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미묘한 차이의 나라
최근 우리 집에서는 사무엘서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수콧 기간에 아이들과 함께 영화 《다윗》을 본 후부터 시작되었죠. 특히 제 딸은 사울 왕과 다윗의 관계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며칠 뒤 딸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사울 왕이 죽었을 때 다윗은 슬펐을까요?”
참 좋은 질문이었습니다. 사울은 수년 동안 다윗을 쫓아다니며 그를 죽이려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사울은 동시에 다윗의 왕이기도 했습니다. 아들은 재빨리 또 다른 관점을 덧붙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딸 중 한 명인 미갈과 결혼했고, 가장 친한 친구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었죠. 사울은 다윗의 적이었을까요? 장인일까요? 왕일까요? 가장 친한 친구의 아버지일까요?
결국 그는 이 모든 것을 동시에 지닌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네, 분명히 말하자면, 다윗은 사울이 죽었을 때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וַיְהִי אַחֲרֵי מוֹת שָׁאוּל וְדָוִד שָׁב מֵהַכּוֹת אֶת־הָעֲמָלֵק וַיֵּשֶׁב דָּוִד בְּצִקְלָג יָמִים שְׁנָיִם׃
“사울이 죽은 후—다윗은 이미 아말렉 사람들을 물리치고 돌아와 있었는데—다윗은 쯔클라그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사무엘하 1:1)
영화를 본 후, 우리는 다시 성경 본문으로 돌아갔고, 아침 식사를 하며 함께 사무엘에 관한 팟캐스트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은 금세 온 가족이 함께하는 프로젝트가 되었습니다.
제가 오늘 이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이야기들을 다시 배우겠다는 제 자신의 다짐 때문입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을 만큼 이 이야기들을 잘 알고 싶고, 아이들의 질문을 통해 제가 다시 배워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몇 장 앞부분에서 우리는 엘리의 아들들인 호프니와 피네하스를 만났습니다. 아이들은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들은 미쉬칸에서 섬겼습니다. 그들의 역할은 말 그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부패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쁜 사람들이 어떻게 제사장이 될 수 있죠?”
단순한 질문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누군가가 거룩한 직분을 맡고 있으면서도 그 직분과 완전히 상반되는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이는 마치 제 딸이 ‘다윗이 사울을 애도할 수 있었을까?’라고 묻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같은 사람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이 어떻게 동시에 참일 수 있는지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어떻게 하나님께 왕으로 선택받았으면서도 질투심에 사로잡혀 파괴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요나단은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면서도 다윗이 미래의 왕이 될 것임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었을까요? 엘리는 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들들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심하게 실패했을까요? 호프니와 피네하스는 어떻게 신성한 직분을 맡으면서도 그 직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결국 우리는 다윗 자신에 대해서도 똑같은 질문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기에 이 문제의 핵심을 꿰뚫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새 왕을 기름 부어 세우라는 명령을 받고 갔을 때, 그는 엘리압을 보고 그가 바로 그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압은 왕의 자질을 갖춘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וַיֹּאמֶר יְהֹוָה אֶל־שְׁמוּאֵל אַל־תַּבֵּט אֶל־מַרְאֵהוּ וְאֶל־גְּבֹהַּ קוֹמָתוֹ כִּי מְאַסְתִּיהוּ כִּי לֹא אֲשֶׁר יִרְאֶה הָאָדָם כִּי הָאָדָם יִרְאֶה לַעֵינַיִם וַיהֹוָה יִרְאֶה לַלֵּבָב׃
“그러나 하쉠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그의 외모나 키를 보지 말라. 내가 그를 버렸노라. 사람이 보는 대로 [하쉠께서 보시는 것이 아니니], 사람은 겉모습만 보지만, 하쉠께서는 마음을 보시기 때문이다.” (사무엘상 16:7)
사무엘은 인간이 우리가 그들에게 부여한 범주에 딱 들어맞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묘한 뉘앙스는 책 전체에 걸쳐 흐르고 있습니다. 사울은 왕이자 아버지, 장인,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이자, 수년 동안 다윗을 죽이려고 애쓴 사람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그를 두려워하고, 그로부터 도망치면서도, 그가 죽었을 때는 여전히 그를 애도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옷을 찢고 사울과 요나단을 위한 애가를 썼습니다. 이러한 진실들 중 어느 것도 다른 것을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는 사무엘에서 시작되거나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얼마 전 심하트 토라(Simchat Torah)를 기념했습니다. 이 유대교 명절은 일 년간의 토라 낭독 주기를 마치고 즉시 창세기부터 다시 시작하는 날입니다. 모쉐 오경의 마지막에서 세 번째 구절은 모쉐의 생애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묘사 중 하나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לֹא־קָם נָבִיא עוֹד בְּיִשְׂרָאֵל כְּמֹשֶׁה אֲשֶׁר יְדָעוֹ יְהֹוָה פָּנִים אֶל־פָּנִים׃
“이스라엘에는 다시는 모쉐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않았으니, 여호와께서 그를 직접 대면하여 택하신 자였기 때문이다.” (신명기 34:10)
모쉐는 자신의 이야기의 결말을 어디서 듣게 되었을까요? 이스라엘 땅 밖에서였습니다.
그는 40년 동안 백성을 이끌고 그곳을 향해 걸어왔습니다. 그 자신도 그곳에 들어가고 싶어 애타게 바랐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실수 때문에 그곳을 건너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내게 불안감을 주는지, 아니면 위안을 주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모쉐가 아닙니다. 나는 다윗도 아닙니다. 나는 그저 사라일 뿐입니다. 나는 아이들을 잘 키우고, 의미 있는 일을 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올바른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도 여전히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데에는 깊은 위안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대함이 실패를 할 수 없게 만들지는 않았고, 그들의 실패가 그들 안에 있던 모든 위대함을 지워버리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흠 없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인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즉, 거룩함은 결코 실수 한 번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더 어려운 질문은 우리가 실수를 했을 때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곳에서 진정한 일이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By Sara Lamm (a content editor for TheIsraelBib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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