월 21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전갈을 받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 다음 걸음을 서둘러 친척 엘리사벳의 집으로 달려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마리아는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으로 갔다(39절). 그것은 자기가 받은 약속의 기쁨으로 넘쳐, 그 기쁨에 이끌려 경건한 마음으로 봉사하기 위해서였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넘친 마리아가 발길을 서두른 것은 이런 이유이다. 성령의 은총은 지체함과 게으름을 허락지 않는다. 항상 즉시 기쁘게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 마리아의 겸손은 그녀를 이끌어 유다 산악 지방으로 가 엘리사벳의 기적적인 잉태를 축하하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친척 엘리사벳의 해산을 보살피게 한다. 마리아는 말씀을 잉태하셨을 뿐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44절) 요한은 태어나지 않았지만 기쁘게 뛰노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알아본다. 요한은 영으로 세상의 주님을 알아본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42절) 주님께서 죽은 태 안에 당신 전령을 준비하신 것은, 그분이 죽은 아담 뒤에 오심을 말한다. 그분은 먼저 엘리사벳의 태에 생기를 불어넣으셨고, 그다음 당신의 몸으로 아담의 토양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엘리사벳은 아들 덕분에 성령으로 충만했다. 어머니가 먼저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태 안에 있던 요한이 먼저 성령을 받았다. 이렇게 아들이 성화 된 다음, 어머니가 성령으로 충만해졌다. 마리아도 구세주를 잉태하시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셨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함께하시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신 것이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43절) 엘리사벳은 자기를 찾아온 마리아를 보자마자 그분이 주님의 어머니임을 알아본다.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45절) 그러나 귀로 듣고 믿는 우리도 복된 사람들이다.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했고, 말씀을 실천하며 그 말씀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살아, 말씀을 낳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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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1. 2024년 12월 21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은총은 그 본성상 자신을 흘려보낼 사람에게만 흐른다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시는 내용입니다.
어제 은총을 받는 첫 번째 방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에 대해 생각해볼까 합니다.
일단 작은 은총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면 큰 은총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성모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당신이 받은 은총을 당신만 지니지 않고 나누려고 하신다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도 자녀가 있으면 형제와 나눌 줄 아는 아이에게 더 주고 싶습니다.
단순하지만 이 두 가지만 알면 우리는 은총 충만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나중에 돌 맞아 죽더라도 당신이 가진 것을 당신만 가지고 있을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미국 아이오와주의 작은 농촌 시골마을 웨스트 브로우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형제가 교회에 가던 중에 주먹질하며 싸우는 소년 네 명을 보았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킨 후에 음식을 먹였습니다.
이 아이들은 학습지진아, 문제아, 저능아, 무의미한 인간 등의 별명을 갖고 있었고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버림받은 아이들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아이들을 교회에 데리고 가서 목사님께 부탁해 주일학교에 이 아이들을 위한
반을 만들어주면 자신이 교사가 되어 가르치겠다고 했습니다.
주일마다 그 선생님은 네 소년에게 하느님 말씀을 가르쳤고 소년들은 자라서 도시로 나갔습니다.
1932년 이 나이 든 주일학교 교사의 은퇴 겸 생일 축하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네 명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서 편지 네 통이 낭독되었습니다.
하나는 중국 선교사로부터, 두 번째 편지는 연방 은행 총재로부터, 그리고 세 번째 편지는 후버 대통령의 비서실장에게서 온 것이고, 네 번째는 후버 대통령의 편지였습니다.
후버는 미국 제31대 대통령으로 가장 어려웠던 대공황 시기(1929-1933)에 미국을 이끌었고
“하느님의 말씀은 역경을 이기는 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어제 은총을 담을 그릇이 감사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그 은총을 빨아들이는 힘은 나누려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제 성모님은 은총이 가득하시기 위해 가진 것이 감사하는 삶을 사셨음을 말했다면, 오늘은 성모님께서 당신이 받은 은총을 엘리사벳에게 흘려주고 싶은 사랑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감사와 사랑이 은총을 충만히 받는 길입니다.
미국의 경영대학원 와튼 스쿨의 애덤 그랜트 교수는 사람을 3가지 유형으로 나눕니다.
남에게 주려고만 하는 이타적인 사람, ‘기버’(Giver), 남에게 받으려고만 하는 이기적인 사람, ‘테이커’(Taker), 그리고 남이 나에게 무언가 해주면 그제야 나도 주는 ‘매처’(Matcher)입니다.
이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실패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안타깝게도 무조건 주는 기버들입니다.
이들은 경쟁에서 뒤처집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가장 큰 성공을 하는 사람들도 기버들입니다.
캘리포니아주의 기술자 16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남을 도와주느라 정작 자신은 가장 낮은
생산성을 보이는 기버 부류를 조사했습니다. 단기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기버들은 경쟁에서 뒤처졌습니다.
하지만 기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성공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지속한 시간 속에서 쌓이는 사회의 ‘인정’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은 일 잘하는 사람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을 선호합니다.
자신보다는 타인과 조직의 이익을 우선하는 기버들이 그래서 장기적으로 승승장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피로감을 주는 이기적인 테이커와 매처보다는 믿음과 신뢰, 그리고 사랑을 느끼게 하는 기버들이 세상에서 성공합니다.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 속에서 자라야 했던 배정철 대표가 있습니다.
그는 가정 형편상 중학교 진학도 포기한 채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하루하루가 힘들었고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을 많이 벌어 자기처럼 불우한 이웃을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견뎠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사회에 내놓은 돈은 무려 50억 원입니다.
한국 초밥왕으로 군림한 그는 자기의 성공의 원인을 자신의 끝없는 나눔 덕분이라고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눔이라는 것은 아주 크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작은 일에서부터 나누다 보면 나중에 자신도 많은 것을 얻게 되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처음에 저도 나눔이라는 것을 시작할 때 작은 것부터 시작하였습니다.
학생들 장학금을 댄다든지 병원에 기부금을 내면서 나눔에 관련된 소문이 나다 보니까
이왕이면 우리 가게에서 먹자 하는 분들이 많으시고 그렇게 되다 보니까 더 많은 것을 제가 얻게 되고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우선 가진 것에 감사합시다.
가장 좋은 것은 매일 저녁 감사일기를 쓰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누워서 주모송을 바치고 오늘 감사한 일 다섯 가지를 생각합니다.
그다음에 다음 날 일어나서 할 일들을 자세하게 생각합니다.
이는 마치 계약의 궤 위로 내린 하느님의 현존이 움직인다면 바로 그 구름을 따라 움직이겠다는 준비된 자세를 말합니다.
계약의 궤는 언제든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은총의 본성은 흐름입니다.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흘려보낼 사람에게만 흐르십니다.
제가 사제가 되었으면서도 유학 가라는 주교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것은 그만큼 큰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항상 전날 밤에 다음 날 일어나서 뭐 해야 할지 주님의 뜻을 물어보면 다음 날 아침부터 당황하지 않고 하루를 알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하는 일들이란 사제이기 때문에 말씀을 전해주는 일입니다.
아주 충실히 살지는 못해도 하루하루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합니다.
그만큼 많이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고 또 내가 가진 것을 나누려는 마음을 가집시다.
‘감사합니다’와 ‘사랑합니다’.
이것이 은총을 받는 유일하고 완벽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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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1. 2024년 12월 21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탄절은 ‘모든 사람이 함께’ 기뻐해야 하는 날입니다.>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39-45)”
1)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가 다녀간 뒤에, 가장 먼저 요셉에게 가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렸을 것이고, 그리고 곧바로 엘리사벳에게 갔습니다.
엘리사벳이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고 가브리엘 천사가 알려 주었기 때문인데, 아기를 낳게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 그리고 엘리사벳의 출산을 돕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려 주기 위해서 갔을 것입니다.
그 상황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기쁨’입니다.
여기서 ‘서둘러’ 라는 말은, 마리아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기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간 이유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 선교사’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둘러’ 라는 말에서,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4-15)”
마리아의 ‘응답’과 ‘순종’은 ‘믿음’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그 믿음에서 ‘기쁨’이 생기고, ‘기쁨’에서 ‘나눔’이
이루어지고, 그 ‘나눔’이 곧 ‘ 복음 선포’입니다.
만일에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다면, 응답과 순종도 없고, 기쁨도 없습니다.
억지로 복종할 수는 있겠지만, 믿음과 기쁨이 없는 복종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뿐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교에서 ‘믿음’과 ‘기쁨’은 ‘하나’입니다.
만일에 기쁨이 없다면, 즉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믿는다는 말만 하면서 다른 것을 더 찾고 있는 경우일 것입니다.
2) 마리아의 기쁨은, 마리아 혼자만의 기쁨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기쁨입니다.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은 마리아에게만 기쁨을 주는 소식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에 관한 소식이고,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한 말이 그것을 나타냅니다.
“천사가 그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3-17)”
이 말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메시아 강생’을 예고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에서는 ‘모든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많은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메시아 강생’은 분명히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이 되는 소식인데도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 구원이 아닌 다른 것만 찾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도 소외시키지 않으시는데,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주님의 구원 사업에서 소외시키는 자들입니다.
3) 성탄절은 ‘모든 사람’을 위한 축제날입니다.
그런데도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것은 아니고,
성탄절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고,
그리스도교의 성탄절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교회 문을 닫아놓고서 신자들끼리만 축하하고 즐거워한다면, 그러면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주님을 거스르는 죄가 되고,
성탄절을 모독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누구나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성탄을 기뻐한다면 그 기쁨을 나누어야 합니다.
성탄절은 우리끼리만 축하하고 즐거워하는 날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 날이고, 함께 기뻐해야 하는 날입니다.
마리아는 바로 그 기쁨과 나눔의 모범이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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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1. 2024년 12월 21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39-45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물이 담긴 컵에 빨간색 잉크를 몇 방울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컵 속에 담긴 물이 붉은 빛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같은 양의 잉크를 한강물에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잉크를 받아들이는 물의 양이 얼마나 많은지가 그런 차이를 만드는 것이지요. 그런 점은 우리 마음도 비슷할 겁니다. 마음이 ‘밴댕이 소갈딱지’처럼 좁은 사람은 작은 불편, 작은 아픔, 작은 슬픔을 참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겉으로 표출합니다. 그것들 때문에 너무 힘들어 견딜 수가 없어서 때로는 짜증으로 때로는 원망으로 때로는 눈물로 그 힘듦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반면 마음이 바다처럼 넓고 깊은 사람은 왠만한 불편, 아픔이나 슬픔이 있어도 겉으로 잘 티가 나지 않습니다. 바닷물처럼 넓은 마음이 그런 것들을 받아들이고 정화하여 자연스레 사그라지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싶으십니까? 밴댕이처럼 좁은 마음으로 사사건건 화내고 짜증내며 스스로를 더 큰 불행에 빠뜨리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살면서 마주하는 시련과 고통을 잘 극복하며 참된 평화를 누리고 싶으십니까? 당연히 후자쪽이겠지요. 그렇기에 왜 신앙생활 하시느냐고 이유를 물으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실테구요. 그렇다면 그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십니까? 아무도 없는 고요한 성전에 앉아 차분하게 기도하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올까요? 그 평화는 성전 문을 나서서 삶의 자리로 돌아가는 순간 바로 깨집니다. 작은 낙엽 하나만으로도 잔잔했던 연못에 큰 파문이 일듯, ‘조용한 평화’는 쉽게 깨지고 마는 겁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우리 삶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 속 성모님의 모습에 그 힌트가 숨어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 말씀에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씩씩하게 답하시긴 했지만, 성모님의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약혼자 요셉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사실대로 말하면 그가 곧이곧대로 믿어줄 지, 배가 점차 불러오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아채고 뒤에서 쑤군댈텐데 부모님이 걱정하시고 속상해하시지는 않을지, 정결법을 거스른 음탕한 여인이라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거나 벌을 받게 되지는 않을지 이런저런 걱정과 근심으로 속이 시끄러웠겠지요.
그런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 성모님이 선택하신 방법은 하느님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임신 초기의 힘든 몸을 이끌고 백 킬로미터가 넘는 산길을 걸어 이모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그녀가 늙은 나이에 잉태한지 여섯 달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 늙어서 주책이라’는 생각에 사람들 눈치를 보느라 힘든 티도 못내고 제대로 못챙겨 먹으며 젊은 임산부들보다 몇 배는 더 고생하는 그녀 곁에 머무르며 사랑으로 보살피는 것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바라시는 뜻이라고 생각했기에 기꺼이 그렇게 한 것이지요. 그 선행의 결과 엘리사벳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들을 듣게 됩니다. 하느님께 특별한 은총과 보살핌을 받는 자신이 얼마나 복된 존재인지, 하느님의 말씀을 굳게 믿으며 따른 자신이 앞으로 얼마나 큰 행복을 누리게 될지를 깨닫고 마음의 평화를 찾았겠지요. 그러니 우리도 마음의 참된 평화를 누리고 싶다면 성모님처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찾아가 손과 발로 실천하는 사랑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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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1. 2024년 12월 21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
좀 오래 전에 교우들과 이스라엘을 순례한 적이 있습니다.
한 날 예루살렘 주위를 순례를 하고 숙소로 돌아가던 중에 시간의 여유가 조금 있기에
아인카렘으로 가면 안 되겠느냐고 사정해서 예루살렘에서 약 7-8km 떨어진 그곳을 들렸습니다.
그때만 해도 예루살렘에서 한국말을 하는 가이드에게 아인카렘은 낮선 곳이기도 했습니다.
아랍 운전기사에게 설명을 해서 아인카렘으로 향할 수가 있었습니다.
버스가 시골길을 달려 드디어 아인카렘에 도착을 했습니다.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성당'이
배경처럼 멀리 있고 세례자 요한 성당이 바닥에 있는 이 마을은 한 폭의 그림처럼 정답고
시골 풍경이 물신 풍기는 것이었습니다.
‘세레자 요한 성당’을 둘러 ‘마리아의 샘’을 지나 언덕에 있는 ‘마리아 엘리사벳 방문 성당’으로
올라가니 시간이 이미 지났는지 정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무척 서운해 하는 우리 교우들의 모습을 보니 포기할 본당 신부가 아니었습니다.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한 수사님이 나왔는데 시간이 지났다고 쌀쌀하게 난색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이태리 수사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안녕하세요.
사랑스런 수사님’이라는 뜻인 ‘부오나 쎄라. 까로 후라뗄로!’라고 이태리 말로 인사를 하니
그 수사님은 어린애처럼 깔깔대고 웃더니 금방 친절한 모습으로 바뀌고 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교우들의 그때 환한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성모님은 임신한 몸으로 나자렛을 떠나 유대 산골의 이 아인 카렘에서 친척 엘리사벳을 반갑게
만납니다. 그때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만나 이렇게 반가움의 인사를 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2-43)
이 성경 구절은 엘리사벳 뿐 아니라 성모님께 대한 우리의 경의를 표현하는 것이지요.
교회의 교부들은 성모님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갖고 있습니다. 3세기의 기도문으로 알려진 라틴어
기도문 중에 '천주의 성모여 (sub tuum praesidium)'는 우리 교회의 공식 기도처럼 자주 바치는
기도문이 되었습니다.
“천주의 성모여, 당신의 보호에 우리를 맡기오니, 어려울 때에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마시고, 항상 모든 위험에서 우리를 구하소서. 영화롭고 복되신 동정녀여.”
성모송의 후반부인 “천주의 성모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의
기도와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우리 신앙의 표본이십니다. 특히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시던 그 삶을 우리도 본받으려는
것이지요. 엘리사벳도 성모님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드러내게 존경했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45절)
성모님 외에 어느 누가 이렇게 전적으로 하느님을 믿으셨을까요?
아인 카렘은 유대인들이나 아랍인들에게는 한낱 작은 시골의 한 마을이겠지만 우리 교우들에게는
예루살렘, 나자렛, 베틀레헴과 더불어 소중한 성지가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어머니와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의 소중한 만남이 있었을 뿐 아니라 성모님을
공식적으로 공경하는 장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가서 저자는 이렇게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나의 연인은 노루나 젊은 사슴 같답니다.”(아가 2,8-9)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은 사랑하는 마음이지요. 그래서 부부들도 언젠가 서로 연애하며 전적으로
상대를 사랑했던 그 시절 그 모습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 뿐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사랑, 교회에 대한 사랑도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지요.
아가서의 사랑의 표현이 비록 인간적인 차원으로 오해할 수 있어도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으로도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도 숭고하고 아름답습니다.
주일을 준비하는 이 하루 아가서의 아름다운 사랑으로 우리 주님을 그리고 우리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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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1. 2024년 12월 21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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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1. 2024년 12월 21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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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1. 2024년 12월 21일.
절망을 이기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
<2024.12.21> 아침을 여는 묵상 (시 109:16~31절)
❝절망을 이기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
❚ 믿음의 사람들은 절망스런 환경에 처했을 때에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찬양하며 이겨내야 합니다.
✔ 어떠한 믿음으로 찬양해야 합니까?
➲ 주님의 함께하심을 믿고 찬양해야 합니다(16~20절).
다윗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악인들의 무자비함을 낱낱이 고발합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보살피는 일은 율법의 명령이었습니다(신 15:11). 그러나 그들은 친절을 베푼 적이 없으며, 오히려 못살게 굴었습니다(16절). 악인들은 무자비하게 약자들을 죽이려 할 뿐만 아니라 약자들을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저주하는 일을 좋아하였고, 저주하는 일을 자신의 옷 입듯 하였습니다(17~18절). 그리하여 다윗은 그들에게 저주가 임하고, 복이 떠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또한 저주가 “,,,물같이 뱃속으로, 기름같이 뼛속으로 돌아간다...”(18절b)는 것은 저주하기를 너무 자주 해 물과 기름처럼 저주로 먹고 살았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악인에게서 저주가 떠나지 않기를 기도했고(19절), 개인적 보복으로 해결하는 대신에 악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보응이 이뤄지기를 간구하였습니다(20절).
오늘도 사탄은 믿는 자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핍박하고 압제하며, 괴롭힙니다. 이러한 핍박과 괴롭힘이 너무나 커서 때로는 절망감을 느끼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과 현실 가운데서 우리는 결코 주저앉아 있거나 낙심한 상태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함께하심을 온전히 믿고, 신뢰함으로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믿고 신뢰하며 인내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고난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함께하심을 믿음으로 절망을 이기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주님의 인자하심을 믿고 찬양해야 합니다(21~25절).
다윗은 악인들에 대한 저주와 고발을 마친 후에 악인들로 인해 극심하게 고통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탄식하며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선대해 주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인자하심을 자신에게 베푸셔서 악인들로부터 건져 달라고 간구합니다(21절). 한결같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은 자기 백성을 환난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근거가 됩니다. 이어서 다윗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태를 하나님께 아룁니다(22~24절). 자신을 조롱하는 자들에게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은 자신을 보면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든다(25절,쉬운성경)고 고백합니다. 육체적인 쇠약 외에도 다윗을 괴롭히는 것은 원수들의 조롱이었습니다. 이처럼 원수들이 다윗을 조롱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버렸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약하기 때문에 혼자 인생길을 가다 보면 금방 힘에 부치고, 조급해지고 쉽게 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런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주저앉아 무너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생은 내 스스로의 힘으로 이끌어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은 종종 꽤나 오랜 세월을 괴롭게 견디게 하신 후에야 도와주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혼자 견뎌 내야 하는 그 시간은 그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간들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어디서나 늘 함께 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늘 한결같으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믿음으로 절망과 고난의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주님이 도와주심을 믿고 찬양해야 합니다(26~31절).
다윗은 적들의 비방과 핍박으로부터 자신을 도우시며, 구원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합니다(26절). 그리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원수들이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27절). 또한 다윗은 악인들로부터 받은 저주와 비방과 조롱을 복으로 바꿔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들이 공격할 때 그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자신은 오히려 즐거워하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28절). 그리할 때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을 욕을 옷 입듯 할 것이며, 수치를 겉옷처럼 몸에 두르게 될 것(29절)입니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승리를 확신하는 다윗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기도한 후에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하며 승리의 찬양을 올려 드리며, 하나님이 궁핍한 자의 우편에 서셔서 지키시고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찬양합니다(30~31절).
믿음을 지키고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조롱을 당할 때 낙심하지 않고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처럼 우리도 고난 중에서 승리를 확신하고 기도한다면 신실하신 하나님이 최상의 방법으로 우리를 도우셔서 모든 어려움에서 이기도록 하실 것입니다. 또한 핍박당할 때 믿음을 저버리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를 향한 저주와 비방이 오히려 복으로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우리 자신을 기가 막힐 웅덩이와 깊은 수렁에서 건지시고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려야 합니다. 어떤 환경이나 상황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을 확실히 믿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힘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절대적 도우심을 의지하며 살아갈 뿐 아니라 어떤 환경이나 상황보다 크신 하나님께 인생의 모든 문제를 맡기고, 승리하게 하실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시 109:16~31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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