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단투, 그리고 단식
1989년 이후 1994년 복직할 때까지 전교조 1,500여 해직교사들은 해단투(해직교사단결투쟁)를 참 많이 했습니다. 본부에서 투쟁 지침이 내려오면 정확히 시간과 장소를 지켜 집결했습니다. 그 때 전교조 안에서는 집회에 ‘본인 사망’ 말고는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유행어가 나돌 정도였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검․경 안기부 등 공안 기관들이 전교조 행사를 단 한 번도 사전에 알아내어 막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비밀스럽게 행사를 치러야 할 만큼 탄압이 심했다는 것과 함께, 다른 한편 전교조 조합원들의 규정력과 단결력이 강했음을 말해 주기도 합니다.
집회가 시작되고 나서 대략 20분이 지나면 경찰 병력이 우리를 에워쌉니다. 그러면 곧 닭장차(경찰차)에 실려 서울 시내 경찰서에 분산 수용됩니다. 우리는 5년 동안 서대문서, 종로서, 종암서, 북부서, 강남서 등 여러 경찰서를 두루 들어가 보게 되었지요. 집회 도중에 한두 사람이 경찰들에 끌려 버스에 실리면 우루루 달려가 자진해서 함께 경찰차에 올라탔습니다. 이런 광경은 흔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동지애를 발휘하는 일이 한편으로 경찰들의 수고를 덜어주는 결과로 나타난 셈이었습니다.
경찰서에 도착하면 일단 유치장에 집단 수용됩니다. 모든 피의자는 48시간 이내에 혐의 없음, 훈방, 내사 종결, 불구속 입건, 구속 등으로 법적 처리를 해야 하는데, 그 시간 동안 교사들은 그 안에서 구호 노래 성토 등으로 집단행동을 벌입니다.
조사실에 끌려가도 지도부의 지침이 내려 올 때까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 등 묵비권을 행사합니다. 처음엔 우리가 투쟁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정당성을 말하기도 하고, 자녀들의 교육 문제와 학교 현실을 놓고 마주앉은 경찰들을 가르치려 듭니다. 상명하복의 경찰 조직에도 노동조합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이해도 구합니다.
48시간이 다가오면 다급해진 경찰이 몸수색을 하거나 강압적으로 나오고 말도 거칠어집니다. 그러다 경찰의 인권 침해 행위가 발생하고 교사들은 이걸 쟁점 삼아 사과를 요구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지문과 사진 채증으로 신분을 밝히려 들지만 이마저 잘 되지 않습니다. 실랑이 끝에 결국 48시간이 지나기 전에 전원 의기양양하게 경찰서 문을 나섭니다.
그런데 유치장에서 대기하는 동안 그 안에서도 간부급 조합원 중심으로 대응 전술을 놓고 토론을 벌이게 됩니다. 가장 첨예한 문제는 관식을 먹느냐 거부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이를 놓고 치열한 토론을 벌입니다. 관식이래야 납작한 양은도시락에 꽁당보리밥과 단무지 서너 개 얹은 게 고작입니다. 대개 이럴 때는 관식을 먹어서 안 된다는 강경파가 선명하게 보여 이기게 됩니다.
이럴 때 나를 포함한 몇 사람은 밥을 먹자는 의견을 냅니다. 몸이 상하고, 가뜩이나 지쳐 있는 우리가 병이 나면 어떻게 투쟁을 이어 나가겠느냐고 주장하지만 강경한 목소리에 묻혀 버립니다. 그래서 밥이 들어오면 먹지 않고 도로 쇠창살 밖으로 내밀어 놓습니다.
단 며칠이라도 물과 소금만 먹고 곡기를 끊는 단식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단식하면서 하루 이틀 지나면 정신이 아주 맑아집니다. 특히, 코가 가장 예민해져서 냄새에 민감해지지요. 음식 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 없지만, 곁에 있는 동지들의 체취는 몹시 역겹습니다. 책을 읽으며 누워 지내면 좋을 것 같지만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감각이 예민해지긴 해도 두뇌 활동은 안 됩니다.
법외노조로 있던 시기, 해직교사 원상복직 등의 여러 가지 사안으로 단식을 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합법화 이후에도 중앙집행위원들은 단식을 가끔 했습니다. 2000년도 교육부와 단체 협상이 막혀 당시 여당인 민주당의 여의도 당사 정책위원장실에 들어가 여러 날 단식 농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전의경들이 당사를 지키고 있었지만 출입이 비교적 쉬웠습니다.
경북지부장을 하던 나도 당사에 들어가 농성에 합류했지만 당시 아내가 병이 깊어 강남 어느 병원에 장기 입원 중이라 병원과 당사를 왔다 갔다 해야 했습니다. 이 때는 도저히 단식을 다른 지부장들처럼 할 수 없었습니다.
농성이 마무리 될 즈음 서울역 앞에서 전국교사대회가 열렸는데,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경북에서 올라온 조합원들과 김밥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 뒤 지부 홈페이지에 저의 도덕성에 실망스럽다는 글이 올랐습니다. 쓴웃음이 나왔지만, 아내의 병구완을 소홀히 할 수 없었노라는 변명으로 댓글을 달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 분은 나와 조직에 대한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전교조의 선거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당시 공안정국에서 전 국가기관이 총동원되다시피 결성을 막으려 했던 전교조가 이런 투쟁성과 역사성 위에서 건설되었기 때문에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전교조가 조직적으로 위기에 처했다고들 하지만 친목단체나 이익단체로 형태 변화를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2009. 11. 21.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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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힘들지만 늘 정의로운 길을 걸어오신 숲사람님. 그만 먹먹해집니다. 어느 해던가 중부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이틀을 단식했던 그 날도 생각납니다. 그럼요. 옳은 길이면 끝까지 가야지요. 바르지 않은 세상이 욕을 하더라고 우리 아이들이 좀더 나은 세상에서 제대로 살 수 있도록 한다면 말입니다. 그러자면 숲사람님도 건강하셔야지요.
전교조 투쟁의 아픔이 전해져옵니다...남편이 은행서 데모할때 옷이랑 들고 다니던 기억이..숲님과 뜻을 같이 하는분들의 건강을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