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56
8월21일[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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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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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ah6qtoghMd8
[서울대교구 최기석 비오(대림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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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누군가가 주님으로부터 관대한 사랑을 받았다면 함께 기뻐해주고 축하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포도밭 일꾼’ 비유에 대한 교부들의 해석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이른 아침에 불린 일꾼들은 아담과 에녹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아홉 시에 불린 일꾼들은 노아와 셈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열두 시에 불려간 일꾼들은 할례의 법이 세워진 아브라함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오후 세시에 불려간 사람들은 모세와 다윗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오후 다섯 시에 불려간 사람들은 이민족 사람들이었습니다.
저같이 게으름뱅이며 늑장부리기의 대가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빨리 온 사람이든 늦게 온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한 데나리온, 곧 성령의 은총을 선물하심으로써, 우리 모두가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되게 하십니다. 우리 각자의 영혼에 하느님의 인장을 찍으시며 불멸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맨 먼저 포도밭에 와서 하루 온종일 일한 사람들의 불평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 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마태오 복음 20장 12절)
이 사람들의 투덜거림에서 또 다른 한 얼굴이 떠오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등장하는 첫째 아들의 얼굴이지요.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복음 15장 29~30절)
이 대목에서 우리는 주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철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은총의 햇빛과 단비를 선물로 주시는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아무리 죽을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끝끝내 회개하기를 인내롭게 기다리십니다.
주님께서 내게 베푸신 크신 은총과 축복에 깊이 감사하고 찬미 드리면 그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받은 더 큰 은총과 축복을 보고 시기질투하거나 배 아파하지 말아야하겠습니다. 누군가가 주님으로부터 관대한 사랑을 받았다면 함께 기뻐해주고 축하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 역시 맨 먼저 포도밭에 온 사람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큽니다. 맨 먼저 온 사람들은 어쩌면,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먼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저 감지덕지하면서 겸손하게 살았어야 했는데, 먼저 불림 받았다는 것에 대한 우월감, 자만심으로 가득했고, 그 결과 주님으로부터 큰 질타를 받은 것입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오 복음 20장 14~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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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KvnO1vOaN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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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이후에 받게 될 영광에 대한 기대가 지금 행복을 좌우한다>
존 뉴턴은 반항적이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에 참여하며 노예들을 가혹하게 다루었고 고난과 도덕적 타락으로 가득 찬 소란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1748년 3월, 그의 배 그레이하운드(Greyhound)는 북대서양에서 격렬한 폭풍에 휘말렸습니다. 배는 심하게 손상되어 침몰할 것이 확실해 보였습니다. 배의 키잡이였던 뉴턴은 폭풍 속에서 배를 조종할 때 배 밖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키에 몸을 묶어놓아야 했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이 시련 동안 뉴턴은 심오한 영적 각성을 경험했습니다. 배가 파도에 부서지자 뉴턴은 어렸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종교적 가르침을 떠올렸습니다. 배의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을 때 뉴턴은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며 절박한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기적적으로 그레이하운드는 폭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뉴턴은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과 같은 사람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기대를 할 수 없었고 정말 지옥에 갈 사람처럼 살아왔습니다. 그는 점차 이전 삶의 방식을 버렸고, 1754년에는 노예무역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성공회 신부가 되어 노예 폐지 운동에 영향력 있는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그가 쓴 찬송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에 그의 마음이 잘 나타납니다. “놀라운 은혜, 감당할 수 없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잃었던 나를 찾았고, 눈먼 날 보게 하셨네. 놀라운 하느님의 은혜….”
오늘 복음에서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고 하십니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아침에 만난 이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아홉 시에도, 열두 시와 오후 세 시, 그리고 다섯 시쯤에도 나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주인은 다섯 시부터 온 이들에게 먼저 한 데나리온씩 주며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세 시에 온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와서 일한 이들은 조금 더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에게도 한 데나리온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불평합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그러자 주인은 그들을 꾸중합니다.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일해놓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적게 받았다고 불평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로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는 이들입니다. 한 데나리온으로 그들을 포도밭에서 일하게 한 이유는 그들을 행복하게 하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존 뉴턴과 같은 사람은 어떨까요? 지옥에 갈 줄 알았고 또 지옥의 사람처럼 살았던 뉴턴은 늦었을 때 주님께 돌아왔고 자신과 같은 죄인을 살리신 놀라운 하느님의 은혜를 노래하였습니다. 그가 나중에 성공회 사제로 살았지만, 그의 봉사는 자신이 받은 은혜에 비해 너무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힘이 들 수 없었습니다.
지금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앉습니다. 그러려면 더 높은 영광을 기대해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도 ‘비르짓다의 7기도’를 바치면서 연옥에 가지 않고 순교자의 지위에 오른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달랑 그 기도를 한다고 피를 흘리며 순교하신 분들의 영광이 주어진다는 것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때문에 지금 내가 하는 봉사는 그 은혜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 때문에 진짜 하늘나라에서 그런 지위에 오를 것을 압니다.
지금부터 행복하려면 한 데나리온의 값을 무한히 큰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자신이 갔어야 할 지옥을 보고 체험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구원이라는 한 데나리온의 값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결코 힘들게 느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의 ‘스크루지 영감’은 자신이 죽고 난 후의 무덤과 비석에 사람들이 침을 뱉는 미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젠 자신의 무덤에 많은 이들이 꽃을 놓아주는 상상을 합니다. 그리고 그 기대만큼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이전 수전노의 지옥의 삶이 아닌 천국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더 큰 영광을 기대합시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한 데나리온의 값이 하느님 아드님의 피 값임을 믿읍시다. 그러면 그분 안에 머물기 위해 그분 뜻을 따르는 삶이 전혀 고생스럽게 느껴지지 않고 항상 부족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이 행복이 진짜 영원한 행복을 보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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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댈러스 성당에는 새 신자 분과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타 주에서도 전입한 교우들이 많은 편입니다. 한 달에 한번 전입교우 소개를 하는데 지난달에는 6가구 20명이 넘었습니다. 새 신자 분과는 전입 교우들에게 점심식사를 제공하고 구역과 반으로 안내합니다. 저도 점심에 함께 하면서 인사를 나누곤 합니다. 한국에서 오면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주택, 학교, 자동차, 의료보험, 구직과 같은 것입니다. 주재원으로 오면 큰 어려움이 없지만 이민으로 오면 직장을 구할 때까지 마음을 졸이게 됩니다. 아이들이 낯선 환경에 적응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새 신자분과는 영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현지 생활에 적응하도록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전입한 교우들은 성당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습니다. 최근에 서울에서 후배 신부님이 문자를 보냈습니다. 본당에서 활동하던 청년이 댈러스로 갔다고 합니다. 숙소, 자동차, 직장까지 구하려고 하는데 도움을 원했습니다. 저는 청년과 연락 했고 본당 교우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낯선 이웃을 귀하게 대 하여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스웨덴은 특이한 월세 계약이 있습니다. 한번 계약을 맺으면 몇 년이 지나도 월세를 올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가 상승으로 관리비는 올릴 수 있지만 월세는 안 올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입자는 월세 걱정 없이 아이들 교육시키고 생활 할 수 있다고 합니다. 20년 전이나 20년 후나 같은 월세라면 세입자 입장에서는 큰 혜택입니다. 스웨덴은 집을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집이 더 있으면 월세계약을 맺고, 한번 계약을 맺으면 물가가 올라도 집세를 올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회적인 합의이고, 이런 합의가 있으니 집이 없는 사람도 큰 걱정 없이 생활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집이 재산증식의 수단이 되면 집이 많은 사람은 더욱 부유해지고, 집이 없는 사람은 집세 걱정하면서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이나 미국에서는 상상 할 수 없는 제도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트렌트 코리아 2024’를 읽었습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은 ‘돌봄 경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돌봄에는 3가지 차원이 있다고 합니다. 배려 돌봄, 정서 돌봄, 관계 돌봄입니다. 배려 돌봄은 혼자서는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이들에 대한 돌봄입니다. 아이, 장애인, 노인에 대한 돌봄입니다. 영국에서는 조부모가 손자를 돌보면 그에 대한 보상을 지급한다고 합니다. 가족이라도 고령의 부모를 돌보면 그에 대한 보상을 지급한다고 합니다. 이제 배려 돌봄은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정서 돌봄은 방황하는 청소년들에 대한 돌봄이 있습니다. 자살에 대한 충동이 있는 청소년, 약물 중독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청소년에 대한 관심과 돌봄이 있습니다. 외로운 노인에게 말벗이 되어주고, 프로그램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활력을 주는 돌봄입니다. 관계 돌봄은 건강한 사람도,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도 도움이 필요하다는 인식입니다. 많이 배웠어도, 많이 가졌어요, 전문적인 직업을 가졌어도 외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도자들도, 성직자들도 이런 관계 돌봄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침부터 일한 사람, 낮부터 일한 사람, 오후에 나와서 일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주인은 모두에게 같은 품삯을 주었다고 합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은 주인에게 더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지만 똑같은 품삯을 받은 것에 대해서 불평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없다는 말이요?’라고 대답합니다. 미국 정부는 흑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흑인들의 주거와 복지, 문화와 교육에 대한 지원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흑인들의 동네에 도서관을 세워주고, 깨진 유리창은 갈아주고, 노후 되어서 허물어져가는 건물은 다시 세워주면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흑인들의 자존감을 세워주고, 흑인들이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흑인 재소자들의 비율도 줄어들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흑인들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 흑인들의 슬픈 역사에 대한 보상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하고 있지 않는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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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0,1-16: 포도밭의 일꾼들
오늘 복음의 밭 임자는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구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주인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사람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낸다. 이른 아침 여섯 시에, 아홉 시에, 열두 시에, 세시에 그리고 다섯 시에 자기가 만난 사람들을 포도밭으로 보냈다. 교부들은 이 하루를 구원의 역사로 해석하고 이른 아침에 아담과 에녹의 시대에 살던 이들을 부르셨고, 아홉 시에는 노아와 그와 함께 있던 이들을 부르셨고, 열두 시에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오후 세 시에는 모세와 다윗을 부르셨으며, 오후 다섯 시에는 다른 민족들을 부르신 것이라고 한다.
저녁에, 시대의 끝자락에 밭 임자는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품삯을 준다.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은 고생은 하지 않고 주인의 후한 덕으로 가장 먼저 보수를 받는다. 다른 사람들보다 영광을 받은 것이다. 맨 먼저 온 사람들은 나중에 온 사람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 나중에 온 사람들이 받는 품삯을 보고 자기들은 더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주인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고 있다. 그들은 불평한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12절) 그들은 다른 이들이 받은 축복을 기분 나빠했다. 그것은 시기와 질투였다. 이제 밭 임자는 그 사람의 시샘을 꾸짖는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15절) 하였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지 될 것이다.”(16절) 언제 부르심을 받았든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 한 시간을 열심히 일하여 하루의 품삯을 받은 이들처럼 우리의 삶도 지금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신 품삯을 모두 받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항상 깨어있는 자세를 말한다. 이것은 품값이라기보다 은총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가 일한 대가가 아니라, 그분의 선하심과 은총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다. 우리가 불림을 받은 후의 삶을 충실히 하여 그 선물을 받도록 하자. 주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우리를 채워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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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6)라고 하십니다.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인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19,30)라는 말씀과 연결되지요. 19장에서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린 제자들이 무엇을 받을 것인지 여쭈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족과 재산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나선 이들에게 백 배의 상급을 약속하시면서도, 그가 많은 것을 버렸으니 많이 받으리라는 생각을 깨뜨리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다시 풀어 설명하십니다.
계산적인 사람에게 이 복음
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여 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그 후한 포도밭 주인이 품삯으로 주는 한 데나리온은 무한대와 같이 큰 것이어서, 한 데나리온만 받았다 하여도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보통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그 품삯이 하늘나라의 갚음을 말한다면 그것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꼴찌”가 되어 가장 적게 받았다 하여도 그것은 이미 차고 넘치는 양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받는 것을 시기할 여지는 없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첫 새벽부터 와서 일한 일꾼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들이 천국에서 큰 영광을 누리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에 견주어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은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해서 사도들이 불만스러워할까요? 하늘나라는 그런 곳이 아니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부족한 사람이라도 그가 들어오는 것을 모두 기뻐하는 곳, 그곳이 참으로 하늘나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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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은총은 ‘내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입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마태 20,1-5)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9-16)
1) 여기서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라는 말은, 뒤의 20절-23절에 있는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의 이야기에 연결됩니다.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마태 20,20-21)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입니다. 두 사도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요청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두 사도가 요청한 것입니다. 두 사도의 요청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열두 옥좌’를 주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에 연결됩니다.(마태 19,28)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는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고, 예수님께서 어떤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 사도만 데리고 가신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두 사도는 자기들이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로서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생각은 포도밭에 맨 먼저 온 이들이, 늦게 온 이들보다 품삯을 더 받기를 기대한(요구한) 것과 같습니다.
2) 또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라는 말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의 말과 비슷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15,29-30)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 나오는 ‘맨 마지막에 온 이들’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과 같고, ‘맨 먼저 온 이들’은 ‘큰아들’과 같습니다. 두 비유는 모두, ‘맨 먼저 온 이들,’ 또는 ‘큰아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는 가르침입니다. 동시에 주님께서 ‘맨 마지막에 온 이들’, 또는 ‘작은아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것을 시기하거나 항의하지 말고, 그 자비에 동참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3) ‘구원의 은총’은 노동의 대가로 요구하는 품삯이 아니라,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자비’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일꾼들, 품삯’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신앙생활을 ‘노동’으로, 또 은총을 ‘품삯’으로 생각하는 것을 꾸짖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신앙생활은 결코 노동이 아니고, 은총은 품삯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은총입니다. 그리고 ‘은총’은 주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4) 태어나자마자 유아세례를 받고 평생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이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와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회개한 사람이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는 다른 나라가 아니라 같은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더 좋은 나라가 따로 있을 수 없고, 덜 좋은 나라가 있을 수도 없습니다. <성당에 일찍 와서 잘 준비하고 미사 참례를 한 사람이 받아먹는 성체와 늦게 온 사람이 먹는 성체가 다를 수 없고, 일찍 왔다고 성체를 두 개씩 주는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평생 마음껏 살다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생각이고, 그런 진정성 없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미사 시간이 다 지나가도록 밖에서 놀다가 영성체 때가 되어서야 성당에 들어와서는 성체를 받아먹어도 되겠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도 역시 어리석은 생각이고, 만일에 실제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성체 모독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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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는 일꾼들의 ‘공로’와 ‘성과’에 대하여 세상의 통념과 다른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주인의 모습이 나옵니다. 아마 대부분 오랜 시간 열심히 일한 사람과 남들이 일하는 동안 빈둥거리며 놀다가 늦은 시간에 와서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똑같은 액수가 품값으로 지급되는 일을 공평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 말씀에 나오는 주인의 생각은 이런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주인은 이른 새벽부터 일꾼들을 부르러 광장에 나갑니다. 수확에 매진하였던 그는 일꾼들을 더 불러 모으기 위하여 적어도 네 번이나 더 집을 나섭니다.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 또는 그리스도이고, 일꾼들은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저마다의 삶에서 서로 다른 시간에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입니다.
포도밭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낮’은 모든 사람의 인생을, ‘저녁’은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순간을 상징합니다. 저녁이 되자 주인이 일꾼들을 불러 품삯을 주고자 줄을 세웁니다. 그런데 가장 늦게 와서 일한 이들이 가장 먼저 불려나가 품삯을 받습니다. 이때부터 우리의 생각과 주인의 생각이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맨 먼저 나와 열두 시간씩 일한 일꾼들은 겨우 한 시간 남짓 일한 일꾼들이 못마땅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맨 처음 나와 일한 이들에게도 나중에 온 이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주인의 논리에 따르면, 그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의 행동에는 ‘공로’를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 담겨 있습니다. 주인은 공로가 아니라 일꾼들의 필요에 따라 품삯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논리입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행하시는 놀라운 방식입니다. 우리는 ‘공로’의 종교, ‘보상’의 종교에 익숙한 나머지,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의 선행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 두고 평가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보상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여기는 공로에 따라 지불하지 않으십니다. 그 어떤 사람도 하느님 앞에서 자기 공로를 내세워 축복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포도밭에 일찍부터 와서 일한 사람은 복됩니다. 그들은 수고하며 땀도 많이 흘렸지만,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님과 함께 행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가운데 먼저 부름을 받고 응답한 이들은 맨 나중에 와서 품삯을 받은 이들을 보며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기쁨이 될 수 있을까?’ ‘주님의 말씀에 따라 충실히 살아간 인생이 최고의 보상이고 감사한 인생이 아닌가?’
비유 속 포도밭 일꾼들의 태도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너그러우심 앞에서 의아해하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주님의 포도밭을 일구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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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이스라엘의 목자를 거슬러 하신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에제키엘 예언서 34,2-3)
주님께서는 그들을 거슬러 말씀하십니다. 양 떼를 보살피는 목자는 아픈 양을 고쳐주고 다친 양을 싸매주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못된 목자의 양 떼는 길을 잃고 헤매며 흩어져서 들짐승의 먹이가 되고 약탈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 양떼를 돌볼 목자가 되시겠다고 하십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에제키엘 예언서 34,11)
요한은 예수님께서 구약시대부터 예언되었던 착한 목자이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4-15)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에서 일할 일꾼들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구원의 주권은 하느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한 포도밭 주인이 아침에 일할 일꾼들을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자기 포도밭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다시 아홉 시쯤, 또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 나가서 일할 사람들을 구해 자신의 포도밭으로 보냅니다. 저녁 때가 되지 품삯을 주는데 모두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하루종일 와서 일하던 사람들은 더 받으려니 기대했기 때문에 늦게 와서 일하는 사람도 똑같은 품삯에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마태오 20,12)라고 투덜 되는 것입니다.
주인은 불평하는 그들에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20,15)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포도밭 주인은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오 20,16)라고 덧붙여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비유 말씀을 하셨을까요? 우선 이스라엘 사람들을 빗대어 설명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선민으로 선택된 역사가 있습니다. 그들은 시간상으로 오래된 이 사실을 자부심과 타민족에게 배타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당신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택은 시간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각자가 현재에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시간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 집안이 역사를 들추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나는 구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또는 '우리 집안에 순교자가 있다.'라고 말하며 자부심과 함께 은근히 자랑까지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으면 그 사실이 더욱 빛날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 이야기에는 열심히 하면서 정작 자신의 신앙생활은 뒷전이라면 그 사실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예수님께서 이 비유 말씀을 통해 구원은 인간의 계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따지는 것을 앞세우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주권이며 선물인 은총과 사랑에 의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조들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어온 유대인들 뿐 아니라 구원은 이방인들과 세상을 향하여 열려 있음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에 대해 이런저런 뜻으로 해석하려고 하지만 사실 하느님께서 구원을 좌지우지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가 아니라 부르시는 주님께서 그 권한을 갖고 있다는 뜻도 됩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권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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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마태 20, 1-16)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찾아보자.
첫째 우리는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예수님께 채용된 일꾼들이라는 것이다.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포도는 기쁨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복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모두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채용된 예수님의 일꾼들이다. 따라서 모든 크리스챤의 첫째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바로 그곳에서 나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유치원에서 일하든지, 가정에서 가정 주부로서 일을 하던지, 직장에서 일하든지, 또는 병원에서 일하든지, 크리스챤의 첫째 의무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성직자 수도자들이 운영하는 병원, 학교, 유치원, 사회복지, 양로원 등을 가보면 운영자체에 역점을 두고 있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성을 두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만일 우리가 복음 전하는 일에 중요성을 두지 않고 사업체의 운영에 또는 일에 중요성을 두고 있다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지 먼저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를 생각해야 한다. 가톨릭 재단에서 운영하는 모든 사업체는 복음전파의 하나의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가정의 가장들이나 주부들도 어떻게 하면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직장에 가면 직장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으로 채용된 주님의 일꾼들이기 때문이다.
저의 매일 복음 묵상이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이 내용만이라도 가족들과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는 것도 아주 훌륭한 복음 전파에 동참하는 것이다.
두 번째, 포도밭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포도밭은 하느님의 백성을 말한다. 이사야서에 "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 드리리라.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서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임은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 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 한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틀까지도 마련해 놓았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포도가 웬 말인가? …… 내가 포도밭을 위하여 무슨 일을 더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는가? …… 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이사 5, 1-7)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어 에집트의 노예생활에서 구해주시고그들을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복지의 땅으로 인도하시며 모든 노력을 기울여 보살펴준 백성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지키지도 않았고 야훼의 계명도 지키지 않았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포도가 웬말인가?"라고 한탄할 정도로 야훼의 말씀을 듣지 않은 백성이었다.
이제 옛 계약을 폐기하시고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어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한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포도밭으로서 포도송이를 맺어야 할 하느님의 백성들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야훼께서 새로 만든 포도밭이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포도밭을 가꾸어 포도가 송이송이 맺게 해야 한다. 포도송이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일하는 곳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내가 포도송이를 맺어야 할 포도밭은(장소는) 바로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정, 직장 등은 포도송이를 맺어야할 포도밭이다.
포도송이를 맺으려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그 사랑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든지 그곳이 집안이든 아니면 직장이든 그곳은 나의 포도밭이 아니라 주님의 포도밭이다.
따라서 우리는 채용된 일꾼답게 성실하게 일해서 많은 포도송이를 맺게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 빈둥 노는 사람, 자기가 관리해야 할 포도밭은 팽개쳐 놓고 다른 사람의 포도밭에 가서 그 사람도 일을 하지 못하도록 훼방노는 사람 등은 자기 몫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나에게 맡겨진 포도밭에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
세 번째 우리는 주님과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를 한 사람들이다. 한 데나리온이란 하루 일한 노동의 대가의 비용이다. 즉 우리가 하루 생활할 수 있는 돈이다.
그러나 우리가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어떤 노동의 대가 때문에 일하는 것은 아니다. 즉 한 데나리온 때문에 일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노동의 대가를 바라보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는 사람"에게 일할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은 내가 잘나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당신의 일꾼으로 불러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나 같은 이를 당신의 일꾼으로 불러 주시어 당신의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불러 주셨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드리며 기쁘게 일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루 일한 대가를 바라보고 일을 한다면 그것은 노동자로서 노동하는 것이요 일종의 노예로서 일을 하는 것이지 사도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일한 대가에 목적을 두고 일을 한다면 즉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기쁨을 맛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창조적인 복음 전파를 할 수 없고 다만 마지못해서 시키는 일이니까 억지로 하는 복음전파가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어떤 대가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도록 불러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노예로 일하도록 불러 주신 것이 아니다. 일할 것이 없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김으로써 일하는 데에서 오는 기쁨을 누리도록 하신다.
따라서 포도밭에서 일하는 이는 일 자체에서 즉 복음을 전하는 그 자체에서 기쁨과 보람을 찾아야 한다. 한 데나리온이라는 돈은 보너스로 받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약속된 사람들이다.
따라서 내가 얼마를 더 받을까 다른 사람들은 얼마를 받을까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말고 오직 나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생활을 10년 한 사람이나 5년 한 사람이나, 이제 갓 영세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복음을 전하라고 불리움을 받은 주님의 일꾼들이다.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불리움을 받았고 그 일을 얼마나 충실히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얼마를 받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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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20,15)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맨 처음에 제 마음에 떠오른 표현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자주 표현하는 것처럼 ‘대박, 완전 대박’이라는 탄성입니다. 이보다 더 통쾌하고 예상을 깨트리는 답변이 어디 있겠으며, 이보다 더 짜릿하고 흥분되는 표현이 없으리라고 봅니다. 하느님 진짜 멋져 버려! 어쩜 살면서 제 안에 남과 비교하는 마음이나 시기하는 마음보다 이런 파격적인 자비심을 더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제 주변에서 많이 보고 있습니다. 조금은 부족하고 모자란 이들에 대한 배려와 보살핌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전엔 ‘포도원 일꾼들의 비유’라고 했는데, 새로운 번역본에는 본래 의도를 되살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20,1~16)라고 바꿔 부르고 있습니다. 이 차이는 결국 이 비유의 방점이 포도밭 주인의 공평하시고 자비하신 선한 호의와 베푸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포도밭은 하늘나라요, 장터(=인력시장)로 일꾼을 찾아 나가시는 분은 포도밭의 임자인 하느님이십니다. 마태오 복음에 보면, 포도밭 임자가 인력시장에 나가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하고 일꾼들을 자신의 포도밭으로 불러온 시간은 이른 아침, 9시,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로 구분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오 사가가 제시하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구분과도 같다고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각 시간대의 순서는 곧 구약의 선택받은 백성들로, 백성의 원로들과 지도자들, 대사제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일반 서민들을 그리고 신약의 새로운 백성인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 소외받은 사람들,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와 창녀들의 순서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불린 시간의 차이처럼 하늘나라에 초대받은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후한 포도밭 임자의 마음이야말로 바로 아빠 하느님의 마음이며, 우리 역시도 하느님의 후한 베푸심을 본받아야 하리라 봅니다. 물론 인간적인 생각이나 계산법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고, 노동법으로 보자면 정의롭지 못한 처사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늘나라의 계산법이 세상적인 계산법과 같다면 소수 약자인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들이 비빌 언덕이 없어지는 것이고 희망이 사라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복음에 보면 포도밭 임자는 이른 아침부터 일을 시작한 일꾼에게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 그리고 9시에 만난 다른 일꾼에게 정당한 삯을, 아울러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엔 만난 이들에게도 동일한 삯에, 끝으로 다섯 시에 만나 일꾼에게는 그냥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문제는 일할 자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일할 기회를 준 포도밭 임자의 처신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처럼 후한 마음에서 참으로 일할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런 기회를 베풀어 준 것에 모든 일꾼은 감사하며 열심히 일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 것은 일을 끝내고 난 다음에, 관리인을 시켜 맨 나중에 온 이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루 품삯을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맨 나중에 온 일꾼들에게 자신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한 데나리온을 지불하는 것을 보면서, 이른 아침부터 일한 일꾼들은 혹시나(?) 자기들에게는 맨 나중에 온 사람들보다 더 많은 품삯을 받는 게 아닐까, 하는 지나친 기대 곧 착각 속에 빠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착각은 자유이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착각이 자칫 맨 처음부터 온 자신들에겐 한 데나리온 이상의 품삯을 기대했다가 똑같은 품삵을 받자,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왔던 것입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20,12)라고 불평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물론 인간적인 면에서 수긍이 가지만 터무니없는 불평임을 그리고 그들의 그런 볼멘소리는 우리네 삶에서 우리 역시 그렇게 치사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불편함이 마음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일할 능력이 부족하지 않음에도 일할 곳이 없어 초조하고 힘든 나날을 살아가는 동업자들에게 “참 잘 되었네. 오늘 다행이네. 먹을 것을 살 돈이 생겼으니”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하고, 자신이 제대로 품삯을 다 받았는데도 다 받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이 불편함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볼 일입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는 말을 조롱이나 하듯이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20,15)라는 포도밭 임자의 말에는 포도밭 일꾼들과 같은 존재인 우리의 근거 없는 기대감 내지 지나친 바람에 대한 포도밭 임자의 통렬한 질책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한편은 찝찝한 느낌이 들지만 다른 한편 포도밭 임자의 화끈하고 후련한 질책이 통쾌함을 가져다주기에 마음 편해짐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사람은 어쩌면 하느님의 크시고 후한 사랑과 자비에도 배가 아플 것입니다. 공평과 정의의 잣대를 고집하고 주장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마저 시비를 걸고 불평할 것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포도밭에 나와서 일한 사람은 오후 다섯 시쯤에라도 나와서 일하게 되고, 자기 동료가 포도밭 임자로부터 자기와 같은 품삯을 받게 된 것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의 슬픔을 함께 나누듯이, 이웃의 기쁨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감사하며 함께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많이 차지하고 혼자서 누리는 하늘나라는 정감이 없고 삭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일할 수 있고 빨리 온 사람이나 늦게 온 사람이나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그날에 필요한 만큼의 품삯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 하루 한 데나리온은 그날에 필요한 만큼의 은총의 양이라고 보며, 모든 사람이 각자의 받은 은총에 감사하고 비교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받은 무상의 선물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고 만족한 그 상태가 바로 하늘나라가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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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먼저 주는 것이 맞을까요? 아니면 내가 먼저 원하는 것을 받아야 할까요? 이것도 아니라면 동시에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받아야 할까요?
많은 사람이 자기 받을 것을 먼저 생각하고 있으며, 받아야 줄 수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야 각박하고 불합리한 세상에서 손해보지 않고 지혜롭게 사는 것이라면서 미소 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계산적으로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요? 실제로 사람들은 계산적인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영어에서도 ‘take and give’라고 하지 않고, ‘give and take’라고 하지 않습니까? 물론 내가 먼저 많은 것을 베풀었는데도 전혀 자기에게 되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다고 억울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점에 대해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순간의 만족보다 영원한 만족을 위해 힘쓰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동창 신부 중에 항상 앞서서 무엇인가를 하는 신부가 있습니다. 지난 일본 성지순례 때도 다른 동창의 불편을 생각하면서 약국도 다녀오고 편의점도 다녀오면서 동창의 불편을 해소해 주었습니다. 날도 더워서 귀찮을 법도 한데, 자기 돈까지 쓰고 땀도 뻘뻘 흘리면서 앞서서 행동합니다. 또 아픈 동창을 챙겨주다가 코로나 확진까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억울해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돕는 일을 무척이나 기뻐합니다.
‘주는 것이 손해’라는 어리석은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의 구차한 변명이 아닐까요?
포도밭 일꾼의 품삯에 대한 비유 말씀을 봅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나, 아홉 시부터 일한 사람, 열두 시와 오후 세 시, 그리고 무엇보다 오후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이 모두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는 포도밭 주인의 처사가 불합리해 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많이 하건, 적게 하건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무조건 주시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받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봉사에 대한 대가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봉사했으니 이 세상 안에서 더 많은 것을 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성당도 나오지 않는데도 많은 것을 누리냐며 불공평하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충분한 보상을 주십니다. 단지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의 기준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보상을 알아채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얼마나 큰 보상이었는지를 발견합니다. 참고 견디면서 주님의 뜻인 ‘주는 사랑’에 집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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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그저 감사하라>
어려서는 삼촌이나 누나에게 용돈을 얻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특히 명절이 되면 서울의 일터로 떠난 누나를, 삼촌을 동네 어귀에서 기다렸습니다. 누나를, 삼촌을 기다렸다기보다 용돈을 기다렸습니다. 그 액수가 얼마가 되든지 상관없이 기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학년이 높아질수록 더 많은 용돈을 기대하게 되었고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용돈을 받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어느 날 그 기쁨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삼촌께서, 누님이 용돈을 줄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용돈을 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습니다. 주면 주는 대로 감사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죄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를 포도원 일꾼의 품삯에 관한 비유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 아홉 시에 일을 시작한 사람이나 열두 시, 오후 3시에 그리고 다섯 시에 시작한 사람과 똑같은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일꾼들은 계약을 맺을 때는 그저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그러나 품삯을 받게 되는 시간이 되자 일찍 일을 시작한 사람은 뒤늦게 시작한 사람보다는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 기대를 채울 수 없었고 그래서 투덜대며 급기야 따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상대적으로 비교를 하는 순간 자기의 첫 마음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분명 그는 계약한 만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받지 못한 것처럼 느꼈습니다.
누가 용돈을 주면 주는 대로 감사히 받을 것이지 투덜댈 자격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계약대로 받았으면 족해야지 왜 따집니까? 주인은 분명 정의를 지켰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시기심 때문에 반발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5)라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모두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십니다(로마11,32). 주님께서는 언제나 후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나 선을 베풀고자 하실 뿐입니다. 그리고 그 선은 주님께서 자유로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그분의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비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품삯을 받기 위해 일을 한 사람과 일 자체를 고마워하며 일을 한 사람과는 분명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중요하지만 어떻게 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듯 하느님나라에서는 결과보다는 동기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상급은 인간이 노력해서 이룬 업적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물은 감사히 기쁘게 받는 것입니다.
“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가?”(성 아우구스띠노). 포도원에서 일을 할 수 있음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많은 일을 해도 해야 될 일을 안 한 사람은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해도 해야 될 것을 한 사람은 많이 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만 앞서거나 부산함만 피우지 마십시오.”(성 요한보스코)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마태20,16) 하느님 아버지는 너그러우시고, 나는 쩨쩨하고 시기질투하며 불평불만이 가득한 사람임을 뉘우칩니다.
인력시장에 가보신 적 있으시나요? 많은 사람들이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기 위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매일 팔려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누구도 자기를 사가지 않습니다. 종일 기다리다 허한 마음으로 쓰디쓴 하루를 마감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수가 좋아서 일찍 팔려 나갑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찍 일을 나간 사람이 뒤늦게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일을 한 것이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한 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주인에게 실망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인이 잘못한 것인가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에 지쳐있다 뒤 늦게 일을 한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주인의 자비가 얼마나 크고 사랑이 많은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의 업적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에도 후하게 주시기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거저 주시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합니다. 더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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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림>
마태오 20,1-16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살림>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마태 20,6)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마태 20,7)
누구에게든
받아들여지고 싶으나
아무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스스로마저
받아들일 수 없는
없음으로써
있어야 하고
없음으로써만
있을 수 있어
애써 눈여겨보지 않으면
애써 다가가지 않으면
애써 찾지 않으면
있음에도 없고
있음에도 없어야 하는
누군가 있다면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을 묻지 않으며
스스로마저
받아들일 수 없는
까닭을 묻지 않으며
다만 환한 웃음 지으며
다만 따스한 눈길 건네며
다만 부드러운 손길 내밀어
그저 품는 겁니다
있음으로써
참으로 있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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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주님의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
+찬미예수님
간혹 부모님들을 만나면 아이들의 성소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주로, “내 아이가 사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하면 성소의 꿈을 심어줄 수 있을까요?” 등의 대화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아주 간혹, “내 아이가 사제직에 관심이 있는데 부족한 것이 많아서 걱정이에요”, “우리 아이는 복사단 활동도 하지 않았고 유아세례를 받지 않아서 자격이 없어요”라는 말씀을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분들을 만날 때 마다 제가 떠올리는 복음이 바로 오늘의 말씀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부르심의 시기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신학교에 막 입학한 학생들을 보면 이러한 사실이 정확히 드러납니다. 물론 어려서부터 신앙 교육을 받고 복사단 활동을 하며 성소의 꿈을 키워온 학생들도 있지만 중고등학교 때 세례를 받았거나 오랜 시간 냉담을 하다가 부르심에 응답해 신학교에 오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신학교의 입학 기준에는 세례성사를 받은 지 3년이 지난 사람이어야 한다는 기준이 있는데, 이를 채우지 못해 시간이 지나길 기다리다가 신학교에 입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부르심을 늦게 받았다고 해서 사제가 된 뒤 어떠한 문제가 있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세례나 견진을 늦게 받았을 지라도 신실하고 모범적인 사제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사실 언제 하느님이 부르시든 그것에 응답하기만 하면 되는 셈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주인으로부터 선택을 받아 일하는 일꾼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누군가는 이른 아침에 일을 시작하고 누군가는 오후 다섯 시에 일을 시작하지만 그들이 밭는 품삯은 모두 똑같습니다. 당연히 먼저 온 사람으로서는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일을 한 시간과 양이 그만큼 차이가 나는데 동일한 값을 받는다는 것은 불공평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애초에 계약을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하였으니 먼저 일을 시작한 사람이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늦게 온 이들에게 그와 같은 값을 쳐 주는 것은 전적으로 주인의 마음이며 배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을 늦게 시작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화는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 지방에서 포도를 따는 때는 9월 말경이었는데, 10월이 되어 날씨가 선선해지기 전에 포도를 서둘러 따지 못하면 농사를 망치게 되므로 짧은 시간이라도 일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늦게 일을 하게 된 이들이 게으른 이들은 아니었습니다. 지방 장터는 노동자들의 대기소와 같은 곳이었는데, 이른 아침에 노동자들은 연장을 들고 장터에 나와 자신을 써줄 고용주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사람들은 이른 시간부터 고용이 되어 일할 수 있었지만, 누군가는 오후 5시가 될 때까지 일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도 빈번했습니다. 이를 생각해보면, 일하고 싶지만 고용되지 않아 초조하게 앉아있는 일꾼들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날품팔이 노동자들, 노동자 중에서도 가장 하층의 노동자들이기 때문에 불안정한 생활을 영위해야 하는 이들. 차라리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는 노예나 종들이라면 적어도 굶을 염려는 없었겠지만 이들은 일을 못하게 되면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까지도 굶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에게 누군가가 나타나 늦은 시간이지만 일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은총이었을 것이며 아주 감사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오늘의 말씀은, 때에 상관없이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앞에서 미리 부름을 받은 그 누구도 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유다인들에 대한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당시의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방인들을 멸시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먼저 선택받았다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부름을 받은 이방인들도 하느님 앞에 모두 평등하며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늦게라도 하느님을 찾은 사람들, 그리고 뒤늦게나마 죄를 뉘우치고 주님께 돌아온 이들에게 커다란 위로가 됩니다.
우리 중에 누구는 이른 시간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도 있고 조금은 뒤늦게 하느님을 찾게 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와 같이 성직자의 역할을 하는 이들도 있고 평신도의 역할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누가 더 낫다고도 부족하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일하기에 똑같이 소중한 사람들이며 각자의 역할은 하느님께 커다란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그렇다면 어차피 같은 은총을 받을 것 조금 천천히 일하는 것이 이득이 아닌가 싶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결코 스스로를 위한 생각이 아닙니다.
오늘 입당송이 이야기하듯, “주님의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이러한 하느님의 균등한 은총과 사랑에 감사하며 부족한 것이 있다면 하루빨리 주님께 기쁨이 되고자 채워나갈 것을 약속 드려야 하겠습니다. 사랑에 지치지 않으시는 하느님, 누구에게나 같은 사랑과 은총을 보내주시는 하느님이 바로 우리의 자애로운 고용주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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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에 대한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이 속에는 하느님 자비의 신비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는 세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포도원 주인은 대체 때를 가리지 않고 품꾼을 불러들인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일의 실적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도 않습니다. 도대체가 계산이라고는 모릅니다. 사실, 그는 애시 당초부터 일을 부리기 위해 품꾼들을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살리기 위해 불러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부르심 그 자체가 이미 은총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불쌍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주어진 은총입니다.
<둘째>는 품삯을 줄 때에 맨 나중에 불려 온 자부터 준다는 점입니다. 무능하여 맨 나중에 올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 대한 깊은 배려와 자비였습니다. 사실, 그들은 능력이 없는 까닭에 자비에 내맡길 수밖에 없는 “꼴찌”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필요한 자에게 우선적으로 흘러들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셋째>는 먼저 온 이들에게나 나중 온 이들에게나 똑같이 품삯이 주어진다는 점입니다. 일한 시간이나 일의 실적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먼저 온 품꾼에 대한 부당한 대우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모두에게는 계약을 맺은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었고, 뒤에 온 이들에게는 자비가 베풀어졌을 뿐입니다. 사실, 주인은 품삯을 셈 해줌에 있어서, 정당함에 자비를 더하여 쳐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인의 권한행사와 너그러운 처사는 절대적인 하느님의 주권과 자비를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인간이 일한 대가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사랑입니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 이유’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포도원 주인이 애초부터 은혜를 베풀기 위해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였듯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들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온 이든 나중에 온 이든 모두가 자비를 입은 이들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 포도원에 와서 일한 사람들이 불평하자,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나는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마태 20,12-13)
사실 은혜를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포도원 주인이 애초부터 은혜를 베풀기 위해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였듯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당신의 교회로 불러들이셨습니다. 여기에는 먼저 온 이와 나중 온 이가 따로 없으며, 모두가 자비를 입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첫째라고 뻐기거나, 혹은 꼴찌라고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포도밭에 와 있음에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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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마태 20,4)
주님!
당신은 무능하여 맨 나중에 올 수밖에 없었던 꼴찌들부터 품삯을 주시니
애시 당초 일을 부리기 위해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불러들이신 까닭입니다.
당신은 일한 시간이나 실적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으시고
똑같이 품삯을 주시니
애초부터 은혜를 베풀기 위해 당신 포도밭에 불러들인 까닭입니다.
이토록, 부르심이 이미 은총이요 은총은 계산이 아니라 자비오니
주님의 자비를 찬미합니다.
당신 부르심이 제게는 영광이오니
오, 나의 주 나의 임이시여! 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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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본소득제의 원조>
-착한목자 주 그리스도 예수님-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23,1)
2000년 전통의 가톨릭교회의 자랑은 역대 교황들이요 무수한 성인들일 것입니다. 어느 종교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유구한 전통의 반영입니다. 지금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에 앞서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제257대 성 비오10세 교황입니다. 역대 교황마다 얼마나 큰 분투의 노력을 다해 교황직을 수행했는지 그들의 행적에 감탄하게 됩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비오 10세도 참 탁월한 교황이었습니다. 교황이기 이전에 주님을 닮은 참목자였습니다. 옛 분원장 시절, 30년이 지난 지금도 장상의 충고를 잊지 못합니다. “장상이기 이전에 목자(牧者)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며, 목자처럼 형제들을 섬기고 돌보라는 충고였습니다. 성 비오 10세 교황의 감동적인 생애를 대략 나누고 싶습니다.
성인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에페1,10)라는 사목표어에 따라 교황직을 시작합니다. 우체국장의 아들로 태어난, 가난한 가정 출신인 비오 10세는 항상 자신의 출신을 잊지 않으려고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가난하게 죽고 싶다.”라고 할만큼 가난을 사랑하였습니다. 성인의 매일 일과만 봐도 얼마나 부지런한 사목자인지 잘 드러납니다.
하루의 일과는 매일 일정했으니, 오전 4시에 일어나서 6시에 미사를 집전하고, 8시 정각 바티칸 궁전 2층에서 개인적인 연구와 사사로운 알현이 있었습니다. 큰 책상 중앙에는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와 ‘잔 다르크’ 성상이 놓여 있었습니다. 정오에는 공식 회견을 열었고, 1시에는 측근들과 함께 점심식사, 그리고 잠시동안의 휴식을 취합니다. 저녁식사는 오후 9시에 이루어졌고, 그 이후에도 밤이 깊을 때까지 다시 일했다 합니다.
성 비오 10세는 어린이들을 각별히 사랑했고 성직자와 평신도의 종교적 삶을 쇄신시키기 위해 힘썼으며 특히 미사성제의 경우 그러했습니다. 성찬례의 대미를 장식하는 영성체에 대해 “하늘나라를 향한 가장 짧고 안전한 길”이라고 유난히 강조했으며, 성체에 대한 존경심으로 후대 신자들에게 “성체의 교황”이라는 명예로운 호칭도 지녔다 합니다.
비오 10세는 가톨릭 신자가 영성체를 자주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어린이 첫영성체 나이를 기존의 10-12세에서 7세까지 낮추어 영성체를 쉽게 해주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 많은 신자들은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라도 보통 한달에 한두번 정도 영성체를할 뿐이었고, 많은 이가 대축일 때에만 영성체를 했습니다.
비오 10세의 치세중 가장 걱정거리는 가톨릭 신앙에 큰 위협이 되었던 근대주의와 상대주의로 철학, 신학, 성경주석에도 그 사상이 침투해 있었습니다. 이신론과 불가지론, 무신론에 이르게 한 근대주의를 “모든 이단의 총집합”이라고 규정지었으며 참으로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 총력을 다한 사목자의 삶이었습니다. 교황님의 다음 말씀도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에 기인함을 봅니다.
“교회에서 사도직의 가장 큰 장애물은 신자들의 소심함이라기 보다는 비겁함입니다.”
교황은 생전에 기적을 많이 일으켜 살아있는 성인으로 대접받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도 있어, “1914년이 가기전에 전쟁은 일어날 것이다.” 말했고, 전쟁을 막고자 노력을 기울였으니 허사가 되었고, 대적하기 위해 각자의 고국으로 돌아가는 신학생들에게는 눈물을 흘리며, “그대들이 고백하는 신앙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그리고 전쟁터에서는 애긍심과 동정심을 잊지 마십시오.” 당부했다 합니다. 교황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공포와 우울증 상태에 빠졌고 그해 뇌졸중으로 선종하니 한평생 예수님을 닮은 착한목자 교황으로서 최선을 다한 삶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여기 나오는 포도밭 주인은 바로 착한목자 주님을 상징합니다. 착한목자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는 착한목자 하느님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는 온통 에제키엘 예언자들 통하 악한 목자들에 대한 착한목자 하느님의 격렬한 분노의 표출로 가득합니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너희는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나 이제 그 목자들을 대적하겠다. 나 이제 양떼를 찾아서 보살피겠다.”
비단 교회지도자들뿐 아니라 작금의 위정자들에게 그대로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아 정말 이제 나라의 지도자들, 위정자들이 민생을 챙기며 착한목자영성을 살아야 할 절박한 시점에 이른 것 같습니다. 먹고살기 힘들다는 절박한 아우성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오늘 복음의 포도밭 선한 주인은 착한목자의 모범이 됩니다. 그는 결코 유능한 사업가 비즈니스맨이 아닌 착한 목자입니다.
포도밭 선한 주인은 일꾼들의 일한 시간과 양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하루 한 데나리온 일당을 나눠줍니다. 분명 선한 주인은 일꾼들의 내적사정을 충분히 고려했을 것입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기회도 일거리도 없는데 딸린 많은 식솔들의 가장들임을 생각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대로 자비롭고 너그러운 착한목자 주님의 모습입니다. 착한목자 주님이야말로 요즘 회자되는 기본소득제의 원조임을 깨닫습니다.
기본소득제도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제가 모든 구성원 개개인에게 아무 조건없이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소득입니다. 앞으로 보편적인 빈곤화로 인해 조만간 실현되리라 봅니다. 얼마전 좌절된 ‘전국민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도 일종의 기본소득제에 속합니다. “억강부약 대동세상, 먹사니즘”을 주장한 모정치인의 이상도 오늘 복음의 정신과 일맥상통합니다.
강자의 욕망은 절제시키고 약자의 삶은 보듬으며, 모두가 어울려 평등하게 사는 보편복지가 실현된 세상이요, 2000년부터 쓰인 ‘먹고사는 게 최고 가치’라는 조어가 먹사니즘입니다. 착한목자 주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제 분수를 모르고 월권한 철부지 일꾼의 항변에 대한 선한 주인의 통쾌한 반응이 복음의 옹졸한 일꾼은 물론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착한목자 주님의 자비하시고 너그러운 마음을 닮게 합니다. 모두가 똑같이 받아 모시는 하나의 성체가 기본소득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주님,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시편 2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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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이 세상이 첫째인 저세상의 꼴찌>
어제 복음의 끝과 오늘 복음의 끝은 같은 내용입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종말에 인생 역전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나가던 사람이 저세상에서는 꼴찌가 될 거라는.
그런데 이 세상에서 첫째이던 사람은 무조건 꼴찌가 되는 건가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선정을 펼친 세종대왕은 어떻게 되고 저처럼 이 세상에서 첫째도 꼴찌도 아닌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그러므로 첫째인 사람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종말에 인생이 역전된다는 것이니 역시 인생 종말에 어떤 인생이냐가 관건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의 순간에도 다시 말해서 죽을 때까지 아직도 이 세상이 첫째이고 저세상은 꼴찌인 사람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에서 꼴찌가 될 첫째입니다.
그리고 종말의 순간에도 이 세상을 집착하여 하느님 나라 갈 생각도 없고 채비가 안 된 것이 문제이지 마지막에라도 그러니까 저녁 6시를 1시간 앞둔 5시에라도 가겠다고 하면 됩니다.
이는 마치 마감 1초 전이라도 응시 원서를 내면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선착순으로 천국 지원자를 자르지 않고, 10시간 전에 응시한 사람과 1초 전에 응시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평생 착하게 산 사람과 평생 악하게 산 사람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평생 악하게 산 사람이라도 죽기 전에 회개한다면 다시 말해서 평생 악하게 산 것을 후회하고 하느님께 애원한다면 평생 착하게 산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를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이십니다.
이때 평생 착하게 산 사람이 저 사람은 악한 사람인데 왜 나와 똑같이 받아주시냐고 따진다면 그 사람이 실은 착한 사람이 아니고 악한 사람입니다.
평생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수도 생활 열심히 한 사람일지라도 마지막에 대세 받는 사람을 시기한다면 그 신앙인과 수도자는 신앙생활과 수도 생활을 헛되이 한 것이고 불행한 자들입니다.
신앙생활을 착실히 한 착한 사람이란 하느님의 후하심을 닮아 다른 사람, 악한 사람에게도 후하고 특히 구원 문제에 있어서 후할 것입니다.
나만 하늘에 오르고 다른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은 자기만 지붕에 오르고 사다리를 걷어차는 세속인과 다르지 않지요.
사실 일찍부터 포도밭에서 일한 사람 다시 말해서 신앙생활을 일찍부터 한 사람은 일찍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사한 것을 행복으로 여겼어야 했습니다.
하느님을 일찍 안 것이 불행입니까? 하느님 나라를 위한 봉사를 일찍부터 한 것이 손해입니까?
하느님 나라를 위한 봉사를 고역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손해 봤다고 할 것이고, 그런 사람은 일생 고역을 치렀으니 일생 불행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인이란 하느님 나라를 위한 봉사가 진정한 행복이요, 하느님 나라를 위한 봉사를 할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후하심을 닮아 다른 사람도 구원되길 바라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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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6)
<하느님의 구원 계획!>
오늘 복음(마태 20,1-16)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하느님의 보편 구원 계획이 계시되고 있습니다.
어떤 밭 임자가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인력시장으로 가서,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냅니다. 이른 아침에, 아홉 시쯤에,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과 다섯 시쯤에 나가 일군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냅니다.
저녁 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을 통해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까지 품삯을 내줍니다. 그런데 맨 먼저 온 이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아들고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말합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하시는군요."(마태 20,12)
그러자 포도밭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 20,14-15)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6)
이 비유에서 '선한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일꾼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입니다.
이 비유가 전하는 메세지는, '누가 먼저 예수님을 믿고 따랐는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는 구원'과 '하느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진행형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부르시는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 지금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이가 첫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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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 20, 15)
가장 비참했던
그 때를
기억해본다.
하느님의
도움과 위로가
간절했던
그 때를
떠올려본다.
그럴만한
사연과
사정이 있는
우리들
아픔이다.
아픈
모든 이들에게
후하게
구원의 문을
열어젖히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지나치는
모든 시간이
은총이고
선물이었다.
후하신
하느님께서
만들어놓으신
아름다운
세상이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누구 하나도
버리지 않으신다.
인간은
가혹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끝내
후하시다.
연민의 길을
걸어가신다.
조건과
무조건 사이에
하느님과
우리가 있다.
우리에게 삶을
가르쳐주시는
주님이시다.
삶에
가장 중요한
순간은
주님을 만나는
순간이다.
우리를
찾기 위해
직접 길을
나서시는
주님의 조건없는
사랑이시다.
우리가
찾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갈 곳 없는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다.
욕심과 시기를
내려놓고
감사와 찬미를
배워야 할
우리들 삶이다.
허망한 삶이
아니라
보시니
참 좋은
하느님의
은총이다.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하느님의
자비이다.
하느님께서는
거두어들이시고
우리는
내려놓아야 한다.
한순간도
은총 아닌 것이
없었다.
한없이 주시는
하느님 앞에
시기와 원망을
내려놓는다.
가장 좋은
하느님의 때를
가로막아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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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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