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4:1-9 관용을 알게 하라.
다들 자기의 문제만 신경을 쓸 때 선교에 진심인 교회, 사도의 기쁨이고 면류관인 교회,
사도바울이 기도할때마다 감사가 나오는 교회,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의 완성을 위해 나가는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가 빌립보교회입니다.
그런 빌립보교회를 향해서 바울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지도자들 간에 서로 대립과 갈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갈등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라고 하는 교회 핵심 여성 지도자 간의 갈등이었습니다.
이들은 빌립보 교회의 핵심성도로 복음 안에서 다른 성도들과 함께 수고한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는 거듭난 자매들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여인들이 개인 재산을 주님을 섬기는데 사용하며 교회를 섬긴 것처럼 유오디아와 순두게도 그렇게 교회에서 많이 헌신하고 오랫동안 섬긴 자매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섬기기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과정에서 방법의 차이나 생각의 차이로 인해 함께 하지 못하고 자기의 것을 주장하고 고집하고, 상대방에게 지지 않으려는 육신의 본성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갈려 다툼이 생기고 이것이 교회의 문제가 되고 불평, 원망, 쓴 뿌리로 인해 교회가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교회에서 잘 섬기는 자매들이 라이벌 의식으로 일을 경쟁적으로 하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무시하고, 교만하게 행하면서 교회는 염려와 근심에 빠지고 최악의 경우 교회의 분열까지 일으킬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 빌립보 교회를 향해 사도는 관용을 알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런 일들이 교회 가정 직장 모임 안에서 늘 일상처럼 일어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분쟁은 악한 영적인 뿌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약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다는 말씀과
[약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라는 말씀처럼 이 모든 것이 옛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옛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주장을 강요합니다. 자기중심으로만 일하려고 합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처럼 강요합니다. 그러다보니 모두가 불편합니다. 육에서 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이 지도자들에게서 나오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악한 영적 뿌리에서 나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그러움 온유 관대 포용 배려 친절을 의미하는 관용은 하나님의 성품의 특성입니다.
[롬9:22]에 보면 하나님은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십니다.
[약3:17]은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궁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다고 말씀하면서 관용이 하나님의 품성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관용은 성도가 하나님 안에서 성숙해 가는 표지입니다.
우리가 새 신발을 신으면 아프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신발이 편해지듯이 신앙이 성숙해간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편안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와 성도들에게서 그런모습을 우리는 보게 뙵니다.
[고후10:1]에 보면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성도를 권하였다고 말합니다.
[딤전3:3]에는 교회지도자의 조건 중에 오직 관용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딛3:2]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는 말씀과 [빌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씀을 통해 관용은 성도의 성숙의 척도임을 말해줍니다. 관용은 넉넉해지는 것입니다. 너그러워지는 것입니다. 품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용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남들에게는 너그러운데 가족들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관용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성품이 아니고 윤리적인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성품적인 것인데 성품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것입니다.
[약3:17]의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궁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다는 말씀처럼 관용은 하늘로 부터 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관용을 알게 하라고 권면하는데 알게 한다는 것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와 있습니다.
여기에 알게 하라는 말은 명령법 수동태로 기록됐는데 이 말은 관용을 광고함으로 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참된 관용의 삶을 삶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그것도 지극히 자연스럽게 나타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관용을 알게 하라는 말씀은 너그러워져라 그것을 가꾸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관용하라고 말합니다. 권리를 주장하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낫다고 권면합니다. 끈기 있게 양보하라는 권면입니다. 친절과 아량을 베풀라는 권면입니다. 오래 참고 관대 하라는 권면입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모든 사람에게 증거 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베드로도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1-23).
인생이 나이 들어 갈수록 곧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씀처럼 주님 오실 때가 가까울수록 알곡으로 추수되도록 자신의 관용을 점검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순례자와 나그네입니다. 오늘 여기서 자라 내일 주 앞에 추수될 것입니다. 주께서 나타내심이 되면 주와 같기를 소망하는 성도 여러분,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살아갑시다. 그것은 마음을 넓히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관용하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관대하십시오. "주께서 가까우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