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인류학자 마셜 사린스는 《석기시대 경제학》에서 원시사회는 하루에 4~5시간만 노동하면 나머지 시간은 휴식과 수면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식량도 부족하지 않았고, 식량저장이라는 개념이 없었어도 현대인 못지않게 다양한 음식으로 영양을 섭취했다고 합니다. 영양이 좋다보니 수렵채취인들은 농경사회 사람들보다 건강하고 키도 컸고 오래 살았습니다. 사냥을 하고 맹수와 싸워야 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 친족 및 집단 내 결속력도 강했다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수렵과 채집은 야만이고, 농경과 목축은 문명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현대인들이 만들어 놓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 사학자 유발하라리는 《사피엔스 》에서 농업혁명은 사기라고 이야기합니다. 농사를 하면서 중노동과 영양부족에 시달리기 때문에 수명은 짧아지고, 키도 작아지고, 더 일찍 죽었다고 합니다.
스티븐 테일러는 《자아폭발-타락 The Fall》에서 약 1만~6천 년 전에는 전쟁이 없는 황금의 시대를 살았다고 합니다. 그 시대의 유적에서 무기와 같은 도구들과 전쟁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가부장제와 사회계급이 나뉘어진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평등한 사회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와 급격한 기후변화로 인해 사람들은 식량 확보가 가능한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총ㆍ균ㆍ쇠》에서 1만 년 전부터 점차 수렵보다 식량생산 쪽으로 택한 이유를 크게 네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1. 야생 먹거리의 감소 2. 기후변화로 작물화할 수 있는 야생식물의 증가 3. 야생 먹거리를 채집하여 가공, 저장하는데 필요한 기술발전이 곡류 재배를 가능하게 함 4. 인구증가에 따른 식량생산의 증가는 인구밀도를 더 높이고, 더 많은 먹거리를 필요로 하게 함
물론 채취에서 경작으로 변모하기까지 수천 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다 신석기 혁명이라 하는 토기의 발명과 맞물리면서 농경문화가 확산되었습니다.
# 고대 농경의 흔적, 고성 문암리 유적
과연 언제부터 우리 선조들은 농사를 짓기 시작했을까요?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의 해안 가까운 구릉지에서 밭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밭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밭유적으로 밝혀지면서 세계적으로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것도 무려 약 5천~6천 년 전에 돌을 갈아서 도구로 쓰던 시대에 만들어진 밭유적이어서 매우 소중한 유산입니다.
밭유적 이외에도 주거지와 야외노지(불을 피워 음식을 하거나 작업을 하던 공간)도 같이 발견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밭에서 농작물을 키워서 재배했음이 증명된 것입니다. 그리고 문암리 주거지 터에서는 석기, 돌화살촉 등과 함께 빗살무늬 토기 조각이 발견되었습니다. 빗살무늬 토기의 형태와 무늬로 볼 때 고조선의 영역(한반도 전체와 중국의 동북3성 지방, 러시아의 아무르 연안을 포함하는 영역)에서 발굴되는 토기들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문암리 밭유적이 약 5천~6천 년 전이면 시기적으로는 고조선보다 이전에 있었던 배달국시대 유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배달국시대에는 농경 역사상 유명한 문화영웅이 한 명 있습니다. 이 책에서 여러 차례 소개하고 있는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입니다. 신농씨는 배달국 8번째 환웅천왕인 안부련 환웅천황 때 강수(姜水)에서 태어난 강씨(姜氏)의 시조입니다.
# 5천~6천 년 전 사람들은 무엇을 먹었을까?
밭은 가장 큰 특징은 이랑과 고랑의 구분입니다. 땅을 갈아서 길고 좁게 흙을 쌓은 곳을 이랑이라 하는데 여기에 작물을 심고, 이랑과 이랑 사이는 흙을 파내어 고랑이라는 공간을 만듭니다. 고랑과 이랑은 농사를 지으면서 축적된 시행착오의 결과입니다. 고성 문암리 밭유적에는 이랑과 고랑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또한 사람의 발자국과 경작을 한 흔적, 재배했던 작물의 줄기 흔적들도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문암리 사람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요? 그중 대표적인 작물이 벼입니다. 벼는 논에서 키우기도 하지만 밭에서도 키웁니다. 특히 논농사가 알려지기 전에는 밭에서만 키웠습니다. 그리고 밀, 조, 기장, 보리, 생강, 명아주, 들깨도 발견되었습니다. 진짜 놀라운 것은 콩이 발견되었다는 점입니다.
강원도 고성 문암리에서 멀지 않은 양양에 오산리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신석기시대 토기조각이 발견되었는데, 토기에 팥에 눌린 자국 두 개가 발견되었습니다.
# 5천 년 전, 벼농사를 짓다
1991년 일산 신도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경기도 고양시 가와지 마을에서 구석기시대 부터 철기시대까지 광범위한 시대의 유물들이 발굴되었습니다. 이중 볍씨 107알을 찾아냈습니다.
미국베타연구소에서 성분을 분석한 결과 가와지 볍씨는 약 5천 년 전의 것으로 연대가 확인되었습니다. 가와지 볍씨가 발견되기 전에는 일본으로부터 쌀이 전래되었다는 어설픈 학설이 대세였는데, 가와지 볍씨 덕분에 바로잡혔습니다.
# 세계 최고(最古) 농경문화, 1만7천 년 전 볍씨
그런데 가와지 볍씨보다 더 놀라운 이야기가 등장했습니다. 1994년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오창과학산업단지 예정지에서 구석기 유적층이 나온 것입니다.
이후 발굴작업을 통해 구석기 유물들과 함께 고대벼와 유사벼(외견상 벼와 유사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토된 볍씨들은 서울대와 미국의 지오크론 연구실에서 연대를 측정한 결과, 1만3천~1만5천 년 전의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소로리 볍씨'입니다.
고대벼와 유사벼는 전자현미경 상으로 보면 모양상 차이점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벼는 현대 볍씨처럼 껍질이 울퉁불퉁한데, 유사벼의 껍질은 편평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발견 당시 고대벼보다 유사벼가 훨씬 더 많았기 때문에 당시 먹을거리로 유사벼의 비중이 더 높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일부 학자들은 1만5천 년 전은 구석기 말 빙하기의 끝 무렵이라 아열대 식물인 벼가 자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벼는 자연상태에서 최저 발아온도가 섭씨 20도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청주MBC 취재팀이 국립 작물시험장 춘천출장소에서 냉해실험을 취재했고, 실험결과 13도에서도 70% 이상이 발아된다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또한 고양시 가와지 볍씨는 소로리 볍씨로부터 유래되어 재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소로리 볍씨가 유전적으로 가와지 볍씨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소로리 볍씨가 발견되기 전까지, 중국 후난성에서 출토된 1만1천 년 전 볍씨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로리 볍씨는 후난성 볍씨보다 4천 년이나 더 오래된 볍씨로 인정받으면서, 중국이 한반도에 벼농사를 전해주었다는 기존 학설이 뒤집히게 되었습니다.
최근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개발한 최신 탄소연대측정 계산법을 적용하면, 소로리 볍씨의 나이는 무려 1만7천 년으로 그 연대가 상향됩니다. 소로리 볍씨에는 '한국에서 재배된 벼'라는 의미로 '오로자 사티바 코레카(Oryza sativa coreca)'라는 새학명이 부여됐습니다.
소로리 볍씨, 가와지 볍씨, 문암리 밭 유적들은 이 땅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농경문화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확인해주었습니다.
첫댓글 대단히 감사합니다~~ 너무나 좋은 정보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