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국 문화의 원류 원문보기 글쓴이: 솔롱고
제 14 장. 안동장군 신라제군사 왜국왕
들어가는 글
다음은『북사(北史)』「열전(列傳)」에 나오는 왜국(倭國)의 주요 내용들입니다.
여기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일본을 큰 나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왜국은 백제와 신라의 동남쪽에 있다. … 그 땅의 형세는 동쪽이 높고, 서쪽은 낮다.
야마퇴(邪摩堆)에서 살고 있으며 이 야마퇴를 『위지(魏志)』에서는 야마타이(邪馬臺)라고 한다. … 풍속은 문신을
하는데, 스스로 태백(太伯)의 후예라 한다. … 호수는 거의 십만에 달한다.
이 나라의 풍속에서는 살인하거나 강도·강간을 범한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 백성들은 편안하고 말이 없는 편이
어서 다툼과 송사가 적고 도적이 적다. … 문자는 없어 나무에 줄을 맺어 새긴다.
불법을 숭상하여 백제에서 불경을 구하니 이것이 문자의 시작이다.
점치는 것을 알아서 무당과 박수를 더욱 믿는다. … 여자가 많은 편이고 남자가 적어 결혼은 같은 성끼리는 못하게
한다. … 사람이 죽으면 죽은 자는 관과 곽에 넣고 가까운 사람들은 관 가까이에서 노래하거나 춤을 춘다. … 진귀한
구슬이 나오는데, 그 색이 청색이고 큰 것은 학의 알만하고, 밤에도 곧 빛이 있으니, 이것을 마치 물고기의 눈이
라고 하였다.
신라와 백제는 모두 왜를 대국이라고 생각하는데 왜에는 진귀한 물건이 많아 이것들을 중시하여 늘 사신들이 왕래
하여 서로 통하였다(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仰之 恒通使往來).
한나라 광무제 때에 사신을 보내어 입조하고 스스로 대부라 칭하였다.
안제 때에 또 조공을 받치고 왜노국(倭奴國)이라 하였다. 한나라 영제 광화 중에 나라에 분란이 있어 왕이 없었다.
히미코라는 여자가 있어 귀신도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라사람들이 그녀를 왕으로 추대했다. … 위나라
정시 때 히미코가 죽자 남자왕이 다스렸으나 분란이 심해 히미코의 딸을 왕으로 세웠다.
그 후 다시 남자 왕들이 들어섰고, 이들은 중국에서 작위를 받았다."
(1) 안동대장군 왜국왕
일본고대사의 가장 큰 쟁점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왜 5왕이라고 했습니다.
왜 5왕이란 『송서』「왜국전」에 나타난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라는 휘(이름)를 가진 다섯 사람의
왜왕(倭王)들을 말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 왜왕에 대해서 많은 분석들을 하여 이제는 이 왜 5왕의 실체에 대해서 여러분들도 잘 이해하시
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왜왕들의 행적과 작호(爵號)로 인하여 한국과 일본 양국의 사학자들이 기나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이러합니다.
『송서』「왜국전」에는 왜의 5왕이 송나라 황제에게 작호를 요구하고 이에 대하여 송나라 황제는 그 작호를 승인
또는 거절하는 대목들이 나옵니다. 앞서 본대로 438년 왜왕 진(珍)은 '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6국제
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의 작호를 송나라에 요구하자 송나라 황제는 안동장군(安東將軍)·왜국왕(倭國王)만 인정
해줍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왜 왜왕(倭王)이 신라, 백제는 물론이고 이미 없어진 진한과 모한 등의 지배권도 요구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 동안 이 부분에 대한 논쟁이나 연구는 충분히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여기서 새삼스럽게 이 과정들을 하나씩
다 분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동안의 연구들은 한국과 일본 모두 "철저히 자국 이해의 관점"에서 논의되어
왔기 때문에 이제는 좀 더 다른 각도에서 한번 살펴봐야 합니다.
먼저 그 동안의 경과에 대해 살펴봅시다.
400년 : 광개토대왕(영락대제) 한반도 남부 침공.
413년 : 장수왕 즉위.
417년 : 백제(전지왕)는 동진의 안제(安帝)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장군·백제왕'으로는 작호를 받음.
420년 : 백제는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음.
421년 : 왜왕 찬(讚)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벼슬을 제수받음(히미코 이후 최초의 남자 왜왕에 대한 기록).
427년 : 장수왕 평양천도.
431년 : 백제는 사신을 보내 선왕(전지왕)의 작호를 받음.
433년 : 나제동맹 성립.
438년 : 왜왕 진(珍)은 '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6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의 작호를 송나라에
요구하자 송은 '안동장군(安東將軍)·왜국왕(倭國王)'만 인정.
450년 : 고구려 장군 실직(현재 삼척)에서 피살.
451년 : 송나라는 왜국왕에 대하여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6국제군사·안동장군' 라는 작호를 내려줌.
461년 : 곤지왕 일본으로 감.
464년 : 고구려의 신라주둔군 (신라군에 의해) 100명 피살.
472년 : 개로왕 북위에 국서를 보내 고구려에 대한 응징을 호소하지만 실패.
북위는 고구려에게 이를 통보. 장수왕은 공격 준비.
475년 : 백제 멸망(이른 바, 한성백제의 멸망).
478년 : 왜왕 무(武)가 보낸 국서에서 왜왕 무(武)는 '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7국 제군사·안동
대장군·왜국왕'으로 자칭.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열도(일본)에서는 한반도 남부에 대한 지배권을 열도의 왜왕들이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는 입장입니다.
열도 사학계의 입장을 간략히 살펴봅시다.
사카모토 요시타네(坂元義種) 교수는 왜왕은 4∼5세기에 중국의 남조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며, 신라나 백제로부터
인질들이 왜국으로 온 것으로 보아 왜국과 백제·신라는 상하복종관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작호로 판단해 보건데 왜왕은 한반도 남부지역을 군사적으로 압도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합
니다.1)
히라노 쿠니오(平野邦雄) 교수는 야마토의 일본열도의 통일은 5세기 후반이며, 왕권이 강화되고 발전된 것도 5세기
말이라고 하고 그 이전의 남부 조선지역에로의 병력을 파견하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2),
왜왕 제(濟)의 451년의 작호는 신라와 임나·가라는 왜의 군사영역에 편입된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3)
야마오 유키하사(山尾幸久) 교수는 왕권은 닌도쿠 천황 시대에 시작되었고, 유라쿠 천황 시대에 확립되었으며4),
5세기에 열도는 통일되었다고 하면서5), 왜왕의 작호에 나타나는 가라, 모한 등은 한반도 남부 해당 지역에 있어서
징병하여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정도의 군사적 지배권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6)
스즈끼 히데오(鈴木英夫) 교수는 왜왕 무의 상표문(국서)을 토대로 보면, 동으로는 간토(關東), 서로는 규슈, 북
[海北]으로는 한반도까지 그 지배권을 가졌다고 주장합니다.7)
카사이 와진(笠井倭人) 교수는 왜5왕이 송나라에 대해 강력하게 작호를 요구한 것은 한반도 남부 지역 내의
기득권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으려 하였다고 주장합니다.8)
이에 대하여 반도 사학계는 이 전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① 작호(爵號)는 대개 요청하는 측이 원하는 대로 주는 경향이 강한 점,
② 모한, 진한 등 이미 없어진 나라에 대해서 지배권을 요청한 점,
③ 신라는 왜의 영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또 신라가 왜의 지배를 받은 적도 없는데도 지배권을 요구한 점,
④ 작호의 책봉은 보다 정치적인 요소가 강한 점 등을 들어서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특히 연민수 교수는 왜왕의 장군호인 안동대장군이 백제왕의 그것(진동대장군)보다 서열이 낮으면서 한반도
남부를 군사적으로 지배한다는 것은 의문이라고 합니다.9)
최재석 교수는 5세기의 왜국이라는 것은 쓰시마(對馬島)를 포함한 규슈지역에 불과한 상태이기 때문에 왜왕들의
작호라는 것은 형식적인데 불과할 뿐이고 오히려 백제가 일본에 일종의 경영팀을 파견하여 일본을 다스렸다고
주장합니다.10)
그러나 냉정하게 보자면, 작호는 그것을 요구하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국제정치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모한·진한 등도 이미 없어진 나라가 아니라 그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한국인들을 통칭하여 아직도 조선, 고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신라는 왜의 영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지배를 받지도 않았다는 문제도 그리 간단하게 대답할 문제는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나의 기록에 대하여 두 나라의 입장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열도(일본)는 끊임없이 한반도의 일부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고 있고 이것은 장기
적으로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치 중국이 지속적으로 한반도는 중국의 영역인 것처럼 주장하면서 동북공정을 강행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일본은 독도도 일본의 영토라고 하고 중국은 제주도 남쪽의 수중암초(이어도)까지도 중국땅이라고 합니다.
저는 같은 쥬신의 나라이면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불필요한 민족주의는 가지고 있진 않습
니다. 다만 현재 자신의 영역을 지켜내면서 쥬신으로서의 공통성과 정체성을 바탕으로 국제협력을 도모하여
어려운 난국에 대처하여 쥬신이 사멸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독도 문제나 이어도 문제는 심합니다.
지도책을 꺼내놓고 한번 보세요. 울릉도에 연해있고 열도와는 1천리도 더 떨어진 곳이 어떻게 일본의 영토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한국이 제주도 가까이 있는 수중암초 위에 해양기지를 만들어 놓으니 이제는 중국이
자기의 땅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국제 정치 현실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적어도 같은 쥬신들만큼은 국제정치에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사안들에 대해
공동대처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만이 쥬신의 사멸을 막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앵글로 색슨들은 이 점에 있어서 하나의 이상적인 모델일 수가 있습니다.
다시 이제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왜 열도의 제왕들은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지배권을 가진 작호들을 요구했을까요?
이 문제들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측면에서 심층적으로 분석해보도록 합시다.
필자 주
(1) 坂元義種『古代東亞細亞の日本と朝鮮』(吉川弘文館 : 1978) 202∼203쪽, 354쪽.
(2) 平野邦雄 『大化前代政治過程の硏究』(1980) 43쪽.
(3) 平野邦雄 「金石文の史實と倭五王の通交」『岩波講座 日本歷史』(1980) 254∼256쪽.
(4) 山尾幸久「日本古代王權の形成と日朝關係」『古代の日朝關係』(塙書房 : 1898)
(5) 山尾幸久 『日本國家の形成』(1977) 머리말.
(6) 山尾幸久 「日本古代王權の形成と日朝關係」『古代の日朝關係』(塙書房 : 1989) 221∼223쪽.
(7) 鈴木英夫 『古代の倭國と朝鮮諸國』(靑木書店 : 1996) 93쪽, 160쪽.
(8) 笠井倭人 『古代の日朝關係と日本書紀』(吉川弘文館 : 2000) 312∼313쪽.
(9) 연민수 『고대한일관계사연구』(혜안 : 1998) 121∼130쪽.
(10) 최재석 「中國史書에 나타난 5세기 '왜5왕'기사에 대하여」『아세아연구 』102호(1999)
(2) 헤게모니 쟁탈전 : 부여계 내부의 권력투쟁
『송서』「왜국전」에 나타난 왜왕의 작호는 마치 한반도 남부 지역이 왜왕의 지배영역처럼 묘사되어있습니다.
이 기록으로 살판이 난 것은 일본의 정치가들과 학자들입니다.
즉 『송서』「왜국전」에 나타난 왜왕의 작호는 왜왕이 일본열도를 포함하여 한반도 남부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있다는 것을 제시하는 듯 보여서 일본 쪽에서는 이것을 한반도 남부의 지배권을 보증하는 수표처럼
인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한국 측에서는 이 작호가 이미 멸망한 나라에 대한 지배권도 포함되어있어 자의적인 것으로 자칭
하여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이 두 견해는 모두 틀렸습니다.
왜왕실과 백제 왕실 자체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상황에서 그 변화나 추이를 감안하지 못한 분석들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왜왕 작호 문제는 부여계 내부의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나타난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아니면 對
고구려전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한 하나의 군사적 전략으로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현상 즉 왜왕의 작호 요구는 곤지왕의 도일(渡日) 및 천황 즉위로 인하여 정리되어 버립니다.
이후 그 같은 문제가 정치적 이슈가 된 일은 없습니다.
이 시기 이후 일본은 이전보다 더욱 강성해지는데 만약 그러하다면 더욱 더 많은 관작의 요구가 있어야할 터인데
그런 모습들은 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열도는 더욱더 독립적으로 움직이면서 수나라가 건국될 시기에는 중국의 황제와 대등하다는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열도(일본)와 반도는 부여계이며 이들이 담로제도를 바탕으로 부여계의 정체성을 유지했을 것이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담로제도는 부여계의 확장과 정체성의 유지에는 매우 유리하다는 점을 충분히 말씀드렸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대륙 부여의 세력이 한강유역의 초기 부여세력과 합류하였고 이들 세력이 열도부여를
건설한 것이며 그 헤게모니가 개로왕의 서거(475)를 기점으로 반도에서 열도로 서서히 이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중심에는 곤지왕(유라쿠 천황)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열도와 반도의 부여계의 대립과 갈등이 고조되었고 그 결과로 나타난 현상들 가운데 하나가 왜왕의
작호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고구려의 남하에 대하여 반도부여(백제)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고, 갈수록 그
세력이 약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00년 광개토대왕의 한반도 남부 침공이 있은 후, 413년 즉위한 장수왕은 한술 더 떠서 평양천도(427)를 단행합
니다. 이후 4세기 중반 이후에는 고구려와 백제사이에는 극심한 전쟁과 갈등이 일어나고 이에 대응하던 반도부여는
국력의 한계 상황에 봉착하게 됩니다.
반도에서는 열도의 지원이 절대적인 상황에서 주도권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아니면 고구려의 거센 남침에 대한 무언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그렇게 해온 것처럼, 열도는 반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했을 수가 있습니다.
마치 반도부여계가 만주부여계를 떠나서 새롭게 부여로 거듭나듯이, 열도부여계들은 반도부여계의 멸망(475)을
기점으로 하여 다시 태어난다는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다만 이 주도권(헤게모니) 싸움은 단순히 주도권 쟁탈전이라는 것 이상으로 부여계의 정체성 유지라는 보다 숭고
한 의미가 담겨있다고 봐야합니다.
즉 헤게모니 쟁탈전은 담로제를 기반으로 하는 부여계의 자가분열 과정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지만, 보다
큰 의미에서 부여계의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천년의 숙적이자 강적인 고구려의 남침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려는 부여계의 전략으로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상세히 분석합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왜왕 작호에 대한 분석을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하나는 부여계 내부의 헤게모니 쟁탈전이라는 관점과 또 다른 하나는 부여계 정체성의 유지를 위한 대고구려전
군사전략(전시군사통수권)이라는 측면입니다.
먼저 왜왕 작호 문제가 왜 결국은 반도부여와 열도부여 사이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될 수도 있다고 하는 지를
살펴봅시다.
첫째, 5세기에는 왜왕(열도부여)과 백제왕(반도부여)이 서로 경쟁적으로 작호의 승인을 송나라에 요청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과정을 한번 보시죠.
417년 백제(전지왕)는 동진의 안제(安帝)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장군·백제왕'으로는 작호를 받았고,
420년 백제는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습니다.11)
그러자 421년 왜왕 찬(讚)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벼슬을 제수받자, 431년 백제는 사신을 보내 선왕(전지왕)의
작호를 받습니다. 438년 왜왕 진(珍)은 '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6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의
작호를 송나라에 요구하자 송은 '안동장군(安東將軍)·왜국왕(倭國王)'만 인정해줍니다.
451년 송나라는 왜국왕에 대하여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6국제군사·안동장군' 라는 작호를 내려줍니다.
이와 같이 5세기초의 반도부여(백제)와 열도부여(야마토)는 마치 경쟁을 하듯이 작호의 승인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이 시기는 반도부여가 극심한 국가적인 위기에 처한 상황입니다.
마치 건달[유맹(流氓)] 사회에서 건달의 두목이 외부의 다른 건달 세력에게 크게 당하면, 이 건달 세력의 내부에는
극심한 동요가 일어나서 새로이 두목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둘째, 왜왕은 실제적이고 노골적으로 백제의 영역에 대해 지배권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반도부여의 멸망을 대비한 포석인 점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송서』에 따르면, 왜 5왕 가운데 왜왕 찬(讚)이 영초 2년(421)에 사신을 보내어 벼슬(구체적 내용은 없음)을
제수받았고, 원가 2년(425)에 사절을 보내어 토산물 등을 보냈습니다.
왜왕 진(珍)은 438년 '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6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의 작호를 송나라에
요구합니다. 이에 대하여 송나라 황제는 안동장군(安東將軍)·왜국왕(倭國王)만 인정해 줍니다.12)
이 같은 송나라의 행태를 보면 백제가 건재한 상태에서 백제 땅을 요구하고 있는 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봐야 합니다.
바로 이전에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따르면, 전지왕(405~420)은 417년 동진의 안제(安帝)로부터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진동장군·백제왕'으로는 작호를 받았고, 이 작호를 비유왕(427~455)이 431년경 사신을 보내
받았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특이하게도 왜왕 진(珍)은 백제왕(비유왕)이 건재하고 송나라와의 관계가 긴밀한데도 백제의
군사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열도와 반도(백제)지역이 부여계라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이것은 열도와 반도사이의 헤게모니 문제가 대두한 것
으로 봐야할 것도 같군요.
특히 이 시기는 백제의 비유왕 시기입니다. 개로왕의 국서로 판단해 보건데, 고구려와의 갈등이 극심한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의 『삼국사기』의 기록은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비유왕의 시기는 지진, 태풍, 극심한 가뭄, 이상기온, 흉년, 기근 등의 내용으로 가득하더니 결국 "흑룡이 한강에
나타나 안개가 자욱하더니" 왕이 돌아갑니다.
여기서 또 다른 이상한 점이 발견됩니다.
왜왕 찬(讚)의 기간 동안 반도부여(백제)의 왕은 구이신왕(420~427)인데 『삼국사기』에는 구이신왕의 행적이
완전히 없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분석들을 토대로 본다면, 구이신왕의 행적을 누군가가 다른 곳 즉 『일본서기』
의 기록에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치 『삼국사기』에서 사라진 근초고왕의 행적이 『일본서기』에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송서』에는 구이신왕이 영초 원년 즉 420년에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의 작호
를 받았다고 합니다.13) 이 작호는 한(漢)나라의 사례를 본다면 안동장군(安東將軍)보다는 높은 지위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왜왕 찬(讚)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벼슬을 제수받는 때(421)의 바로 1년전의 일입니다.
그리고 원가 2년(425)부터 백제는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습니다.
결국 비유왕이 431년 선왕의 작호를 받으러 사신을 보낸 문제도 부여계 내부에서 열도와 반도 사이에 갈등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도 있죠.
즉 반도부여(백제)가 고구려의 남하로 인하여 지속적으로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열도에서는 반도의 상황을 회의
적으로 보면서 반도부여는 고구려의 침공을 버틸 수 없을 것으로 파악한 듯도 합니다.
이상으로 왜왕의 작호문제를 헤게모니 쟁탈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았지만,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왜왕의 작호에는 "임나진한모한" 등의 말이 있는데, 이것은 다른 작호의 경우와는 달리 지나치게 시시
콜콜하게 일일이 지역 전체를 지칭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특히 제군사(諸軍事)라고 하여 군사적인 동원권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신라에 대한 지배권도 없는 왜왕이 나제동맹(433) 이후에는 신라까지도 군사지배권에 포함시켜달라고
요구합니다.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따라서 왜왕 작호의 문제는 부여의 헤게모니 쟁탈전으로만 파악하기에는 많은 다른 문제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본다면 왜왕 작호 문제를 부여계의 헤게모니 쟁탈전으로만 설명하기에는 크게 부족합니다.
(3) 부여의 대고구려전 군사전략 : 전시군사통수권
그러면 이제 왜왕 작호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좀 다른 시각에서 살펴봅시다.
제가 보기엔, 왜왕의 작호문제가 이 헤게모니 쟁탈전을 넘어서 만약 반도부여가 멸망할 경우 즉각 해당 지역의
맹주로서의 권한을 기득권화하고 재생시킬 수 있는 국제적인 인정 과정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즉 왜왕이 백제왕의 친족관계로 백제왕이 멸망하면 그 지역은 결국은 부여계의 땅이라는 논리로 작호를 요구한
측면도 분명히 있다는 말입니다.
생각해봅시다. 왜왕의 작호에는 특이하게도 두 가지 점이 포착됩니다.
하나는 왜왕은 백제왕보다도 높은 작호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 또 다른 하나는 특이하게도 신라임나진한모한
등의 백제가 지배한 영역들을 포함하는데 이것은 백제왕이 요구한 작호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왜왕이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전시(戰時) 부통령 개념으로 왜국을 통치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백제의 대통령(백제왕)이 죽게되면 그 대통령의 통치영역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본에 있는 부통령(왜왕)
이 전시 군사통수권을 받아서 한반도내에서 고구려에 대항하는 전쟁을 치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일본은 섬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이므로 왜왕이 이 기득권을 확실히 요구해두지 않으면, 한반도 남부의
백제(반도부여) 지배영역은 영원히 부여[왜왕(열도)]와는 상관없는 지역이 될 가능성이 크지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그 동안 백제왕은 이 지역의 맹주로서 임나진한모한 등의 지역에 대한 군사적 동원권을 가지고 있었
지만, 만약 백제왕이 사거(死去)할 경우, 당장 왜왕은 고구려의 남하를 막는 전쟁을 치르야 하는데 임나진한모한
등의 지역의 지배자들이 왜왕의 명령을 제대로 따를 리가 없는 것이죠.
다시말해서 백제왕이 이 지역에 대한 군사적 관할권을 요구하지 않았던 것은 이미 이 지역을 군사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던 상황이므로 굳이 그 부분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그런데 만약 백제왕이 죽게되면, 이 지역에 대한 맹주로서의 권한을 왜왕이 제대로 이양받을 수가 없게됩니다.
따라서 왜왕들은 이 지역에 대한 맹주권을 어떤 형태로든 간에 명시해두거나 국제적으로 승인받지 않으면 안되
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나제동맹(433)이 있은 이후에는 신라를 이에 포함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백제와 왜의 경쟁적인 작호 요구의 과정은 부여계 내부의 헤게모니 경쟁이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짧게는 3~4년, 길게는 5~10년을 주기로 백제왕들과 왜왕들은 작호를 받아두려합니다.
이것은 결국 대고구려전을 보다 원활히 수행할 수 있게하는 범부여계의 국제전략으로 봐야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왜왕의 국서에는 고구려에 대한 극심한 분노가 표출되어있으며, 반도부여가 재건된 이후에는 이 같은
작호문제가 다시 발생하지 않는 것이죠.
필자 주
(11) 『宋書』「武帝紀」 및 「百濟傳」
(12) "讚死, 弟珍立, 遣使貢獻. 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表求除正, 詔除安東將軍、倭國王." (『宋書』「倭國傳」)
(13) 『宋書』「武帝紀」 및 「百濟傳」
(4) 반도에서 열도로 : 헤게모니의 이전
백제가 멸망(475)하자 열도부여는 반도부여(백제)의 재건에 총력을 다합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전후하여 반도부여(백제)와 열도부여(왜)의 헤게모니가 서서히 교체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
니다. 문제는 반도부여에서 열도부여로 헤게모니가 넘어가는 이 시점의 중심인물에 일본 천황 가운데는 왜왕
무(武) 즉 유라쿠 천황이 있고 백제에서는 곤지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본대로 이 두 사람은 동일인이었
습니다.
부여계의 헤게모니가 반도부여에서 열도부여로 이전된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유라쿠 천황이 스스로를
고구려왕에 준하는 지위를 자칭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구려와 적대적인 관계에서만 나올 수 있는 조치입니다.
뿐만 아니라 반도부여의 몰락에 즈음하여 새로운 고구려 대항세력임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한 것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이것은 왜왕의 작호가 대고구려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군사적 전략이었다는 점에 대한 또 다른
증명이 됩니다. 이 점을 구체적으로 봅시다.
478년 왜왕 무(武) 즉 유라쿠 천황은 송나라에 사신을 통해 보낸 국서에 스스로를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라고 칭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삼사(三司)는 태위(太尉) ·사도(司徒) · 사공(司空) 등으로 삼공(三公)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 관직은 중국에서는 황제를 제외하고는 국가의 대사를 관장하는 최고의 관직입니다.
그러니까 개부의동삼사란 이 삼공에 준하면서 부(府) 즉 관청을 열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카모토 요시타네(坂元義種) 교수에 따르면, 송나라를 기준으로 송나라 황제가 이 개부의동삼사를 인정해준
사람은 4명 뿐이었다고 합니다.14)
그 만큼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의미 있고 영향력이 있는 작호인 셈이죠. 『삼국사기』「장수왕」51년조(463년)
에는 고구려의 장수왕이 송나라 세조로부터 정동대장군고려왕(征東大將軍高麗王)이라는 작호에서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車騎大將軍開府儀同三司)로 격상됩니다.
그런데 왜왕 무(곤지왕)가 이 관직을 스스로 칭했다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말은 반도부여가 몰락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만약 반도부여가 건재한 상황이라면 천년의 숙적에 대해 대등하게 라이벌 의식을 가진 이 용어를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개로왕의 생전에는 사실상 고구려의 남침을 저지하는 중책을 총괄하는 사람이 개로왕이
었는데, 개로왕 사후에는 이 중책을 맡을 사람이 바로 유라쿠 천황(곤지왕)이었던 것입니다.
고구려의 장수왕이 개동의부삼사라는 작호를 받은 것이 463년으로 이 시기는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남하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12년 후 개로왕은 피살(475)되고 이로부터 3년뒤에 유라쿠 천황은 장수왕과 대등한 작호를
스스로 칭하고 있습니다.
설령 유라쿠 천황(곤지왕)에게 있어서 '개동의부삼사'라는 작호는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든 안 받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당면한 과제인 고구려의 남하에 대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막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여계의 총사령관으로서 유라쿠 천황은 스스로를 '개부의동삼사'로 부른 것으로 추정됩니다.
실제로 유라쿠 천황(곤지왕)은 458년 개로왕의 주선으로 송나라로부터 정로장군 좌현왕(征虜將軍左賢王)에 봉해
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좌현왕이라는 말은 주로 쥬신계의 호칭으로 개로왕을 이은 제2인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개로왕이 서거했으니 곤지왕은 개로왕의 권한과 책임 모두를 떠맡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왜왕들의 작호문제를 중심으로 그 역사적 의미와 실체를 살펴보았습니다.
험난한 부여계의 역사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열도부여로 이어지는 지를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 [그림 ⑤] 곤지왕 신사(아스카베 신사) |
[부록]
오사카에는 아스카베신사(飛鳥神社)가 있습니다.
927년 일본 황실이 제정한 『연희식(延喜式)』에 따르면 현재 오사카의 아스카베 신사는 일본 황실의 사당인데
이 사당은 원래 이름은 곤지왕신사(昆支王神社)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곤지왕신사는 아스카베신사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720년 경의 기록에 의하면, 곤지왕 신사의 제신은 아스카베미야쓰코(飛鳥戶造)인 백제숙이의 조상인 곤지왕
이라고 합니다.15)
참고로 일본 군국주의 시대에는 이렇게 한일동족론에 관한 많은 사실들을 숨기기에 바빴습니다.
일본은 본가, 한국은 분가(分家)라는 사실에 위배되는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시 몇 가지를 상기해보고 지나갑시다.
앞서 본대로 14세기의 키타바타케 치카후사(北畠親房 : 1293~1354)는 자신의 저서인 『신황정통기(新皇正統記)』
에서 "옛날 일본은 삼한(三韓)과 같은 종족이라고 전해왔다.
그런데 그와 관련된 책들이 칸무 천황(桓武天皇 : 재위 781~806) 때 모두 불태워졌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후기(日本後記)』에 따르면, 헤이죠(平城) 천황 대동(大同) 4년(809년)에는 일본과 삼한이 같은 종족
이라는 서적을 관청에 바치라는 포고령을 내리고 "만약 이를 감추는 자가 발견된다면, 엄벌에 처한다."라는 칙령을
내렸다고 합니다.16)
18세기 에도시대의 저명한 고증학자인 도데이칸(藤貞幹 : 1732~1797)은 일본인들의 대부분은 백제인에 의해 조직
되었다고 단정합니다.17)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 당시 1915년 6월 29일 일본정부는 치안상의 이유로 김해(金海) 김씨(金氏)의 족보(族譜)
발행을 금지합니다. 당시 김해 김씨의 족보에는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의 왕자들 가운데 7명이 구름을 타고 가야를
떠나 일본으로 간 것으로 나타나있습니다.
앞서 본대로 일본에서는 그들의 조상신이 다까마노하라[고천원(高天原)]에서 다카치호노미네[고천수봉(高千穗峰)]
로 내려왔다고 믿고 있는데 이 지역은 규슈 남부지역을 말하고 있죠.
이 지방 일대에는 일본 궁내청에서 직접 관할하는 신사들이 많다는 것이죠.18)
필자 주
(14) 坂元義種『ゼミナ―ル日本古代史(下)』(光文社 : 1980) 385∼387쪽.
(15) 『延喜式』「神祇志料」(927)
(16) 『日本後記』券17 平城天皇 大同 4年 2月5日
(17) 藤貞幹 『衝口發』
(18) 朴炳植『韓國上古史』(敎保文庫 : 1994) 206쪽
제 15 장. 우리의 이름, 왜(Wa)
들어가는 말 : 광개토대왕비의 답답한 해석
광개토대왕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어 우리를 당혹스럽게 했습니다.
"百殘新羅, 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이 부분은 "백제와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써 조공을 하여왔는데 왜가 신묘년(391년) "까지는 문제
가 없는데, 그 다음에는 글자가 망실되어 많은 논란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제대로 해결된 것은 없습니다. 그저 양국의 학자들이 아직도 입씨름을 하고 있죠.
그래서 "신묘년 이래 (백제와 신라가)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백잔과 신라를 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거나 "신묘년
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잔을 깨뜨리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또는 "왜가 (신라를 신민으로 삼기 위해) 신묘년
에 바다를 건너오므로 고구려가 왜를 쳐부수었다."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일단 주요 글자가 망실되어 정확한 의미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열도(일본)에서는 주로 "왜가 391년 이후 백제를 쳐부수고 신라를 신민 즉 부용국(식민지)로 삼았다."라고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열도(일본)의 동북아의 고대사 즉 한국 고대사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반도 북부에는 고구려라는 강대국이 있고, 한반도의 남부 및 열도에는 왜(倭)라는 강국이 있으며 한반도에는
백제, 신라, 가야 등의 소국들이 고구려와 왜의 부용국 또는 조공국으로서 이들 강국(고구려와 왜)의 정치적
영향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제대로 된 역사 연구'가 없이는 열도쥬신(일본인)의 생각을 고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반도쥬신의 사학계처럼 소중화 사상에 빠져 자기논리로만 무장하여 이를 극복하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두 나라는 지금까지 천년 이상을 반목(反目)하여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원수처럼 살아야 합니다.
열도의 이 같은 해석에 대해 반도의 사학계는 다양한 대응을 해왔습니다.
그 동안 워낙 많은 논쟁과 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논할 문제는 아닌 듯합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비문에 왜(倭 : Wa)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답답한 것은 반도의 사학계는 이 왜를 열도의 왜로만 생각한다는 것이죠.
소중화(小中華) 의식의 발로이겠지요.
제가 보기에는 이 같은 논쟁은 큰 의미가 없고, 다만 왜가 신라를 부용국으로 삼기위해서 대대적으로 침입한 상황
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고구려 군이 신라를 도와주기 위해 내려온 것이겠죠.
이제 다른 부분을 봅시다.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영락) 9년(399년) 기해년에 부여(백잔)의 잔당들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통한후 한 무리가 되자, 왕이 평양
아래로 순수하였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왕께 고하여 말하길, '왜인이 나라의 지경에 가득하여 성과 못이 부셔
지고, 깨져 백성이 노비로 되니, 왕의 군대가 돌아와 저희들의 목숨을 구해주십시오.'하였다."
눈에 띄는 것으로 백제(반도부여)와 왜가 한무리가 되었다는 말이 있군요.
특히 왜인이 나라의 지경에 가득하다는 말이 눈에 띕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한국의 사학계는 도무지 대응할 길이 없죠. 겨우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백제의 지원군으로 동원된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적어도 신라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는 전쟁의 주도세력이 백제가 아니고 왜로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글쎄요. 백제는 고구려의 극심한 침공으로 꼼짝을 못하고 왜가 이를 대신하고 있는 걸까요?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
"(영락) 10년 경자년에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오만을 파견하여, 가서 신라를 구하였다.
남거성에서 나아가 신라성에 이르렀는데, 왜인이 그 가운데 가득하였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신라성 즉 경주 인근에 왜인(倭人)들이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즉 "(영락) 14년 갑진에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의 경계에 침입하였다."라는 말입니다.
원래 대방이라는 곳은 요동과 만주, 황해도 등 여러 지역을 부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위의 비문에 있는 말은 이후의 말들로 봐서 오늘날 평안도나 황해도를 가리키는 말로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백제가 아니라 왜가 황해도 지역까지 고구려를 공격해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전에 고구려가 왜를 공격한 것에 대한 복수전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요.
이것은 일본학자들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위의 기록은 한반도 남부를 원래 일본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고구려군의 침공에 대한 일본(왜)의
반격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견해는 에가미 나미오의 '왜한연합왕국설(倭韓聯合王國說)'설의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죠.
▲ 광개토대왕비 탁본 |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한국의 사학계는 입을 꾹 다물고 있거나 궁색한 변명만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기껏하는 얘기가 이 전쟁은 백제가 주도했을 것이며 왜군은 지원군이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의 비문에 왜가 백제의 지원군이라는 얘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한국사의 연구 수준이나 패러다임이 얼마나 부실한 지를 보여주는 한 대목입니다.
제가 보기엔 왜라는 말이 한국인의 다른 이름 같은데요.
이것은 '왜 = 일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긴 문제들입니다.
왜 = 가야인 또는 규슈지역의 가야인 또는 요동과 한반도에 이르는 해안 지역민을 낮추어 부르는 말로 이해하면
간단한 일입니다.
자 이제 이 문제에 대해 한번 생각해봅시다.
광개토대왕 시대라면 5세기 초입니다. 만약 왜가 고구려를 상대로 싸웠다고 하면 수천에서 수만의 군대가 전략적
으로 신속히 동원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왜가 현재의 일본지역 사람들이라면,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는 강력한 고구려군을 상대하려면 적어도 2만 이상의 군대가 동원되어야 할 것인데 이 많은 병력을 일본 열도
에서 누가 조직하고 동원했으며 그 보급로는 어떻게 구성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열도에서 그 많은 병력을 단기간에 동원하여 이동시킬만한 항해술이 4세기 말에 있었는가 하는 점입
니다. 뿐만 아니라 2만 이상의 군대를 동원하려면 동원되는 배만 해도 (사이메이 천황기의 기록과 대비한다면)
대형 선박으로 4백~5백여척이 필요한데 이것을 누가 어떻게 동원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만약에 그 많은 군대와 큰 배가 동원되었다고 하면 행정조직이 고도화되어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4세기 말의 일본에 대한 기록 자체가 없습니다. 특히 4세기에서 5세기초까지 일본에는 어떤 기록도 없어,
'신비의 4세기'라고 할 지경입니다.
그 동안 유라쿠 천황(곤지왕)까지의 여러 가지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야마토에 의한 일본 열도의 정치적 통합이
거의 6세기에 이르기까지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열도는 각종 정치세력들의 각축장이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상태에서 무슨 군단급 해외파병이 가능한 일입니까? 항공모함이 있는 것도 아닐텐데 말입니다.1)
그러니까 생각을 바꾸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봐야한다는 것이죠.
'왜(倭) = 일본(日本)' 이라는 것 자체가 착각이죠. 원래 왜(倭)라는 말이 일본의 중심 지역인 현재의 오사카 -
교토 지역에 나타난 것은 최소로 잡아도 5세기 이후로 봐야합니다. 중국의 문헌 사료에서는 266년경부터 413년
까지 약 150년간 왜에 관한 기사가 보이지 않지요. 그 이전 기록들은 주로 만주 - 한반도 등지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왜라는 말은 한국인들을 비하하여 부르는 말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필자 주
(1) 고대의 전쟁과정과 전쟁 물자의 이동과 관련된 사항은 김운회『삼국지 바로읽기』
(삼인 : 2006) 22장, 29장, 42장 참고.
(1) 왜(倭), 한국인들의 이름
저는 그 동안 누누이 왜(倭)는 한국인을 비하하는 말이라고 강조해왔습니다.
위치로 말하자면 현재의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황해도 해안, 충청도 해안이라고까지 추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가지고 욕을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누워서 침뱉기에 불과하다는 말을 해왔습니다.
왜의 실체에 대하여 『대쥬신을 찾아서』를 통하여 상당한 부분을 소개했습니다.
이번에는 그 동안 다하지 못한 부분들을 중심으로 말씀드리죠.
일단 『대쥬신을 찾아서』의 내용 가운데 관련된 중요한 부분들을 간단히 보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후한서(後漢書)』나 『자치통감(資治通鑑)』등의 기록에서, 왜인(倭人)들은 마치 현재의 베이징(北京) 인근
지역에 사는 것처럼 서술되어있습니다.
만약에 왜인들을 일본 열도의 사람들로만 이해하고서는 해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단순히 가야인으로만 이해를 해도 곤란합니다.
이 점들을 일단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후한서』의 내용입니다.
"서기 178년 겨울, 오랑캐(선비)가 다시 주천(酒泉)에 쳐들어와, 변방이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사람들이 나날이 불어나자 들짐승을 사냥하는 것만으로 양식을 대기가 힘들었다.
이 때문에 단석괴(檀石槐 : ?~181)는 스스로 정복지들을 널리 돌아보다가 오후(烏侯)에서 진수(秦水)를 보았는데,
진수(호수)는 광대하고 큰물이 멈춘 채 흐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물 속에는 물고기가 있었으나 잡지를 못했다.
단석괴는 왜인(倭人)이 그물질을 잘 한다는 말을 들은 바 있어 이에 동으로 가서 왜인국(倭人國)을 공격하여 왜인
들의 1천여 가를 잡아온 뒤, 그들을 진수 위로 이주시키고 난 뒤 '물고기를 잡아 먹을거리를 마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2)
이 기록에 나타나는 주천(酒泉)은 현재의 깐수성(甘肅省) 주취안(酒泉)인데 이 곳에서 동쪽으로 가면 큰 호수가
있고 그 호수에서 다시 동쪽으로 가면 왜인(倭人)들이 산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치통감』에는 위의 기록이 있던 바로 다음 해(179)에 단석괴가 유주(幽州)와 병주(幷州)에 침입했
다는 말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병주(幷州)는 현재의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 지역이고 유주(幽州)
는 바로 현재의 베이징(北京) 지역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왜인은 중국의 변방 특히 큰강 유역이나 해안가에서 어업(물일)에 종사하면서 사는 사람
들을 가리키는 말이 분명합니다.
이외에도 왜인들이 나타난 기록들을 모아서 그림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3)
다음의 그림은 사서에 나타난 왜에 대한 기록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 왜(倭)라는 말이 나타난 지역 관련 지도 |
위의 그림을 보면 결국 왜인들이 거주한 지역은 현재의 베이징이나 요동지역, 산동반도 서부, 한반도 서해와
남해의 연안 및 도서지방 등이라고 볼 수밖에 없죠? .
왜(倭)에 대한 기록이 매우 상세하고 후대의 기록에 큰 영향을 미친 『삼국지(三國志)』에서 말하는 왜(倭)의
모습은 왜(倭)가 현재의 일본(日本)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한반도 서남부 해안 전체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
니다. 『삼국지』에는 "사람이 죽으면 상주(喪主)는 곡(哭)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춤추고 노래한다."
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2천년 후인 지금 우리(한국)의 모습과 너무 흡사합니다
(현재 일본의 풍습은 아닌 듯합니다).
그 후 시간이 지나 『북사(北史)』가 등장하는 시기엔 왜(倭)는 거의 일본 열도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이 왜(倭)에 대하여 정말이지 제대로 한번 분석해 봅시다.
필자 주
(2) "光和元年冬 又寇酒泉 緣邊莫不被毒 種衆日多 田畜射獵 不足給食 檀石槐乃自徇行見烏侯秦水 廣從數百里
水停不流 其中有魚 不能得之 聞倭人善網捕 於是東擊 倭人國 得千餘家 徙置秦水上 令捕魚以助糧食"
(『後漢書』「鮮卑傳」).
(3) 김운회『대쥬신을 찾아서 1』(해냄 : 2006), 133~183쪽 참고.
(2) 광개토대왕비의 왜(倭)
반도 쥬신에서는 왜(倭)를 현재의 일본 열도라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1963년 이후 반도쥬신의 북부(북한)를 중심으로 일본사를 반도쥬신의 역사의 연장선으로 보는 관점들이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면, 가야 지역이4) 『삼국지』「위서(魏書)」동이전의 한전(韓傳)의 계통을 잇는 왜(倭)의 또 다른 이름은
아닐까 라는 의문들이 제기되었던 것이죠.
물론 반도 쥬신의 사서인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나타나는 왜(倭)라는 말은 가야뿐만 아니라 열도(일본)를
가리키는 경우도 나타납니다.
▲ 일반적으로 알려진 왜구의 그림 |
그 동안 이 왜(倭)의 존재를 일본에서는 야마토(大和) 정권 또는 한반도 남부 왜인으로 보았고5),
한국에서는 북규슈의 백제계 왜국6), 친백제 북규슈 세력7), 중국에서는 북규슈의 해적 세력8) 등으로 보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조금씩 잘못된 견해들입니다.
특히 한반도 남부의 왜인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저 한국인이지요. 도대체 열도에 제대로 된 국체나
국가도 없는데 그 국민만이 반도에 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앞서 본대로 왜에 대한 개념은 광개토대왕비의 해석 문제와도 결부되어있습니다.
광개토대왕비의 경우 고구려군은 왜백제연합군(倭百濟聯合軍)을 격파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왜에 대하여
크게는 대화조정(大和朝廷)으로 보는 설, 북규슈(北九州)의 백제계 국가로 보는 설, 임나지방의 별명으로 보는 설
등이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난 왜에 대한 문제는 1960년대부터 반도 쥬신(한국)과 열도 쥬신(일본) 사이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는데, 당시에 열도의 학자들은 비문의 왜를 대화조정(大和朝廷)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결국 이런 사고에서 열도 쥬신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하는 식의 논리로 발전하였고 이것은 열도 쥬신의
반도 쥬신에 대한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구실로 인용되기도 합니다.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 왜에 대하여 일본의 연구에 대하여 가장 강력하게 반발한 학자는 북한의 김석형(金錫亨)
교수(김일성 종합대학)로 여기서 말하는 왜는 북규슈(北九州) 지방에 있던 백제계(백제 분국)인 왜국으로 고국인
백제를 위해 동원되어 조선에 출병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즉 1960년대 「삼한·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설」을 제기한 김석형 교수는 일본 열도 안에서 『일본서기』의 10개
가라국을 기비(吉備) 지방을 중심으로 모두 찾아냈을 뿐 아니라 몇 개 가라계열 소분국을 더 찾아내기도 했지요.
결론부터 말하면 김석형 교수의 견해는 오류입니다.
김석형 교수의 견해는 부여계와 왜를 완전히 같다고 보는데 그것은 잘못이지요.
그리고 이 시기에 고국으로 그 많은 군대를 보낸다는 자체가 동화같은 얘기입니다.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 왜에 대하여 그것이 야마토 조정의 군대이든, 백제분국의 군대 이든 모두 북규슈로 비정한
것은 타당성이 부족합니다.
첫째 지금까지 본대로 5세기 초에 대전(大戰)을 수행해낼만한 정치적인 실체가 제대로 없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도대체 규슈 지역에 어떤 강력한 국가가 있어 대고구려 전쟁을 수행한다는 말입니까?
둘째 설령 야마토 조정의 실체가 존재한다해도 4세기말에 야마토 조정이 한반도로 출병하여 고구려의 대군과
싸울 정도의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째 고구려와 싸운 왜가 일본 내에 있었다면 왜의 대군(大軍)은 전쟁이 필요한 시기에 신속하게 쓰시마(對馬)
해협을 건너야 하는데, 그것은 당시의 조선(造船) 기술로 보아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입니다.9)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이미 지적한대로 당시 야마토 조정이 군단급 병력을 동원한 기록은 고사하고 중대급
병력도 제대로 동원한 기록이 믿을 만한 사서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왜는 일본 열도에 있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데 이에 대하여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
교수는 고구려와 싸운 왜군의 중핵 혹은 대부분은 바다를 건너지 않은 왜인(倭人), 곧 임나 지방에 있던 왜인
이었을 것이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왜인·왜병도 육지와 이어진 곳에 살고 있던 왜인·왜병이며,10)
신라에서는 7세기 중엽까지는 신라와 접해 있던 임나지방을 왜(倭)라고 불렀다고 주장하였습니다.11)
이와 관련하여 키노시타 레이진(木下禮仁) 교수는 『삼국사기』의 왜관계 기사들이 신라본기(新羅本紀)에 집중
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12)
이 논의들도 말이 안됩니다. 열도 쥬신의 사학계의 거목조차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양국의 사학자들의 소중화주의적 질환이 심각한 정도입니다.
한번 봅시다. "바다를 건너지 않은 왜인(倭人), 곧 임나 지방에 있던 왜인"이라는 말이 우습군요.
임나지방에 있는 왜인이라는 표현이 말입니다. 이 말은 그저 임나지역민 즉 가야인이라고 하면 간단한 말이 될
터인데 표현이 이상하다는 말이죠.
이시기에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national identity)이나 국민의식이 제대로 있었던 것도 아닌데, 임나지역에 있던
왜인이라는 말이 상식적이지 않죠. 그저 가야인들이라고 하면 될 일입니다. 이 점은 이미 여러 차례 지적했습니다.
어쨌든 이노우에 히데오 교수는, 일본의 대부분 사가들이 중국 사서 왜인전에 보이는 왜인 거주구역의 중심이
오늘날의 일본 열도라고 판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倭)', '왜국(倭國)', '왜인(倭人)'이라는 어휘를 사용하는
각종 사료들을 검토해 본 결과 그 내용이 지금의 일본 열도와는 관계가 없는 경우가 많다고 본 것입니다.
탁견(卓見)이 분명합니다.
이노우에 히데오 교수는 『산해경(山海涇)』, 『논형(論衡)』, 『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의 왜 관계 기사를 여러 차례 검토하였습니다.13)
그 결과 그곳에 등장하는 왜인의 거주지역이 현재 중국의 화북(華北)이나 화남(華南), 혹은 한반도 남부에 조금씩
흩어져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이노우에 히데오 교수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왜(倭)'가 집중적으로 사용되었고, 신화시대(神話時代)에는
천황과 그 가족만이 이 용어를 사용하고, 전설시대(傳說時代)에는 야마토 지방의 귀족과 호족들이, 역사시대에서는
이주민들(부여계를 말함)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동안 왜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과는 다른 것이지요.
간단히 말하면, 이노우에 히데오 교수는 중국·조선 사서의 왜(倭) 관련 기사(記事)들을 검토하여 왜가 가야의 별칭
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내고,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란 가야의 재지호족(在地豪族)으로 구성된 합의체로서,
왜 왕권뿐만 아니라 일본열도의 세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노우에 교수의 견해는 매우 합리적이고 타당한 견해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견해도 앞으로 보겠지만 쥬신의 전체 역사에서 고찰한 왜와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왜라는 개념은 단순히 일본 열도나 중국의 화중, 화남 및 한반도 남부의 사정만으로는 결코 이해하기 힘든 여러
가지의 요소들과 변수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왜(倭)는 범쥬신(Pan-Jüsin) 즉 범 한국인들의 명칭이며, 이 명칭은 단순히 한반도나 일본뿐만 아니라 현재
중국의 산둥(山東), 허베이(河北), 요하(遼河) 등에서 포괄적으로 나타나는 해안 지대를 중심으로 거주한 친부여계
한국인들임을 『대쥬신을 찾아서』(제2권)를 통하여 충분히 고증하였습니다.
앞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좀더 포괄적이고 심층적으로 왜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여러 학자들의 견해들을 검토하고
그 타당성을 검정할 것입니다.
필자 주
(4) 일본에서는 주로 가라(加羅)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5) 井上秀雄『任那日本府と倭』(東出版 : 1973), 119쪽.
(6) 金錫亨『초기조일관계연구』(사회과학원출판사 : 1966), 297쪽.
(7) 千寬宇 "廣開土王凌碑文再論"『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일조각 : 1979)
(8) 王建群(박동석譯)『廣開土王碑硏究』(역민사 : 1985), 236쪽.
(9) 井上秀雄『任那日本府と倭』(東出版 : 1973), 116~121쪽.
(10) 井上秀雄 앞의 책, 390쪽.
(11) 旗田巍「三國史記新羅本紀にあらわれた倭」『日本文化と朝鮮』2(朝鮮文化社 : 1975)
(12) 木下禮仁「5世紀以前の倭關係記事」- 三國史記を中心として『倭人傳を讀む』森浩一編(中央公論 : 1982)
(13) 이노우에 히데오 교수는 『한서(漢書)』의 경우는 지리지(地理志),『후한서(後漢書)』는 선비전(鮮卑傳),
『삼국지(三國志)』는 동이전(東夷傳),『삼국사기(三國史記)』는 신라본기(新羅本紀) 등의 기록에 주목하고 있다.
(김운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