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7]
이 시기는 한마디로 아빠가 외국에서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세월이었다. 비록 가진 기술도 받은 교육도 별로 없는 사람이었지만 아빠는 순수한 회복력과 끈질긴 신념으로 그걸 배로 벌충해냈다. 자존심 때문에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아빠는 그 자리에서 마지막까지 버틴 사람이 될 것이었다. 아빠는 새롭게 발견한 자기 단련법을 체화해 유진으로 돌아왔다.
유진에서 아빠는 문제 해결에 달려들고 직원들에게 일을 위임하기를 즐기는 성공한 브로커가 됐다. 20년 동안 실패한 인생을 살아온 아빠는 마침내 자신의 소질을 발견하고 그것에 모든 걸 쏟아부었다. 이를 위해 아빠는 마치 그레이하운드처럼 사는 희생을 치렀다. 항상 시선을 앞에 두고, 피 냄새를 맡고, 미친듯이 달렸다. 하지만 엄마의 병은 아빠가 빠져나갈 묘책을 찾아내거나 초과근무를 해서 해결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빠는 무기력한 기분에 시달리자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정오에, 나는 병원 벤치에서 연이어 밤을 보내고 완전히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가 부엌 식탁에 앉아 있었고 집에서 탄내가 났다. "이건 내가 아니야."아빠가 중얼거렸다. 아빠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자동차 보험증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귀에 수화기를 대고 그 주에만 두번째 벌어진 접촉사고를 처리하려 기다리는 중이었다. 두번 다 아빠쪽의 과실었다.
쓰레기통에는 까맣게 탄 토스트 두 조각이 들어 있었고, 토스터에서는 스멀스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빵을 꺼내 개수대로 가지고 가서 버터나이프로 탄 부분을 긁어냈다. 그리고 그걸 접시에 담아 아빠 자리 옆에 놓았다.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아빠가 말했다. 그날 밤 병원으로 돌아가기 전에 나는 아빠가 똑같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 졸았다 깼다 하면서 두서없이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런닝셔츠와 흰 팬티만 입은 채로.
아홉시쯤 됐는데, 벌써 와인 두 병을 해치우고 있었다. 엄마에게 주려고 병원 약국에서 구입해둔 마리화나 캔디를 하나 빨아먹고 있었다. "날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해." 아빠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 보기만해도 운다고." 아빠는 큰 몸을 들썩거렸다. 쩍쩍 갈라진 입술 주름 사이에 짙은 보라색 와인이 스며들어 있었다. 아빠가 우는 모습을 드물지 않게 봐온 터였다.
아빠는불굴의 투지를 가진 사나이였지만 상처도 잘 받았다. 아빠는 일말의 진실도 감출 줄 몰랐다. 엄마와 달리 10퍼센트를 따로 남두는 법을 몰랐다. "내 옆에 있겠다고 약속해줘." 아빠가 말했다. "나랑 약속한거야, 알았지?" 아빠는 팔을 내밀어 내 손목을 꼭 잡고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확인하듯 내 표정을 살폈다. 다른 손에는 반쯤 먹다 만 얄스버그 치즈조각이 들려 있었다.
아빠가 내 쪽으로 몸을 기대자 치즈가 풀썩 주저 앉았다. 나는 아빠 팔을 획 뿌리치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했다. 연민이든 공감이든 하여간 그 비슷한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원망하는 마음만 부글부글 긇어올랐다. 아빠는 리스크가 크고 승산이 희박한게임에서 전혀 달갑지 않은 파트너였다. 이 사람이 내 아빠였고, 나는 아빠가 침착하게 나를 안심 시켜주기를 바랐다.
나를 들들 볶아대서 이 절망스러운 길을 외롭게 걸어가도록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아빠 앞에서 울수도 없었다. 그렇게 하는 순간 아빠는 분명 내 슬픔에 자기 슬픔을 얹을 터였다. 누가 엄마를 더 사랑하는지, 누가 더 상실감이 클직 경쟁 하듯이 호소하면서, 개다가 아빠는 절대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까지 집이 떠나가라 말해서 내 속을 있는 대로 뒤집어놓았다.엄마가 이 병을 이겨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어쩌면 이제 엄마 없이 우리 둘만 달랑 남게 될 수도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