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현실과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영화 속의 허구를 사실처럼 믿고 싶어 한다. 현실의 연장선상에 만들어지는 또 하나의 현실인 영화가, 단순히 자기반영의 전자적 거울 이미지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현실의 모순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극복해 나가려고 한다.
정치영화가 거의 만들어지지 않는 우리 현실에서, 영화는 정치와 거리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매체 중의 하나다. 시나리오 작가 시절의 강제규 감독이 각본을 쓴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나, 강리나 주연의 [서울무지개]같은 영화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풍자 수준은 너무나 조심스럽다. 예리한 부리와 날카로운 발톱 숨기고 무슨 정치 풍자영화가 만들어지겠는가. 차포 떼고 내기장기 두는 것과 같다.
지금은 노무현 후보의 미디어대책본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 김한길의 베스트셀러 [여자의 남자]는 대통령의 딸을 여주인공으로 설정하면서 로얄 패밀리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전만배 감독의 [피아노 치는 대통령] 역시 대통령 일가족을 소재로 하고 있다.
[대통령의 연인들]처럼 로맨틱한 설정부터 [웩 더 독]의 부패한 정치인의 화신이거나 아니면 [인디펜던스 데이]에서처럼 영웅적 이미지로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자주 등장하던 대통령의 모습이지만, 내 좁은 견문으로는 한국 영화 속의 주인공으로 첫 번 째 등장하는 영화가 [피아노 치는 대통령]이다.
날카로운 정치적 비판은 기대하지 말자. 사별하고 고등학생 딸과 함께 청와대에서 거주하는 대통령이 딸의 담임선생님과 눈이 맞는다는 소재 자체가 로맨틱 코미디를 벗어날 길이 없다. 대통령은 최대한 낭만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거지 차림으로 지하도 노숙자패들과 함께 어울리기도 하고, 시내버스에 동승해서 시민들과 호흡을 같이 하기도 한다. 딸의 생일날에는 박진영의 [그녀는 예뻤다]에 맞춰 춤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통령의 마음을 사로잡는 딸의 담임선생님을 대학시절 시위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 설정한 것은 작위적이며 서툴고 어색하기만 하다. 대통령이 선생님에게 호감을 갖고 데이트 하는 과정도 충분하게 설명되어 있지 못하다. 부분부분 남녀 주인공들의 연기는 필요보다 과장되어 있고, 웃음을 만들기 위해 억지로 배치된 상황은 여전히 억지스럽다.
그런데도 [피아노 치는 대통령]이 밉지가 않다. 이런 모든 허점을 눈감아 주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살아 숨쉬는 캐릭터가 있다. 물론 그 공의 상당부분은 주연을 맡은 안성기와 최지우의 열연에 돌아가야 한다. 특히 점점 조연으로 밀려나는 안성기는 오랜만에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배역을 맡았다.
우리가 [피아노 치는 대통령]의 비현실적 모습에 매료되는 것은, 능력도 있고 낭만적이며 인간적인 대통령의 모습을 사실로 믿고 싶어 하는 대중심리 때문이다. 피아노 치는 대통령의 모습은 극중에서 대통령 역을 맡은 안성기의 고백대로, 위장된 거짓 이미지이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 대중들의 호감을 사려고 피아노를 연습해서 단 하나의 곡만 칠 수 있을 뿐이다. 사랑이냐 일이냐, 이런 해묵은 고민은 역시 정석대로 사랑을 부정하고 일을 선택한다. 하지만 역시 또 정석대로 결말에서는 진심을 고백하고 사랑을 선택한다.
이런 내러티브 구조 자체가 너무나 낯익어서 새로움은 전혀 없다. 그런데도 상투적이고 범상한 연출은 정공법으로 소재를 다루면서 대중들의 감정선을 조절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이 이 영화 연출의 유일한 장점이다. 즉 새로움은 없지만 안정감은 있다.
대통령 행차하는 과정을 직접 본 적이 있는데, 영화 속의 경호실 직원들 모습은 너무 준비 없고 안일하다. 대통령이 경호원들의 감시를 벗어나서 선생님과 단 둘이 데이트한다는 설정도 지나치게 상투적이고 비현실적이다. 대한민국 대통령 경호실 요원들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로마의 휴일]처럼 궁궐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일탈에의 욕망이 아무 고민 없이, 거리낌 없이, 차용되고 있다.
딸의 잘못을 부모가 대신하여 벌을 받는 것도 영화 전반부에 배치되어 너무 느닷없다. 은수라는 캐릭터의 당돌함을 설명하기 위해 담임으로 부임하기 전 깻잎머리 여학생으로 위장한 전력을 삽입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황조가] 100번 쓰기 같은 숙제를 만년필로 꼬박꼬박 따라하는 대통령의 모습이 리얼리티를 갖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캐릭터 구축 작업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런 지적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부모형제까지도 팔아먹는 냉정한 정치판을 잠시 잊고, 온기가 도는 정치와 로맨틱한 멜로의 행복한 궁합을 꿈꾸기까지 한다. 영화 속에서지만, 그것은 제법 달콤한 환상을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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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변화시키는 인터넷①』
(≫≪) 미군 희생 여중생들의 죽음을 애도하며..