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8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바이칼을 투어하면서 러시아의 유배문학과 알라 푸가 쵸바의 <백만송이 장미>, 우리 나라 모래시계의 배경음악인 코즈브 죤의 <백학>에 대하여 제대로 학습한 것 같습니다. 한 때 세계 최강인 쏘련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지금 러시아의 대중음악의 기조는 단조의 저음의 흐름이 주류인것 같더군요. 슬픔의 기조가 최강의 그림자 밑에 흐르고 있다니......
Million Alyh Roz /Alla Pugatcheva 백만 송이 장미 / 러시아 국민 가수 알라 뿌까쵸바
<이야기 1> 러시아 최고 국민 여가수 알라 푸가쵸바(출처 : 모스크바 프레스 10월호, 최미원기자) 대표곡 만 500여 곡 영어, 프랑스어 등 10개 국어 번역돼 앨범 판매 수만 2억 5천만장 ![]() 러시아란 나라에 혁명과 봉기가 잦았던 이유가 바로 ‘극단적’으로 게을러서란 예기가 있다. 극단적으로 게을러 참고 참다가 터지는, 한 번 터지면 극단적으로 계속 터지는 게 바로 혁명이고 봉기란 예기를 들은 적이 있다. 러시아 TV를 틀면 푸틴 (러시아 대통령)만큼이나 많이 나오는 유명인사 중 한 명이 ‘알라 푸가쵸바’ (여,64세)다. 2011년 TV 인기 쇼 프로그램 진행자이자 연예 방송인이 올해 나이 37 세인 막심 갈킨 (27살 연하)과 결혼해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 알라 푸가쵸바는 한국인들에게 ‘백만 송이 장미’ 노래로 알려져 있다. 한국 가수와 비교하자면 한국의 ‘이미자’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자 씨를 보통 트로트 가요무대에서만 볼 수 있다면, 알라는 임의의 모든 가요무대에서 볼 수 있다. 심지어 그녀의 지휘아래 젊은 신인 가수 선출 경연대회도 최근 해 펼쳐지고 있다. 러시아 가요 무대는 한국과 다르게 젊은 층과 중년 및 노년층이 격의 없이 다 함께 무대를 장식한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 TV를 틀면 주로 젊은 신세대 가수위주의 무대가 많은 반면, 러시아에서는 여러 연령층의 가수들이 다 함께 공연한다. 그녀를 어떤 이는 18세기 러시아 정계를 주름잡았던 예카테리나 2세와도 비교한다. 러시아 역사에서 예카테리나 2세 때 영토가 최고 넓었다는 기록이 있다. 페테르부르크 도시를 세운 표트르 대제의 며느리로 표트르 대제를 이어 러시아를 발전시킨 인물로 야사에 따르면 그녀의 침대는 뱀가죽으로 되어 있고 그녀가 거느린 남자만해도 수천 명에 이르며 대단한 권세와 부귀를 누린 여황제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현재 러시아에서 알라는 가요계의 푸틴으로 통하기도 한다. 가요계의 ‘프리마돈나’란 칭호가 있을 정도 가요계에 발을 들여놓은 신인들에게 있어서 그녀는 등용문이 됐다. 다시 말해, 그녀는 실력과 재력과 권력을 모두 쥐고 있다는 예기다. ![]() 푸가쵸바는 러시아 국민 가수일 뿐만 아니라, 피아니스트, 작곡가, 작사가, 프로듀서, 영화배우, 1991년도에는 ‘러시아 국민 아티스트’란 칭호도 얻었다. 그녀의 대표 곡은 500 개가 넘으며 러시아어, 영어, 프랑스어, 히브리어, 독일어, 핀란드어, 우크라이나어로 번역됐고 100 여개가 넘는 그녀의 음반이 일본, 한국, 스웨덴, 핀란드, 독일, 폴란드, 체코, 불가리아, 등에서, 팔리고 있으며 전체 앨범 판매수는 2억 5천만 장으로 집계되고 있다. 현재 남편인 막심 갈킨과는 2005년부터 동거했으며, 알라 푸가쵸바의 고백에 따르면 막심과의 인연은 2001년부터 시작됐다. 러시아 방송사 중 한 채널인 NTV에서는 이들의 1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 ‘알라 막심, 사랑 고백’이란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왜 러시아인들은 그녀에게 열광할까?!!!!!!! ‘노래하는 여자’, ‘프리마돈나’ -그녀의 이름은 알라 푸가쵸바! 1997년 있었던 유로비젼 (Eurovision)에서 ‘프리마돈나’라는 노래를 선보이게 되면서 알라는 ‘프리마돈나’라는 애창을 얻게 된다. 이는 지금까지도 모든 러시아인들의 입에서 불러내리는 그녀의 애칭이기도 하다. 알라 푸가쵸바는 이미 러시아 국내에서 유로비전 훨씬 이전, 소비에트 정부가 무너지기 훨씬 이전인 1975년 소비에트 당대 최고의 영화였던 ‘운명의 장난’이란 영화노래를 부른 이후 유명해졌다. 그 후 2년 뒤 ‘노래하는 여자’란 그녀의 반자서전적인 뮤지컬 영화가 탄생한다. ![]() 오랜 세월 동안 그녀는 소비에트 국민들의 가슴속 독특한 개성을 소유한 ‘노래하는 여인’으로 남아 있다. 그녀의 명성은 당시 경쟁상대가 없을 정도로 대단해서 ‘알라’라는 이름의 또 다른 유명 여가수가 있었으나, 푸가쵸바에게 방해가 될까 봐 그녀의 이름을 ‘발레리야’로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1982년 푸가쵸바는 드디어 소비에트를 넘어 외국에서도 유명세를 얻게 된다. 그녀를 세계적 유명가수로 알린 그 노래는 바로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백만 송이 장미’다. 이 노래는 한국어, 스웨덴어, 일본어, 핀란드어, 헝가리어, 영어, 히브리어, 등으로 번역되어 불리워졌고 수많은 외국 가수들이 그녀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푸가쵸바는 유럽, 미국, 오스트리아, 독일, 이스라엘, 체코 등을 비롯해 한국과 북한에서도 순회공연을 가졌다. 러시아에 있어 알라는 한 가지로 표현할 수 없는 인물이다. 강인한 여성상, 재능 있는 여가수 여기에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저속문화의 파급자라고 여긴다. 이는 그녀의 허스키한 모습을 비롯해 공개적으로 담배피고 욕설하는 모습을 자유롭게 연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어느 정도에 있어 그녀가 소비에트 여인의 이상형의 영향을 줬다고도 예기한다. 당시 소비에트 사회에 서구의 부르조와적스타일을 알리고 팝, 록, 카바레 풍의 음악장르를소개했다. 또한 소비에트 시절 그녀가 직접 ‘빙산’이란 곡에 에로틱 영화를 찍었다. 물론 상영 금지됐다. 당시 소비에트 검열 관들의 관점에서는 얼음 사이로 모피를 두르고 풀어헤친 머리로 누운 채 썰매를 타고 돌아다니는 여인의 모습이 브라운관을 통해 국민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소비에트 정권이 무너진 1990년대 알라는 실제적으로 가요계를 떠난다. 그러나 곧 ‘프리마돈나’와 같은 파워 있는 곡을 들고 무대를 장악한다. 현재 알라는 나이가 제법 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가요제를 비롯해 러시아 대중에게 품어내는 영향력은 아직까지도 여전하다. 가수로서는 무대를 떠났으나 작곡가 프로듀서로 자라나는 기대주를 키우고 있다. 그녀는 특히 과거 속으로 사라진 소비에트 정권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대에게 있어서 그 시대에 상징으로 남아 있는 그래서 소비에트 문화를 담고 있는 러시아인들이 열광할 수 밖에 없는 세대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 1949: 4월 15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나다 1954: 5세때 최초로 콘서트 무대 데뷔 1956: 음악학교 입학 1965: 첫 노래 ‘로버트’로 대단한 성공을 거둔다 1867: 서커스 학교에서 콘서트 반주자로 일 시작 1969: 오르바카스 서커스 배우와 결혼 1989: 한국, 미국, 오스트리아 순회공연 1991: ‘소비에트 국민 가수’ 칭호 부여 1992: 영화 제작 1993: ‘세기의 여성’으로 인정 2012: 대선에서 미하일 프로호로프 공개지지, 신인발굴, 2011 러시아 엘리트 순위에서 푸틴, 메드베데프 다음으로 3위에 기록됨, 100인의 영향력 있는 여성 순위에서 마트비엔코 다음으로 2 위에 랭킹 그녀의 남편들 첫번째 결혼:1969 ~ 1971, 서커스배우와 결혼 두번째 결혼: 1976 ~ 1980, 영화 감독과 결혼 세번째결혼: 1985 ~ 1993, 알라의 전 퓨로듀서와 결혼 네번째 결혼: 1994 ~ 2005, 가수 (필립키르코로프/ 67년생와 결혼) 다섯번째 결혼: 2011~ 현재, 쇼 프로그램 진행자와 결혼 [출처] 러시아 최고 국민 여가수 알라 푸가쵸바(백만송이장미 부른 가수)|작성자 코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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